본문 바로가기

[동양 문학 작품의 이해편]중국_2#43

중국문학의 향기_2

Chinese literature developed significantly during various dynasties. In prose, major works like Shiji by Sima Qian and Hanshu by Ban Gu were produced, establishing historiographical standards. The Wei, Jin, and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marked a time of literary diversity influenced by Taoism and Buddhism. Poetry flourished during the Tang dynasty, with renowned poets like Li Bai and Du Fu. Prose also evolved, with the emergence of classical essays and literary criticism. Novels began to take shape, and the Song dynasty saw the rise of new forms, including vernacular literature.

산문

산문은 진·한대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발전했는데, 사전(史 문학의 쌍벽인 『사기(史記)』와 『한서(漢書)』가 가장 뛰어나다. 태사공() 사마천(司馬 BC145~BC86)이 지은 『사기』는 장장 18년이 걸려 완성된 것으로, 전설상의 황 제()로부터 시작하여 한 무제까지 약 2천 년간의 역사 사실과 인물에 관한 사적을 기전체(紀傳體)로 기술했는데, 130 50여만 자에 이른다. 이 책은 중국 최초의 통사 대작으로서 전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마천이 죽고 나서 100여 년 뒤 반고(32~92)에 의해 지어진 한서는 시한의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총 80여만 자에 이르는데 체재와 규모면에서 『사기』에 다소 뒤지기는 하지만 중국 단대사의 효시로서 가치 높다. 그 밖에 비교적 중요한 산문 작품으로는 회남왕 유안이 지은 『회남자』를 둘 수 있는데, 전국시대 제자()와 비슷한 공격을 지니고 있다.

위진남북조 문학(220~589)

한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장기간의 분열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정치와 사회가 모두 불안했지만 문학상으로는 오히려 발전했는데, 그것은 불교문학의 영향으로 중국어의 음률미가 강화되었고 북방 이민족이 세운 북조와 한족 중심의 남조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문학적인 다양성이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위진남북조는 문학사조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원인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정치상으로는 약 370년 간 10여 왕조가 부침을 거듭했고,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 등 내란과 외란이 겹쳐 사회가 오랫동안 혼란과 불안에 처하게 되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일종의 청담의 기풍이 형성되었다. 학술상으로는 한대에 국시로 추앙 받던 유학이 위진남북조에 이르러 음양참위설(陰陽)로 변질되고 역대 제왕들이 유학을 경시하자, 그 정치적 뒷받침을 잃게 됨으로써 자연히 문학사조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철학상으로는 일종의 난세의 산물로서 청정무위(無爲)와 만물제동을 주장하고 소극적인 현실도피 경향을 띤 노장철학이 부활되었는데, 이러한 주장과 경향이 당시 사람들의 심리적인 요구에 부합되었다. 종교상으로는 후한에 형성된 도교와 후한 말 중국에 전입된 불교가 위진 남북조에 이르러 상호교류를 통하여 널리 전파되었는데, 도교의 피세사상과 불교의 염세사상이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합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요인에 따라 위진남북조의 문학경향은 염세적 인 은일사상이 팽배하고, 낭만적인 개인주의 경향이 강하며, 조탁과 수식에 힘쓴 유미주의 경향이 짙고, 현허(虛的사변적(思辨的)인 경향이 농후하다. 또한 순문학에 대한 자각과 함께 문 학의 독립성을 인정하여 문학론과 비평론이 발달하게 되었다.·

시가

이 시기의 시가는 남방과 북방이 서로 다른 풍격을 띠고 있는 데, 남방은 대부분 서정시가 위주이고 북방은 전쟁의 강인한 기운이 비교적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조식(曹植: 192~232)과 도연명(陶淵明: 365~427) 두 사람이 대표적이다. 조식은 서정적이고 우아한 오언시에 뛰어났으며 그의 부친 조조(曹操: 155~ 220), 형 조비(曹丕: 187~226), 동시대의 시인들과 함께 건안 문학(建文學)이라는 풍격을 조성했다. 도연명의 시는 특히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특색을 갖추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시 풍은 후세의 많은 시인들이 본받았다. 그가 전원에 은거한 후에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술 마신 뒤에 쓴 「음주(飮 酒)12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대표작품이다.

산문

이 시기의 문학은 정통 유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도가와 외래 불교문학의 영향을 점차적으로 받았으며, 조화로운 음률과 아름다운 수식을 강조한 변려문이 산문 형식의 주류를 이루었다. 동진() 초기의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육기(陸機: 261~303)가 지은 『문부()』는 문장을 지을 때 창조성을 중요시하고 이전 사람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인습에 반대했다. ()나라의 유협(劉鰓: 464?~521)이 지은 『문심조룡 (文心雕龍)』은 최초의 전문적인 문학비평서로서 당시에 유행 하던 변문체로 되어 있다. 또한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 記)」와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등은 당시 산문의 주류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었지만 그 소담한 기풍과 청 신한 필치로 후대에 널리 애송된 작품이다. 북조의 대표적인 산문 작가와 작품에는 양현지(楊街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 藍記)』와 역도원(道元)의 수경주()』등이 있다. 또 한동한 이래로 계속된 불교경전의 번역이 이 시기에 질량 면에서 모두 증가하여 중국문학의 발전에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 미쳤다.

소설

한편 이 시기에는 중국 소설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일반적으로 지괴()소설과 지인()소설로 분류한다. 동진 간보(: 317전후)의 『수신기(神記)』는 지괴소설의 대표작으 로서, 귀신과 관련된 민간전설과 역사전설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남조 송() 유의경(劉慶: 403~444)의 『세설신 어(世說)』는 지인소설의 대표작으로서, 동한 말부터 동진 까지의 유명한 지식인들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기록했는데 당시에 유행하던 청담()의 기풍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수·당·오대 문학(589~960)

위진남북조의 혼란한 시대를 평정하고 통일제국을 이룩한 수 나라는 겨우 37년밖에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발전할 겨를이 없었다. 수나라를 개국한 문제() 양견(楊堅)은 북조에서 싹이 튼 반 유미주의 문학주장을 이어받아 문풍 개혁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으나 육조의 화려한 문풍을 일소할 수는 없었다. 문제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 양광()은 주색에 빠져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향락을 일삼았기 때문에 자연히 양진대(陳代)의 궁체문학이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중국문학은 당대에 이르러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당대의 문인들은 통일제국의 번영과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등으로 다양한 사회생활을 경험함으로써 안목과 시정(詩情)이 확대되었으며, 안사(安史)의 난과 같은 대변란으로 풍부한 창작 경험과 소재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시가는 이 시기에 대단히 번성했다. 이전의 시체(詩體)가 모두 사용되고 개량되었으며, 아울러 새로운 형식인 근체 시() 역시 형성되었다. 근체시는 구법()에 있어서는 오언과 칠언, 체재에 있어서는 절구(絶句)와 율시(律詩)의 구별이 있는데, 엄격한 격률이 그 특징이다. 율시는 오언율 시와 칠언율시 모두 기...결의 구조를 갖춘 8구로 이루어지는데, 평측()과 압운(押韻)을 쓰는 외에 ''에 해 당하는 제3.4구와 ''에 해당하는 제5·6구가 서로 대구(對 句)를 이루어야 하며 이를 따로 '함련()' '경련(頸聯)'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구는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를 막론하 고 4구로 구성되며 격률은 율시의 규정과 같다. 이 시기에는 위대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호방한 기질로 낭만적 인 정감을 노래한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과 자신이 처한 정치와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성 (詩聖) 두보(杜甫: 712~770)가 가장 유명하다. 그 밖에 산수 와 전원의 아름다움을 그림같이 그려낸 왕유(王維: 701~ 761), 변새의 쓸쓸한 풍정을 담아낸 잠삼(岑參: 715~770), 두보의 시풍을 이어받아 왜곡된 사회문제를 평담한 언어로 고발하고 신악부시(新樂府詩)를 제창한 백거이(白居易:772 ~846) 등도 이름이 높았다. 청나라때 편찬된 『전당시(全唐詩)』에는 2,200여 명의 시인들의 작품 48,900여 수가 실려 있다.

 

한편 당말 오대 때에 사()라고 하는 일종의 새로운 시가형 식이 생겨났는데, 음악에 맞추어 노래 부를 수 있는 보다 자 유스러운 형식이었다. 이것은 각 구의 자수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장단구(長短句)라고도 부른다. 사는 민간의 악부시가 에서 기원하여 중당(中唐) 때에 이미 【억강남(憶江南)】 등과 같은 사 작품이 창작되었으며, 만당(晩唐)에 이르러 비로소 시인들의 주목을 받았고, 오대 때에는 마침내 시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당의 시인 온정균 (溫庭筠: 812~870)은 사의 창작에 힘을 쏟은 첫 번째 문인으 로 '화간파()'라는 사풍(詞風)을 창도했다. 오대 남당 (南唐)의 군주 이욱(李煜: 937~978)은 오대 사단의 영수로서 초기에는 주로 남녀간의 농염한 애정을 묘사했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는 고국을 그리는 애상을 침울한 어조로 노래하여 과거 화간파의 사풍과는 다른 풍격을 보여주었다.

 

산문

당대에는 산문 방면에 중대한 변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고문의 대가인 한유(: 768~824)가 창도한 '고문운동' 이다. 그는 수백년 동안 숭상해온 변려체의 문장을 일소하고 '문장복고(文章復古)' '문이재도(文以道)'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긴 했지만, 사실상 문장을 엄격한 형식의 틀에서 해방시켜 자연스러움으로 되돌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같은 시대의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고문운동의 또 다른 대표자로서, 고문체를 운용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애독되는 훌륭한 산수유기문(山 記)과 소품문小品文)을 창작했다.

 

소설

고문운동은 또한 소설의 한 형식인 전기(傳奇)의 활발한 발 전을 촉진했다. 전기는 수당 교체시기에 생겨나 당대 중엽 이후에 매우 번성했다. 전기는 일반적으로 고문으로 기술했는데, 편폭은 짧지만 구성이 비교적 짜임새 있으며 애정·협의(신선귀신고사 등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이공좌(李公佐: 770?~850?)의 『남가태수전 (南柯太守傳), 원진(: 779~831)의 『앵앵전()』 등을 들 수 있다. 전기 가운데 일부 작품은 후대에 소설과 희곡으로 개편되기도 했다. 또한 전기를 진정한 중국 소설의 시작으로 여기는 주장도 있다.

 

민간문학

당말에는 또 다른 문학 형식인 변문()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불교의 포교와 관련된 것으로 산문과 운문을 적절히 섞어 강창()하는 매우 색다른 형식이다. 처음에는 주로 부 처의 일생에 관한 일화를 강창했으나 나중에는 중국의 역사 고사와 민간전설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뽑아 강창했다.

 

송대문학(960~1279)

송나라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경시하여 결과적으로 금나 라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천도하는 전란을 겪기도 했지만 문학 방면 은 다양하게 발전했다. 이러한 문학의 발전은 주로 새로운 관료체계를 형성한 신흥 사대부계층의 대두, 도시경제의 발달에 따른 시민계층의 형성, 인쇄술의 발달, 많은 학교의 설립에 따른 것이었다.

산문

당나라 때 한유가 제창한 고문운동은 북송에 이르러 고문의 대가인 구양수(歐陽修: 1007~1072)와 소식(蘇軾: 1037~ 1101) 등에 의해 계속 이어져 더욱 활발해졌다. 송대의 고문 운동은 그 후에도 저명한 역사·철학가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과 이학(理學)인 주희(朱熹: 1130~1200) 등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유미주의적인 문학에 반대하고 꾸밈없는 질박한 고문 작품에 찬성했다.

소설

소설 방면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추세가 있었는데, 그것은 문언(文言)소설과 화본()소설이다. 문언 소설은 당대의 전기를 답습하여 별다른 창의성이 없었다. 반면에 화본은 민간에서 구어로 이야기를 강창(講唱)할 때 사용된 대본으로 송대 소설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백화체의 화본은 후대 중국 소설의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송시는 우선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는데, 당시와 비교하여 그 특징을 간추리면 철리화·산문화·통속화·평담화(平淡化)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탁월하게 일가를 이룬 시인들이 많이 나왔는데, 북송에는 시문의 대가인 소식과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영수인 황정(黃庭堅: 1045~1105)등이 있으며, 남송에는 우국의 충정을 노래한 애국시인 육유(: 1125~1210) 등이 있다. 특히 육유는 1만여 수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을 남긴 보기 드문 다작가이다.

송대에는 또한 시인들이 대부분 사를 짓는 데에도 뛰어났는 데, 사는 일반 문인들과 민간의 중시를 받아 마침내 당당히 송대 문학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인으로는 북송의 유영(柳永: 1045전후소식·주방언(周邦彦: 1056~1121)과 남송의 이청조(淸照 1081~1140?). 신기질(辛棄疾: 1140~1207)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이청조는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여류 사인이다. 그 밖에 소식과 신기질은 모두 사의 풍격이 호매()하고 의경(意境)이 청신하여 세상에서 '..)'으로 병칭된다.

원대 문학(1279~1367)

북방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한족의 문화와 문학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전통문학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반면에 민간문학의 성격이 짙은 희곡과 통속소설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잡극과 산곡을 제외한 시··산문등 이른바 정통문학은 원 왕조의 상대적인 문화적 낙후와 한족 문인에 대한 차별 대우로 말미암아 전반적으로 저조한 상태를 면치 못하여, 두드러진 작가나 작품이 나오지 못했다.

희곡

원대에는 서로 다른 민족들이 한데 섞이게 되자 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언어로부터 일종의 새로운 곡조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새로운 문학 갈래의 흥기를 촉진했다. 원대의 희곡은 일반적으로 잡극(雜劇)이라고 하는데, 과거에 이미 있어 왔던 골계희(滑稽참군희(參軍가무희(歌舞) ·괴뢰희(傀儡영자희등의 기초 위에 인도 등지의 희곡 양식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잡극의 구성은 한 작품이 4(: 오늘날의 ~에 해당)로 이루어지고, (: 노래(: 동작(: 대사) 3요소를 갖추었다. 비록 당시의 문인들이 다 투어 작품을 짓긴 했으나 아직은 정통 문학평론가들의 중시를 받지 못하여 많은 작품들이 미처 기록으로 보존되지 못한 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 총 167편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원래의 10%도 안 되는 분량이다.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에는 관한경(關漢卿)의 『두아원(寶娥寃),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 秋), 왕실보(實甫)의 『서상기(西廂記)』등이 있다.

시가

원대에는 산곡()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가 형식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사의 형식을 타파했으며 잡극과의 관련성이 깊다. 산곡은 잡극보다 늦게 생겨났으며 그 중요성도 잡극에 미치지 못한다. 희곡의 주요작가들이 대부분 산곡에도 뛰어났다.

통속소설

이 시기의 소설은 당·송대의 소설과는 아주 다른 특성을 지녔다. 우선 작품의 편폭이 전대에 비하여 매우 장편화 되었으며 또한 대부분 백화문체를 사용했다. 가장 뛰어난 장편 통속소설가로는 원말,명초의 나관중(羅貫中: 1367전후)을 들 수 있는데, 그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삼국지통속연의( 國志通俗演義)』와 『수호전(水滸傳)』은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중국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명대의 『서유기(西遊記)·『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의 4대 기서(奇書) 로 손꼽히며, 후대의 장회체(回體)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명대 문학(1368~1643)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몽골족의 지배하에서 억압당했던 한족의 문화를 회복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전통적인 시문이 다시 그 중요성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시험에 사용되었던 팔고문()은 그 형식이 너무 까다로워서 시문의 자유로운 발전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전통문학

명대의 문인들은 시가와 산문 방면에서 대부분 복고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여 '문은 반드시 진·한을 따르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좇는必秦漢,詩必盛唐'는 의고주의(擬古)가 팽배했다. 이러한 복고운동은 모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창의성이 결핍 되었기때문에 그 성과는 사실상 당,송대의 고문운동에 비하여 보잘것없었다. 이른바 '전후칠자'를 중심으로 한 의고주의 문학은 대체로 진·한의 문학을 숭상하는 진한파(秦漢派)와 한유의 '문이재도(以載道)'의 주장을 강조하는 당송파(唐宋派)로 대별된다. 이러한 의고주의 문학사조는 명대 전체를 휩쓸다가 명대 말엽인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원씨 3형제[道道·袁中道가 주도한 공안파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문학의 진화성을 주장하고 훌륭한 작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성령(性靈)' 을 강조했다. 공안파와 그 뒤를 이은 종성(담원춘(譚元春)이 중심이 된 경릉파()의 영향으로 명말에는 청신하고 미려한 소품문이 창작되었다.

희곡

명대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통속문학인 희곡과 백화소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희곡은 남곡(南曲)이라고도 하는 '전기()'가 매우 성행했는데, 전기는 송대의 희곡인 '희문()'으로부터 발전해 온 것으로 북곡()인 잡극과 구성상 많은 차이가 있다. 전기는 원래 민간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 후로 점차 문인들의 지지를 받아 잡극을 누르고 희곡문학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초기의 전기 작품으로는 고명(高明: 1305?~?)의 『비파기(琵琶記)』가 가장 유명하다. 『비파기』 이후로 전기는 잠시 침체하기도 했으나 곧 다시 흥성했다. 이러한 전기의 부흥은 여러 지방의 서로 다른 곡조를 개량하여 '곤강(崑腔)'이라는 새로운 곡조를 만들어 낸 위량보(魏良輔)와 곤강을 사용하여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고 이를 널리 유행시킨 양진어(梁辰魚)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곤강은 감미로운 노래와 섬세한 음악성 때문에 그 후 18 세기말까지 중국 극단을 지배했다.

소설

명대 중엽 이후에는 소설의 창작도 크게 발전되었다. 우선 장편 백화소설의 대표작으로는 오승은(吳承恩: 1500?~1582?)의 『서유기』와 작자미상의 『금병매』를 들 수 있다. 『서유기』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이 천축(天竺國: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 온 고사에 근거하여 100회의 장회체 신마(神魔) 소설로 확대 부연한 것이다. 『금병매』는 100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인공인 서문경(西門)과 그 처첩들의 음탕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일찍이 음서(淫書)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통속소설과는 달리 철저하게 현실사회를 다룬 사실주의적인 묘사수법은 중국소설사에서 주목받을만 한 가치가 있다. 그 밖에 단편 백화소설도 꽤 유행했는데 송 대의 화본을 모방했다 하여 '의화본(話本)'이라 부른다. 그 대표작품에는 풍몽룡(馮夢龍: 1574~1645)의 삼언(三言: 世明言』『警世通言』『醒世恒)과 능몽초(凌濛初: 1580~ 1644)의 이박二:初체拍案驚奇」「二刻拍案驚奇』)이 있다.

청대 문학(1644~1911)

청나라는 이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왕조였지만 역대 군주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학술·문학 등을 옹호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청대의 문학은 고증학(考證學)으로 대표되는 학술조류의 영향으로 복고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이전 시대의 모든 문학 양식이 고루 발전했다. 특히 고전문학에 대한 정리와 연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시문

청대의 시단에는 문학 전체의 복고적인 조류 속에서 여러 유파가 생겨났으나 대체로 당시를 숭상하는 종당파(唐派)와 송시를 숭상하는 종송파(宗派)로 나눌 수 있다. 오위업(吳 偉業: 1609~1671)이 창시한 종당파는 그 후 왕사정(王士禎: 1634~1711)·원매(袁枚: 1716~1797)·심덕잠(沈德潛:1673 ~1769) 등이 각기 다른 시론을 내세워 발전시켰으며, 종송파는 전겸익(謙益: 1582~1664)이 주도했다. 또한 이러한 유파와는 달리 자신의 창의와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풍을 세우려던 시인들도 있었다. 청말에는 황준헌(黃憲:1848~ 1905)을 중심으로 한 시계혁명(詩界革命)이 일어나 이제까지의 복고주의적 성향을 타파하고 전통적인 중국 시의 내용과 형식을 개혁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후대 백화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는 청대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이하여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으며 사에 관한 이론과 평론도 활발했다. 초기에는 납란성 덕(納蘭性德: 1655~1685)이 사단을 대표했고, 그 후로 주이존 (朱彝尊: 1629~1709). 진유숭(陳維崧: 1625~1682). 장혜언(張惠言: 1761~1802)등이 각기 다른 풍격의 사를 지었다. 산문 방면은 당시의 학술조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고 증을 중시하고 실질을 숭상했다. 특히 방포(: 1668~ 1749): 1698~1780): 1731~1815)를 중심으로 한 동성파(桐城派)가 청말까지 문단을 지배하여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

소설

청대에는 명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통속문학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소설의 발전은 청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 다.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소설의 형식 과 내용이 모두 발전했는데, 일부 문언소설이 창작되기도 했 지만 그 주류는 역시 장편 백화 소설이었다.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이 지은 『요재지이(聊齋誌異)』는 중국 문언소설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여우·혼령·신선·기인·동식물·꿈 등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431편을 모은 것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요물들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어서 친근감을 주기도 하며, 봉건 예교와 정치를 완곡하게 비판한 것도 있다. 오경재(吳敬梓: 1701~1754)가 지은 『유림외사(儒林外史)』는 55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거 제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관료 정치제도의 모순과 사회의 부패 등을 주로 묘사하여 풍자 소설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조설근(曹芹: 1715?~1763?)이 지은 『홍루몽(紅樓夢)』은 총 120회이며, 관료 집안인 영국부(寧國府)와 영국부(榮國府) 두 대가정의 몰락과 가보옥(賈寶 玉)을 중심으로 12미녀들이 펼치는 애정고사를 묘사한 것으 로 중국 인정소설의 최고작이다. 「홍루몽」에 관한 비평과 연구는 대단히 활발하여 '홍학(紅學)'이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이다. 청말에는 주로 조정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을 신 랄하게 질타하는 이른바 '견책譴責)소설'이 유행했는데, 1867~1906)의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희곡

희곡은 명대 전기의 발전을 계승하여 청대 중엽에 대단히 성행하여 홍승(: 1645~1704)의 『장생전(長生殿), 공상임 (孔尙任: 1648~1718)의 『도화선(桃花扇)』과 같은 명작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 후로는 새로운 곡조인 피황조(皮黃調)가 유행함에 따라 곤강에 의거한 전기는 급속히 쇠퇴하고 여러 지방희(地方)가 대두했으며, 이를 통합 발전시킨 경극이 마침내 탄생되었다.

번역문학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자연히 서 양의 학술서적과 문학작품이 들어와 번역되기 시작했다. 서구의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한 사람은 엄복(嚴復) 이었다. 특히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천연론』은 당시의 지식인과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문학작품을 처음으로 번역한 사람은 임서()인데, 그는 외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의 구술에 의지하여 무려 170여 권에 달하는 각국의 작품을 번역했 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고문의 명수였기 때문에 그들의 번역 서는 모두 미려한 고문으로 쓰였다.

 

 

중국문학의 향기: 중국문학 장르별 이해

김장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