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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문학 작품의 이해편]중국_6#51

중국문학의 향기_6

Song poetry inherited and developed Tang poetry but had its unique features. While Tang poetry emphasized grandiosity, Song poetry was known for its precision and philosophical focus, influenced by Neo-Confucianism. Song poets often used prose-like styles and explored deeper meanings in their work. The Song Dynasty saw various poetic schools like the Xi Kun and Jiangxi schools. Prominent poets like Ouyang Xiu, Su Shi, and Huang Tingjian contributed to the evolution of Song poetry, emphasizing creativity, rhythm, and philosophical depth. The Southern Song period continued this legacy with poets like Lu You and Yang Wanli.

송·금·원대 시

송시는 당시를 계승하여 발전했지만 당시와는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격조상 당시는 웅혼()한 맛이 있는 반면에 송시는 섬세하고 공교(工巧)로우며, 수법상 당시는 순수한 서정을 솔직히 펴낸 반면에 송시는 송대 이학(理學)의 영향을 받아 설리(說理)에 치중했으며, 경향상 당시는 시로 시를 지은 순수한 시가인 반면에 송시는 산문으로 시를 지은 산문화된 시가라 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송시는 평담화(平淡化철리화(哲理化산문화(文化)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송시의 발전은 크게 북송과 남송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북송의 시단은 그 유파에 따라 다시 서곤파(西崑派반서곤파(反西崑派강서시파(江西詩派)로 대별된다. 서곤파는 만당 이상은(李商隱)의 시풍을 이어받은 유파로, 송초의 양억(楊億유균(劉筠전유연(錢惟演)등이 대표한다. 이들이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서곤수창집(西崑酬唱集)』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서관'이란 명칭이 유래되었다. 서곤파의 시는 대우·전고 를 중시하고 섬세함과 아름다운 표현을 숭상하여 겉으로는 지극히 화미()하지만 안으로는 내용이 없어 공허한 경향을 띠었다. 반서곤파는 당대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이 주장한 고문운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유파로, 구양수(歐陽修소순흠(蘇舜欽매요신(梅堯)등이 앞장서고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등이 뒷받침하여 서곤파를 압도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구양수(1007~1072)는 새로운 풍격의 송시를 개척한 시인으로, 중국 최초의 시화집()인 육일시화()』를 지었다. 그의 시는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고 수사보다는 기세와 풍격을 중시했으며, 이론의 전개를 허용하고 묘사대상을 가리지 않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풍락정의 봄나들이[豊樂亭遊春]()

붉은 나무 푸른 산 해는 뉘엿뉘엿, 기다란 들녘에 풀빛은 끝없이 푸르네.

나들이 꾼은 봄 가는 것 아랑곳하지 않고, 풍락정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떨어진 꽃만 밟네.

紅樹靑山日欲斜,長郊草色綠無涯. 遊人不管春將老,來往前踏落花

 

소식 (1037~1101)은 구양수의 제자로서 송시의 영역을 확대 시켰으며, 서곤체의 화미함과 만당의 유약함을 반대하고 청신·평담·웅방함 등을 추구하여 송시의 혁신을 꾀했다. 또한 풍부한 상상력, 치밀한 관찰력과 침착한 구상, ((()의 융화, ··도의 사상적 조화를 그 특색으로 하고 있다.

 

「금산사 나들이 [遊金山寺](七古)

내 집은 장강이 처음 발원하는 곳, 벼슬하느라 곧장 장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왔네.

듣자하니 조수 높이가 한 길이나 되고, 추운 날씨에도 모래 흔적 남아 있다네.

중령천() 남쪽 기슭의 석반타는, 예로부터 파도 높이 따라 나타났다 잠겼다 한다네.

시험 삼아 산꼭대기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니, 장강의 남북으로 푸른 산 많기도 하네.

나그네 수심에 저녁이 두려워 돌아갈 배 찾으니, 산사의 스님이 한사코 붙잡으며 낙조를 보라 하네.

미풍은 넓디넓은 강물에 고운 무늬 짓고, 반쪽 하늘에 걸린 조각 노을은 물고기 꼬리처럼 붉네.

이때 강 위로 초사흘 초승달 뜨더니, 이경에 달이 지니 하늘은 캄캄하네.

강 한복판에 횃불처럼 밝은 게 나타나는 듯하더니, 나는 화염이 산을 비춰 잠든 까마귀 놀라게 하네.

석연찮은 마음으로 돌아와 누워 생각하나 알 수 없으니,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인가?

강산이 이와 같은데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강신이 괴이함 보여 나의 완고함 깨우치려나 보네.

내 강신에게 말하노니, "어쩔 수 없네. 밭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함이 저 강물과 같은 걸."

我家江水初發源, 宦游直送江入海 聞道潮頭一丈高, 天寒尙有沙痕在 中洽南畔石盤陀, 古來出沒隨濤波. 試登絶頂望鄕國,

江南江北 靑山多. 羈愁畏尋歸楫,苦留看落日. 微風萬頃靴紋細,斷霞半空魚尾赤 是時江月初生魄, 二更月落天深黑

江心似有炬火明, 飛焰照山棲烏驚, 悵然歸臥心莫識,非鬼非人竟何物 江山如此不歸山,江神見怪驚我 我謝江神豈得已,

有田不歸如江水

 

강서시파는 송대 전체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유파로서, 특히 남송대의 시인 대부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송의 여거인(呂居仁)이 『강서종파도(江西宗派圖)』에 황정견(黃庭堅) 아래에 25명의 시인을 열거했는데, 여기에서 '강서'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황정견을 우두머리로 하여 진사도(陳師道진여의등이 이 유파를 대표하는데, 원대(元代) 방회(方回)는 이들 이 모두 두보(杜甫)를 배우려 했다고 해서 이들을 '일조삼종'이라고 했다. 황정견(1045~1105)은 소식의 제자로서 송시를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올려놓은 시인이다. 그의 시론은 조구법(造句法)으로서 환골법(換骨法)과 탈태법(脫胎法)을 운용한 외에, 평측이 격률에 어긋나는 요체()를 사용하여 새로운 리듬을 추구하고, 진부하고 속된 표현을 배척하고 특이하고 억센 표현을 추구했으며, 한글자 한 글자마다 그 내원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환골법과 탈태법은 표절의 우려가 있으며, 문학의 사상과 내용을 경시하고 형식주의에 매달릴 우려가 있었다. 사실 황정견 자신도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쾌락에 올라](七律)

미련한 아이처럼 관청 일 끝내고, 쾌각에서 동서로 맑은 저녁 맞이하네.

낙엽 진 온 산위로 하늘은 드넓고, 맑은 강 한 가닥 위로 달은 또렷하네.

이미 고운 님 때문에 붉은 거문고 줄 끊어버렸지만, 애오라지 맛난 술로 인해 반가운 눈 한다네.

만리에서 돌아오는 배 피리 소리 울리니, 이 마음은 나와 흰 갈매기의 맹세라네.

痴兒了却公家事,快閣東西倚 落木千山天遠大,澄江一道月分明.

朱絃已佳人,眼聊因美酒 萬里歸船弄長笛,此心吾與白鷗盟

 

남송의 시단은 다시 남송 4대가, 영가사령(永嘉四), 강호파 (江湖派), 유민시(遺民詩)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남송 4대가는 남송 초기의 시단을 대표하는 4명의 시인으로 육유양만리(楊萬里범성대(范成大우무()를 말한다. 육유(1125~1210)는 중국 최대의 다작 시인으로 1만여 수를 지었다. 초기의 시는 호탕하고 분방했으나 후기에는 한적하고 담백하게 바뀌었으며, 능히 일가(一家)를 이루어 강서시파를 답 습하지 않았다.

 

「분한 마음 적으며[書憤]()

어렸을 땐 어찌 세상사 어렵단 걸 알았겠는가? 북쪽으로 중원을 바라보니 분기()가 산과 같네.

전선(戰船)은 눈 오는 밤에 과주를 건넜고, 철마는 바람 부는 가을에 대산관을 넘었네.

변방의 장성이라고 공연히 스스로 자부하지만, 거울 속의 센 귀밑털은 벌써 반백이네.

「출사표」하나로 세상에 참된 명성 드리웠으니, 천년토록 뉘라서 우열을 다투리오!

早歲那知世事艱,中原北望氣如山 樓船夜雪瓜洲渡,鐵馬秋風大散關,

塞上長城空自許,鏡中衰鬢已先斑 出師一表眞名世,千載誰堪伯仲間

 

그밖에 양만리의 시는 전원의 맛이 나며 유머와 해학이 가미되어 통속적이고 이해하기 쉽다. 범성대의 시는 담담하고 청신하며 전원과 산수의 경물을 묘사한 것이 많다. 우무의 시는 평담하고 질박하며 시절을 슬퍼한 작품이 많다. 남송 4대가를 이어 영가사()이 등장하여 한동안 남송 시단을 대표했다. 영가사령은 서조, 서기, 옹권(), 조사수(趙秀: 靈秀)를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영가 지방 출신이고 자나 호에 모두 '()'자가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 이들은 백화체로 시를 짓고 청신함과 유창함을 주장하여 강서시파에 반대했으나 성과는 별로 거두지 못했다.

 

옹권 「향촌의 사월[鄕村四月]()

초록빛 질펀한 산 들녘, 흰 물결 가득한 내, 자규 소리 속에 안개 같은 비.

향촌의 사월엔 한가한 사람 적으니, 누에치기 겨우 끝내곤 또 밭에 가래질하네.

山原白滿川 子規聲裏雨如烟, 村四月閑人少, 幾了蠶桑又,

 

다음으로 강호파가 등장했는데, 진기(陳起)가 펴낸 강호집』과 『강호후집(江湖後集)』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강기·유극장(劉克莊대복고(戴復古)등이 이 유파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 중에서 강기(1155?~1235?)는 독창(獨創고묘(高妙풍격(風格)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특색을 보였다. 이들은 강서시파에 염증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재야의 시인임을 내세웠으나 그다지 큰 성과는 없었다.

 

강기 「수홍교를 지나며[過垂虹]()

자작 신곡의 운치 최고로 멋들어지니, 소홍이 나지막이 노래 부르고 내가 퉁소 부네.

곡이 끝날 즈음 송릉의 길 다 지났으니, 고개 돌려 안개 낀 물결 속 열네 개 다리 보네.

自作新詞韻最嬌, 小紅低唱我吹簫. 曲終過盡松陵路, 回首烟波十四橋,

 

마지막으로 남송이 원()에게 멸망당한 뒤에도 숨어서 침통한 망국의 한을 노래한 유민시 일파가 있다. 문천상(文天祥사고·임경희(景熙) 등이 대표적인 시인인데, 이들의 시는 대부분 망국의 통한과 비분이 충만해 있다. 특히 문천상(1236~1283)은 송시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인으로, 그의 「정기가(正歌)」는 고금의 명시로 인정받고 있다.

 

「정기가」(五古)

천지에 바른 기운 있어, 한데 뒤섞여 만물을 빚어냈네. 아래로는 강과 산악 되고 위로는 해와 별 되었네.

사람에게 있는 건 호연지기라고 하니, 왕성하게 천지간에 가득 찼네.

나라 다스릴 제 태평성세 만나면, 훌륭한 조정을 머금었다 토해냈고,

시절이 곤궁하면 절개로 드러나, 한결같이 변함없는 충정 드리웠네.

제나라에선 태사의 죽간 되고, ()나라에선 동호의 붓 되고,

()나라에선 장량의 몽둥이 되고, 한나라에선 소무의 절개 되었네.

엄장군의 머리 되고, 혜시중의 피 되고, 장휴양의 치아 되고, 안상산의 혀 되었네.

혹은 요동 관녕()의 모자 되어, 맑은 지조 얼음 눈처럼 매서웠고,

혹은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되어, 귀신도 그 장렬함에 울었고,

혹은 조적)이 도강할 때의 노 되어, 분격함으로 오랑캐 삼켰고,

혹은 단수이 역적을 내리칠 때의 홀 되어, 역모의 괴수 머리 깨버렸네.

이 기운 충만한 것은, 장엄하게 만고에 남아 있네. 이것이 해와 달 관통할 땐, 생사 따윈 어찌 논할 만하리오!

땅 줄은 이것에 의지해 서고, 하늘 기둥은 이것에 의지해 높아지네.

삼강은 이것의 명이고, 도의는 이것을 근본으로 하네.

! 내가 액운을 당하니, 부하들도 힘을 쓰지 못했네.

초나라 죄수처럼 그 관()을 매고, 호송 수레에 실려 외진 북쪽으로 보내졌네.

팽형()을 당해도 엿처럼 달게 여길 텐데, 죽고자 해도 그럴 수 없네.

감옥은 음침하여 도깨비 불 떠돌고, 춘원()은 닫혀 하늘조차 어둡네.

소와 천리마가 같은 구유에서 먹고, 닭과 봉황이 함께 섞여 먹네.

하루아침에 초로(草露)의 객 될 테니, 생각하니 도랑 속의 뼈다귀 되겠지.

이처럼 추위와 더위 두 번이나 지났지만, 모든 질병 저절로 피해가네.

슬프구나! 낮고 음습한 곳도, 나에게 안락한 나라 되네.

무슨 다른 뾰족한 수 있으랴? 음양도 나를 해칠 수 없다네.

다만 이렇게 꼿꼿이 살아남아, 우러러 보니 흰 구름만 떠다니네.

내 마음의 슬픔 아득하니, 푸른 하늘은 어디에 끝이 있는가?

성현은 날마다 나에게서 멀어지지만, 그 모범은 어제오늘에 있다네.

바람 이는 처마감옥)에서 책 펼쳐 읽나니, 옛 성현의 도()가 내 얼굴 비추네.

 

금대의 전통 시문은 전반적으로 저조했다. 건국 초기에는 금나라에서 벼슬한 요(()의 구(舊臣) 들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심적 고통을 주로 묘사했는데, 주요 작가로는 우문허중()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남송과의 화친 시기에는 조탁과 모방으로 내용이 빈 곤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주요 작가로는 왕약허(王若)를 들 수 있는데, 왕약허는 『호남시화(南詩』를 지어 문장자득( )을 주장하고 지나친 조탁을 일삼는 시풍에 반대했다. 마지막으로 쇠망기에는 국세가 기울고 사회가 불안하여 어지 러운 시대를 상심하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었는데, 주요 작가로는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을 들 수 있다. 원호문은 그의 대표작인 「논시절구삼십수(論詩句三十首)」를 지어 한(). ()에서 당·송에 이르는 역대 시인들의 작품을 비평했는데, 비평의 표준으로 천연(天然고아(高雅풍골(風骨호방(豪放청신·청담·독창·진성등을 주장한 반면에 조탁( ·비속(卑俗화미(華靡섬약(纖弱난삽(번잡(煩雜답습·가식(假飾) 등을 반대하는 시론을 주장했다.

 

「논시절구삼십(七絶)

한의 가요 위의 시편 이래 오래도록 어지러웠지만, 올바른 시체() 함께 자세히 논할 사람 없네.

그 누가 시 중의 길 트는 사람인가? 잠시 경수()와 위수(渭水)를 각각 맑고 흐리게 하여 보리라.

漢魏什久紛紜,正體無人與細論 誰是詩中鑿手,暫敎涇渭各淸渾. [1]

 

한바탕의 천연한 말씀 만고에 새로우니, 호화로움 다 떨쳐버려야 참됨과 순박함 드러난다네.

남쪽 창 밝은 낮에 복희() 이전 사람 되었으니, 도연명이 진나라 사람인 것에 손색없도다.

一語天然萬古新,豪華落盡見, 南白日皇上 [4]

 

고아함은 두자미에게 가까이하기 어렵고, 정순함은 이의산()의 진실함을 모두 잃었네.

시를 논함에 진실로 부옹에게는 절할 수 있으나, 강서시파의 사람은 되지 않으리.

 

명대 시

명태의 시가는 각종 문학유파의 형성·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소설. 희곡 등의 봉속문학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침체. 쇠퇴의 길을 걸었다. 양적인 면에서는 절대 주 이존이 편찬한 「명시사(明詩)」에 총 3400여 시인의 각 품이 수록되어 있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전문적인 시인이나 일가를 이룬 작가가 드물었으며 복고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중국시 가사상 낙후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명대 시단의 흐름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대체로 문단의 상황과 비슷하게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명초에는 오중사걸(吳中四傑)로 불리는 고계(高啓양기(楊基서분(徐賁장우(張羽)가 등장하여 시단을 주도했는데, 이 중에서 고계가 가장 뛰어났다. 고계(1336~1375)는 청신하고 준 일()한 시풍으로 성당시의 풍격에 가까운 시를 지었는데, 여 러시체에 뛰어났으며 총 2,000여 수의 작품을 남겨 명대의 대표 적인 시인으로 손꼽힌다.

 

고계 「전가행」

풀은 망망하고, 물은 콸콸. 위 밭은 잡초 무성하고, 아래 밭은 물에 잠겼네.

가운데 밭엔 벼이삭 자라지 않고, 흩어진 낱알은 오리와 기러기의 먹이일 뿐,

빗속에 이삭 줍다 반쯤 젖은 몸으로 돌아오니, 부인은 절구질하여 밥 짓고 아이는 밤에 우네.

中田有不不長,狼只供鳧雁程, 而中病歸半身處,新局者兒夜拉,

 

양사기()로 대표되는 대각체(閣體) 시는 가송(歌頌응제(수창()의 작품이 대부분이며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다. 다릉시파()의 대표인물인 이동양(李東陽: 1447~1516) 은 전아()하고 청()한 풍격의 시를 지었으며, 「회록당시화』를 지어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시화문학을 부활 시켰다.

 

이동양 「구월 구일에 장강을 건너며(九日渡江]

가을바람 강어귀에 불고 빈랑나무 막대 두드리는 소리 들리니, 먼 길 떠나온 나그네의 향수 아련하기만 하네.

만리 천지로 이 강물 흘러가니, 백 년 동안 아름다운 중양절의 풍광 몇 번이나 될까?

안개 속 나무 빛은 과보진()에 뜨고, 성 위 산세는 건강을 둘렀네.

곧장 진주 지나 다시 동쪽으로 내려가니, 깊은 밤 등불 그림자만 유양에 잠드네.

秋風江口聽鳴榔,遠客歸心正渺茫。 萬里乾坤此江水,百年風日幾重陽 烟中樹色浮瓜步,城上山形繞建康,

直過眞州更東下,夜深燈影宿維揚。

 

이몽양(: 1473~1530). 하경명(何景明: 1483~1521)으로 대표되는 전자()의 시인은 "시는 반드시 성당을 따라야 한대화 기치 아래 엄숙한 창작태도를 견지하며 복고를 는 주장했다. 이몽양은 시풍이 웅혼. 진중하고 격률이 정제되었으며, 하경명은 복고적인 경향이 농후했지만 독창성도 존중했다.

 

이몽양 「가을의 전망

황하 물은 한나라 궁전 담 감돌아 흐르는데, 강가 가을바람 속에 기러기 떼 몇 번이나 지나갔나?

나그네는 성밖 해자 지나며 아지랑이 쫓는데, 장군은 화살집 메고 천랑성(天狼) 쏘네.

누런 먼지 이는 옛 나루터엔 길 잃은 급한 수레,

흰 달 가로지른 하늘 아래 썰렁한 전쟁터. 듣자하니 북방엔 지략 갖춘 용사들 많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곽분양)은 누구던고?

河水繞漢宮,河上秋風雁幾行, 客子過壕追野馬,將軍輜箭射天狼 黃塵古渡迷飛挽,

白月空冷戰場, 間道方多勇略,只今誰是汾陽?

 

심주(沈周: 1427~1509)와 오중사재자(吳中四: 唐寅.祝允明.徐禎卿)는 모두 다재 다능한 시··화가로서, 복고의 문풍을 반대하고 개성적인 표현으로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다. 후칠자()의 시인은 이반룡(李龍: 1514~1570). 왕세정 (王世貞: 1526~1590)으로 대표되는데, 왕세정은 평담하고 자연스러운 풍격을 지향하고 지나친 모방을 반대했으며 시문평론집 인 예원치언()』을 지었다.

 

왕세정 「태백루에 올라」

듣자하니 옛날에 이공봉이, 이 누대에 홀로 올라 길게 시 읊조렸다지.

이 곳을 직접 한 번 둘러본 뒤로, 위대한 명성 백대에 남겼다네.

흰 구름 낀 해변의 새벽, 밝은 달 뜬 천문의 가을 다시 찾아오는 사람 찾고자 하나, 퀄퀄퀄 제수만 흐르네.

昔聞李供奉 長嘯獨登樓 此地一垂顧 高名百代留 白雲海色署 明月天門秋 欲重來者 潺湲濟水流

 

이지()와 서위(徐渭)의 시는 모두 공안파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지는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풍격으로 독특한 풍취를 이루었으며, 서위는 자유분방한 풍격으로 모방을 반대하고 독창성을 강조했다. 공안파(公派)와 경릉파()의 시인은 성령()의 표현을 주장했으며, 청신하고 준일한 풍격으로 모방과 난삽한 표현을 일삼는 당시의 시풍을 개혁하고자 했다.

 

원광도 「죽지사」(七絶)

장사치들 서로 만나면 멍한 마음 배가 되고, ···재나무 서쪽 사천(四川)에서 내려오네.

맑은 하늘 아래 도처에서 환관들 날뛰니, 딸 팔고 아들 보태 세금 낸다네.

마지막으로 기사()와 복사(復社)의 시인이 등장하여 명말의 시단을 이끌었다. 기사는 진자룡(: 1608~1647)을 중심으로 한 문인 결사(結社)였다. 진자룡은 남명(南明)의 항청()인 사로서 순국했는데, 그의 시풍은 비분. 처량하며 국사를 근심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작품을 많이 지었다. 복사는 명말 최대의 문인 결사로서 장부()가 중심인물이다. 장부는 복사를 조직하여 환관의 정치활동에 반대하고 반청운동에 가담했는데, 문학상으로는 전·후자의 복고주의를 지지했지만 창작상으로는 대부 분 현실사회의 다양한 생활상을 반영했다.

 

청대 시

청대 전기의 시단은 고증학(考證)의 복고적인 조류 속에서 시인들이 저마다의 기호에 따라 이전 시대의 작가와 작품을 규범으로 삼아 창작함으로써 여러 유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유파는 당시(唐詩)를 숭상하는 종당파()와 송시()를 숭상 하는 송파()로 대별된다. 종당파는 당시를 표준으로 삼아 그 웅혼한 시풍을 추구한 일파로, 주창자는 오위업(吳偉業: 1609~1671)이다. 그는 초당사의 격률에 근거를 두고 백거이(白居易)의 시법(詩法)을 본받아 종당 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종당파의 주요 시인과 시론에는 왕사정(王禎: 1634~1711)의 신운설(神韻), 심덕잠(沈德: 1673~1769)의 격조설(格調說), 원매(袁枚: 1716~1797)의 성령설(性靈說), 옹방강(翁方綱: 1733~ 1818)의 기리설(肌理說) 등이 있다. 왕사정의 신운설은 송대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인위적인 수식이나 논리를 반대하고 자연 스럽고 청신한 신정(神情)과 운미(韻味)를 추구하여 시와 선()의 일치를 주장했다. 그러나 지나친 '언외지미(言外之)'의 추구로 내용이 공소해지는 결점이 있었다.

 

「진주절구(絶句)(七絶)

강가엔 낚시꾼 집 많기도 하지만, 버들 두렁길과 마름 연못 일대는 듬성듬성하네.

제일 멋있는 건 해 기울고 바람 잔 뒤에, 강둑 반쪽 단풍든 나무 아래에서 농어 파는 정경이라네.

江干多是釣人居,柳陌菱塘一帶疏 好是日斜後半江賣魚.[4]

심덕잠의 격조설은 사상표현의 양식인 '()'과 언어적인 음 조인 '(調)'를 중시한 것으로, 시의 형식적·외면적인 요소, 즉 작시법상의 기교를 논했다. 그러나 시정()의 다양성이 부족 하고 도학자적인 색채가 농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허주를 지나며[]

여기저기 연못에선 졸졸졸 물 흐르고, 버드나무 늘어진 백리길 평야를 덮고 있네.

나그네는 문득 수염과 눈썹까지 파래짐을 느끼며, 가는 길 내내 매미 소리 들으며 허주를 지나네.

到處陂塘決決流,垂楊百里罨平疇, 行人便覺須眉,一路蟬聲過許州

 

원매의 성령설은 명대 공안파(公派)의 낭만주의 이론을 계승 한 것으로, 기성의 격률에 구애 받지 않고 작자의 솔직한 정감과 개성을 꾸밈없이 표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당시 에는 천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서호(西湖)가에서[]

갈령에 꽃 핀 이월의 어느 날, 놀러 나온 사람들 왕래하며 신선을 얘기하네.

이 늙은이의 마음은 저 놀러 나온 사람들과는 다르니, 신선이 부러운 게 아니라 젊은이가 부럽다네.

葛嶺花開二月天,遊人來往說神仙, 老心與遊人不羨神仙茨少年. [10]

 

옹방강의 기리설은 신운설의 공소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학문의 배양을 바탕으로 한 개성적인 시리(詩理)를 주장했다. 다음으로 송파는 송시를 표준으로 삼아 그 치밀하고 섬세한 풍격을 추구한 일파로, 주창자는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이 다. 그는 송대 소식(蘇軾). 육유()와 원대 원호문()의 시를 추수하여 송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주요 인물에는 송락사신행여악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송시기사 100권을 지어 송시 연구에 이바지한 여악(1692~ 1753)이 특기할 만하다.청대 후기의 시단 역시 전기와 마찬가지로 시인들의 기호에 따라 여러 유파로 나뉘었는데, 그 주요 유파에는 사회파(社會派)의 고파(강서파(江西派혁신파() 등이 있다. 사회파는 공자진(龔自珍: 1792~1841)으로 대표된다. 그는 창작을 통하여 현실주의 비판정신과 낭만주의 표현수법의 결합을 시도한 작가로, 시가의 사회적 작용을 중시하여 폭넓은 사회생활 을 시에 반영할 것을 주장하고, 작자의 개성표현을 중시하여 장자·굴원·이백(李白)의 낭만주의 전통을 높이 평가했다.

 

「기해년(1839)[己亥雜詩]」七絶)

온 나라의 생명력은 바람과 천둥에 의지하나니, 모든 말이 한결같이 벙어리 되니 결국 애처롭구나!

나는 하느님께 권하오니, 다시금 분발하시어, 격식에 구애받지 마시고 인재를 내려주옵소서!

九州生氣恃風雷,萬馬齊究可哀 不拘-格降人才.

 

외고파는 왕개운()으로 대표되는데, 그는 한··육조로부터 소급하여 『시경』. 「초사」에 이르는 고체시에 관심을 두고 외고적인 작품을 썼다. 강서파는 진립삼(陳立: 1852~1936). 진연(: 1856~1938)을 대표로 한 동광체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청말에 송시 존중의 기풍을 다시 일으켰는데, 그들은 송시 중에서도 소식과 황정견의 시를 숭상하여 '강서파'라고 부른다. 혁신파의 주요 시인은 황준헌: 1848~1905), 양계초(:1873~1929), 담사동(譚嗣同: 1865~1898)등인데, 이 중에 서 황준헌은 이른바 '시계혁명(詩界革命)'을 주장하면서 옛 시의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전통 시단의 의고주의에 반대하고내 손으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써야 한다" 고 주장했으며, 시에 현실생활과 투쟁을 반영할 것을 주장하여 시가 창작의 현실주의 정신을 제창했다. 또한 표현상 전대의 우수한 예술전통을 이용하여 다양한 변화를 추구했으며, 옛 격조에 속어·신언어·신사상을 주입하여 조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중국 전통시의 골격을 완전히 혁신하지는 못하고 개량 주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황준헌 「감회」()

세상 학자들 시서를 암송하며, 종종 자신의 재주를 뽐내네.

머리 들어 상고시대를 언급하고, 손바닥 치며 치국평천하를 설명하네.

처음엔 삼대의 융성함 얘기하고, 나중엔 백 대의 제후를 얘기하고,

중간엔 오늘의 난리를 얘기하며, 눈물 콧물 흘리며 통곡하네.

거전법(車法) 도면 베껴 그리는데, 백장 넘어가니 굳은살 박이고, 손에 정전법(井田法) 지도 들고서,

한번 시행해 볼 요량으로 땅에 그리네.

옛 사람이 어찌 우리를 속이랴 만은, 옛날과 지금의 형세가 다르니 어쩌랴!

문밖을 나서보지 않은 학자님들, 당세의 일일랑 논하지 마시라. 시대를 파악하려면 지금을 아는 게 중요하고,

정세에 통달하려면 세태를 겪는 게 중요하네. 위대하다! 천고의 성현들이시여, 당신들만이 시대의 병폐를 고칠 수 있었네.

가생의 정치사회 안정책과, 강통의 외래 민족 추방론처럼.

世儒誦詩書 往往矜爪嘴 道皇 拍掌說平 上言三代隆 中言今日亂 痛哭繼流涕 摹寫車戰圖 胼胝過百紙 持 盡地期一試

古人豈我欺 今昔奈勢異 儒生不出門 當事 識時貴知今 通情貴閱世 卓哉千古賢 獨能救時弊 賈生治安策 江統徙戎議

 

중국문학의 향기: 중국문학 장르별 이해

김장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