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학의 향기_7
The "ci" (詞) form of Chinese poetry emerged in the late Tang dynasty and flourished during the Song dynasty. Closely linked with music, each "ci" is based on specific musical patterns called cipai (詞牌). Unlike traditional poems, ci emphasizes musicality and formal rules, ranging from short forms (xiaoci) to longer forms (daling). During the Song dynasty, the development of commerce and performing arts led to the ci's expansion, with notable poets from the Northern and Southern Song periods contributing to its popularity.
詞 사
梧桐更兼细雨 到黃昏 點點滴滴 這次第 怎一個愁字了得
'사'는 당말(唐),오대(五代)에 발생하여 송대(代)에서 화려 하게 꽃을 피운 시가의 일종으로, 그 구성 형식과 음악적 특성에 따라 곡자사·악부(樂府)·신성(新聲)·여음·별조(別調)·전사(詞)·장단구(長短句)·시여(詩餘)등 여러 가지 별칭이 있다. 사는 시와는 다른 형식상 특색을 보이는데 무엇보다도 음악성이 강조되었다. 첫째, 매수의 사에는 모두 음악적인 곡조[이를 사조라고 함)를 나타내는 사패(詞牌)가 있는데, 이 사패는 사의 제목이 아니다. 정작 사의 제목은 사패 뒤에 병기(記)하는 부제(副題)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는 이미 작곡된 이러한 사패에 맞춰 가사를 집어넣기 때문에 사 짓는 것을 '의성전사'한다고 말한다. 둘째, 각 사패에는 정해진 구수句)가 있고 각 구에는 정해진 자수(數)가 있으며 각 자에는 정해진 성조(聲調)가 있다. 또한 각 구의 길이는 일정치 않아 긴 것은 10여자에 이르기도 하고 짧은 것은 1자뿐인 경우도 있다. 셋째, 사는 작품의 길이에 따라 짧은 소령(小)과 긴 대령(令)으로 나뉘는 데, 소령은 소사(小詞)·단사(短詞)라고도 하며 대령은 만사·장사(長詞)라고도 한다. 한편 구체적인 글자수를 기준으로 하여 단조(58자 이하), 중조(中調: 59자~90자 사이), 장조(91자 이상)로 나누기도 하지만 이러한 글자수에 따른 분류는 그 다지 큰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넷째, 한 수의 사는 대부분 몇 개의 편(片)으로 나눠지는데, 이것은 오늘날 노래 가사의 절과 비슷한 의미이다. 편은 단(段) 또는 결(閔)이라고도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사는 1편으로 된 것부터 4편으로 된 것까지 있는데, 이중에서 2편으로 된 것이 가장 많다. 편수(片數)에 따라 이를 다시 단조(單調: 1편), 쌍조(雙調: 2편), 삼첩(三疊: 3편), 사첩(四 疊: 4편)이라고도 한다. 또한 쌍조의 경우 앞 편은 상편(片)이라 하고, 뒤 편은 하편(下片)이라고 한다. 다섯째, 일반적으로 쌍조의 사는 상편과 하편이 같은 형식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하편의 첫 머리[이를 과편(過片)이라 함] 부분의 글자나 평측 등에 변화를 주 기도하는데, 이러한 변화가 있는 경우를 환두 또는 과변(過變)이라 하고 전혀 변화가 없는 경우를 불환두라고 한다. 여섯째, 사는 사조에 따라 압운의 위치가 일정치 않아 근체시에서 사용하는 격구운(隔句韻)과는 다르다. 많은 경우는 매구마다 압운하기도 하며, 적은 경우는 전체 가운데 5~6군데만 압운하기도 한다. 또한 압운할 때 사용하는 운자(韻)도 근체시에서 평성 자로만 압운하는 것과는 달리, 사에서는 평성과 측성을 모두 사용할 수 있으며 중간에 전운(轉韻)할 수도 있다. 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시경』의 구식이 자유롭고 사와 마찬가지로 노래의 가사였다는 점에서 『시경』에 그 근원을 두는 설, 한· 위·진·남북조 고악부의 장단구를 이어받아 형성되었다는 설, 당대 근체시가 가창할 수 있도록 장 단구로 변했다는 설, 외국에서 전래된 호악(胡樂)과 민간 가곡인 속악(樂)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는 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성당의 이백이 지었다고 하는 【보살만 (菩薩蠻)】, 중당 장지화(張志和)의 【어가자(漁歌子)】와 백거이(白居易)의 【장상사(長相思】를 비롯하여 그 밖에 사와 근접한 많은 작품이 지어진 것으로 보아 성당과 중당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사는 처음에는 주로 민간에서 널리 유행하여, 평이하고 소박한 정감으로 병사의 고통,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슬픔, 남녀의 연정, 기녀의 신세, 강호에 숨어사는 은자의 생활 등을 읊었는데, 이러 한 경향은 돈황(敦煌)의 민간사에 잘 나타나 있다.
만당·오대 사
만당은 사의 초창기로서 민간사가 유행함에 따라 문인들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온정균(溫庭筠: 812~870)이다. 그의 사는 언어가 농염하고 섬세하며 표현기교가 은유적이 고 함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화간집(花集)』이라는 사집에 66수가 수록되어 전한다. 온정균은 최초의 전문적인 사 작가로서, 그에 의하여 사가 정식 문학양식으로 성립되어 운문사상 시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수사(修辭)와 의경 (意境)면에서 시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 작품이 창작되었다.
온정균 [보살만(菩薩)】
병풍 속 중첩된 작은 산에 반짝이는 금빛, 구름 같은 귀밑머린 향긋한 눈빛 뺨에 닿을락 말락.
나른하게 일어나 고운 눈썹 그리고, 예쁘게 단장하지만 머리 손질 더디네.
앞 뒤 거울에 비치는 꽃, 꽃과 얼굴 서로 어울려 빛나네.
새로 지은 수놓은 비단 저고리엔, 쌍쌍이 나는 황금빛 자고새.
小山重疊金明滅,鬢雲欲度香腮雪 畵蛾眉,弄牧梳洗遲. 照花前後鏡花面交相映. 新貼繡羅補, 雙雙金鵬鵡.
오대는 사의 발달기로서 중국 최초의 사집(詞)인 화간집 集)』과 뛰어난 사인이 배출되었다. 『화간집』은 후(後蜀)의 조 숭조(趙)가 편찬한 사집으로, 18명 작가의 500수를 수록하고 있다. 그들의 사풍은 온정균의 사풍을 모방하여 대부분 염려(艶麗)하고 여성적인 성향이 강한데, 후대에 이들을 '화간파'라 부른다. 이 시기의 사는 만당 온정균의 사풍을 계승·발전시켜 사의 독립된 지위를 강화하고, 중국 사의 전성기인 송대의 사인과 작 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주요 작가에는 위장·풍연사(馮延巳)·이경(李璟)·이욱(李煜)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이욱이 가장 뛰어났다. 이욱(937~978)은 남당(南唐)의 후주(後)로서, 망국 이전의 작품은 온화하고 미려하나 망국 이후의 작품은 비장하고 애수에 차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낭도사(浪淘沙)]· 【우미인(虞美人)] 등은 당시의 독보적 인 작품으로 '사성(聖)'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남당이주사에 40여 수가 수록되어 전한다.
이욱[낭도사]
*발 밖엔 비가 추적추적, 봄뜻은 시들시들. 비단 이불로도 오경의 추위 이겨내지 못하네.
꿈속에선 이 몸이 나그네인 줄도 모르고, 잠깐 동안 즐거움 탐했네.
*혼자 난간에 기대지 마소라! 끝없이 펼쳐진 저 강산. 헤어지긴 쉽지만 만나긴 어렵네.
흐르는 물 지는 꽃에 봄날은 가버렸나니, 천상의 세상으로.
*簾外雨渥 春意闌珊 羅不耐五更寒 夢裏不知身是客 一晌貪歡
*獨自莫憑閱 無限江山 別時容易見時難 流水落花春去也 天上人間
송대 사
당대 중엽에 발생하여 당말, 오대에 발전하기 시작한 사는 송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송대를 대표하는 문학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사가 송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 사체(詞體) 자체의 발전이다. 중국 시는 당대에서 내용과 형식을 막론하고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문인들이 부득이 새로운 형식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송대의 사가 새롭게 발전할 계기가 조성되었다. 둘째, 사패(詞牌) 수량의 증가이 다. 소령(小)은 물론이고 편폭이 긴 장조(長調: 大令)의 사가 대부분 송대에 지어졌으며, 음률에 정통한 사인들이 새로운 곡조를 창작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질적·양적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셋째, 상업경제의 발달이다. 송대에는 도시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가무와 연희가 성행했는데, 사는 원래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 환경을 바탕으로 사 작가와 사의 감상층이 확대되었다. 넷째, 군주와 귀족의 적극적인 제창이다. 송대의 군주와 귀족들이 다투어 사를 짓고 사인들을 장려함에 따라 송사 가 번성하게 되었다. 다섯째, 도학에 대한 반작용이다. 송대의 사 상계를 지배한 도학자들의 도학관념이 순수한 시문의 창달을 구속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사가 발전하게 되었다. 송사의 발전은 크게 북송과 남송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북송의 사는 일반적으로 다음의 몇 시기로 구분한다. 제1기는 오대의 여향기(響)로서, 송사가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풍은 청절(淸切), 완려(婉麗), 완약(約)한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오대 사단(壇)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형식은 짧은 소사(小小 令)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내용은 대부분 완약한 서정을 노래한 귀족문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구양수(歐陽修) • 안수(晏殊). 안기도(晏 道)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인이다. 구양수(1007~1072)는 완약파의 대가로서, 그의 사에는 여성적인 서정과 섬세한 감상 유염艶)한 정조가 깃들어 있다. 사집으로 『육 일거사사(一居士詞)』와 『취옹금취외편(醉翁琴 趣外篇)』이 있다.
남쪽 동산 봄날 답청 놀이할 때, 온화한 바람 속에 말 우는 소리 들려오네.
푸른 매실은 콩만 하고 버들은 눈썹 같은데, 긴 낮에 나비 날아다니네.
꽃 이슬은 무겁고, 풀 안개는 나지막한데, 인가엔 주렴과 휘장 내려져 있네.
그네 타다 답답한지 비단 저고리 풀었고, 채색 들보엔 제비 한 쌍 깃들어 있네.
南園春踏青時, 風和聞馬嘶. 青梅如豆柳如眉, 日長蝴蝶飛 花露重,草烟低, 人家簾幕垂 鞦韆慵困解羅衣, 畫梁雙燕
제2기는 형식의 전변기(轉期)로서, 형식상 화려함을 추구한 시기이다. 이시기의 사풍은 섬약(約)·기려(綺麗)·비량(悲凉)한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형식은 긴 만사가 주류를 이루었고 사패 아래에 부제(副題)를 달기도 했다. 내용은 도시인들의 사랑 과 애환을 노래한 민중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시정에서 쓰는 속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유영(柳)·장선(張先)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인이다. 유영(1045전후)은 만사의 창시자로 평생 사작詞)에 몰두 했으며, 우리나라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에도 그의 사가 실려 있다. 사집으로 『악장집(樂章集)』이 있다. 그의 사는 기녀들의 생활을 묘사하여 그들의 고통과 소망을 반영하고, 객지생활을 묘사하여 강호를 유랑하는 감상을 펴냈으며, 도시의 번영을 묘사하여 민간의 풍속을 반영했다. 그 특징은 사의 제재 확대, 대량의 만사 창작, 사의 표현기교 발전, 음률의 조화와 속어의 사용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사는 내용상의 혁신과 예술상의 성공으로 소식 (蘇軾)·진관(秦觀)·주방언(周邦彦)·신기질등 후대 사인 에게 영향을 미쳤고, 언어의 통속화로 새로운 악곡의 창작을 촉진시켰으며, 강창문학과 희곡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림 령】
가을 매미 쓸쓸히 우는데, 역 마을의 저녁 대하니, 소낙비 막 그치네.
성문 밖 전별연의 심란한 마음,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데, 목련 배는 떠나자고 재촉하네.
손잡고 서로 쳐다보는 눈물어린 눈, 끝내 말없이 목이 메네.
떠날 걸 생각하니 천릿길 안개 낀 저 물결, 저녁노을 짙게 깔린 초 땅의 광활한 하늘.
다정한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별에 마음 아팠거늘, 더욱이 썰렁하게 맑디맑은 이 가을을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오늘밤은 어느 곳에서 술이 깰까? 버드나무 강기슭 새벽바람에 기운 달. 이번에 떠나면 해를 넘길 테니,
응당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 헛되이 펼쳐지겠지. 설사 천 갈래 애정이 있다한들, 다시 누구에게 얘기할까?
寒蟬凄切.對長亭晚,雨初敭 都門帳飮無緖,方留戀處,蘭舟催發. 執手相看淚眼,竟無語凝噎 念去去千里烟波,暮靄沈沈楚天闊,
多情自古傷離別.更堪,冷落淸秋節. 今宵酒醒何處,楊柳岸,曉風殘月. 此去經年,應是良辰好景虛設, 便縱有千種風情,更與何人說,
장선(990~1078)은 소령은 안수, 구양수 등과 병칭되고 만사는 유영과 병칭되며, 사재(詞才)는 유영보다 못하지만 사운은 그보다 뛰어나 '운고(韻高)'라고 칭송된다. 사집으로 [장자야사][일명(~~~)]가 있다.
[옥루춘(玉樓春)]-을묘년 오흥에서의 한식(乙卯吳興寒食)
용머리 장식한 날쌘 배 몰며 오흥의 소년들 경주하고, 대나무 사이에 매단 그네 타며 나들이 소녀들 시합하네.
방초 우거진 모래톱에서 물총새 털 줍느라, 해 저물도록 돌아갈 줄 모르고,
아름다운 들녘에서 답청 놀이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찾아오네.
구름 같은 소녀들 떠난 뒤 저 먼 산은 어두워지고, 생황 노래 소리 그치니 연못 정원 고요하네.
정원 안에 뜬 달빛 정말 맑고 밝은데, 무수한 버들꽃 그림자도 없이 떠다니네.
龍頭舴艋兒競,筍柱鞦韆遊女 芳洲拾翠暮忘歸,秀野踏青來不定. 行雲去後遙山,已放笙歌池院靜. 中庭月色正清明,無數楊過無影
제3기는 사풍의 전변기로, 풍격상 호방함을 추구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풍은 호방(豪放), 광달(達)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소식(蘇軾)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인이다. 소식(1037~1101)은 호방파의 대가이며, 사집으로 『동파악부 (東坡樂府)』가 있다. 그의 사는 형식상 만사의 형식을 계승했지만 전고, 산문적인 표현, 구어, 허사 등을 운용하여 음률의 제한을 과감히 돌파했으며, 풍격상 이전 사인들의 완약한 정서를 떨쳐버리고 분방하고 웅장한 기품을 수립했다. 그 특징은 사와 음악을 분리시켜 읽는 사를 지어 사의 시화(詩化)를 추구하고, 사경(詞境) 의 확대와 개성이 뚜렷한 표현에 힘썼다.
[염노교嬌]-적벽에서의 회고(赤壁懷古)
큰 강물 동쪽으로 흘러 흘러, 도도한 물결과 함께, 천고의 풍류 인물들을 쓸어가 버렸네.
옛 보루의 서쪽을, 사람들은 말하네,
삼국시대 주랑의 적벽이라고. 구름 무너뜨릴 듯한 어지럽게 솟은 바위, 강기슭 찢는 듯한 놀란 파도,
천 무더기 눈을 말아 올리는 듯하네.
강산은 그림 같은데, 한때의 영웅호걸들 그 얼마였던가?
공근의 한창 때를 아련히 떠올리니 소교가 갓 시집왔었고, 영웅다운 자태 빼어났었지.
깃털 부채 들고 푸른 두건 두른 채, 담소하는 사이에, 강한 적들 재 되어 날리고 연기 되어 사라졌네.
생각으로나마 고향 길 찾아가니, 다정한 이는 틀림없이 날보고 웃겠지,
벌써 머리에 꽃이 피었다고. 인생이란 꿈과 같은 것, 한 잔 술을 강물에 비친 달에 따르네.
大江東去,浪淘盡,千古風流人物. 故壘西邊,人道是三國周郞赤壁. 亂石崩雲,驚濤裂岸,捲起千堆雪. 江山如畫,一時多少豪傑
遙想公瑾當年,小喬初嫁了,雄姿英發. 羽扇綸巾,談笑間,強虜灰飛烟滅. 故國神遊,多情應笑我,早生華髮. 人間如夢,一還酌江月,
제4기는 사율의 발전기로, 음률상 격률미를 추구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풍은 아정(正). 전아(雅)한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내용은 완약하면서도 표현은 아정한 작품을 쓰려고 했다. 또한 형식은 사의 성률과 격조를 존중하고 사와 악부를 다시 결합했다. 진관(觀), 하주賀), 주방언(周邦), 이청조(李照)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인이다. 이들은 송사의 정통파로서 '격률사파' 또는 '악부사파'라고도 불린다. 주방언(1056~1121)은 격률사파의 대가이자 송사의 집대성자로 평가받으며, 사집으로 『청진사집(淸眞詞集)』 [일명 「이 있 다. 그의 사는 형식상 엄정한 사율을 완성했고, 표현상 의상에만 치중하지 않고 언어의 단련과 음률의 조화에 힘씀으로써 정교하고 전아한 기풍을 이루었으며, 내용상 영물사(詠物詞)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사는 엄정한 격률이 작자의 개성이나 창의성을 제약하여 내용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결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접련화]-새벽길[무]
환한 달빛에 놀란 까마귀 깃들어 있지 못하네.
물시계도 그치려 하는데, 삐걱삐걱 우물물 긷는 소리.
불러일으키니 두 눈동자는 초롱초롱, 눈물 꽃송이 떨어진 붉은 비단 베개만 차갑네.
손 맞잡으니 서릿바람 귀밑머리에 부네.
마음은 떠나야 하지만 몸은 배회하니, 수심어린 이별의 말 차마 듣기 어렵네.
누대 위 난간에 북두칠성 가로질렀는데, 이슬은 차갑고 사람은 멀어지고 닭은 따라 우네.
*
月咬驚烏棲不定. 更漏將閑,壢轆牽金井. 喚起兩眸清炯炯. 淚花落枕紅.
*執手霜風吹鬢影. 去意徊徭,別語愁難聽. 樓上欄干横斗柄. 露寒人遠相應,
이청조(1084~1140?)는 전기의 사풍은 청신하고 발랄하나 후기 의 사풍은 침통하고 처량한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사집으로 수옥사)가 있다. 그녀는 사의 '별시일가(別是一家)'를 강조하고, 고아(高雅). 혼성(渾成)·협률(協律)·전중(典重)· )·포서(鋪敍).고실(實)을 주장하는 사론(詞論)을 전개했다.
【성성만]-가을의 상념
더듬더듬 뒤적뒤적. 썰렁썰렁 섬뜩섬뜩, 처량하고 비참하고 애처로워요.
언뜻 따뜻했다 다시 추워지는 이 때, 편안히 쉬기가 가장 어려워요. 두세 잔 약한 술로는, 어떻게 견디겠어요?
밤에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지나가는 기러기, 정작 내 마음 아프게 하니, 그래도 옛날엔 서로 아는 사이였지요.
땅에 가득 노란 꽃 쌓여요. 시들어 떨어졌으니, 지금 같다면 그 누가 따주겠어요?
창문을 지키고 있자니, 혼자 이 까만 밤을 어떻게 보낼 수 있겠어요?
그 널따란 오동나무에 가랑비까지 내려, 황혼녘 되니 방울방울 뚝뚝.
이러한 때를, 어떻게 근심 '수'자 하나로 당해낼 수 있겠어요?
*尋尋覓覓,冷冷淸淸, 凄凄慘慘戚戚, 乍暖還寒時候,最難將息, 三杯兩盞淡酒,怎敵他,晚來風急. 雁過也,正傷心,却是舊時相識.
*滿地黃花堆積,憔悴損, 如今有誰摘 守着窗兒,獨自怎生得黑 梧桐更兼細雨,到黃昏,點點滴滴, 這次第,怎一個愁字了得,
다음으로 남송의 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기는 북송이 금(金)나라에게 멸망하여 비분강개의 격정이 끓어오르던 시대적인 환경을 지닌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풍은 소식의 사풍이 부활하여 격정적이면서도 비애미가 감돌고, 내용은 애국적인 충정과 나라를 잃은 비통함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며, 기질·육유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인인데, 이 형식은 산문화 또는 백화화의 경향을 보였다. 주돈유(朱敦儒)·신들은 '백화사파'라고도 불린다. 신기질(1140~1207)은 호방한 필치로 애국충정을 표현했으며, 사집으로 『가헌장단구(稼軒長短句)』가 있다. 그의 사는 형식상 시·사의 한계를 타파하고 나아가 시·사·산문을 종합하여 사의 형 식을 해방했으며, 내용상 구세애국(世愛國)의 열정에서부터 인도주의 사상, 정치, 산수 등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을 확대했 다. 따라서 그 사풍은 호방한 기백, 온유한 감정 및 진지한 문학 정신으로 풍격의 다양화를 이루었다.
【파진자]
-진동보를 위해 씩씩한 노래 지어 부치며[為陳同甫賦壯詞以寄]
*취중에 등잔 돋우어 장검 살펴보고, 꿈속에 뿔피리 불어 진영 연결하네.
얼룩소 잡아 휘하 장병에게 구운 고기 나눠주고, 오십 줄 거문고로 변방의 노래 연주하네.
병사 점호하는 사막의 가을 전장.
* 말은 적로처럼 나는 듯 빠르고, 활은 벽력처럼 시위가 놀라네.
군왕 위해 천하의 일 완수하니, 살아생전에 죽은 후의 명성 얻네. 가련하게도 마구 생겨나는 백발.
*醉裏挑燈看劍,夢回吹角營 八百里分麾下炙,五十絃翻塞外聲。沙場秋點兵 馬作的盧飛快,弓如霹靂絃驚.
了却君王天下事,赢得生前身後名 可憐白髮生.
후기는 전란기를 지나 다시 도시경제가 발달하자 문인들 사이에서 망국의 슬픔을 잊고 다시 향락을 추구하는 풍조가 생겨난 시대적 환경을 지닌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풍은 주방언의 사풍이 부활하여 단아하고 정교한 특색을 지니고 있고, 내용 은 현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영물사가 대부분이며, 형식은 엄정한 격률과 화려한 조탁을 추구했다. 강기(夔)·사달조·오문영(吳文英)·주밀(周密)·장염(張)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인인데, 이들은 '격률사'[또는 '고전사파']라고도 불린다. 강기(1155?~1235?)는 남송 격률사파의 우두머리로서 중국사의 형식미를 최고점에 올려놓았으며, 사집으로 『백석사(白石詞)』가 있다. 그는 음악에 정통하여 새로운 곡조를 많이 작곡하고, 자구의 조탁에 힘써 전아한 표현미를 살렸다. 그래서 함축미가 뛰어나고 음운이 매우 조화로우며, 암유(暗)와 연상(聯想) 등의 수 법을 사용하여 영물과 서정의 조화를 꾀했다. 또한 단행산구(單 行散)를 많이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파격미를 살리기도 했다.
[암향]
옛날의 달빛. 몇 번이나 비추었을까? 매화 옆에서 피리 불던 나를.
옥 같은 님 불러 일으켜, 쌀쌀한 추위 아랑곳하지 않고 함께 잡아당겨 땄지.
하손은 이제 점점 늙어, 모두 잊어 버렸네, 봄바람 속에 노래 짓던 붓을.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나무 밖의 성긴 꽃, 차가운 향기가 고운 옥 방석에 스며드네.
강이 많은 고장이지만, 정작 적적하기만 하네.
부쳐 보내려도 길이 멀어 탄식하는데, 밤사이 눈 내려 쌓이네.
초록빛 술 단지는 쉬이 눈물짓지만, 붉은 꽃받침은 말없이 말똥말똥 생각하네.
일찍이 손 끌어 잡았던 곳 길이 기억 하나니, 천 그루 나무에 눌려, 서호는 추워서 파랬었지.
또 조각조각, 바람에 다 날려가 버렸으니, 어느 때나 만나볼 수 있을까?
舊時月色,算幾番照我,梅邊吹笛. 喚起玉人,不管清寒與攀摘 何遜而今漸老,都忘却,春風詞筆. 但怪得,竹外疏花,
香冷入瑤席. *江國,正寂寂,歎寄與路遙,夜雪初積. 翠易泣,紅萼無言相憶, 長記會携手處,千樹壓,西湖寒碧. 又片片,吹盡也,幾時見得.
장염(12480~?)은 송사를 끝 맺음한 작가로서, 사집으로는 「산중 백운사(詞)』가 있고, 사론집(詞論集)으로는 『사원(詞源)』 이 있다. 송대 이후로 원대와 명대에는 주목할 만한 사 작가나 작품이 나 오질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깊은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사는 청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청대 사
청대의 사단은 다른 정통문학과 마찬가지로 고증학의 기풍 아 래 복고적인 성향을 띠었는데, 송대의 사와는 달리 음악과 분리 된 일종의 문학 양식으로서 사보(詞譜)에 따라 사를 짓는 '전사( 詞)'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청대 사는 전체적으로 보아 중국 사의 부흥시기로서, 사의 창작은 물론이고 사학(詞學)의 연구와 사집 (詞)의 정리·간행에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청초의 사단을 대표하는 작가는 납란성덕(納蘭性德:1655~ 1685)이다. 그는 소령(小)에 뛰어났으며 변새지방의 풍경과 처랑한 비애감을 잘 표현했는데, 명말의 유풍을 계승하여 처완(棲 婉)·유미(柔媚)한 특색을 보인다. 사집으로 『음수사(飮水詞)』[원명은 가 있다.
[사범령]
*보리 물결 출렁이는 맑은 날씨에 바람은 버들가지 살랑이는데, 봄의 아픔 느끼는 계절은 이미 지나갔네.
어째서 그를 위해 수심에 잠기는가? 필경은 봄이 내 마음 붙잡고 있기 때문이겠지.
'붉은 작약꽃 핀 난간 가에서 섬섬옥수 마주 잡으니, 부드러운 속삭임 술보다 진하네.
정원의 꽃으로 눈 돌리니 수놓은 듯 깔렸는데, 봄 이전에 비하여 오히려 더 야위었네.
*麥浪翻晴風颺柳已過傷春候. 因甚爲他成偈憾,畢竟是春施逗.
*紅藥闌邊攜素手. 暖語濃於酒 助到園花鋪似繡,郤更比,春前痩.
납란성덕에 이어 청대 사단은 절서파(浙西派)・양선파(陽羨派). 상주파(派)의 3대 유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절서파라는 명칭은 공상린(龔)의 『절서육가사(西大家詞)』 에서 비롯되었으며, 대표 작가는 주이존(朱尊: 1629~1709)을 중심으로 한 절서육개주이존·李良年·李符・沈皞日·沈岸登·공산이다. 이들은 남송의 강기, 장염(張炎)등의 사를 모범으로 삼아 청(淸). 아정한 사풍과 사율을 중시했다.
주이존 [매화성(花] 우화대
버드나무 시든 백문의 물굽이, 물결은 성벽 때리며 감돌아 흐르네.
작은 마을에 큰 마을 이어졌나니, 노랫가락 맞추던 딱따기와 술집 깃발 모두 없어졌고, 낚싯대만 남았네.
가을 잡초 우거진 육조의 옛터 쓸쓸하고, 텅 빈 단에 꽃비만 내리네.
아무도 없는 곳 나 혼자 난간에 기대자니, 제비는 석양에 왔다가 또 가고, 강산만 이렇게 남았네.
衰柳白門灣, 潮打城還 小長干接大長. 歌板酒旗零落盡, 剩有漁竿
*秋草六朝寒, 花雨空壇. 更無人處一憑闌, 燕子斜陽來又去, 如此江山,
양선파의 대표 작가는 진유숭(陳維崧: 1625~1682)을 중심으로 조정길(曹貞)·만수(萬樹)·오기(吳綺) 등인데, 이들은 송대 소식 (蘇軾)과 신기질(의사를 본받아 재기(氣)를 존중하고 개성적이고 호방한 사풍을 중시했다.
진유숭 【취락백] -매를 읊으며[詠鷹]
*차가운 산 몇 겹이나 둘러쳐 있나? 낮게 깔린 바람은 중원의 길 깎아 잘게 부수네.
가을 하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온통 푸르기만 하니, 취한 김에 담비 갖옷 걷어붙이고, 찾아 부르던 곳 기억해보네.
사내장부의 솜씨 그 누구와 겨룰 것인가? 나이 들었지만 매서운 기운 아직도 드세네.
인간 세상에 교활한 여우와 토끼 그 얼마던가? 달빛 없는 어두운 밤 누런 모래 날리니, 이러한 때 한사코 너를 떠올리네.
*寒山幾 風低中原路, 秋空一碧. 貊,略尋呼處 男兒身手和誰賭, 老來猛氣還軒擧. 人間閒狐. 月黑沙黃,此際偏思汝.
상주파의 대표 작가는 장혜언(張惠言: 1761~1802)을 중심으로 주제(周濟)·장기(張琦)·운경(惲敬)·전계중(錢季重)등인데, 이들 은 북송 주방언(周邦彦)의 심미굉약(深美閦約)한 사풍을 본받아 공연한 조탁을 배격하고 『시경』과 『초사』에서처럼 함축된 의미 와 은유적인 표현을 중시했다.
장혜언 【수조가두(水調歌頭)】
오늘은 어제가 아니니, 내일은 또 어떨까?
지난날에 정말로 후회스러운 건 어떤 일일까? 십 년 동안 공부하지 않은 것이라네.
묻노니 동풍[봄바람]은 늘 불어오지만, 단풍나무 늘어선 강과 난초 핀 오솔길 몇 번이나 지났나?
천릿길 모두 잡초로 우거졌네. 적막한 석양 밖,
아련히 정작 나를 근심에 잠기게 하네. 천고의 뜻,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모두 잠시 잠깐뿐이라네.
죽은 뒤 묻히려고 명산 찾아 헤매는 건, 역시 옛 사람의 어리석음이라 하겠네.
하룻밤 사이에 뜰 앞이 온통 짙푸르고, 석 달 빗속에 붉은 꽃 곱게 피며, 온 천지가 나의 오두막으로 들어오네.
뭇 꽃들 시들기 쉬우니, 자규의 우는 소릴 듣지 마시라.
今日非昨日,明日復何如 來眞悔何事,不讀十年書 為問東風吹老,幾度楓江蘭徑, 千里轉平蕪 寂斜陽外,正愁予.
*千古意,君知否,只斯須 名山料理身後,也算古人愚. 一夜庭前綠遍,三月雨中紅透, 天地入吾廬. 容易衆芳敭,莫聽子規呼.
청대 후기의 사단은 장춘림(1818~1868)·정문작(1856~1918). 황주이(況周頤: 1859~1926)·주조모(朱祖謀: 1857~1931)·왕국유(王國維: 1877~1927) 등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장춘림이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장춘림은 청말의 어지러운 시대를 근심하고 민생의 고통을 반영한 작품을 많이 창작하 여 '사사(史)'로 일컬어지며, 침울한 풍격과 내용 및 성률에 모두 특색이 있어서 청대 사단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사집으로 [수운루사]가 있다. 이 시기의 사풍은 대부분 상 주파의 여류(流)이지만 기존의 작법과 이론에 집착하지 않고 개성적인 작품을 창작하여 특색을 갖추었다.
장춘림 [당다령(唐多令)】
단풍나무 고목은 붉은 빛 흩뿌리고, 갈대꽃은 바람에 불려 또 꺾이네.
조각배 매어 놓고, 함께 붉은 난간에 기대네.
젊은 시절 가무 즐기던 곳 같은데, 낙엽 소리 들으며, 장안을 떠올리네.
애절한 뿔피리 소린 중첩된 관문에서 들려오고, 서리 짙게 내린 초 땅 강물은 차갑네.
서풍을 등지고 있자니, 돌아가는 기러기 소리 서럽기만 하네.
한 조각 석두성 위의 달, 정말 비추길 두려워하네, 저 옛 강과 산을.
楓老樹流丹,蘆花吹又殘. 扁舟,同倚朱蘭. 還似少年歌舞地,聽落葉,憶長安, 哀角起重關,霜深楚水寒,
背西風,歸雁聲酸, 一片石頭城上月,渾伯照,舊江山,
한편 청대에는 역대사 작품을 정리. 선별하여 편찬한 사선집과 중요한 사론이 담겨 있는 사화집(詞話集) 등 많은 사학 관련 저작들이 나왔다.
먼저 주요 사선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이의 사(詞)은 당,오대,송,금,원의 사인 500여 명 의 작품을 선집하고 자신의 사론을 피력하여 절서파의 종지를 밝혔다. 장혜의 사선(詞選)』은 당·송의 사인 44명의 작품을 선집하여 상주파의 표본으로 삼았다. 주제(1781~1839)의 『송사가사선 (四家詞選)』은 주방언·신기질·오문영(吳文英)·왕기손의 작품을 선집하여 상주파의 사통(詞統)을 밝혔다. 주조모의 『강촌 총서疆叢書)』는 송·원의 사인 170여명의 사집을 교감한 것이다. 다음으로 주요 사화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정작陳)의 『백우재사화(白雨齋詞話)』는 총 8권 696조로 되어 있으며, 상주파 후기 사론의 중요저작으로서 장혜언의 사론 을 발전시켜 '온후(溫厚)'·'침울(沈鬱)'을 최고의 경계로 삼았다. 황주이의 『혜풍사화(蕙風詞話)』는 총 5권으로 되어 있으며, 상주파 후기 사론의 중요 저작으로서 창작상 '사심(心)'의 발로를 중시하고 사풍상 침중함, 질박함, 웅대함을 추구했다. 왕 국유의 인간화(人間詞話)』는 총 112조로 되어 있으며, 최초로 서구의 미학관점을 운용하여 사를 평론한 것으로서 그의 문예미 학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는 경계설(境界說)을 내세워 정경의 융합, '조경(造)'과 '사경(寫)'의 문제, '유아지경'과 '무 아지경'의 구별, '격(隔)'과 '불격(不隔)'의 문제 등을 제기하여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밖에도 강희제(康熙帝)의 칙명으로 편찬된 『흠정사보(欽定詞』, 만수)의 『사율(詞)』, 과재(戊)의 『사림정운(詞林正韻』 등 주목할 만한 사율서(詞律書)와 사보(詞譜)가 많이 간행되었다.
중국문학의 향기: 중국문학 장르별 이해
김장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