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학의 향기_5
Poetry during the Wei, Jin, and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began in the Jian'an era, led by figures like the Three Cao and the Seven Sages of Jian'an. They often expressed the futility of life and heroic spirit. The Seven Sages of Bamboo Grove rejected Confucianism and embraced free thought. Later poetry in the Western and Eastern Jin emphasized stylistic beauty, and Southern Dynasty poetry focused on landscape poems, with courtly poetry emphasizing elaborate and sensual themes.
I was impressed by Cao Cao's poem Dan Ge Xing from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Dan Ge Xing is as follows
「단가행」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니, 인생이란 얼마나 오래 살겠는가? 마치 아침 이슬과 같구나.
지난날 괴로움이 많았네. 격앙되고 비통하지만, 근심을 잊기 어렵네. 무엇으로 근심을 풀까?
오직 술뿐이라네. 푸른 옷깃을 두른 그대, 내 마음은 아련하네. 단지 그대 때문에, 지금껏 나지막이 읊조리네. 유! 유! 사슴이 울고, 들판의 쑥을 먹네. 나에게 훌륭한 손님이 있어, 거문고를 타고 생황을 부네. 밝디 밝은 저 달, 언제나 딸 수 있을까?
가슴 속 근심을 끊을 수 없네.
밭두렁을 넘고 논두렁을 건너, 일부러 찾아와 안부를 묻네.
헤어졌다 다시 만나 잔치를 벌이며, 마음속으로 옛 은덕을 기리네. 달빛은 밝고, 별빛은 드문드문하니, 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가네. 나무를 세 바퀴나 돌지만, 어느 가지에 앉을까? 산은 높다고 싫어하지 않고, 바다는 깊다고 싫어하지 않듯이, 주공은 식사 중에도 손님을 맞이하며 천하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네. (삼국지 조조의 시 “단가행”)
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慨當以慷 幽思難忘 何以解憂 唯有杜康 青青子衿 悠悠我心
但為君故 沈吟至今 呦呦鹿鳴 食野之 我有嘉賓 鼓瑟吹笙 明明如月 何時可掇 憂從中來 不可斷絕 越陌度阡
枉用相存 契闊談讌 心念舊恩 月明星稀 烏鵲南飛 繞樹三匝 何枝可依 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
위진남북조 시
위진남북조 초기의 시는 한대 말에서 위대(魏代) 초에 형성되었던 건안(安) 시가에서 시작되었다. 건안 시가는 공융(孔融)· 진림(陳琳)·왕찬(王粲)·서간(徐幹)·완우(阮)·응창(應瑒)·유정(劉楨)의 이른바 건안칠자(建安七子)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동한 현제(獻帝) 건안 연간(196~219)에 살았기 때문에 '건안칠자'라고 하며, 또한 모두 위(魏)의 수도 업(鄴)에서 살았기 때문에 '업중칠자(中七子)'라고도 한다. 건안 시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일파는 '삼조(曹)'로 병칭되는 조조(曹操)와 그의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인데, 이 중에서 조식이 가장 뛰어났다. 조조(155~220)는 자가 맹덕(德)이고 시호가 무제이며, 위나 라의 개국시조이다. 그의 시는 기상이 웅혼한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대표작인 「단가행(短歌行)」은 영웅적인 기백과 허무한 인생에 대한 애수를 잘 표현했다.
조비(187~226)는 자가 자환(桓)이고 시호가 문제이며, 조조의 장남이다. 그의 시는 완약(弱)하고 우아한 특색을 지니고 있 는데, 대표작인 「연가행(燕歌行)」은 남편을 그리는 부인의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초기 7언시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제비의 노래 [歌行]」(七古)
가을바람 소슬하니 날씨 서늘하고, 초목 시드니 이슬이 서리되네.
제비 떼 돌아가고 기러기도 남쪽으로 날아가니, 객지로 길 떠난 님 생각에 애간장 끊어지네.
불편한 마음에 돌아올 생각하며 고향 그리는 법인데, 님은 어이하여 타향에 오래 머무시는가?
소첩은 고독하게 빈방 지키며, 님 걱정 그리움 떨쳐버릴 수 없으니,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옷을 적시네. 금 당겨 현 뜯으며 청상곡 연주하나, 가만히 부르는 단가 소리 오래 가지 않네.
밝은 달은 교교하게 내 침상 비추고, 은하수는 서쪽으로 흐르지만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견우와 직녀 멀리서 서로 바라보고만 있으니, 당신들은 무슨 죄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있소?
秋風蕭瑟天氣涼,草木摇落露為霜, 群燕辭歸雁南翔,念君客遊思斷腸 慊慊思歸戀故鄉,君何淹留寄他方 賤妾煢煢守空房,憂來思君不敢忘, 不覺淚下裳 援琴鳴絃發清商,短歌微吟不能長, 明月皎皎照我床,星漢西流夜未央 牽牛織女遙相望,爾獨何辜限河梁、
조식(192~232)은 자가 자건(建)이고 진사왕(陳思王)이라고 부르며, 조조의 셋째 아들이다. '삼조' 가운데서 문학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 그의 시는 침통·화려·섬세·웅혼등 풍격이 다양하고, 비유와 상징의 표현수법이 풍부하며, 내적인 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하여 시적 서정의 세계를 확대했다. 대표작에는 「백마편(白馬篇)」·「원가행(怨歌行)」·「칠애시(七哀詩)」등이 있다.
「칠애시」 (古)
밝은 달은 높다란 누각을 비추고, 흐르는 빛은 한창 어슬렁거리네.
그 위에 시름에 잠긴 색시, 슬픈 탄식에 애처로움 넘치네. 탄식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길 떠난 나그네의 아내라네. 님 가신지 10년이 넘는데, 외로운 소첩은 늘 혼자 지내요. 님은 맑은 길의 먼지라면, 소첩은 흐린 물의 진흙이지요. 뜨고 가라앉는 형세 각자 다르니, 언제 만나 화목하게 될까요? 서남풍이 되어, 멀리 날아가 님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님의 품 열리지 않는다면, 소첩은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요?
明月照高樓,流光正徘徊, 上有愁思婦,悲歎有餘哀 借問歎者誰,言是宕子妻, 君行逾十年,孤常獨棲 君若清路塵,若濁水泥. 浮沈各異勢,會合何時諧, 願爲西南風,長逝入君懷, 君懷良不開,賤妾當何依.
건안 시가는 풍격상으로는 비분강개하고 격앙된 정조로 당시 의 혼란한 사회상과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반영했는데, 이를 '건안풍골(建安風骨)'이라 한다. 형식상으로는 편폭이 길어지고 문 인들의 참여로 세련되고 화려해 졌으며, 내용상으로는 악부의 사실주의 정신을 보존했다. 위대(魏)의 시가는 정시(正始: 240~248, 魏曹芳의 연호) 문학이라고도 하며, 완적(阮籍)·혜강(嵇康)·유영(劉)·상수(向秀)·산도(山)·왕(王)·완함(阮咸)의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에 의해 주도되었다. 죽림칠현이 모두 시에 능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방탄적(放誕的)이고 허무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현 묘한 이치를 담론하고 전통적인 예교를 타파하고 유학사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청담(淸)의 기풍을 조성했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시인은 「영회시(詠懷詩)」82수로 유명한 완적이다.
「회포를 노래하며[詠懷詩]」(五古)
밤중에 잠들 수 없어, 일어나 앉아 거문고 타네. 얇은 휘장엔 밝은 달빛 비치고, 맑은 바람은 내 옷깃 스치네.
외로운 기러기는 들녘에서 울고, 삭방의 새는 북쪽 숲에서 우네. 배회한들 무엇을 보겠는가?
근심 걱정에 홀로 마음만 아프네.
夜不能寐,起坐彈鳴琴, 薄帷鑑明月,清風吹我衿, 孤鴻號外野,朔鳥鳴北林. 徘徊將何見,憂思獨傷心. [제1수]
서진(晉)의 시가는 태강(康: 280~289, 西晉 의 연호) 또는 원강(元: 291~299,西의 연호) 문학이라고도 하며, 이른바 삼장(三張: 張華.張載.張協, 이육(二陸:陸機·陸 雲), 양반(兩潘岳.潘尼), 일좌(左: 左思)에 의 해 주도되었다. 이 중에서 육기 (261~303)는 화려한 시어, 자구의 조탁, 대우의 중시 등 수사에 치중하고 부와 변려문에도 뛰어났으며, 연련주連珠)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시(詩)와 부(賦)의 일체를 꾀했는데, 「의고시(擬古詩)」가 유명하다. 반악岳)(247~300)은 시어가 화려하고 상심과 비애의 감정을 잘 표현했으며 「도망시(詩)」가 유명하다. 좌사(250?~305?)는 시풍이 기개와 박력이 넘치고 시어가 순박하다. 고금의 인물을 통하여 자신의 불우함을 표현하고 당시의 문벌제도에 불만을 토로한 「영사시(詩)」8수가 유명하다.
「역사를 노래하며[詠史詩]」(五古)
형가가 연의 저자에서 술 마시는데, 술기운 오르자 호기 더욱 떨쳤네.
슬픈 노래로 고점리에게 화답하는데,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 했네.
비록 장사의 위업은 이루지 못했지만, 세인들과는 역시 크게 달랐네.
고고하게 저 아득한 세상 흘겨보았으니, 명문고관일랑 어찌 말할 게 있으랴?
부귀한 자는 자신을 귀하다 하지만, 그는 티끌 바라보듯 했네.
미천한 자는 자신을 천하다 하지만, 그는 3만 근처럼 중히 여겼네.
荊軻飮燕市,酒酷氣益震. 哀歌和漸離,謂若傍無人. 雖無壯士節,與世亦殊倫, 高眄邈四海,豪右何足陳, 貴者雖自貴,視之若塵
賤者雖自賤,重之若.
서진 시가의 풍격은 작품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중하여 형식 주의·수사주의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문채는 정시보다 화려 하고 힘은 건안보다 유약하다고 할 수 있다. 동진(東晉)의 시가는 유곤(劉琨)·곽박(郭璞)·도잠(陶潛)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 중에서 도잠이 가장 뛰어나다. 곽박(276~324)의 시는 대부분 환상적, 현허적(玄虛的)이고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을 그린 것으로 현언시(玄言詩)의 발전을 가져 왔는데, 「유선시(遊仙詩)」14수가 유명하다. 도잠(365~427)은 자가 연명(淵明)이고 호는 정절선생(靖節先生)이며,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은거하면서 평생 명리를 멀리하고 시와 술로써 유유 자적했다. 도잠의 시는 전원시와 영회시· 영사시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전원시는 농촌의 한가한 정취와 자 신의 유연자득(悠然自得)한 심경을 묘사하고 농촌의 퇴락(頹落)함 과 자신의 곤궁한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 「귀원전거(歸園田居)」5 수와 「음주(酒)」 20수가 대표적이다. 영회시·영사시는 완적과 좌사의 전통을 계승하여 출사(出仕)와 은일(隱逸)의 모순 속에서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고민을 표현한 것으로, 「잡시(雜詩)」와 「독산 해경(讀山海經)」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풍은 평담(平淡)함과 자연스러움을 통일하여 평담한 가운데 웅건함이 있고 자연스러운 가운데 정교함이 있으며, 정(情)·경(景)·이(理)의 융합을 이루었다. 중국 전원시의 새로운 발전을 이룩한 그의 시는 당대의 왕유·유종원(柳宗元)·위응물(應物), 송대의 소식(蘇軾) 등에 모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원으로 돌아와 거하며[歸園田居]」(五古)
젊어서부터 세속에 적응하지 못했으니, 성격이 본래 산천을 좋아했네.
속진의 그물에 잘못 빠져, 내처 30년이나 지났네.
조롱의 새는 옛 숲 그리워하고, 못의 고기는 옛 연못 생각하네.
남쪽 들녘에서 황무지 개간하고, 고졸(古拙)함 지키며 전원으로 돌아오네.
마당은 천 여평, 초가는 여덟 아홉칸.
느릅나무 버드나무는 뒤 처마 그늘 지우고, 오얏나무 복사나무는 대청 앞에 늘어섰네.
가물가물 저 먼 촌락, 하늘하늘 마을의 연기. 개는 깊은 골목에서 짖고, 닭은 뽕나무 위에서 우네.
집안에 속진의 번잡함 없으니, 빈방에 한가로움 넘치네. 오랫동안 새장 속에 있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다네!
少無適俗韻 性愛丘山 誤落塵網中 一去三十年 羈鳥戀舊林 池鱼思故淵 開荒野 守拙歸園田 方宅十餘畝 草屋八九間 楡柳蔭後簷 桃李羅堂前 曖曖遠人村 依依墟里煙 狗吠深巷中 雞鳴桑樹顚 戶庭無塵雜 虛室有餘閒 久在樊籠裏 -復得返自然
「술 마시며[酒]」(五古)
사람 사는 곳에 초가집 얽어놓았지만,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 없네.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그럴 수 있소? 마음이 멀어지면 땅도 절로 외지는 법이라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드니, 유연히 남산이 눈에 들어오네.
산기운은 해질녘이 아름다우니, 나는 새도 무리지어 돌아오네. 이 속에 참 뜻 있으니, 형언하려 하나 이미 할 말을 잊었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辯已忘言
남조(南朝)의 시가는 다시 원가(元嘉: 424~453,文帝劉 의 연호) 문학, 영명(永明: 483~493, 武帝蕭의 연호) 문학, 궁체 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 원가문학은 사령운(運)과 포조(鮑照)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사령운(385~433)은 산수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려하게 묘사하여 중국 산수시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원가문학 시기에는 현언시 (詩)가 퇴조하고 산수시가 흥성했으며 대우, 신기한 표현, 화려한 묘사 등 유미 주의적인 형식미를 중시했다.
영명문학은 사조(謝跳)와 심약(沈約) 등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들의 시체를 '영명체'라고도 한다. 이 중에서 심약(441~513)은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을 주장하여 엄정한 음률미를 추구함으로 작품의 내용보다는 정교한 대구나 화려한 음률등 표현상의 기교으로써 당대 근체시의 성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명문학은를 중시했다. 위진남북조 말에 형성된 궁체문학은 유신(庾信)과 서릉(徐陵) 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궁체시는 여성의 아름다운 자태와 염정을 묘사한 관능적인 염정시로서 극도의 섬세함과 화려함을 추구했으며 일부 퇴폐적인 경향도 띠었다. 서릉(507~583)이 엮은 『옥대신영(臺新詠)』 10권은 한대부터 양대까지의 5언시·악 부·가행(行)에서 가려 뽑은 염정시선집으로, 당시의 유미주의 적인 궁체문학의 영향으로 문사상의 염려(麗)한 시만을 집록했 다. 『옥대신영』은 중국 시가발전사상 유미주의·수사주의 절정기의 작품을 집대성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당대 시
당대 문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이며, 나아가 중국 시 가의 황금기 역시 당대이다. 당시가 번성하게 된 원인으로는 우선 시가 자체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내용상 『시경』과 한대 악부의 현실주의 정신, 『초사』의 낭만주의 정신, 위진남북조의 전원·산수시 등이 당시의 내용 확 대에 영향을 미쳤으며, 형식상 전대에 이미 사용되었던 4.5.7언 시(고시), 소체(體), 악부체 등의 다양한 시체가 당대 근체시 발 전에 영향을 미쳤다. 다음으로는 사회적 원인을 들 수 있다. 제국의 통일과 번영으로 시인들이 전국을 주유하면서 다양한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수려한 산천경개를 유람함으로써 안목과 시정(詩情)이 증대되었고, 외국과의 빈번한 교류로 시인들의 정신생활과 예술경험이 더욱 풍부해졌으며, 안・사(安史)의 난 등과 같은 대 변란이 창작의 영감을 자극하고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다. 또한 시·부로써 인재를 뽑는 과거제도의 시행으로 시인의 저변이 확 대되어 시가의 내용과 형식이 풍부해 졌다. 그 성취면에서 보면, 당시는 수량상 2,200여 명의 48,900여 수가 창작되었고 [全唐詩』에 근거함], 질량상 중국 시가를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작가와 작품들이 많이 배출되어 중국 시가의 사 상성과 예술성이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으며, 형식상 고시·율시·절구등 다양한 시체가 완비되었다. 당시는 일반적으로 명대 고병(高)의 『당시품휘(唐詩品彙)』에서 나눈 초당(初唐)·성당(盛唐)·중당(中唐)·만당(晩唐)의 4시기로 구분한다. 초당은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618)에서 예종) 태극 極) 원년(712)까지를 말하는데, 당시의 맹아시기로서 내용과 형식 상 당시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은 화려함과 질박함을 조화시켜 새로운 풍격을 창출하면서 비교적 깊이 있는 정감과 통속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작자의 재능을 발휘 한 '초당 4걸'(唐四傑:王勃·楊炯·盧照隣·駱賓王)과, 시가의 격률 운동에 힘을 써 엄격한 격률과 치밀한 구성으로 당대 근체시의 형식을 확정한 '심·송'(沈 沈佺期宋之問)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진자앙(陳)을 비롯한 장열(張)·장구령(張九齡) 등은 자유로 운운율을 추구하고 자유분방한 감정을 표현하여 초당 시단에 남 아 있던 제(齊). 양(梁)의 화려한 기풍을 일소하고 '건안풍골(建安 風骨)'을 제창함으로써, 시가의 형식화와 수사미에 반대했다.
왕발(王) 「산중(山中)」(絶)
장강은 슬픔으로 이미 막혔으니, 만리 밖에서 장차 돌아 갈 생각하네.
게다가 세찬 바람 부는 저녁이라, 산마다 누런 낙엽만 날리네.
萬里念將歸 況屬高風晚 山山黃葉飛
성당은 현종(玄宗) 개원(開元) 원년(713)에서 대종(代宗), 영태(永黍), 원년(765)까지를 말하는데, 시의 격률이 이미 정형을 이루었고 시론 역시 진일보하여 당시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시기 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은 시불(詩佛), 왕유(王維), 시선(詩仙), 이백(李白), 시성(詩聖) 두보(杜甫)이다. 왕유(701~761)의 시는 전원·산수의 정취와 농촌생활을 노래하여 평담한 풍격으로 천지자연 속에서 정신적인 해탈을 추구했다. 그의 시는 회화성이 뛰어나 예로부터 “시 가운데에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畫中有"고 평가받았다. 대표작으로는 「녹시(鹿柴)」·「죽리관(竹里館)」·「산거추명(山居秋 등이 있다.
「대숲 별관]」(五絕)
홀로 그윽한 대나무 숲속에 앉아, 금을 타며 길게 휘파람 부네.
깊은 숲이라 다른 사람은 알 리 없고, 밝은 달만 내려와 비추네.
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산속의 가을 저녁[居秋嶼]」(五律)
빈산 새로 비 온 뒤, 가을 저녁의 날씨.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추고, 맑은 샘은 바위 위로 흐르네.
대숲 소란스럽더니 빨래하는 아낙들 돌아가고, 연잎 흔들리더니 고기잡이 배 내려가네.
제멋대로 봄 향기 풀은 지지만, 왕손은 그래도 남을 것이라네.
空山新雨 天氣晚來秋 明月松間照 清泉石上流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이백(701~762)의 시는 열렬한 정감과 강렬한 개성으로 자아 표현의 주관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대담한 과장, 교묘한 비유, 미려한 신화전설, 기이한 환상을 운용하여 정감을 거침없이 표현했 는데, 풍격은 호방(豪放)하고 표일(飄逸)하며 시어는 청신하고 자연스럽다. 이백은 굴원의 뒤를 이어 중국 시가의 낭만주의 전통을 발양광대廣大)시키고, 시가 창작의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여 육조의 화려하고 유약한 시풍을 일소하고 시가 혁신의 위업을 완성했다. 또한 악부민가의 정신과 건안 이후의 우수한 시가 예술기교를 흡수하여 중국 시가의 내용과 형식을 창조적으로 시킴으로써, 두보와 함께 중국 고전시가의 황금시대를 개척했다. 대표작으로 「고풍(古風)」·「월하독작(月下獨酌)」・「산중문답(山中問答)」·「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등이 있다.
「달 아래서 혼자 술 마시며 [月下獨酌]」(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친구도 없이 혼자 마시네. 술잔 들어 밝은 달 초대하니, 그림자랑 함께 세 사람 되었네.
달은 본시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내 몸만 따라다닐 뿐이네.
잠시 달이랑 그림자랑 어울려, 봄날에 맞춰 모름지기 즐겨야지.
내가 노래하니 달이 서성이고, 내가 춤추니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리네.
깨어 있을 땐 함께 기쁨 나누지만, 취한 뒤엔 각자 나누어 흩어지네.
영원히 맺은 고상한 우정, 저 아득한 은하수에 기약하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舉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既不解飲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산중의 문답[山中問答]」(七絕)
무슨 심사로 푸른 산에서 사냐고 나에게 묻지만, 빙긋 웃으며 대답 않으니 마음은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떠 있는 물 아련히 흘러가니, 여기는 인간세상이 아닌 또 다른 천지라네.
問余何事棲碧山,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別有天地非人間
두보(712~770)의 시는 현실생활의 중대한 문제들과 사물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반영하고, 웅혼하고 장대한 예술 경지로 경물을 치밀하게 묘사하여 내면의 정감을 속속들이 표현했으며, 풍격 이 침울. 비장하다. 또한 언어구사가 정확하고 생동감 넘치며 글 자마다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두보는 『시경』과 한대 악부의 현실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동시에 육조 이래 시가의 음률· 격 률·조구(句) 등 예술기교를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중국 현실주의 시가를 집대성했으며, 그의 현실주의 정신 및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신악부시는 중당의 신악부운동을 직접 계도했다. 특히 그의 충군·애국·애민정신은 이후 역대 애국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 「춘망(春望)」, 「추흥(秋興)」, 3리(三吏: 「新安吏」·「潼關吏」·「石壕吏), 3별(三別:「新婚」·「無家別」·「垂老) 등이 있다.
「봄날의 전망望]」(五)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에는 봄이라 초목이 우거졌네.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떨구고,
이별을 한스러워하여 새도 마음 졸이네. 봉화가 석 달이나 이어지니, 집에서 온 편지는 만 금이나 나가네.
흰머리 긁어 더욱 짧아지니, 아무래도 상투꽂이조차 이기지 못할 듯하네.
관리의 호통은 어찌 그리도 사나운지, 할멈이 문을 나서 맞았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
「석호 마을의 관리]」(古)
저녁에 석호 마을에 투숙했더니, 관리가 밤에 사람 잡으러 왔네.
할아범은 담 넘어 도망쳤고, 할멈의 울음은 어찌 그리도 서글픈지.
할멈이 나서서 하는 말 들었더니,
"세 아들이 업성에서 수자리 서고 있는데, 한 아들이 부쳐온 편지에, 두 아들이 새로 전사했다는 군요.
살아남은 놈은 겨우 목숨만 건졌지만, 죽은 높은 영영 그만이지요. 집안엔 더 이상 사람은 없고,
오직 젖먹이 손자만 있어요.
손자에겐 아직 집 나가지 않은 어미가 있지만, 나들이할 때 온전한 치마조차 없어요.
이 늙은 할망구가 기운은 쇠했지만, 나으리 따라 밤 도타 돌아가,
급히 하양의 전장에 댄다면, 새벽밥만큼은 지을 수 있어요."
밤 깊어 말소리 끊어졌지만, 목메어 흐느끼는 소리 들리는 듯하네.
날 밝아 갈 길에 올랐을 때, 홀로 할아범하고 만 작별했네.
暮投石壕村 有吏夜捉人 老翁踰墙走 老婦出門看 吏呼一何怒 婦啼一何苦 聽婦前致詞 三男鄴城戍 一男附書至 二男新戰死
存者且偷生 死者長已矣 室中更無人 惟有乳下孫 孫有母未去 出入無完裙 老嫗力衰 請從吏夜歸 急應河陽役 猶得備晨炊 夜久語聲絕 如聞泣幽咽 天明登前途 獨與老翁別
그밖에 고적(適 702~765)・잠삼(岑參: 715~770) 등은 변새 생활에서 제재를 취하여 변방의 경치와 이국적인 정조, 비참한 전쟁장면, 병사들의 향수와 고생 등을 비장하고 호방한 풍격으로 묘사했다. 중당은 대종(代) 대력(曆) 원년(766)에서 문종(文宗) 태화 (太和) 9년(835)까지를 말하는데, 내용과 기교상 모두 다시 한번 진일보하여 당시 발전의 중요한 단계가 된 시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은 백거이(白居易)이다. 백거이(772~846)는 두보의 사회시를 계승하여 문학의 사회적 작용을 중시했으며, 신악부 운동의 중심인물로서 시어의 의식적인 통속화에 힘을 썼다. 대표 작으로 「장한가(長恨歌)」・「비파행 (琵琶行)」 등이 있다.
「비파의 노래」(七古)
원화 10년(815)에 나는 구강군의 사마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가을에 손님을 분포구에서 전송하게 되었는데, 어떤 배 안에서 밤에 비 파 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어보니 맑고 낭랑하여 서울의 가락이 담겨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본래 장안의 기생으로 일찍이 목과 조 두 선재에게서 비파를 배웠는데 나이 들어 미색이 이울자 몸을 맡겨 상인의 아내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술을 차려오라 명하고 속히 몇 곡을 타보라고 했다. 곡이 끝나자 가엽게도 젊었을 적의 즐거웠던 일과 지금의 초췌한 모습으로 강호 사이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는 신세를 스스로 이야기했다. 나는 지방으로 전출된 지 2년 동안 조용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왔는 데, 이 여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려 이날 저녁에야 비로소 좌천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장편의 노래를 지어 그녀에게 주었으니, 모두 616자로 '비파의 노래'라고 제목을 붙였다.
심양강 어귀에서 밤에 손님을 전송하니, 단풍잎과 꽃 우거진 쓸쓸한 가을이었네.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손님은 배안에 있는데, 술 들어 마시려 해도 음악이 없었네.
취해도 즐겁기는커녕 이별에 가슴 아프니, 이별할 제 아득한 강물이 달빛에 젖었네.
문득 강물 위에서 비파 소리 들려오니, 주인은 돌아가길 잊고 손님도 떠나지 못했네.
소리 찾아 비파 타는 사람 누구냐고 살며시 물었더니, 비파 소리 멈춘 채 대답하려 하나 더디었네.
배 옮겨 가까이 다가가 만나보길 청하며, 술 더하고 등불 돌려 다시 잔치 벌렸네.
천 번만 번 부르고서야 비로소 나왔는데, 비파를 안고 있어서 얼굴이 반쯤 가려졌네.
축을 돌려 줄을 튕겨 두세 소리 내보지만, 곡조를 채 이루기도 전에 정이 앞섰네.
누르는 줄마다 그 소리 상념에 잠겨, 한평생 못 이룬 뜻을 하소연하는 듯했네.
머리 숙여 손 가는대로 연달아 타며, 마음속의 무한한 일을 다 이야기했네.
가볍게 누르고 천천히 매만지며 비틀었다 다시 튕기니, 처음엔 「예상」의 곡조요 나중엔 「육요」의 곡조였네.
굵은 줄은 둥기댕기 급한 소나기 소리 같고, 가는 줄은 통기탕기 귀엣말 같았네.
둥기덩기 통기탕기 뒤섞여 타니, 큰 구슬 작은 구슬 옥 쟁반에 떨어졌네.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 꽃 아래서 매끄럽고, 흐느끼는 샘물 소리 얼음 밑에서 잠겼네.
샘물 차가우니 현도 얼어붙고, 얼어붙어 막히니 소리 잠시 끊겼네.
달리 깊은 시름과 남모르는 한이 생겨나니, 이때의 소리 없음은 있는 것보다 나았네.
은병이 갑자기 깨지며 물이 쏟아지고, 철갑 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오며 칼이 부딪혔네.
곡이 끝나자 발목(木) 거두어 가운데를 그으니, 넉 줄이 한 소리로 비단 찢는 듯했네.
동쪽 배 서쪽 배는 소리 없이 조용한데, 오직 강 복판에 가을달만 하었네..
깊은 생각에 잠겨 발목 거두어 줄 가운데에 꽂고, 옷깃 여미며 일어나 얼굴빛 가다듬었네.
스스로 말하길, "본래는 서울 여자로, 하마릉 아래에 집이 있었지요.
열세 살 때 비파를 완전히 배워, 이름이 교방에서 첫째로 꼽혔지요.
연주가 끝나면 선재님도 탄복했고, 화장을 하면 추이도 시샘하곤 했지요.
오릉의 젊은 귀공자들 다투어 선물 보내, 한 곡조에 붉은 생초가 셀 수도 없었지요.
자개 박은 구름 빗치개 장단 맞추다 부서지고, 선홍색 비단 치마 술 엎질러 더렵혔지요.
금년도 웃음으로 또 명년도 마찬가지, 가을 달 봄 바람을 등한히 보냈지요.
동생은 군대 가고 양어머니 돌아가시고, 저녁 가고 아침 오는 중에 얼굴도 늙었지요.
문 앞은 쓸쓸하게도 귀한 손님 드물어, 나이든 몸으로 시집가 상인의 아내 되었지요.
상인은 이문만 중히 여기고 이별 따윈 가볍게 여기니, 지난달에 부량으로 차 사러 떠났지요.
떠나간 뒤로 강어귀에서 빈 배만 지키자니, 배 둘레로 달은 밝고 강물은 차가웠지요.
밤 깊어 문득 젊었을 적 일을 꿈꾸다가, 꿈속에 울다보니 화장 묻은 눈물 붉게 흘렀지요."
나는 비파 소리 듣고 벌써 탄식하고 있었는데, 다시 이 얘기 듣곤 연신 쭛! 쭛! 했네.
똑같이 하늘 끝에서 처량하게 떠도는 사람이니, 서로 만남에 어찌 반드시 옛 친구라야만 하리?
나는 작년에 서울을 떠나온 뒤로, 귀양살이하며 심양성에서 병들어 누웠네.
심양 땅은 궁벽한 곳이라 음악이 없어, 일년 내내 악기 소리 듣질 못했네.
거처하는 곳은 분강에 가까워 땅이 낮고 습하며, 누런 갈대와 참대가 집 둘레에 자라났네.
그 사이에서 아침저녁으로 무슨 소리 들리나? 피맺힌 두견새 울음과 애달픈 잔나비 울음뿐이라네.
봄 강에 꽃핀 아침이나 가을 달 밝은 밤이면, 가끔 술잔 들어 혼자 기울였네.
어찌 초동의 노래나 목동의 피리 소리가 없으랴 만은, 시끌시끌 조잘조잘 귀에 거슬렸네.
오늘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신선의 음악 듣는 듯 잠시 귀가 밝아지네.
사양치 말고 다시 앉아 한 곡 타시게! 그대 위해 「비파의 노래」 지어볼 테니.
나의 이 말에 감동되어 한참을 서 있다가, 물러앉아 줄 조이니 줄은 다시 팽팽해졌네.
그 처절함이 이전의 소리와 다르니, 온 좌중의 다시 듣는 사람 모두 눈물 훔쳤네.
그 중에서 누가 가장 많이 눈물 흘렸는가?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이 흠뻑 젖었다네.
(무수한 한자~~~~)
그밖에 한적한 심경과 산수자연의 풍경을 잘 묘사한 위응물(韋應物 737~789)·유종원(柳宗元: 773~819)과, 의식적으로 예술적인 기교에 치중하고 기이한 표현을 좋아하여 난삽하고 괴팍한 시풍을 조성한 한유韓愈: 768~824) 등이 있다.
유종원 「강의 눈[雪]」(絶)
온 산에 새도 날지 않고, 온 길에 사람 흔적 없네.
외로운 배에 도롱이 쓴 노인, 홀로 눈 쌓인 추운 강에서 낚시질하네.
千山鳥飛絶,萬徑人蹤滅, 孤舟蓑笠翁,獨釣寒江雪
한유 「산의 돌」
산의 돌은 울퉁불퉁 길은 좁은데, 황혼녘 산사에 도착하니 박쥐가 나네.
불당에 올라 섬돌에 앉으니 새 비가 흡족히 내려, 파초 잎은 커다랗고 치자는 통통하네.
스님은 옛 벽의 불화가 좋다고 하면서, 불을 가져와 비추는데 보이는 건 희미하네.
평상 펴고 자리 털고 국과 밥 차려놓는데, 거친 밥이지만 그래도 내 시장기를 채우기에 충분하네.
밤 깊어 조용히 누우니 온갖 벌레소리 끊어지고, 맑은 달 산마루로 떠올라 방문으로 달빛 들어오네.
날 밝아 홀로 떠나는데 길을 찾을 수 없어,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안개 속을 헤매네
붉은 산과 푸른 개울 한데 어울려 찬란한데, 가끔 보이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는 모두 열 아름이나 되네.
물가에서 맨발로 개울 돌 밟을 적에, 물소리 콸콸 바람이 옷깃 날리네.
인생살이 이만하면 절로 즐길 만한데, 어찌하여 구속되어 남에게 얽매이는가?
아아! 나의 벗들이여, 어찌하여 늙도록 돌아가지 않는가?
山石犖确行徑微,黃昏到寺蝙蝠飛 升堂坐階新雨足,芭蕉葉大支子肥 儈言古壁佛畫好,以火來照所見稀, 鋪牀拂席置羹飯,疏糲亦足飽我飢, 夜深靜臥百蟲絕,清月出嶺光入扉。 天明獨去無道路,出入高下窮煙飛. 山紅澗碧紛爛漫,時見松瀝皆十圍. 當流赤足踢澗石,水聲激激風吹衣. 人生如此自可樂,豈必局束為人, 嗟哉吾黨二三子,安得至老不更歸
만당은 문종(宗) 개성(開成) 원년(836)에서 애제, 천우(天祐) 4년(907)까지를 말하는데, 당시의 수확단계로서 풍격변화가 더욱 다양해지고 내용이 더욱 풍부해지고 기교가 더욱 세밀해진 시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은 이상은(李商)이다. 이상은(813~858)의 시는 형식주의와 유미주의에 치중하여 신 비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렀는데, 대부분 제재가 화려하고 내용이 은약(約)하며 사용한 전고가 괴벽(怪)하여 뜻을 이해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비단 금슬[錦瑟]」(七律)
비단 금슬은 까닭 없이 쉰 줄, 장자는 새벽에 나비인 줄 헤맸고, 한 줄 한 괘마다 꽃답던 시절 생각나네.
창해에 달 밝을 때 진주에 눈물 고이고, 망제는 봄 마음을 두견새에게 기탁했네.
남전에 햇볕 따뜻할 때 옥에서 연기 피어나네. 이 마음 추억되길 기다릴 만도 하지만, 그저 당시엔 이미 망연했던 걸.
錦瑟無端五十絃 一絃一柱思華年 莊生曉夢迷蝴蝶 望帝春心託杜鵑 滄海月明珠有淚 藍田日暖玉生煙
此情可待成追憶 只是當時已惘然
그 밖에 귀재시인(鬼才詩人)으로 불리는 이하(李賀: 790~816) 와 풍류시인으로 불리는 두목(杜牧: 803~852)은 시가의 기교지 상관점을 계승하여 미려한 시구 중에 청신한 풍격을 갖추고자 했다.
이하 「가을바람에 부치는 감상」 五排)
남산은 어찌 그리도 슬픈가? 귀신 비가 빈 풀밭에 뿌리네. 장안의 가을 깊은 밤, 바람 앞에서 몇 사람이나 늙어가나?
어슴푸레한 황혼녘 오솔길, 하늘거리는 푸른 상수리나무 길. 달은 높아 나무에 그림자 없고, 온 산은 오직 하얀 새벽이네.
옻칠 같은 횃불이 새 사람 맞이하는데, 무덤구덩이엔 반딧불이 어지럽게 날리네.
南山何其悲 鬼雨空草 長安夜半秋 風前幾人老 低迷黃昏逕 靑櫟道 月午樹無影 一山唯白曉 漆炬迎新人 幽壙螢擾擾
중국문학의 향기: 중국문학 장르별 이해
김장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