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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인류의 지혜]인도_9#62

인도_9

This text explores the relationship between Atman (individual soul) and Brahman (ultimate reality) in Indian philosophy, highlighting meditation and ascetic practices as paths to liberation. Atman is indestructible, and overcoming Maya (illusion) leads to ultimate freedom. It discusses Hindu beliefs on death and rebirth, along with Jainism and Buddhism's similar views. Additionally, the concepts of time and creation in Indian philosophy are elaborated upon, portraying a cyclical view of existence and the universe.

영혼

'타트 트밤 아시'(그것은 바로 너다)라는 만트라 는 <우파니샤드>(22~23쪽 참조)의 중요한 문구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 즉 아트만(모든 존재들이 가진 영혼) '그것', 즉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초월적인 브라만(절대)과의 관계를 말해 주고 있다.

브라만은 인간의 마음으로 인식될 수 없다. 브라만은 본래 어떤 것으로도 정의할 수 없다. 이것은 비인격이며 어떤 한계도 없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브라만은 말로 표 현할 수는 없지만, 아트만의 생기가 되어 아트만 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또 손으로 움켜 잡을 수는 없지만, 호수 수면 위에 비치는 햇빛 처럼 볼 수는 있다.

아트만은 긍정적인 표현방법으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흔히 부정적 표현방법을 동원해 다 양하게 묘사된다. 이것은 감지되지 않는 것이며, 파괴될 수 없는 것이며, 죽음이 전제된 육신 속 에 머물러 있는 불멸의 존재로서 그 자체가 고통 을 받거나 죽음을 맞는 존재가 아니다. 이처럼 아트만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파니샤드>는 명상, 고행, 그리고 요가 의 방법을 통해서 아트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다. <브라만) 사제들은 더 이상 자신들만 베다 신 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 게 되었다. 신비스러운 체험이 베다 신들보다 우 선했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주된 초점과 목적이 이제 희생제에서 해탈로 옮겨진 것이었다. 이 해탈은 브라만과 아트만이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같다고 하는 영적인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저절 로 도달하게 되는 지극한 자유의 단계이다.

8세기의 걸출한 인도의 신학자 상카라는 아드 바이타不二元論를 가장 명확하게 주장한 인물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브라만의 영역과 평범한 경험의 세계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다. 이 경험적 세계에서 우리의 개체적 자아는 서로 다른 정체 성을 가진다. 상카라에게는 해탈이란 우리의 정 체성을 절대자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일 뿐 아니라 마야(130~131쪽 참조)가 만든 세상 의 환영적 속성을 아는 것이다. 상카라는 실체란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 즉 평범한 차원과 지고 한 진리의 차원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평범한 차인도 중부 마디아프라데시의 신성한 나르마디 강에서 동이 트는 새벽에 몸을 씻고 있는 두 명의 푸자리(사제), 성스러운 물에 영혼을 씻고 과거 의 업을 씻는 것이다.

원에서는 사물로 이루어진 물질세계와 독립된 자아가 진실이지만 지극히 높은 진리의 차원에 서 그것은 환영에 불과하다. 고행을 통해 명상을 하는 사람의 목표는 영혼을 절대자와 합일시킴 으로써 이러한 평범한 실체의 환영을 초월하는 것이다.

 

진리의 차원에서는 개체적 영혼이 존재하지 않고 절대적 실체를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상카라의 주장으로 인해 그는 위선적인 불교도 라고 비난받았다. 사실 그는 종종 불교의 교리를 공격하기는 했지만 두 학파의 접근방법에는 유 사한 점도 많았다. 불교의 교리에서는 독립된 자 아란 없을 뿐 아니라 자아란 전혀 없다고 한다. 이른바 아나타非我論이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 (두카)이 영원하지 않고 덧없는 개체적 자아나 에고라는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 고 가르쳤다. 부처에 따르면 우리가 일생 동안 생각하는 ''라고 하는 것은 헛된 것이고 또 의 미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가 제시한 팔정도(35쪽 참조)는 자아라 고 하는 헛된 생각에 집착하는 마음을 초월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다. 부처는 우리 의 행위를 조정하는 자아라는 것은 잘못된 욕망 의 산물이라고 가르쳤다. 부처에 의하면 자아는 본디 존재하지 않고, 육신 속에서 발견할 수도 없으며, 정의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순간적인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일 뿐이다.

 

죽음의 본질

죽음은 흔히 재탄생 이전의 삼 에 비유된다. 밤에 잠을 자는 동 안 우리의 의식은 없는 상태이지 반 아침에 일어나면 같은 사람인 것 처럼, 아트만(영혼)은 의식이 잠들어 있는 동안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아 무런 상에 없이 옮겨 다닌다. 육신이 죽으면 화장할 때 그 육신을 이루고 있던 구성들은 각기 그 본래대로, 즉 눈은 대양 속으로, 숨은 바람 속으로 돌아간다. 힌두교의 장례 식에서는 죽은 사람의 지난 일들 에 대해 구구절절 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의 영혼에게 직접 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떠나라, 머나라, 우리의 조상들이 거쳐 온 그 오래된 길을 따라 떠나라", 왜냐하면 영혼은 파열될 수 없는, 그래서 절대로 죽는 일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타 우파니샤드>의 유명한 이 야기를 통해서 죽음의 근원에 대한 베다식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어 린 브라만 소년이 있었다. 그 아버 지는 형식적인 제례에 대해 회의를 좋고 꼬치꼬치 따지 묻는 아들에게 하가 나서 "죽음한테나 가서 붙어 보라"고 말한다. 소년은 정말로 죽음의 신을 찾아간다. 그는 살 아 있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신 이마의 영역을 방문한 첫번째 사람이있다. 야마는 처음에는 바쁘다면서 소 넌을 바대했으나,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면서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 주겠다고 한다. 소년은 세 번째 소원으로 죽음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한 다. 야마는 죽음이란 영혼의 불멸성을 알지 못해 생겨나는 환영일 뿐이라고 말한다. <바가바드기 타>(60~61쪽 참조)에서도 "영혼은 육신이 죽는 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야마는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개체적인 자아를 초 원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 론짓는다.

 

인도의 사두(70~71쪽 참조)들은 입문식 때 개체적 자아의 죽음과 자아의 초월을 상징하는 죽음에 대한 의례를 치른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이와 같은 교의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대단한 마음의 준비를 요구한다. 인도에서도 많은 사람 들이 환생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환생은 믿지 않더라도 사람이 죽으면 다른 영역, 흔히 지하 세계로 옮겨간다고 생각한다.

면 내생에 대한 믿음이 어떻든 전생에 대한 집착 그로 은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다. 마을 주변의 어두 컴컴한 숲, 후미진 장소가 어쩌면 자살해 죽은 귀신, 아이를 낳다 죽은 여자 귀신, 모아놓은 재 산을 숨겨놓고 죽은 귀신들의 소굴이 될 수도 있 다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어디로도 옮겨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육신의 죽음 후에도 계속 살아 있는 어떤 개체적 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전통적인 힌두교의 장례법은 화장이다. 바로 불이 내생으로 영혼을 옮겨다 주는 중개자인 셈 이다. 신성한 도시 바라나시는 모두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기를 소망하는 장소이다. 힌두교도들 은 이곳에서 화장되어 그 재가 갠지스 강에 뿌려 지기를 소망하면서 인도 전역에서 몰려든다. 이 처럼 죽음을 둘러싼 의례는 하나하나가 나름대 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조상제사 (슈랏다)에서 브라만 사제들에게 음식을 제공하 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에게 그 복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의례는 죽 은 사람이 좋은 환생을 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으로 최소한 1년에 한 번 치른다.

 

자이나교에서의 죽음

살레카나는 금식을 통해서 육신을 내버리는 자이나교 특 유의 종교적 죽음의 형태이다. 자이나교도들은 힌두교와 불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을 때의 바른 행동이 다음 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고행과 금욕주의를 실천하면 그것은 업을 소멸시키 고 결과적으로 다음 생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 각하기 때문에 자이나교도의 이상적인 죽음은 마음이 육 신을 완전히 제어하는 상태에서 죽는 것이다.

금식은 그 사람의 업을 소멸시킴으로써 육신을 씻어 내리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 마음은 자유롭게 되어 그 영혼의 운명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다. 자이나교의 살레카나에 관해서는 마하비라의 제자인 스칸달라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60번의 끼니를 거절하고 결국 깊은 명상에 들었다. 그는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음식과 물을 모두 거절하고 육신을 돌보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개념

시간을 초월하는 것은 인도의 모든 정 신적 전통의 목표였다. 시간은 흔히 적으로 간주되었다. 진리에 대한 무 지와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 는 존재들에게 시간은 영혼을 묶는 영원한 수레바퀴와 같기 때문이다. 시간의 숙명적인 수레바퀴에서 '해 방 되는 것이 해탈(모크샤)이다. 이 커다란 목표를 달성한 고행승은 칼라아티타(시 간을 초월한 자)라고 불렸다.

<아타르바베다>(16~17쪽 참조)는 시간을 우 주가 창조되고 움직일 수 있게 한 '첫번째 원리' 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힌두교 문헌들 속에서는 시간을 벗어나고' '정복' 하려는 시도를 많이 읽 을 수 있다. <마하바라타>(56~57쪽 참조)의 한 운문은 "시간은 모든 존재를 '요리' 한다" 그리고 "모든 창조물을 파괴한다"고 적고 있다. 또 모두 가 잠들어 있을 때 "시간은 깨어 있다. 시간을 벗 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힌두 신화에서 시간은 칼파라고 불리는 창조 (사르가)와 파괴(프랄라야)의 거대한 순환을 통 해 돌아가는 수레바퀴로 표현된다. 힌두교의 고 전 문헌들은 각 칼파들을 창조신 브라마의 일생 이라고 이해한다. 브라마는 브라마 시간으로 100 세를 산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시간으로 계 산하면 311 400억 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주 는 브라마 신이 태어날 때 나타났다가 브라마가 죽을 때 파괴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브라마가 브 라마 시간으로 100년 후에 생겨나고 이러한 주기 가 다시 시작된다. 이러한 칼파는 1,000번의 '거 대한 영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대한 영겁은 교대로 네 단계 유가(세상의 시기)로 구성된다.

 

마야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은 세상을 미야, 즉 환영이라고 말 한다. 인간이 실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브라마 (48-49쪽 참조)의 꿈이라는 것이다. 브라마는 창조신 이고,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위대한 미술사이다. 그 꿈 자체는 보존자인 비슈누에 의해 지속되는데, 비슈누는 마야를 우리가 실제라고 알고 있는 복합적 직조물인 세 상을 회전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세상 자체가 환영이 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환영이라는 것 이다. 우리는 우주를 다양한 대상물, 구조 그리고 사건 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마야 이론은 모든 것이 하나라고 한다. 이성적인 번주도 단지 인간의 마음에 의 한 직조물일 뿐 그것이 어떤 궁극적인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인도의 종교적 스승 가운데 유명한 라즈니쉬 (156~157쪽 참조)는 만일 서양이 그리스 철학자 가운 데 플라톤을 따르지 않고 헤라클레이토스를 따랐다면 관념의 역사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며, 마야 의 개념이 동양사상뿐 아니라 서양사상에서도 중심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플라톤이 "눈에 보이는 세계는 저 너머에 있는 진정한 실체의 희미한 그림자이다"라고 한 것은 마야 이론과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플 라톤은 세계의 각기 다른 측면들은 독립적이고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우 주라는 것이 본래 분리될 수 없고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뭉뚱그려진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생성이론의 핵심은 모든 것이 항상 유동하는 상 데, 즉 무언가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과정중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2,500년 후인 오늘날까지도 카 오스 이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 제임스 클릭은 카오스 이론을 어떤 상대에 대한 과학이 라기보다는 과정에 대한 과학이고, 존재에 대한 과학이라기보다는 생성에 대한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창조

아리아인들의 고대인도에서 희생제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다. 특히 <베다>에서 찾아볼 수 있 는 창조신화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우주적 인간인 푸루샤 희생제이다. 신들은 이 푸 루샤를 네 개의 토막으로 잘라 신들의 영역에 속 한 그의 4분의 1을 희생제의 불속에 던졌다. 그 러자 거기에서 인드라, 아그니, 바유 등 <베다>에 나오는 신들이 태어났다. 그 다음에 우주의 구심 점과 함께 동물, 인간 그리고 네 가지 신분(바르 나)이 생겨났다.

<베다>에 나오는 또 다른 창조신화는 황금알 신화이다. 이것은 창조주가 태어난 우주의 알 혹 은 배쓰로 묘사되고 있는데, 거대한 바다가 이 알을 뜨겁게 달구자 알을 깨고 창조주가 태어났 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쓰여진 <베다>의 시구 들에는 점차적으로 이와 같은 극도의 상징성에 대해 회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리그베다>의 제10편에는 이러한 물음이 제기되어 있다. "누가 진정 알 것인가, 이 세상의 창조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서양종교에서 신은 인간과 우주보다 앞서 존재했지만, 힌두교의 신들은 창조를 통해서 만들 어진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다. 힌두교에서 세상 의 창조란 창조자가 창조해내는 행위라기보다는 혼돈에서 만들어지는 질서이다. 그래서 우주는 흔히 신성한 글자 '' (108~109쪽 참조)에서 태 어난다고도 하고, 혹은 없음에서 태어난다고도 한다. 이때의 없음은 "존재도 존재가 아닌 것도 없다. 죽음도 죽음이 아닌 것도 없다"라는 다양 한 생명체를 생겨나게 한 바로 그 원리이다. 바 로 이 없음에서 욕망이 생겨나고, 욕망에서 인 간, , 그리고 악마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우주 의 창조에 관한 운문에는 우주는 창조주 없이 홀로 존재하는 한 남자의 형태인 순수한 자아였 다고 묘사된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내가 있다!"고 소리쳤다.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렇게 '즐거 없는 그는 스스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움이 맞추려고 했다. 절반은 여성, 절반은 남성짝을 이었다. 절반인 여성은도대체 자기 자신으로 부터 나온 나와 어떻게 결합한단 말인가?"라며 남성을 피해 모습을 바꾸어 도망쳤다. 그녀는 암소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남성은 수소 가 되어 그녀와 결합했다. 이번에는 여성이 암 말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남성은 수말이 되어 그녀와 결합했다. 다시 여성이 암염소, 암 양, 암탕나귀 등으로 모습을 바꿀 때마다 남성 은 수염소, 수양, 수탕나귀가 되어 그녀와 결합 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은 살아 있는 생명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반쪽 남성은 이제 깨달았다. “내가 바로 창조로구나. 내가 이 모든 것을 낳았으니. 그러니까 힌두교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처럼 사람만이 신 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모 든 피조물들이 우주적 자아로부터 태어났다고 보 고 그 중에서 신과 인간이 스스로 여럿이 되기를 원해 자신을 나누었던 바로 그 첫번째 존재와 매 우 유사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브 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결론을 내 린다. "누구든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이 세상의 창조 속에서 스스로 창조자가 된다".

 

인도 리처드 워터스톤 치음/ 이재숙 옮김 종교와 의례, 신과 우주, 명상과 요가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