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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문학 작품의 이해편]중국_12#64

중국문학의 향기_12

The origin of Chinese fiction began with myths and legends, shaped largely by religious contexts. The fictional nature of these myths influenced other narrative forms like allegories, playing a crucial role in the development of later fiction. During the Wei, Jin, and Southern-Northern Dynasties, "zhiguai" (tales of the strange) and "zhiren" (tales of personalities) emerged, with "Soushenji" being a representative work that depicts human society and ideal worlds.

小說 소설

 

중국 소설의 기원

신화전설

중국의 신화전설은 발생된 시기는 매우 이르지만 기록된 시기는 매우 늦다. 신화전설에 관한 은대(殷代)의 자료에는 한계가 있으며, 주대()의 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활용할 때는 한대(漢代)의 저작을 참고해야만 한다. 초기의 신화 전설은 늦어도 주나라가 개국될 당시에 유행하던 종교적인 상황에 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신화전설은 대부분 단편적인 것들이어서 줄거리가 완전한 고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강한 현실성과 아름 다운 낭만성이 잘 드러나 있다. 고대의 신화전설은 주로 『산해경(山海經),『초사(),「회남자(淮南子)』 등에 실려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과보축일」,「여와보천(女媧補天),「예사십일(羿射十日),「공공노촉부주산(共工怒觸不周山),「곤우치수(緜禹治水),「항아분월(嫦娥奔月)」 등을 들 수 있다.

 

[과보가 태양과 경주하다]

과보가 태양과 경주하다 태양광선 속으로 들어갔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서 황하와 위수를 마셨는데, 황하와 위수가 부족하자 북쪽으로 가서 대택을 마셨다. 도착하기 전에 도중에 목이 말라죽었다. 그 지팡이를 버렸는데 그것이 변하여 등림이 되었다.

套父與日逐走, 入日,, 欲得, 飮于河·渭河·渭不足, 北飮大澤. 未至, 道渴而死, 棄其杖, 化爲鄧林. [『山海經』「海外北經]

 

[여와가 하늘을 기다]

먼 옛날에 사방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의 구주가 갈라져, 하늘은 대지를 완전히 덮을 수 없었고 땅은 만물을 모두 실을 수 없었다. 불길 이 널름거리며 번져 나가 꺼지지 않았고 물이 넘실대며 퍼져 나가 그 치지 않았다. 맹수가 선량한 사람을 잡아먹고 사나운 새가 노약자를 채갔다. 그래서 여와가 오색석을 주물러서 창천을 기우고, 큰 자라의 다리를 잘라 사방의 기둥을 세웠으며, 검은 용을 죽여 기주를 구제하고, 갈대 재를 쌓아 홍수를 막았다. 창천이 기워지고 사방 기둥이 똑바로 서고 홍수가 마르고 기주가 평안해지고 흉악한 해충 이 죽자 선량한 사람들이 살수 있게 되었다.

往古之時, 四極廢, 九州裂, 天不覆, 地不周載. 檻而不滅, 浩洋而 不息, 猛獸食顓民, 鷙鳥攫老弱, 于是女媧煉五色石以補蒼天, 斷鰲足以立 四極, 殺黑龍以濟冀州, 積蘆灰以止淫水. 蒼天補,四極正, 淫水洞, 冀州平, 狹蟲死, 民生. [『淮南子」

 

「예가 열 개의 태양을 쏘다」

요 때에 이르러 열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떠서 곡식을 태우고 초목을 죽이는 바람에 사람들이 먹을 게 없었다. 알유, 착치, 구영, 대풍, 봉희, 수사가 모두 사람을 해쳤다. 그래서 요는 예로 하여금 주화의 들에서 착치를 주살하고, 흉수가에서 구영을 죽이고, 청구의 연못에서 대풍을 쏘고, 위로 열 개의 태양을 쏘고 아래로는 알유를 죽이고, 동정에서 수사를 자르고, 상림에서 봉희를 사로잡게 했다. 만민이 모두 기뻐하여 요를 천자로 추대했다.

逮至堯之時, 十日幷出, 焦禾稼, 殺草木, 而民無所食, 狸渝·鑿齒·九嬰·大風·封豨·脩蛇, 皆爲民害. 堯乃使羿誅鑿齒于疇華之, 殺九嬰凶之上, 大風于邱之澤, 上射十日而下殺猰貐, 斷脩蛇于洞庭, 禽封豨于 桑林. 萬民皆喜, 置堯以爲天子. [『淮南子』/本經]

 

「공공이 격분하여 부주산을 들이받다[共工怒觸不周山]

옛날에 공공이 전욱과 제위를 놓고 전쟁을 하다가 격분하여 부주산을 들이받는 바람에 하늘 기둥이 부러지고 땅 줄이 끊어졌다. 하늘 이 서북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해, , 별들이 그쪽으로 이동하고, 땅이 동남쪽으로 덜 찼기 때문에 물과 티끌이 그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昔者共工與顯頊爭爲帝, 怒而觸不周之山, 天柱折, 地維絶. 天傾西北, 故日月星辰移焉, 地不滿東南, 故水潦塵埃歸焉。

[『淮南子」/天文]

 

이러한 신화전설은 후대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예술창작 방면에서는 후대 문학상의 낭만주의 창작방법은 모두 신화전설로부터 발전되었다. 소설 방면에서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지괴소설, 당대 전기(傳奇)소설, 『서유기(西遊記),『봉신연의(封神演義)』와 같은 명청대 신마소설 등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전통은 노신(魯迅)의 『고사신편(故事編』에까지 이어졌다. 시가 방면에서는 굴원()과 송옥()의 초사(), 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 도연명(陶淵明), 이백(李白), 이하(李賀), 이상은(), 소식(蘇軾) 등 대시인들의 작품에 많은 소재를 제공했다. 희곡 방면에서는 한대의 각저희(), 진대(晉代)의 치우희(蚩尤) 등 원시 희곡에 소재를 제공했다.

 

우언

춘추전국시대에 주 왕실이 쇠미해짐에 따라 여러 제후 국가들이 서로 약육강식 하느라 부국강병책에 밝은 인사를 널리 찾았는데, 그 결과 제자들의 백가쟁명(百家鳴) 현상이 있었다. 제자들은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자주 우언을 사용했는데, 그 결과 이 시기에 우언이라는 독특한 서사갈래가 크게 흥성했다. 이러한 우언은 특히 『맹자』, 『장자』, 『한비자」,「전국책』등에 많이 들어 있다. 우언의 중요한 특징은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한 간단한 이야기를 통하여 특정한 이치를 밝히려는 데 있다. 그 목적이 말하는 사람이 강조하려는 이치 확인에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내용은 보충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않으나, 강한 '고사성'을 지닌 표현양식과 독특한 풍자수법은 후대 소설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우언의 특징인 고사성, 허구성, 단편성, 철리성 가운데 고사성과 허구성은 신화전설의 영향을 받았으나, 우언의 경우엔 자각적 창조와 허구임에 비해 신화의 허구는 비자 각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우언은 더욱 소설에 근접한 갈래라 하겠다.

 

사전

사전()이란 역사기록에서 전기 부분을 말한다. 역사서에서 특히 전기 부분은 인물의 내·외면적 특징묘사와 특정 사건에 대 한 짜임새 있는 기술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성과는 「좌전』, 『전국책』 등에서 이미 확인된 바이고, 이어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특히 「열전」 부분은 인물형상, 사건서술, 전쟁묘사 등에서 매우 다양한 표현수법을 적절히 활용하여 역사의 단순한 기록을 뛰어 넘어 풍부한 문학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사전 문학의 성과는 특정 인물과 그 인물의 사건 줄거리를 바탕으로 삼는 소설 갈래에 하나의 전범으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문언소설

위진남북조 지괴 · 지인소설

'소설'이란 용어는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의소설을 꾸며서 높은 벼슬을 구하는 것은 대도와는 또한 먼 짓이다[飾小說以干縣令, 其於大達亦遠는 구절에서 맨 처음 보이지만, 여기에서의 '소설' '대도(大道)'와 상대적인 의미이며 근대적 의미의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한대에 이르러 일부 문인들에 의해 소설의 허구성, 통속성, 단편성, 공효성 등이 부분적으로 언급되긴 했지만, 소설은 여전히 천시의 대상이었으며 역사서나 지리서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소설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한대의 작품으로는 지리박물고사류의 『신이경(神異經), 『십주기(+洲記), 신선고사류의 『동명기』, 『한무고사(漢武故事), 『열선전(列仙傳), 역사고사류의 『연단자』, 『설원(說苑), 『신서(新序), 『열녀전(列女傳)』 등을 들 수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소설을 천시하는 관념은 여전히 이어졌지만, 창작된 작품의 수량, 내용, 예술성은 훨씬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소설은 크게 지괴소설(小說)과 지인소설(小說)로 나뉘는데, 이러한 분류는 노신(魯迅)이 그의 『중국소설의 역사적 변천[中國小說的歷史的變』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다. 지괴소설은 주로 신선, 귀신, 산천지리, 불법(佛法)과 관련된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위진남북조 소설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지괴소설이 대량으로 창작된 주요 배경으로는 무풍(巫風), 방술(方術)의 흥성 및 전파, 불교의 전파와 불경의 번역, 문인, 방사(方士), 승려를 중심으로 한 작자층의 확대, 귀신의 존재를 믿었던 당시인의 관념, 고대 신화와 역사전설의 계승 등을 들 수 있다. 지괴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은 동진 간보(干寶: 317전후)의 『수신기』이다. 『수신기』는 내용상 중국 지괴소설의 전형적인 범주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형식상 일부 고사는 편폭이 길어 지고 줄거리 전개에 기복이 있는 등 비교적 완정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인물묘사상 등장인물의 형상을 창조함에 있어서 인물의 성격을 통하여 인간사회를 반영하고 작자의 애증태도와 이상세계를 제시했으며, 표현기교상 '몽환', '이혼(離魂)', '환생', '선경(仙境) 왕래' 등의 수법을 사용하여 작품의 오락성과 예술성을 제고시켰다.

 

「송정백이 귀신을 잡다[宋定伯捉鬼]

남양의 송정백이 젊었을 때 밤길을 가다가 귀신을 만났다. 정백이 물었다. “뉘시오?" 귀신이 말했다. “귀신이오." 귀신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또 뉘시오?" 정백이 그를 속여 말했다. “나도 귀신이오." 귀신이 물었다. "어디로 가시오?" 정백이 대답했다. “완시로 가는 길이오." 귀신이 말했다. "나도 완시로 가는 길이오." 그리하여 함께 몇 리를 갔다. 귀신이 말했다. "걷는 것이 너무 피곤하니 서로 번갈아 업어주기로 합시다." 정백이 말했다. "그거 좋소." 귀신이 먼저 정백을 업고 몇 리를 갔다. 귀신이 말했다. "그대는 너무 무거우니 아무래도 귀신이 아닌 것 같소!" 정백이 말했다. "나는 갓 죽었기 때문에 무거운 것이오." 정백이 이번에는 귀신을 업었는데, 귀신은 거의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두세번을 했다. 정백이 다시 말했다. "나는 갓 죽어서 귀신들이 꺼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오." 귀신이 말했다. “오직 사람의 침을 싫어하오." 그래서 함께 길을 가다가 물을 만나게 되었다. 정백이 귀신에게 먼저 건너가라 하고 들어보았더니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백 자신이 건너갔는데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귀신이 다시 말했다. "어찌하여 소리가 나오?" 정백이 말했다. “갓 죽어서 물 건너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니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오!" 완시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 정백은 잽싸게 귀신을 들어 머리 위에 올려놓고 꽉 잡았다. 귀신이 큰 소리로 꽥꽥거리면서 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정백은 들어주지 않고 곧장 완시로 갔다. 귀신을 땅에 내려놓았더니 한 마리 양으로 변하자 곧 팔았다. 정백은 그것이 다시 변화할까봐 걱정되어 침을 뱉었다. 정백은 천오백 냥을 벌어 가 지고 곧장 떠났다. 당시 사람들이 말했다. "정백이 귀신을 팔아 천오백 냥을 벌었다네."

南陽定伯年少時, 夜行逢鬼問曰: "?" 鬼曰: “鬼也."鬼曰: "卿復誰?" 定伯之言:"我亦鬼也."鬼問: "欲至何?"答曰: "欲至宛市."鬼言: "我 亦欲至宛市.”共行數里, 鬼言: “步行太垂, 可共迭相擔也.”定伯曰: "大善. ”鬼便先擔定伯數里, 鬼言: "太重, 將鬼也! "定伯言: "我死, 故重 耳.”定伯因復擔鬼, 鬼略無重, 如是再三, 定伯復言: “我死不知鬼悉何 所惡忌 鬼曰: “唯不喜人唾於是共道遇水, 定伯因命鬼先渡, 聽之了無 聲, 定伯自渡, 漕灌作聲, 鬼復言: "何以作聲? ”定伯曰: “死不習渡 耳勿怪! "行欲至宛市, 定伯便擔鬼至頭上, 急持之, 鬼大呼, 下不復聽之, 徑至宛市中. 著地, 化爲一羊, 便賣之.恐其便化, 乃之. 得錢千五百, 乃去. 於時言: "定伯賣鬼, 得錢千五百.” 「한빙부부(韓夫婦)[列傳]

 

송나라 강왕의 사인 한빙은 하씨를 부인으로 얻었는데, 미인이어서 강왕이 그녀를 빼앗았다. 한빙이 원망하자 강왕은 그를 가두어 낮에는 성을 쌓고 밤에는 보초를 서는 형벌에 처했다. 부인이 은밀히 한빙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말을 난해하게 했다. "그 비는 주룩주룩, 강은 크고 물은 깊으며, 해는 떠서 마음을 비춥니다." 나중에 왕이 그 편지를 입수하여 좌우 신하들에게 보였으나 좌우 신하들은 그 뜻을 풀지 못했다. 그런데 신하 소하가 대답했다. "그 비는 주룩주룩은 근심하고 사모한다는 말이고, '강은 크고 물은 깊으며'는 왕래할 수 없다는 뜻이며, '해는 떠서 마음을 비춘다'는 마음에 죽을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 후 한빙은 자살했다. 그 부인은 남몰래 자기 옷을 썩혀 두었다. 왕이 그녀와 함께 누대에 올랐을 때 부인은 누대 아래로 투신했는데, 좌우 사람들이 붙잡으려 했으나 옷이 손에 잡히질 않아 죽고 말았다. 허리끈에는 "왕께서는 내가 사는 게 좋지만 첩은 내가 죽는 게 좋습니다. 원컨대 시체나마 한빙과 합장해주십시오"라는 유서가 씌어 있었다. 왕은 노하여 그 말을 들어주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매장하여 무덤을 서로 바라보게 하도록 했다. 왕이 말했다. “너희 부부는 서로 사랑하여 마지않으니 만약 무덤을 합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막지 않겠노라.” 하룻밤 사이에 곧바로 큰 가래나무가 두 무덤 끝에서 자라나 10일 만에 한 아름에 가득 찰 크기가 되어 몸통을 굽혀서 서로 나아갔으며, 뿌리는 아래에서 엉키고 가지는 위에서 얽혔다. 또한 원앙새 암수 각 한 마리가 항상 나무 위에 살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떠나 지 않은 채 목을 부비고 슬피 울어 그 소리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송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애도하여 마침내 그 나무를 '상사수'라고 불렀다. '상사'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남방 사람들은 이 새를 한빙 부부의 정령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수양 땅에 한빙성이 있는데, 그 노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宋康王舍人韓憑, 娶妻何氏,, 康王奪之. 憑怨, 王囚之, 城旦, 妻密 遺憑書, 繆其辭曰: “其雨淫淫, 河大水深, 日出當心。旣而王得其書, 以示 左右, 左右莫解其意, 臣蘇賀對曰: “其雨淫淫”, 言愁且思也, “河大水深, 不得往來也日出當心’, 心有死志也。俄而憑乃自殺, 其妻乃陰腐其衣, 王與之登臺, 妻自投臺下, 左右攬之, 衣不中手而死, 遺書於帶曰: “王利 其生, 妾利其死, 願以尸骨, 賜憑合葬. ”王怒, 不聽, 使里人埋之, 相望, 王曰: “爾夫婦相愛不已, 若能使, 則吾不阻也。宿昔之間, 便有大 梓木生于二, 旬日而大盈抱, 屈體相就, 根交于下, 枝錯于上, 又有 鴛鴦, 雌雄各一, 恒棲樹上, 晨夕不去, 交頸悲鳴, 音聲感人, 宋人哀之, 逐 號其木曰 相思樹, ‘相思之名起于此也, 南人謂此禽卽韓憑夫婦之精魂, 今 睢陽有韓憑城, 其歌謠至今猶存, [「搜神記」]

 

위진 남북조 지괴소설에서 확립된 중국 지괴의 전통은 이후 송대 홍매(洪邁)의 『이견지(夷堅志)』를 거쳐 청대 포송령(蒲松)의 『요재지이(聊齋志)』에서 최고봉에 이르게 된다. 또한 다양한 고사와 표현법은 이후 당대 전기(傳奇) 소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당대 변문(), ·원대 화본(話本) 및 희곡, ·청대 문언소설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지인소설은 주로 문인·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상류층 인물의 언행과 일화를 기록하여, 위진남북조 명사의 풍류를 반영하고 그들의 사상과 풍모를 그려냈는데, 그 내용이 비교적 사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지인소설이 창작된 배경으로는 한·위 이래 이어져온 청담()과 인물품평 풍조의 성행으로 인물의 언행과 일화를 기록한 서책의 필요성이 대두된 시대상황과 선진 역사산문과 제 자산문 가운데 인물고사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지인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은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 403~ 444)의 『세설신어(世說新語)』이다. 『세설신어는 내용상 더 이상 역사의 기술이나 단순한 신화전설, 우언고사가 아니라 작자가 직접 체험한 실제생활과 여러 군상의 인물의 언행을 묘사하여 지괴 소설과 뚜렷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으며, 생동감이 넘치고 현실성 이 강하다. 또한 표현수법상 작자의 직접적인 서술이 아니라 등 장인물의 언행을 통하여 몇 마디의 말로 인물의 성격과 특성을 성공적으로 표현했으며, 언어예술상 정련된 언어와 함축적인 문 장으로 풍부한 심미성(審美性)을 구현했다.

 

「유령의 술병」

유령이 술병이 들어 갈증이 심해지자 부인에게 술을 가져오라 했더니, 부인이 술을 버리고 그릇을 깨면서 울며 간했다. "당신은 너무 지나치게 마시는데, 이는 섭생의 도가 아니니 반드시 끊으셔야 합니다." 유령이 말했다. "심히좋소. 그러나 나는 스스로 술을 끊을 수 없으니 마땅히 귀신에게 기도하여 끊겠다고 맹세 하겠소. 속히 술과 고기를 차려오도록 하시오." 부인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신명 앞에 술과 고기를 차려 놓고 유령에게 기도하며 맹세하길 청했다. 유령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늘이 유령을 태어 내실적에 술로 이름나게 하셨으니, 한 번 마시면 10말이요 해장술로 5말이니, 부인의 말은 삼가 듣지 마소서!" 그리고는 곧장 술과 고기를 가져다가 거나하게 취해 버렸다.

劉伶病酒, 渴甚, 從婦求酒. 婦捐酒毁器, 悌泣諫曰: “君飮太過, 非攝生之 道, 必宜斷之. ”伶曰: “甚我不能自禁, 惟當祝鬼神, 誓斷之耳, 便可具 酒肉. ”婦曰: “敬聞命!" 供酒肉于神前, 請伶祝誓, 伶跪而祝曰: “天生劉伶, 以酒爲名, 一飮一斛, 五斗解醒, 婦人之言, 愼不可聽 便引酒進肉, 隗然 已醉矣. [『世說新語』「任誕]

 

지인소설에는 고사성어와 전고로 정착되어 후대까지 널리 인 구에 회자되는 고사가 산재해 있으며, 후대 시화()나 문화(文話)의 발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당대 전기()소설

당대에는 위진남북조를 이어 지괴 · 지인소설이 계속 창작되었 지만, 당대 소설을 대표하는 것은 전기(傳奇)라는 새로운 형식이 었다'전기' '기이한 일을 전하여 기술한다[傳述奇異之'는 뜻을 지 니고 있으며, 당대 배형()의 소설집 『전기(傳奇)』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전기는 선진시대의 신화.전설, 『사기』 이후의 전기(傳記) 문 학, 위진남북조의 지괴· 지인소설 등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여 등 장했는데, 그것의 발전에는 외부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우선 당 대에 흥성한 고문운동이 전기의 창작에 적합한 문체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경제의 번영으로 풍부한 소재를 제공받았으며, 도교·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사상이 유입되어 내용이 다양 해졌다. 그밖에 과거 응시자들이 시험관에게 미리 자신의 글을 보내 재능을 인정받고자 했던 투권()의 풍습이 전기의 창작을 촉진시켰다.

 

당대 전기 소설

당대에는 위진남북조를 이어 지괴 · 지인소설이 계속 창작되었 지만, 당대 소설을 대표하는 것은 전기(傳奇)라는 새로운 형식이었다. '전기' '기이한 일을 전하여 기술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당대 배형()의 소설집 『전기(傳奇)』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전기는 선진시대의 신화, 전설, 『사기』 이후의 전기(傳記) 문 학, 위진남북조의 지괴· 지인소설 등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여 등 장했는데, 그것의 발전에는 외부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우선 당대에 흥성한 고문운동이 전기의 창작에 적합한 문체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경제의 번영으로 풍부한 소재를 제공받았으며, 도교·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사상이 유입되어 내용이 다양 해졌다. 그 밖에 과거 응시자들이 시험관에게 미리 자신의 글을 보내 재능을 인정받고자 했던 투권()의 풍습이 전기의 창작을 촉진시켰다. 당대 전기소설은 신괴류·풍자류·애정류·호협류·역사류등으 로 분류할 수 있다. 신괴류는 위진남북조 지괴소설을 계승하여 신선고사·불교설화·민간전설·요괴담등을 제재로 한 것으로, 왕도()의 『고경 기(古記), 작자미상의 『보강총백원전(補江總白猿傳)』등이 여기에 속한다. 풍자류는 몽환류(夢幻)라고도 하며, 비현실적인 소재와 상징적인 묘사를 통하여 부귀공명과 인생에 대한 환멸을 표출함으로써 현실을 풍자한 것으로, 심기제(沈旣濟: 750?~790?)의 「침중기 (枕中記), 이공좌(李公佐: 770?~850?)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등이 여기에 속한다. 애정류는 남녀의 애정을 제재로 한 것으로, 전기소설 가운데 문학적인 가치가 가장 높다. 이는 다시 인간과 신녀·귀신과의 애정을 묘사한 것, 재자가인의 사랑과 이별을 묘사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장작(: 660?~740?)의 『유선굴(遊仙窟), 진현우( : 770전후)의 이혼기(魂記)』 등은 전자에 속하고, 장방(蔣 防)의 곽소옥전(小玉傳), 백행간(白行簡: 775?~826?)의 「이와 전(), 원진(: 779~831)의 「앵앵전』 등은 후자 에 속한다.

 

「앵앵전』

......(전략)...... 이날 밤에 홍낭이 다시 와서 비단 편지를 장생에게 주며 말했다. 아가씨가 명하신 것이에요." 그 시의 제목은 「달 밝은 보름밤」이었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쪽 행랑 아래에서 달 기다리며, 창문 반쯤 열어 놓고 바람 맞이하네. 바람이 담장을 스쳐 꽃 그림자 움직이니, 아마도 님이 오신 것 같네." 장생도 그 뜻을 은밀하게 알아차렸다. 이날 밤은 2 14일이었다. 최씨 집 동쪽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붙잡고 올라가면 담을 넘을 수 있었다. 16일 저녁에 장생은 그 나무를 사다리 삼아 넘어갔다. 서쪽 행랑에 도착했더니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홍낭이 침상에서 자고 있기에 장생이 흔들어 깨웠더니 홍낭이 놀라며 말했다. “서방님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장생이 홍남을 속이며 말했다. "최아가씨가 편지로 날 부른 게야. 너는 나 대신 가서 고하여라." 잠시 후 홍낭이 다시 오면서 연달아 말했다. "아가씨가 오셔요! 오셔요!" 장생은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면서 틀림없이 일이 성사되었다고 생각했다. ....(중략).....

며칠 밤이 지난 뒤에 장생이 추녀 가에서 혼자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가 누군가가 깨웠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보니 홍낭이 이불과 베개를 들고 와서 장생을 흔들며 말했다. "오셨어요! 오셨다니까요! 주무시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는 베개와 이불을 펴놓고 가버렸다. 장생은 눈을 비비고 한참 동안 단정히 앉아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하면서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후 홍낭이 최아가씨를 부축하고 왔다. 도착한 아가씨를 보니, 수줍음을 품은 고운 자태로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어 보였으며, 며칠 전의 그 엄숙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이날 저녁이 18일이었다. 비스듬히 비치는 달빛이 맑고도 밝게 침대의 절반까지 그윽하게 비추고 있었다. 장생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그녀가 선녀가 아닌가 의심했으며 인간세상에서 온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절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고 하늘이 장차 밝으려 했다. 홍낭은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최아가씨가 교태스럽게 울먹이며 몸을 돌렸지만 홍낭은 그녀를 부축하여 돌아 갔으며, 그날 밤새도록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장생은 색을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밝은 뒤에 일어나 스스로 의심하며 '혹시 이것이 꿈은 아닐까? 라고 했다. 아침이 되어 보니 화장이 팔에 묻어 있었고 향수 냄새가 옷에 배어 있었으며, 요 위에는 아직도 눈물자 국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30분을 지었는데, 아직 다 짓기 전에 홍낭이 마침 찾아오자 그녀에 게 주면서 최아가씨에게 갖다 드리라고 했다. 이때부터 최아가씨가 장생을 다시 받아들여 아침이면 남몰래 나오고 저녁이면 남몰래 들어가곤 하면서 전에 말한 서쪽 행랑에서 거의 한달가량을 같이 지냈다.........

............(前略)......是夕, 紅娘復至, 持牋以授張, : “崔所命也. ”題其篇 曰「明月三五夜」, 其詞曰: “待月西廂下, 迎風戶半開, 拂牆花影動, 疑是玉人來張亦微喩其旨, 是夕, 歲二月旬有四日矣, 崔之東有杏花一株攀援 可跡, 望之夕, 張因梯其樹而踰焉, 達於西廂, 則戶半開矣, 紅娘寢於牀, 生因驚之, 紅娘駭曰: “何以至?” 張因之曰: “崔氏之召我也爾 告之。無幾, 紅娘復來, 連曰: “至矣! 至矣!” 張生且喜且駭, 必謂獲濟. ............(中略)...... 數夕, 張生臨軒獨寢, 忽有人覺之, 驚駭而起, 則紅娘斂衾枕而至, 撫張 曰: “至矣! 至矣! 睡何!” 並重而去, 張生拭目危坐久之, 猶疑夢寐, 然而修謹以俟, 俄而紅娘捧崔氏而至, , 則嬌羞融冶, 力不能運支體, 曩時 端莊, 不復同矣, 是夕, 有八日也斜晶瑩, 幽輝牀, 張生飄飄然, 且 疑神仙之徒, 不謂從人間至矣, 有頃, 寺鐘鳴, 天將曉, 紅娘促去, 崔氏嬌啼 宛轉, 紅娘又捧之而去, 終夕無一言, 張生辨色而興, 自疑曰:“豈其夢邪?” 及明, 覩妝在臂, 香在衣, 淚光熒熒然, 猶瑩於茵席而已, 是後又十餘日, 不復知, 張生賦 「會眞詩」 三十韻,未畢, 而紅娘適至, 因授之, 以貽崔氏, 自是復容之, 朝隱而出, 暮隱而入, 同安於曩所謂西廂者, 幾一月矣......(後略)......

 

호협류는 협객의 의로운 행위를 위주로 하고 정치사건과 애정 고사를 삽입하여 내용이 비교적 복잡한데, 두광정(杜光庭: 850~ 933)의 『규염객전(叫髥客傳), 설조(薛調)의 『무쌍전(無雙傳)』등 이 여기에 속한다. 역사류는 역사적인 사건을 제재로 취하여 적당한 허구를 가미 한 것으로 시대성과 사회성이 농후하며, 진홍(陳鴻) '장한가전 (長恨歌傳), 곽식(郭湜)의 『고력사외전(高力士外傳)』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전기소설은 구성이 완정하고 고사 전개에 기복이 많으며, 등장인물의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묘사가 세밀하며, 언어가 생동감 있고 인물의 대화가 구어에 가까운 특색을 지니고 있다. 당대 전기소설의 중국소설사상 의의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첫째, 의식적인 창작이다. 문인들이 의식적으로 소설 을 창작하고 그것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인정하여 소설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다. 둘째, 편폭의 확장이다. 위진남북조 소설은 짤막한 고사로 이루어졌는데, 전기소설은 구성과 내용이 상당히 복잡한 장편의 고사로 발전했다. 셋째, 내용의 확대이다. 특히 인 간 사회의 다양한 제재를 취하여 현실성이 보다 강한 폭넓은 내 용을 갖추었다. 당대 전기소설 가운데 우수한 작품들은 후대의 문언소설, ·원 화본(話本)과 명·청 의화본() 등의 백화소설, 원대 잡극과 명·청 전기(傳奇)를 포함한 희곡의 창작에 많은 소재와 묘사기교 등을 제공했다.

 

송대 문언소설

송대에는 화본소설 외에도 전통적인 문언소설 또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까지의 문언소설을 집대성 한 『태평광기(太平記)』와 『태평어람(太平御覽)』의 간행이다. 『태평광기(太平記)』는 이방() 등이 송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태평흥국(太平興國) 3(978)에 완성한 것으로, 500, 92 대류(), 150여 소류(小類)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대(漢代)부터 북송 초까지의 역사·지리·종교·풍속·명물(名物전고(典故사장(고증등에 관한 문언 필기소설을 광범위하게 채록해 놓았다. 『태평광기』는 중국 고대 문언소설의 보고(寶庫)로서 송대 이전 소설의 변천과 발전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참고자 료이다. 특히 인용된 500여 종의 작품 가운데 절반가량이 현존하지 않는 것이어서 그 중요성이 지대하다. 『태평어람(太平御覽)』은 이방 등이 송 태종의 명을 받아 태평 흥국 8(983)에 완성한 것으로, 1000, 55(), 4558() 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태평광기와 비슷하다. 『태평어람』은 『태평광기와 함께 중국 고대 문언소설의 보고로 인정받고 있지만, 『태평광기』에 비하여 고사 선택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다소 번잡한 결점이 있다. 이 밖에 악사()의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진순(秦醇)의 「조비연별전(趙飛燕別傳), 홍매(洪邁)의 『이견지(夷堅志), 작자 미상의 「매비전()」등이 창작되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대 부분 당대 전기(傳奇)를 모방한 것으로 예술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명대 문언소설

위진남북조·당·송을 거쳐 이어져온 전통적인 문언소설은 명대의 복고적인 문학조류에 힘입어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명대에는 백화소설 외에 전통 문언소설도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는데,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는 명대 초기에 문언소설의 붐을 일으킨 대표적인 작품이다. 모두 4 22(또는 21)으로 되어 있는 이 전기소설집은 대부분 고금의 기이한 이야기와 남녀관계, 괴기사건 등의 내용을 싣고 있다. 이 책은 작자가 당시 호사가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들과 과거의 지괴·전기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구우(1341~ 1417)의 자는 종길()이고 호는 존재(存齋), 전당(錢塘) 사람으로 어려서 부터 총명했으나 평생 불우하여 낮은 관리에 머물렀다. 『전등 신화』의 작품들은 그 제목이나 분위기가 대부분 당대 전 기소설을 닮았지만, 사상성이나 예술적 성과에서는 전반적으로 그 수준이 당 전기를 따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등 신화』 속에도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 들어 있다. 적잖은 작품 속에서 기상천외한 상상의 세계가 풍부하게 펼쳐지고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흥을 일으킨다. 특히 애정을 다룬 작품은 거의 원대 말기의 동란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전란으로 인한 청춘남녀의 이별과 죽음, 사랑과 슬픔을 잘 그려내고 있다. 작자는 이들의 구구절절한 사랑의 애절한 비극을 감동적으로 잘 그려내어 독자의 가슴을 사로잡고 있다. 구우는 해박한 지 식과 풍부한 감성을 동원하여 비교적 다양한 기풍의 작품을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 「금봉차기(金鳳記)」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나라 대덕() 연간 양주(揚州)의 오부자 댁에 흥낭(興娘)과 경남()이란 두 자매가 있었는데, 오부자는 이웃집에서 대대로 벼슬살이하고 있는 최진사 댁의 아들 최흥가(崔興)가 어려서부터 훌륭하여 자신의 큰 딸 흥낭과 미리 약혼시켜 두었다. 그러나 후에 최생의 부친이 다른 지방으로 전근가게 되어 온 집안이 이사를 갔는데 15년간이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딸의 혼기를 놓치게 된 흥낭의 모친은 약혼을 파기하고 다른 곳에 혼사를 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은 약속을 중시하여 기다릴 것을 강요했고, 흥남은 약혼자를 기다리다 결국 아깝게도 병사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뒤에 최생이 돌아와서 그 동안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느라 일찍 돌아오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최생은 오부자 댁의 행랑채에 머물게 되었는데, 청명절을 맞아 집안 식구들이 모두 흥낭의 무덤에 성묘를 갔다 돌아올 때, 가마에서 떨어진 금봉차를 최생이 주워서 간직했다. 그 금봉차는 옛날 두 사람의 약혼의 정표로 최생의 집에서 주었던 것인데, 흥낭이 죽자 함께 무덤에 묻었던 물건이었다. 며칠 후 어느 날 흥낭의 여동생인 경남이 행랑채로 최생을 몰래 찾아와 유혹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두 사람은 동침하게 되었다. 훗날 탄로가 두려웠던 최생은 경남을 데리고 야밤 에 도주, 최생의 노복으로 있었던 김영()이란 사람에게 의탁하여 5년여를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경낭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하자 함께 배를 타고 귀향했다. 우선 경낭을 배에 남겨 둔 채 최생이 먼저 들어가 그 간의 일을 사죄하니, 경남의 부모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 최생이 떠난 후로 경낭은 줄곧 혼수상태로 방안에서만 지내고 있었다고 했다. 하인을 시켜 나가보게 했더니 방안에 누워 있던 경낭과 배에 남아 있던 경낭이 만나 합쳐져 하나가 되면서 숨겨진 비밀을 말했다. 그녀는 흥낭의 혼백으로서 자신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최생과의 사랑을 이뤄보려고 동생의 몸을 빌렸던 것인데, 이제 최생을 경낭과 정식으로 결혼시켜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라고 부모에게 간청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흥낭의 혼백은 돌아가고 경낭이 되살아나 두 사람은 맺어졌다. 후에 최생은 금봉차를 팔아 제물을 마련하여 절에서 흥낭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러한 소재는 당대 전기소설인 『이혼기(魂記)』에서도 나타나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다. 흥남은 사랑을 기다리다 죽었고, 또 생전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사후에라도 잇기 위해 애썼으며, 결국 누이를 통해 최종적인 사랑의 완성을 이루려고 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후에 능몽초(凌初)의 초각박안경기』(23)에서 백화소설로 다시 묘사되었다. [전등신화]는 훗날 백화소설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명·청대의 희곡작품 중에도 이 책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 적지 않다. 『전등신화』는 이처럼 중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을 일으켜 많은 모방 작을 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조선을 비롯하여, 일본과 월 남 등 해외 각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각국에 유사한 문언소설의 창작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한국 최초의 소설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세조(世祖)때의 김 시습(金時習)이 지은 것으로, 구우의 [전등신화]와 상당히 유사한 구성 형식과 전기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 영향관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금오신화』에서는 모든 작품의 무대와 인물이 우리의 것으로 바뀌어져 있고 무수한 시()를 별도로 삽 입하여, 나름대로 독창성을 추구한 대목도 적잖게 엿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등신화』의 유행에 힘입어 이정(李禎) [전등여화], 소경첨의 [멱등인화] 등이 계속 창작되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전등삼화(剪燈三話)'라고 부른다. 이밖에 마중석(馬中錫)의 「중산랑전(中山狼傳)』과 근래 우리나라 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 '산보문원사귤 刪補文苑植橋)』도 명대 문언소설의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청대 문언소설

청대는 문언 단편소설에 있어서 최대의 수확기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요재지이(聊齋誌異)』와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를 들 수 있다.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이(聊齋志異)』는 명·청 문언소설을 대 표하는 작품으로, 모두 500편에 가까운 문언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산동성 치천() 사람인 포송령(1640~1715)은 자가 유선 ()이며 몰락해가는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19살에 수재 (秀才)가 되어 두각을 나타내고 문명을 날렸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 수차례의 과거시험에서 연거푸 낙방하여 실의 속에서 지내 다가 만년인 71세에 비로소 세공생(歲貢生)이 되었다.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시···곡을 지었지만 그의 이름을 날리게 한 것은 역시 『요재지이』로 인해서였다. 그는 농촌에서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창작을 시작하여 만년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수정을 거듭하여 필생의 작업으로 이 책을 편찬했다. 『요재지이』에 수록된 작품들은 짧으면 수백 자, 길어도 수천 자에 불과한 단편이지만 내용은 매우 다양하며 대부분 완벽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작품의 소재도 지극히 다양하여 민간전설에서부터 전대의 야사, 또는 작자 자신의 견문이나 상상을 통한 허구 적 창작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작자는 주로 육조시대의 지괴 소설과 당대 전기소설의 영향을 받아 작품을 창작했고, 묘사대상은 대부분 여우와 귀신, 요정과 신선 등이며 거의 대부분의 작품 마다 말미에 '이사씨(異史氏)'라는 이름으로 작자 자신의 평어를 붙였다. 사상적으로 『요재지이』는 매우 강력한 비판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당시 봉건통치자의 부정부패와 어두운 사회를 향하고 있다. 작품 속에는 탐관오리와 지방토호들의 추악한 모습이 낱낱이 묘사되어 있으며, 일반 백성이 받았던 혹독한 압 박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당시 과거제도의 불 합리성에 대한 폭로와 비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과 결혼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묘사 또한 뛰어나 우수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이들 작품 속에 서는 봉건예교의 구속 하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사랑 과 결혼을 하지 못하는 불행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예술적 성과에서 『요재지이』는 문언소설로서는 드물게 상당한 수준에까지 오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소설이 비록 귀신과 여우를 등장시켜 환상적인 초현실의 세계를 그려내어 낭만성이 매 우 농후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초현실의 세계는 곧 현실세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귀신이나 여우의 이야기도 그대로 인간의 이야기로 여겨져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전해준다. 그러므로 때로는 현실세계의 이야기보다도 더한 풍자와 감동을 느끼게 된다. 등장인물의 형상화에 있어서도 작자는 성격과 심리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인간이 아닌 주인공의 묘사에서도 호흡이 통하고 피가 흐르는 듯한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 예술 형상을 더욱 높였다. 언어에 있어서도 문언 소설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우아하고 절제된 언어를 적절하게 구사했고, 동시에 생동감 있는 구어와 속담을 활용하여 살아있는 언어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요재지이』는 당대 전기(傳奇)의 수법을 차용하여 탄탄한 구성력, 풍부한 상상력, 정련된 언어, 치밀한 묘사성, 뛰어난 창작성으로 중국 문언단편소설의 최고봉에 올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가난한 선비가 여우의 정령인 홍옥이란 여자로부터 도움을 받아 혼인했으나 포악한 벼슬아치의 박해로 온갖 고생을 겪다가 다시 홍옥의 도움으로 가세를 회복하게 된 이야기인 「홍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청나라 광평() 지방에 풍노인의 아들 풍상여(馮相如)가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했다. 수년 후 모친과 아내가 차례로 사망하고 홀아비 부자가 살았다. 어느날 밤 풍생이 달밤에 정원에 앉아 있는데, 한 여인이 담장을 기웃거리다가 넘어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 여인의 미모에 반한 풍생은 곧 그녀와 동침하고, 이름을 물으니 이웃에 사는 홍옥()이라고 했다. 풍생은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살자고 언약하고 반년간이나 밤마다 밀회를 계속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풍노인이 아들 방에서 나는 여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내고는 크게 책망했다. 홍옥은 눈물을 흘리며 매파의 소개와 부모의 명이 없으니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풍생도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하자, 홍옥은 마침 근처 마을의 위씨 집에 좋은 여자가 있으니 그녀를 아내로 맞으라고 일러주었다. 풍생이 가난하여 그녀를 맞아들일 돈이 없다고 하니 홍옥은 다음날 백금 40냥을 갖다 주었다. 풍생 이 위씨를 찾아가 돈을 내놓으니 위씨는 기뻐하며 딸을 주었다. 두 사람은 혼인하여 2년이 지나 아들 복아(福兒)를 낳았다. 그 후 어느 해 청명절에 성묘를 갔는데, 그 지방의 권세가 송어사의 눈에 띄었다. 그는 풍생의 아내를 가로채려고 뇌물을 주었으나 풍생은 화도 못 내고 그냥 거절하고 돌아와 부친에게 그 말을 했다. 풍노인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송어사를 찾아가 소동을 부렸다. 송어사는 사람을 보내 풍씨 부자를 매질하고 풍생의 아내를 강제로 데려갔다. 이튿날 부친은 화병으로 절명하고 풍생은 통곡하며 아들을 안고 관가에 가서 고소했지만, 권세 가인 송어사가 미리 손을 써서 별 소용이 없었다. 아내 위씨가 송 어사 집에 가서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풍생은 가슴에 원한을 품은 채 남몰래 송씨를 죽이고자 결심했다. 어느 날 문득 한 구레나룻의 사내가 조문을 왔는데 평소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는 복수를 부추겼다. 풍생은 그가 혹시 정탐꾼이 아닌가 의심하고 짐짓 거짓으로 답변하니 객이 화를 내며 나갔다. 풍생은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 다시 모셔와 이실직고하면서 다만 강보에 싸인 아들이 가여워 결행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아이를 맡아준다면 당장이라도 복수하겠다고 하니, 구레나룻의 사내는 대신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했 다.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일의 성패를 막론하고 원망도 은혜도 생각 말라 하고 떠났다. 풍생은 즉시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 산에 숨었고, 그날 밤 구레나룻의 사내는 송씨 집에 들어가 송어사와 그의 가족을 여러 명 죽이고 사라졌다. 관가에서는 풍생을 유력한 용의자로 수배했는데,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풍생을 추적하여 체포했다. 이때 아이는 산에 버려졌다. 현령이 그를 문초하니 풍생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도망간 이유에 대답이 궁하여 변명을 못하고 투옥되었다. 그날 밤 현령이 잠자고 있을 때 비수가 날아와 침대에 박혔다. 현령은 속으로 심히 두려워하며 권세를 부리던 송어사도 이미 죽은 뒤라 풍생을 풀어주었다. 풍생은 집에 돌아온 얼마 후에 현령에게 하소연하여 아내 위씨의 시체를 돌려받아 새로 장사 지냈다. 어느 날 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보니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서 있었다. 인사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불을 켜고 살펴보니 바로 홍옥이었다. 풍생은 그녀를 안고 통곡했다. 홍옥은 곁에 서 있던 아이를 떠밀며 아버지에게 인사하라고 일렀다. 풍생이 놀라서 살펴보니 산 속에 버려졌던 아들 복아였다.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풍생에게 홍옥은 그 동안의 숨은 사연을 말했다. 사실 그녀는 여우의 정령으로 풍생의 이웃에 있다가 서로 인연을 맺었으나 정식으로 혼인하여 살 수 없게 되자 그의 곁을 떠났으며, 후에 밤길에 산을 지나다가 계곡에서 아이를 발견하여 지금까지 양육해왔다는 것이었다. 이제 집안의 큰 난리가 끝났다니 데려왔다고 했다. 날이 밝자 여인은 그때부터 남자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풍생에게 살림 걱정일랑 말고 과거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했다. 수 년 후에 가세가 회복되었고, 풍생은 홍옥의 도움으로 과거에도 당당히 급 제하게 되었다. 홍옥은 몸을 아끼지 않고 거친 일을 했지만 항상 부드러운 피부와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끝에 포송령이 쓴 '이사씨왈(異史氏曰)'에서는 "그 아들이 어질고 그 아비가 덕이 있으니 그 복수를 협객이 나서서 해 주도다. 사람만 의협이 있는 게 아니고 여우까지도 의협이 있으니 가히 기이하지 않으랴!"라고 말하면서 당시 관청의 우매함과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당대의 전기소설 『임씨전』에 나오는, 여우의 정령이면서도 인간보다 정조를 중히 여긴 임씨의 형상이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며, 또 『규염객전』에서의 이름 없는 구레나룻 협객인 규염객의 형상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 기윤이나 원매의 문언소설이 나옴으로써, 이미 백화소설의 시대에 진입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문언소설의 붐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에도 일찍부터 이 책이 전래되어 특히 문인들에게 많이 읽혀 졌고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후기 북학파의 거두인 이덕무(李德懋)의 손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서 중국소설 중에 포송령의 『요재지이』가 가장 볼만한 것이며, 한때 왕어양(王士禎)이 그 문장이 좋아 천금을 주고 사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으나 포송령이 응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열미초당필기』는 기윤(紀昀: 1724~1805)의 작으로, 24권 에 1,100여 편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대부분 귀신·풍속·시문·전고·서화 등에 관한 괴이한 고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열미초당필기』는 당대 전기의 화려함을 반대하고 육조 지괴의 질박함을 추구하여 문장이 담백하고 청신하지만, 예술성은 『요재지이』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 밖에 원매()의 『신제해(齊諧)[일명 (子不語)],[심기봉의 해탁], 호가자의「형창이초」 등도 청대 문언소설의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화본의 종류에는 일반적으로 '설화사가(說話四家)'라고 알려진 소설(小說강사서(講史書담경(談經합생()이 있다. 소설은 다시 고금의 인정세담(人情世談)이나 괴이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 은자아(銀字兒), 재판이나 협객담을 주로 다룬 설공안(說公案), 전쟁이나 영웅 고사를 주로 다룬 설철기아(說鐵騎兒) 등으로 나뉘는데, 형식은 대체로 단편 화본이다. 작품은 현재 경본 통속소설(通俗小說)』에 9편이 실려 있으며, 그밖에 명대 홍편 ()이 편찬한 『청평산당화본(淸平山堂話本)』과 풍몽룡(馮夢龍) 이 편찬한 '삼언(三言)』에 송대의 소설 화본이 실려 있다. 이러한 소설 화본은 후대 단편 백화소설로 발전했다.

 

[최녕을 잘못 참하다]

∙∙∙∙∙∙(전략)..... 이 고사에서는 한 관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는 술 마신 뒤에 저지른 한 순간의 농담 때문에 결국 자신이 죽게 되고 집안도 파산했으며 몇 사람의 무고한 목숨까지도 잃게 했다. 먼저 고사 하나를 끌어서 잠시 '승두회'로 삼고자 한다......(중략)...... 각설하고, 유관인을 돈을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집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는데, 이미 등불을 켤 시간이었다. 소낭자 진이저는 혼자 집에 있었는데,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해가 저물길 기다렸다가 문을 잠그고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었다. 그러니 유관인이 문을 두드렸을 때 그녀가 어떻게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겠는가? 한참을 두드리니 그제야 비로소 알아차리고 깨어나 "오셨군요!"라 고 응답하면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유관인이 대문을 들어가 방에 들어서니, 진이저가 유관인을 대신해 돈을 받아 탁자 위에 놓으면서 곧 물었다. "나으리는 어디에서 이 많은 돈을 빌렸어요? 어디다 쓰시려고요?" 유관인은 술 몇 잔을 마신데 다가 그녀가 문을 늦게 열어준 것에 짜증이 나서, 농담으로 그녀를 한 번 놀래 줄 작정으로 말했다. "말하자니 당신이 원망할까봐 걱정이고, 말하지 않자니 당신이 꼭 알아야만 할 것 같소. 내 일시적으로 어찌할 수 없이 달리 방도가 없어서 당신을 어떤 나그네에게 저당 잡혔소. 그렇다고 당신을 그냥 버릴 수도 없어서 다만 15관의 돈에 저당 잡혔소. 만약에 좋은 일이 생기면 이자쳐서 갚아주고 당신을 찾아올 것이지만, 만약에 아까처럼 사람을 짜증나게 하면 찾아오는 것을 그만둬 버리겠소!" 소낭자는 그 말을 듣고는 믿지 않자니 15관의 돈이 방문 앞에 쌓여 있는 것이 보이고, 믿자니 그가 평소에 나에게 일언반구도 말한 적이 없고 대 낭자와도 잘 지냈는데 어떻게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이리저리 의심하면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물었다. "비록 그렇더라도 반드시 우리 부모님에게는 한 마디라도 알려 드렸어야죠." 유관인이 말했다. "만약에 당신 부모님에게 알렸다면 이 일은 결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오. 당신이 내일 아침에 그 사람 집에 간 뒤에 내가 천천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당신 부모님에게 알려드릴 테니, 그러면 그 분들 도 나를 나무라지는 않으실 것이오." 소낭자가 또 물었다. “나으리는 오늘 어디에서 술을 마시고 오셨어요?" 유관인이 말했다. "바로 당신을 저당 잡힌 사람과 문서를 쓰고 나서 그가 산 술을 마시고 오는 길이오." 소낭자가 또 물었다. "큰언니는 어찌하여 오지 않지요?" 유관인이 말했다. "그녀는 당신이 떠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당신이 내일 문을 나선 뒤에야 올 것이오. 이것 또한 내가 어쩔 수 없어서 한 마디로 결정해버린 것이오." 유관인은 말을 마치고 나서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옷을 벗지도 않고 침상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느덧 곯아떨어졌다. ......(후략)......

............(前略)......這回書單說一個官人, 只因酒後一時戲笑之言, 遂至殺身 破家, 陷了幾條性命, 且先引下一個故事來, 權做個 得勝頭廻 ......(중략).... 却說官人了錢, 一步一步推到家中敲門, 已是點燈時分, 小娘子二姐獨 自在家, 沒一些事做, 守得天黑, 開了門, 在燈下打, 劉官人打門, 他那裏便聽見? 敲了半晌, 方知覺, 答應一聲 來了!” 起身開了門, 劉官人進去, 到了房中, 二姐替官人接了錢, 放在, 便問: “官人何處挪移這項 錢來? 却是甚用? ”那劉官人一來有了幾分酒, 二來怪他開得門遲了, 且戲言 嚇他一嚇,便道:“說出來,又恐見怪,不說時,又須通得知,只是我一時 無奈, 沒計可施,只得把典與一個客人,又因捨不得,只典得十五貫錢 若是我有些好處,加利贖回來,若是照前這般不順溜,只索罷了!”那小娘 子聽了,欲待不信,又見十五貫錢堆在門前,欲待信來,他平白與我沒半句 言語,大娘子又過得好,怎麼便下得這等心辣手?疑狐不決,只得再問道: “雖然如此,也須通知我爹娘一聲。”劉官人道:“若是通知爹娘,此事斷然 不成,明日且到了人家,我慢慢人與爹娘說通,他也須怪我不得小 娘子又問:“官人今日在何處吃酒來?”劉官人道:“便是把典與人,寫了文 書,吃他的酒纔來的。”小娘子又問:“大姐姐如何不來?”劉官人道:“他因不 忍見分離,待得明日出了門來這也是我沒計奈,一言定”說,暗地忍不住笑,不脫衣裳,睡在床上,不覺睡去了......(後略)......

 

강사서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주된 내용으로 하며, 형식은 대부분 장편 화본인데, 이를 '평화()'라고 도 한다. 주요 작품에는 후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나 『수당 연의와 같은 역사소설의 선구가 된 「신편오대사평화 (新編五代史平話), 『수호전(水滸傳)』의 저본이 된 『대송선화유사 (大宋宣和遺事), 『서유기(西遊記)』의 저본이 된 「대당삼장법사취경기(唐三藏法師取經記)』 등이 있다. 이러한 강사 화본은 후대 장회체() 장편 백화소설로 발전했다. 담경()은 설참청(說參請), 설원경(說譚經)이라고도 하며, 불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경전과 수도에 관한 이야기를 주된 내용으로 한다. 담경 화본은 당대 변문의 직계로서 명·청대의 강창문 학으로 발전했다. 합생()은 호악(胡樂)을 바탕으로 설화와 가무를 합친 형태 로서, 오늘날 '상성()'과 유사한 면이 있다. 화본은 위로는 당대 변문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명대 장회소설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진정으로 평민들의 사상과 감정에 부합되는 통속문학이 출현하여 문학 영역의 신천지를 개척했다는 데에 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명대 단편 의화본소설

명대의 소설은 백화로 씌어진 장회체(回體) 장편소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송대의 화본을 모방하여 지은 의화본(話本)소설 역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명대에 유행한 백화 단편소설은 대부분 의화본소설이 주류를 이 루고 있는데, 『삼언(三言)·『이박(二拍)·『금고기관(古奇觀)· 일형()이 바로 그것이다. 『삼언』은 풍몽룡(馮夢龍: 1574~1645)이 지었으며, 『유세명언(喩世明言)[40, 일명 『古小說], 『경세통언(警世通言)[40], 『성세항언(醒世恒言)[40]을 말한다. 풍몽룡은 소설의 사회적 공효성을 인식하고 통속문학의 제창과 창작에 힘쓴 소설가로, 전 래된 단편 화본을 수집 · 정리 · 각색하고 새롭게 창작하여 『삼언』을 편찬했다. 「이박』은 능몽초(凌濛初: 1580~1644)가 지었으며, 초각박안 경기(初拍奇)[40]와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40] 를 말한다. 「이박』에 실려 있는 고사는 전대의 화본을 개작한 것, 「고금소설』에서 취재한 것, 「초각』과 『이각』에 중복되는 것, 자신이 창작한 것 등이 있다. 『금고기관[40]은 포옹노인(抱甕老人)이 편집했다. 「삼언』과 「이박』이 너무 방대하여 민간에서 쉽게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삼언』에서 29, 「이박』에서 10편을 정선하고 따로 1편을 첨가 하여 화본 선집을 만들었는데, 사실상 『삼언』과 『이박』보다 훨씬 널리 유행했다. 『일형』은 육인룡(陸人龍)이 지었으며, 『형세언(型世言)[40, 일명『三刻拍案驚奇』『幻影』]을 말한다. 『형세언』은 대부분 전대의 고사를 윤색. 개작한 것으로, 유일한 완정본이 1992년에 한국 규장각(奎藏閣)에서 발견되어 세계적으로 귀중한 가치가 있다.

 

명대 백화 장편소설

명대에는 시··고문 등 정통문학이 부진한 반면에 송·원대에 서 기반을 다진 통속문학인 소설과 희곡이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 다. 특히 소설은 중국 문학사상 다른 정통문학과 대등한 지위를 확보하여 희곡과 함께 명대를 대표하는 문학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명대에 소설이 발달하게 된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백 화문학의 발전이다. 백화문의 사용은 당대의 변문()과 송대의 화본() 가운데서 이미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대부분 반문 반백()의 상태였는데, 명대에는 문인 학사들이 의식적으 로 백화문학을 제창하고 백화로 소설을 지어 소설 창작에 이바지했다. 둘째, 소설의 지위 제고이다. 중국 문학 속에서 소설은 역대문인. 사대부들에 의하여 경시되어 왔는데, 명대에는 이탁오(李卓吾원광도(袁宏道풍몽룡(馮夢龍) 등의 문인들이 소설의 문학성과 사회적 공효성을 고양하여 소설에 대한 관념이 변하게 되었다. 셋째, 시대적인 환경이다. 도시경제의 발전에 따른 시민 계급의 등장으로 소설의 독자층과 작자층이 확대되었으며, 당시의 다양한 시대상황과 사회의식을 소설에 반영하여 널리 유행하 게 되었다. 넷째, 인쇄술의 발달과 책방의 증가로 소설이 널리 간행되고 유포되었다. 명대의 주요 백화 장편소설에는 역사소설로 대표되는 『삼국지 연의(三國志演義), 영웅소설로 대표되는 『수호전(水滸傳), 신마 소설로 대표되는 『서유기(西遊記), 인정소설로 대표되는 『금병매(金甁梅)』등이 있다. 『삼국지연의』의 작자는 나관중(1367전후)이다. 『삼국 지연의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내 용을 바탕으로 하고 당대의 변문(變文), 송대의 화본[說三分], 원대 잡극의 삼국고사를 종합하여 형성된 것으로, 직접적인 모태가 된 것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에 신안() 우씨가 간행한 『전 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이다. 판본에는 최초본으로 24 240절로 되어 있는 홍치본(弘治本), 이탁오 비평본으로 120회로 되어 있는 만력본(萬曆本), 현재 통행 본으로 청대 모종강(毛崗)이 비평·개작한 120회의 모본(毛本) 등이 있다. 위·촉·오 삼국의 분열과 쟁패()를 다룬 『삼국지연의』는 생동감 넘치는 개성적인 인물의 전형을 창출하고, 과장·대비·심리묘사 등 묘사기교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언어가 정련되어 있고 문체상 문언과 백화가 섞여 있어서 아속(雅俗)이 함께 감상 할 수 있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삼국지연의』의 속작에는 『개벽연역통속지전(開闢演繹通俗志傳)·『유하지전(有夏誌傳)·『열국지전(列國志傳)·『전한지전(全 漢志)』 등이 있다.

 

「적벽대전(大戰)

......(전략).......... 각설하고, 그날 밤에 장료는 황개를 한 화살에 쏘아 맞혀 물에 떨어뜨리고 조조를 구하여 언덕으로 올라가 말을 찾아서 달렸는데, 이때는 군중이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한당이 연기를 무릅쓰고 불속을 뚫고 들어와서 수채를 들이치려고 하는데 문득 군사 가 아뢰었다. “웬 사람이 선미 키에 매달려 큰소리로 장군의 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한당이 자세히 들어보니 "공의[한당의 자재]는 날 좀 구해 주오!"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한당은저 사람은 황공복[황개]이다!"라고 하면서 급히 끌어 올려서 보았더니, 황개가 화살을 맞고 부상당해 있었다. 곧 살대를 입으로 물어 뽑았는데 살촉이 살 속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 한당은 급히 젖은 옷을 벗기고 칼끝으로 살을 도려 살촉을 끄집어낸 후에 깃발을 찢어 상처를 싸매고 자기의 전포를 벗어서 입힌 다음에 그를 다른 배에 태워 먼저 대채로 돌려보내 치료를 받게 했다. 원래 황개가 물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 추운 날씨에 갑옷을 입은 채로 강물에 빠졌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날 불길은 강을 덮고 함성은 천지를 뒤흔드는데, 좌편으로는 한당과 장흠의 양군이 적벽 서편으로부터 몰려나오고, 우편 으로는 주태와 진무의 양군이 적벽 동편으로부터 몰려나오며, 한가 운데로는 주유·정보·서성·정봉의 대대 선척이 모두 나왔다. 불은 군사의 형세에 응하고 군사는 불의 위엄에 의지하니, 이것이 바로 삼강의 수전이요 적벽의 몰살이라는 것이다. 조조의 군사들 가운데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고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후세 사람이 지은 시가 있다.위나라, 오나라 자웅을 결단하니, 적벽강을 덮은 전선 한 번 쓸어 자취 없네.

열화가 활활 일어 운해를 비출 적에, 주랑이 바로 예서 조공을 격파했다네. ......(후략)......

......(前略) 却說當夜張遼一箭射黃蓋下, 救得曹操登馬匹 時, 已大亂, 韓當冒煙突火來攻水寨, 忽聽得士卒報道: "上 人, 高將軍表."韓當細, 但聞高" 公義救當曰: "此公覆也 急救起, 見黃蓋負箭着傷, 咬出箭桿, 箭頭陷在肉內, 韓當急爲脫去濕衣, 用刀刻出箭頭, 旗束之, 脫自己戰袍與黃蓋穿了, 先令別船送回大寨, 原來蓋深知性, 故大塞之時, 和甲墮江, 也逃得性命, 知說當日滿江火滾, 喊聲震地, 左邊是韓當·蔣欽兩車從赤壁西邊殺來, 右邊是秦·陳武兩軍從赤壁東邊殺來, 正中是周瑜·程普··丁奉大 船隻都到, 火兵應, 兵仗火威, 此正是三江水戰, 赤壁鑰兵, 曹軍着中 箭, 火焚水溺者, 不計其數, 後人有詩: 魏吳爭践决雌雄, 赤壁樓船一掃空。烈火初張照雲海, 會此破曹公 [삼국지연의 제50]

 

「수호전」의 작자에 대해서는 시내암(1296~1370)이라는 설, 나관중이라는 설, 시내암이 짓고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설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시내암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수호전」은 송강()의 반란사건을 간략히 기록한 송사(宋史)』를 바탕으로 하고 송말의 화본과 원초의 잡극 등에서 수호고사를 종합하여 형성된 것으로, 직접적인 모태가 된 것은 송말·원 초에 나온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제4절 「梁山泊英雄宋江起義記_양산박송강기의기」이다. 「수호전」은 판본에 따라 내용상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그 주요 판본에는 송강등이 양산박에서 기의(起義)한 뒤 조정의 초안(結安)을 받아들여 방랍(方獵)을 토벌한 것을 기록한 115회본 「충의수호전』 명 가정 연간 무정후() 곽훈의 집에서 나온 변본으로 송강등이 방랍을 토벌하기 전에 요()를 정벌한 일이 추가되어 있는 100회본, 천계(天啓). 숭정(崇禎) 연간에 양정견(楊定見)이 엮은 것으로 요를 정벌한 뒤에 다시 전호(田虎왕경(王慶)을 정벌한 일이 추가되어 있는 120 회본 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全書), 청초 김성탄(金聖)의 산정 본(刪定本)으로 송강 등이 조정에 불려 들어간 이후의 일을 과감 히 삭제해버린 70회본[일명 腰斬本] 등이 있다. 『수호전』은 세련된 백화문의 운용으로 백화문학의 최고봉에 올랐고, 등장인물의 개성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관핍민반 民)'의 민중의지를 잘 반영하여 주제표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수호전』의 속작에는 『정사구(四寇) [일명 『後水滸傳], 『수호후전(水滸後傳), 『탕구지(蕩寇志)[일명 『結水滸傳], 『정충전(精忠傳)』등이 있다.

 

[경양강에서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다]

....(전략)...... 무송은 그 호랑이가 다시 몸을 돌려 달려드는 것을 보고 몽치를 두 손으로 쳐들었다가 있는 힘을 다해 한 대 내리갈겼다. 와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다시 자세히 보니, 엉겁결에 내리친다는 것이 호랑이는 맞히지 못하고 마른나무를 후려갈겨 손에 든 몽치가 두 토막 나서 절반은 날아가고 절반만 손에 남아 있었다. 호랑이가 연거푸 포효하며 재차 덮치니 무송은 이번에도 몸을 날려 10여보 밖으로 물러났다. 호랑이가 다시 덮쳐와 그 놈의 앞발이 발부리 앞을 짚을 때 무송은 동강난 몽치를 내던지고 두 손으로 호랑이의 대가리를 움켜쥐고 내리눌렀다. 호랑이는 용을 쓸 대로 썼으나 무송이 있는 힘껏 내리누르는 바람에 빠져 날 수가 없었다. 무송은 손으로 내리누르는 한편 발길로 호랑이의 이마빼기와 눈퉁이를 연신 걷어찼다. 호랑이가 고함을 지르며 앞발로 긁어 차는 바람에 땅에 구덩이가 생겼다. 이때라고 생각한 무송은 호랑이의 주둥이를 그 구덩이에다 눌러 박았다. 호랑이는 무송한테 눌려서 맥이 어지간히 빠진 상태였다. 무 송은 왼손으로 호랑이의 정수리를 움켜쥐고 단단히 누른 채 오른손을 빼내 쇠망치 같은 주먹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마구 내리쳤다. 60~70번쯤 내리치자 호랑이의 눈과 입과 코와 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무송은 평생의 위력과 무예를 다 써서 잠시간에 호랑이를 때려눕혔는데, 마치 큰 비단 부대를 엎어 놓은 것 같았다. 무송이 경양강에서 호랑이를 잡은 장면을 묘사한 이런 시가 있다. 경양강 산마루에 광풍이 몰아치니, 만리의 검은 구름 햇빛을 가리네. 빛 진한 저녁 노을 숲 위에 비껴 있고, 차디찬 저녁 안개 하늘을 뒤덮었네. 벽력같은 고함소리 갑자기 울리더니, 산중호걸 산허리에 나타났네. 머리 들고 날치면서 이빨과 발톱 드러내니, 노루 사슴 따위는 넋을 잃고 내빼네. 청하의 장사는 술도 깨지 않은 채로, 산마루에 홀로 있다 엉겁결에 맞섰다네. 굶주리고 목말라 사람 찾던 호랑이, 사납게 덮쳐드니 흉악하기 그지없네. 달려드는 호랑이는 무너지는 산과 같고, 맞다드는 사람은 떨어지는 바위 같네. 내리치는 주먹은 포석이 떨어지는 듯하고, 발톱으로 후빈 곳엔 구덩이 패였네. 주먹과 발길은 빗발처럼 떨어지고, 두 손엔 붉은 피 낭자하게 묻었네. 피 뿌려진 송림엔 비린내 풍기고, 흩어진 털과 수염 산마루 덮었네. 가까이서 보면 천근 힘도 더 있는 듯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위풍도 당당하네. 풀밭에 쓰러지니 얼룩무늬 안 보이고, 감겨진 두 눈엔 불빛이 사라졌네. 경양강의 그 맹호는 무송이 한참 휘두른 주먹질과 발길질에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단지 입으로만 가는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무송은 손을 떼고 소나무 옆으로 가서 동강난 몽치를 찾아들고 혹시 채 죽지 않았을까 해서 또 한바탕 내리쳤다. 보기에 죽은 것이 분명하니, 그제서야 뭉치를 내던졌다 어디, 이놈을 끌고 경양강을 내려가 볼까? 무송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피가 질펀한 데다 손을 밀어 넣어 들려고 했으나 움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지나치게 다 쓰고 난 뒤라 맥이 풀려 손발이 나른해져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후략)......

............(前略)............ 武松見那大蟲復翻身回來, 雙手輪起梢棒,儘平生氣力, 只一棒, 從半空劈將下來, 只聽得一聲響, 簌簌地將那樹連枝帶葉劈打將下來, 定睛看時, 一棒劈不着大蟲, 原來打急了, 正打在枯樹上, 把那條折做兩截, 只拿得一半在手裏, 那大蟲咆哮, 性發起來,翻身又只一撲撲將來, 武松又只一跳, 却退了十步遠, 那大蟲恰好把兩隻前爪搭在武松面前, 武松將半截棒丟在一邊, 兩隻手就勢把大蟲頂花皮, 一按按將下來, 那隻大蟲急要, 被武松儘氣力捺定, 那裏肯放半點兒鬆寬, 武松 把隻脚望大蟲面門上, 眼睛裏, 只顧亂, 那大蟲咆哮起來, 把身底下爬起兩堆黃泥做了一個土坑, 武松把大蟲嘴直按下泥坑裏去, 那大蟲喫武松奈何得沒了些氣力, 武松把左手緊緊地住頂花皮, 出右手來,提起鐵鎚般大小拳頭, 儘平生之力只顧打, 打到五七十拳, 那大蟲眼裏·口裏·鼻子裏·,都迸出鮮血來, 那武松盡平昔神威, 仗胸中武藝, 半歇兒把大蟲打做一堆, 却似着一個錦布袋, 有一篇古風,單道景陽岡武松打虎: 景陽岡頭風正狂, 萬里陰日光, 觸目霞掛林藪, 侵人冷霧滿窮. 忽聞一聲霹靂嚮, 山腰飛出獸中王, 頭踴躍逞牙爪, 麋鹿之屬皆奔忙, 河壯士酒未醒, 風頭獨坐忙相迎, 上下尋人虎饑渴, 一掀一撲何猙獰, 虎來撲人似山倒, 人去迎虎如巖傾臂腕落時飛炮, 爪牙爬處成泥坑拳頭脚尖如雨點, 淋漓兩手猩紅染, 腥風血雨滿松林, 散亂毛鬚墜山奄, 近着千鈞勢有餘, 遠觀八面威風斂, 身橫野草錦斑鎖, 緊閉雙睛光不閃 當下景陽岡上那隻猛虎, 被武松沒頓飯之間, 一頓拳脚打得那大蟲動, 使得口裏兀自氣喘. 武松放了手, 來松樹邊尋那打折的棒檄, 拿在手裏, 只伯大蟲不死; 把棒檄又打了一回. 那大蟲氣都沒了. 武松再尋思道我就 地拖得這死大蟲下子去? 就血泊裏雙手來提時, 那裏提得動, 原來使盡 了氣力, 手脚都蘇軟了, 動揮不得. ............(後略)............ [『水滸傳』제23]

 

『서유기』의 작자는 오승은(吳承恩: 1500?~1582?)이다. 『서유기』는 초당의 고승 현장()이 인도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동안 에 겪은 여러 고난을 기록한 『대자은삼장법사전(大慈恩三藏法師傳)』과 사서의 현장전() 및 현장 자신이 지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바탕으로 하고, 송대의 화본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 금대의 원본() 『당삼장(唐三藏), ·명 대의 잡극 『서유기』 등과 민간에 퍼져 있던 '서천취경(西取經)' 고사를 새롭게 개편하여 창작되었다. 「서유기의 주요 판본 가운데 명대 판본으로는 화양동천주인 교본(華陽洞天主人校本)[100], 이탁오비평본(李卓吾批評本)[100, 『당삼장서유석액전(唐三藏西遊釋厄傳)[朱鼎臣 編, 10] 등이 있으며, 청대 판본은 대부분 100회본 계통이다. 『서유기』는 제1~8회는 손오공(孫悟空)의 탄생과 천궁에 서의 난동, 9회는 현장의 등장, 10~12회는 당 태종의 지옥 탐방, 13~100회는 손오공이 요괴들과 싸우는 81()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유기』는 기이한 환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낭만주의 예술 특색을 최대로 발휘한 신마소설로, 인물묘사상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고, 선의의 조소, 신랄한 풍자, 엄중한 비평을 예술적으로 결합시켰으며, 산문과 운문 및 민간의 방언과 구어를 잘 운용하고, 고사의 구성과 인물의 배치가 치밀하다. 『서유기의 속작에는 『속서유기(續西遊記)·『후서유기(後西遊 記)·『서유보(西遊補)·『사유기(四遊記)·『서양기(西洋記)』등 이 있다. 그밖에 나관중의 『북송삼수평요전(北宋三遂平妖傳)』과 허중림 (許仲琳)의 『봉신연의(封神演義)』등도 당시에 널리 유행한 신마 소설이다. 「오공이 헛되이 천만 가지 계책을 써보心猿空用千般計」 .....(전략)...... 그때 네 천사가 영소전에 가서 상주하고 오공을 옥제님께 배알시켰다. 오공은 전상을 향해 큰 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옥제님께 삼가 아뢰나이다. 저는 당승 삼장을 보호하여 서천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길이옵니다만, 여행 도중에 흉한 일은 많고 길 한 일은 적사와 그 어려움이 이루 여쭐 수도 없을 지경이 옵니다. 그러던 중에 이번에 금도산 금도동에서 시대왕이란 괴물을 만났 사옵니다. 그 괴물이 삼장을 자기네 동굴로 잡아갔는데, 삼장을 쪄서 먹을지 삶아서 먹을지 말려서 먹을지 알 길이 없사옵니다. 그래서 전 그 거처를 알아내어 그 놈과 싸웠습니다만, 그 괴물의 신통력이 어찌나 광대무변한지 저의 금고봉까지도 빼앗겼나이다. 그리하여 저로서도 그 놈을 정복할 수가 없었사 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괴물은 저를 알고 있는 듯 했사옵니다. 그래서 이건 필시 천계의 흉악한 별이 하계로 내려온 것이리라 생각되어 제가 상주하러 온 것이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영을 내려 흉악한 별을 점검하여 주시고 병마를 내셔서 요마를 퇴치해주시길 비나이다. 그러 하오면 저는 감격하기 그지없겠나이다." 그리고선 또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분부대로 따르겠사 옵니다"고 했다. 옆에 있던 갈선옹이 그 모양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원숭이가 처음엔 우쭐하더니 지금엔 아주 점잖아졌으니 웬일이신가?" 오공이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오. 처음에 우쭐하다가 나중에 점잖아진 게 아니오. 어쨌든 난 지금 금고봉을 잃어버렸단 말이오." ......(후략)......

 

...(前略)... 當時四天師傳奏靈霄, 引見玉陛. 行者朝上唱個大嗟, : ...... “老官兒,! ! 我老孫保護唐僧西天取經, 一路凶多吉少, 也不消說. 於今來在金山兜山, 金山兜洞, 有一兇怪, 把唐僧拿在洞裏, 不知是要蒸, 要煮, 是老孫尋上他門, 與他交戰, 那怪却就有些認得老卓是 春記 神通廣大, 把老孫的金箍棒搶去, 因此難妖魔, 疑是上天凶星, 思凡下界, 此老孫特來, 伏天尊垂慈洞, 降旨勘兇星, 發兵剿妖魔, 老 孫不勝戰慄營之至!" 却又打個深窮道: "以聞"旁有葛仙翁笑道: "猴子是 何前後恭?" 行者道: “不敢! 不敢! 不是甚前侶後恭, 老孫於今是沒棒弄 了.” ......(後略)............ [『西遊記』 제51]

 

『금병매』의 확실한 작자는 미상이며 난릉蘭)의 소소생(笑 生)이 지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명대 왕세정(世貞)이 지었다고도 하지만 믿을 수는 없다. 『금병매』는 『수호전』의 제23~27회에 나오는 '무송살수 (武松)'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확대·개편한 것이다. 『금병매』의 주요 판본에는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산동(山東) 지방의 방언과 시중의 은어()가 많이 들어 있는 사화본 本), 제일기서본(第一奇書本)이라고도 하며 사화본을 개정한 것으로 문장이 잘 정련 되어있고 방언을 삭제해버린 개정본 등이 있다. 『금병매』는 관료·토호·부상()인 서문경(西門)과 그의 첩 반금련(潘金蓮이병아(李甁兒방춘매(龐春梅)가 펼치는 음탕 하고 방탕한 가정생활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조명한 중국 인정소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금병매』는 인물의 성격묘사 와 전형성이 뛰어나고, 일상의 언어를 잘 운용하여 생동감이 넘 칠 뿐만 아니라, 암암리에 현실을 폭로한 비판정신이 담겨 있다. 또한 대담한 색정 묘사를 통하여 예술적인 성공을 거둔 것도 중 요한 특징이다. 『금병매』는 이제까지의 역사 · 영웅고사나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실제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중국 통속소설사상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데에서 그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금병매』는 『옥교리(玉嬌梨)·『평산냉연(平山冷燕)·『호구전 ()·『철화선사(鐵花仙史)·『육포단(肉蒲團)』등 후대 염정 소설의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춘매가 정색하며 이명에게 욕하다 [春梅正色罵李銘]

......(前略_전략)............이 빌어먹을 놈! 네 놈이 어쩌자고 내 손을 비비면서 나를 희롱하느냐? 이 죽어도 쌀 놈 같으니! 너는 내가 누군지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하루 온종일 술과 고기를 처먹더니 양기가 팔팔하게 오른 그 빌어먹을 물건이 서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중략)...... 이 빌어먹을 놈아, 너는 그 놈의 방망이 잘못 놀렸다간 경을 칠 게야.......(중략)...... 나으리 오시길 기다렸다가 내가 말씀드려 빌어먹을 네 놈을 한바탕 두들겨 패가지고 문밖으로 던져 버릴 테다. 네 놈 없다고 노래 못 배울 줄 아느냐? 본사의 삼원을 뒤지면 네놈 같은 놈 못 찾을까 보냐? 에이, 구린내 나는 더러운 놈 같으니! ...... (후략)..

......(前略)............好的王八! 恁的捻我的手, 調戲我? 賊少死的王八, 還不知我是誰! 一日好酒好肉, 越發養活的那王八靈怪兒出來了......(中略)... 賊王入, 錯下遣個鎚撤了.................(中略)............ 等來家等我說了, 這的王八一棍的離門離戶, 這王八, 學不成唱了? 愁本司三院尋 不出,闕臭了! ......(後略)...... [『金甁梅』제22]

 

 

중국문학의 향기: 중국문학 장르별 이해

김장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