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Chunshen of Chu used his wit to secure an alliance with Qin, but his later lack of decisiveness led to his downfall. This illustrates the lesson, "Hesitation invites disaster." Meanwhile, Lin Xiangru demonstrated wisdom and courage in the He Shi Bi incident, preserving Zhao's honor, and later reconciled with Lian Po, becoming lifelong friends. These stories highlight the value of wisdom, decisiveness, and loyalty.
결단하지 않으면 화를 입는다
춘신군 : 적은 용서하지 말고, 때는 잃지 말아야 한다
춘신군春申君은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이 헐歇이고 성이 황黃이다. 그 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초나라에서 경양왕頃襄王을 섬겼다. 경양왕은 그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여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 낸 적이 있었다. 황혈이 진나라에 있을 때 진나라가 초나라를 친다는 정보를 입수하 게 되었다. 그는 곧 진나라 소왕에게 글을 올려 초나라 공격을 중지하 도록 요청했다. “적은 용서하지 말아야 하고, 때는 잃지 말아야 한다는 옛말이 있습 니다. 오나라가 망한 것은 가까운 적인 월나라를 두고 먼 나라인 제나 라를 치다 월나라에 당한 것입니다. 이러할진대 진나라도 가까이 있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두고 초나라를 쳤다가는 틀림없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초나라와 친선을 맺고 한나라와 위나라를 치면 한 나라와 위나라는 망할 것이며, 당연히 그 연합국인 연나라와 조나라는 위태롭게 되고, 나중에는 제나라뿐만 아니라 초나라까지 흔들면 4개국 은 공격을 당하기 전 항복할 것입니다.” 글을 읽고 난 진나라의 소왕은 흡족하여 곧 초나라 공격을 중지시키고 초나라와 친선을 약속했다. 황헐이 초나라에 돌아와 우호의 약속을 보고하니, 초나라 왕은 다시 황혈과 태자 완完을 진나라에 보내어 우호의 인질이 되도록 했다. 그 뒤 초나라 경양왕이 위독하게 되었다. 볼모로 진나라에 잡힌 태자 완은 진나라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태자 완이 경양왕이 죽은 후에 초 나라로 돌아간다면 배다른 형제들이 왕의 자리에 오를 게 뻔하기 때문 이었다. 그렇게 되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황헐은 태자와 사이가 좋은 진나라 재상 응후를 만나 설득했다. “태자를 입국시켜 왕이 되게 한다면 그 공은 다 응후의 것이며, 태자 는 그 공을 잊지 못해 응후와 진나라를 극진하게 섬길 것입니다." 응후는 황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진나라 왕에게 가서 황헐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진나라 왕은 얼른 결정을 내리지 않 고 시간을 질질 끌었다. 속이 타는 것은 황혈과 태자였다. 할 수 없이 황 헐은 태자를 변장시켜 초나라에 보내고 자신은 진나라에 남았다. 태자 가 완전히 진나라 국경을 벗어날 때쯤 되어 황헐은 진나라 왕에게 나아 가 이 사실을 자백했다. “초나라 태자는 이미 돌아갔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한 일이니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진나라 소왕은 화가 잔뜩 나서 그를 사형시키려고 했다. 이때 응후가 나서서 말했다. “황혈이 신하된 도리로서 자신을 내던져 군주를 위하여 죽고자 한 행 동입니다. 초나라의 태자가 왕이 되면 황혈을 반드시 등용할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묻지 말고 그를 돌려보내서 진나라와 친교를 맺게 하는 것 이 좋을 줄 압니다.” 그래서 진나라 왕은 응후의 말을 듣고 황헐을 초나라로 돌려보냈다.
세상에는 뜻하지 않은 화禍와 복福이 찾아온다
황헐이 초나라에 돌아온 지 3개월 만에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이 즉 위하니, 그가 바로 고열왕考烈王이다. 고열왕 원년에 왕은 황혈을 재상 으로 삼고 춘신군에 봉하였으며, 회수淮水의 북쪽 땅 12현을 하사했다. 그 뒤 15년이 지나서 춘신군은 제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회수의 북쪽 땅 12현을 반납하고 제나라와 가까운 옛날 오나라의 터에 성을 쌓고 그곳 을 자신의 도읍으로 정했다. 조나라가 진나라와의 장평 싸움에서 대패하고 수도인 한단이 함락의 위기에 처하자 초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춘신군이 군대를 몰고 가 진나라의 포위를 풀어주었다. 춘신군이 재상으로 있은 지 8년에는 북쪽으로 노나라를 쳐 멸망시켰다. 이 무렵, 초나라는 다시 강성해졌다. 춘신군이 재상으로 있은 지 22년 만에 각 제후들과 합종하여 연합군 을 이끌고 진나라를 치려 했으나 오히려 함곡관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 일로 초나라 고열왕은 춘신군을 책망했고, 춘신군은 점점 정권에서 소 외되었다. 또한 이때에 위나라가 허許 땅을 갈라 진나라에 바치니 초나 라 수도 진陳과 진나라는 더욱 가깝게 되어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 다. 이에 초나라는 수도를 다시 수춘壽春으로 옮겼는데, 이후로 초나라 의 국력도 점점 약화되어 갔다. 한편 초나라 고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춘신군이 이를 걱정하여 많은 여인을 바쳤으나 그래도 왕의 소생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 가 생기지 않은 원인이 여자에게 있는 게 아니라 왕에게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원李園이라는 자가 이를 알고 먼저 자신의 여동생을 춘신군에게 바 쳤다. 이원은 여동생이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임신한 것을 알고 드디어 그의 여동생과 모의했다. 이원의 여동생은 춘신군을 설득했다. "나리께서 초나라 재상으로 국정을 맡은 지 오래되었으니 그동안 왕 의 친척과도 많은 원한을 진 셈입니다. 만약 왕이 죽게 된다면 나리의 몸이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확실하게 해두고 싶으시면 첩을 초 나라 왕에게 바치십시오. 그러면 왕은 반드시 첩을 총애할 것입니다. 첩이 하늘의 도움을 입어 아들을 낳게 되면 바로 나리의 아들이 왕으로 될 것이니, 초나라를 송두리째 얻게 되는 일입니다. 나리의 몸이 위험 하게 되는 것과 미래를 확실히 해두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선택이 겠습니까?" 춘신군은 매우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어 마침내 여인을 초나라 왕에게 바쳤다. 과연 일은 이원의 계략대로 되었다. 춘신군의 애첩이자 이원의 여동생이 아들을 낳으니 초나라 왕은 아 들을 태자로 삼고 그녀를 왕후로 삼았다. 마침내 이원이 초나라 왕의 신임을 받으니, 이원은 초나라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이원은 태 자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는 춘신군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목이 많아 함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은밀히 협사俠士(대장부다운 기상을 지 닌 사람)를 길렀다. 춘신군이 재상으로 있은 지 25년째 되던 해에 고열왕이 병에 걸렸다. 이때에 춘신군의 문객 중 주영이라는 자가 춘신군에게 말했다. “세상에는 뜻하지 않게 복이 올 수도 있고, 또 뜻하지 않게 화禍가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고, 기대할 수 없는 군주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군을 지켜줄 뜻밖의 사람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춘신군이 말했다. "무엇을 뜻하지 않은 복이라고 하오?" "군께서 초나라 재상이 되신 지 20여 년, 이름은 상국相國이라고 하나 사실은 초나라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병든 고열왕이 죽어도 어린 군주를 내세워 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왕이 장성하면 정권을 돌려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왕과 같 은 권력을 누리면서 초나라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을 뜻하지 않은 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뜻하지 않은 화라고 하오?" "이원은 군을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몰래 협사들을 기른 지 오래입니다. 초나라 왕이 죽으면 이원은 틀림없이 궁중에 먼저 들어 가 권력을 잡고, 다음으로 군을 죽여서 입을 봉할 것입니다. 이것이 뜻 하지 않게 다가올 화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뜻밖의 사람이라고 하오?" "군께서는 신을 낭중郎中(경호의 책임을 맡은 벼슬)의 지위에 임명하십시 오. 초나라 왕이 죽으면 이원이 반드시 궁중에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 때 신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군을 지켜줄 뜻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춘신군은 이원과의 사적인 정 때문에 주영의 말을 듣지 않았 다. 주영은 후환이 두려워 도망쳐 버렸다. 이로부터 17일 후, 고열왕이 죽자 과연 주영의 예언대로 이원은 먼저 궁궐에 들어와 협사들을 숨겨놓았다. 그리고 조정에 들어오는 황혈을 기다렸다가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보내 춘신군의 집안 사람 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이원이 자신의 여동생과 춘신군의 사이에 난 아들을 왕으로 세우니 이 사람이 유왕幽王이다. 처음에 춘신군이 진나라에서 소왕을 설득하고 인질로 잡혀 있던 초 나라 태자 완을 돌아오게 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지혜인가. 그러나 나 이 들어 이원에게 당하고 만 것은 사리판단이 어두워진 탓일 것이다. 사람들의 말에 '마땅히 결단을 내려야 할 때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만나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 들이지 않았음을 두고 한 말일까?
죽기를 각오하면 용기가 솟아난다.
인상여 염파 : 옥박이냐 보옥이냐, 돌도 다듬기 나름이다 초나라 사람 중에 변화卞和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보배로운 옥을 발견했는데, 그 이름을 '화씨벽和氏璧'이라 했다. 이 화씨벽이 보 옥이란 평가를 받기까지에는 이런 과정이 있었다. 변화가 산에서 옥박(다듬지 않은 거친 구슬)을 발견하여 초나라 여왕에 게 바쳤다. 그런데 감정결과 돌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이에 왕이 크게 노하여 변화의 왼쪽 발을 베어버리게 했다. 그후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다시 변화가 그 옥박을 바쳤다. 감정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에 변화는 자신의 오른쪽 발마저 잘리고 말았다. 문왕文王이 즉위한 후 변화는 너무 억울한 나머지 옥박을 발견한 산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했다. 문왕이 이 소문을 듣고 변화의 옥박을 다 듬게 해보니 천하의 둘도 없는 보옥이었다. 그리하여 이 보옥을 '화씨 벽'이라고 이름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화씨벽이 조나라 혜문왕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진나라 소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진나라의 15개 성과 화씨벽을 바꾸 자고 요청하였다. 조나라 왕은 근심했다. 화씨벽을 주자니 진나라에 속아 15개 성은 받 지 못할 것이 뻔하고, 화씨벽을 안 주자니 진나라가 공격해올 것이 뻔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나라에 가서 답변할 마땅한 인물도 없었다. 이때 조나라 환관의 우두머리인 목현이 자기가 데리고 있던 인상여藺 相如라는 사람을 추천하였다. 인상여가 혜문왕 앞에 불려나왔다. 인상 여가 혜문왕의 심중을 헤아리고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가 성을 주는 대신 화씨벽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조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잘못은 조나라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조나라가 화씨 벽을 주었는데도 진나라가 성을 주지 않으면 잘못은 진나라에 있게 됩 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을 비교하여 보니, 차라리 허락하셔서 잘못된 책 임을 진나라에 지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누구를 사자로 보내면 좋은가?"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신이 화씨벽을 받들고 가겠습니다. 만약 성을 받는다면 화씨벽을 진나라에 줄 것이지만, 성을 받지 못한다면 신은 어 떻게 해서든 화씨벽을 다시 갖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래서 조나라 왕은 인상여에게 화씨벽을 주어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인상여가 진나라 왕에게 화씨벽을 바치니 진나라 왕은 흡족한 미소 를 띠면서 좌우 신하들에게 화씨벽을 보였다. 인상여가 진나라 왕의 표 정을 보니 조나라 왕에게 성을 내줄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인상여가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화씨벽에 흠이 있습니다. 신이 그걸 알려드리겠으니, 돌려주소서.” 진나라 왕이 이 말을 믿고 인상여에게 돌려주자 인상여는 화씨벽을 받자마자 기둥에 기대섰다. 그리고 머리털이 갓을 밀어올릴 만큼 성을 내며 말했다. "우리 왕께선 대왕이 탐욕스러워 화씨벽만을 빼앗고 성과 교환하려 는 생각이 없음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신은 말하기를, '평 범한 사람도 사귈 때는 서로 속이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대국이 속이 겠습니까! 또 한낱 구슬 한 개 때문에 진나라와의 우호를 저버리는 건 옳지 않습니다'라고 아뢰어 이렇게 화씨벽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 런데 신이 화씨벽을 얻은 대왕의 표정을 보니 조나라에 성을 보상할 의 사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다시 화씨벽을 제 손에 넣 은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신을 협박하여 화씨벽을 빼앗고자 한다면, 신의 머리는 지금 이 화씨벽과 함께 기둥에 부딪쳐 부서질 것입니다." 인상여는 기둥을 노려보며 손에 쥔 화씨벽을 깨뜨리려고 했다. 진나 라 왕은 화씨벽이 깨질까 두려워 곧 담당 관리를 불러서 지도를 펼치게 한 다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서부터 15개의 도성을 조나라에 주어라." 그러나 인상여는 진나라 왕이 거짓말로 속여서 화씨벽을 빼앗으려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조건을 달았다. “화씨벽은 천하의 보물입니다. 조나라 왕께서도 이 구슬을 보내실 때 5일 동안 목욕재계하여 예를 치렀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도 5일 동안 목욕재계하시고 '구빈九賓의 예'(천자가 귀빈을 접대하는 예)를 조정에 베 푸십시오. 그러면 신이 비로소 화씨벽을 올리겠나이다.” 할 수 없이 진나라 왕이 인상여의 청대로 하겠다고 하자, 인상여는 수행원을 시켜 비밀리에 화씨벽을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진나라 왕이 구빈의 예를 마치고 다시 인상여를 불러들였다. 인상여 는 진나라 왕에게 사실대로 말하며 죽음을 청했다. 이에 진나라 왕의 신 하들이 당장 인상여를 끌고 가 처형하려고 하자 진나라 왕이 제지했다. "지금 인상여를 죽인다고 해도 화씨벽은 끝내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조나라와의 우호만 끊어질 뿐이니, 그를 후대하여 조나라로 돌려보내 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인상여는 조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조나라 왕은 인상여가 화씨벽을 흠 없이 도로 가져왔고 또한 사자로 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지 않게 했다는 공을 인정하여 인상여를 상대부 上大夫로 삼았다. 진나라가 성을 조나라에 주지 않았으므로, 조나라도 끝내 화씨벽을 진나라에 주지 않았던 것이다.
문경지우가 된 인상여와 염파
그러나 그후 진나라가 조나라를 번번이 공격하여 괴롭힌 뒤 수교 명 목으로 서하西河 남쪽 면지 땅으로 조나라 왕을 불러냈다. 조나라 왕이 겁을 먹고 가지 않으려 하자 인상여가 함께 가기로 했다. 드디어 조나 라 왕이 진나라 왕과 면지에서 회합했다. 진나라 왕은 술자리가 무르익 자 이렇게 말했다. "과인이 들으니, 조나라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청 컨대 비파를 한 곡조 연주하여 주십시오." 조나라 왕이 비파를 타니, 진나라의 궁실 사관이 앞으로 나가 '모년 모월 모일에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과 만나 술을 마시며 조나라 왕을 시켜 비파를 타게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자 인상여가 앞으로 나아가 말 했다. “조나라 왕께서 들으니, 진나라 왕께선 음악에 능하다고 합니다. 장 구를 진나라 왕께 올리니 연주하시어 서로 즐겼으면 합니다.” 진나라 왕은 성을 내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인상여가 장구를 올리 고 꿇어앉아 진나라 왕에게 청했다. 진나라 왕이 여전히 거부하자 인상 여가 조용히 말했다. “왕과 신의 거리가 다섯 걸음 안이어서, 제 목의 피로 대왕을 적실 수 도 있습니다.” 이 소리에 진나라 왕도 어쩔 수 없이 장구를 쳐야 했다. 그러자 인상 여가 조나라 궁중 사관을 불러‘모년 모월 모일에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을 위해 장구를 치다'라고 쓰게 했다. 이에 질세라 진나라의 군신들이 말했다. “조나라는 15개 성을 바치어 진나라 왕의 장수를 축복해주시오." 인상여가 이를 맞받아 치며 말했다. “진나라는 수도 함양을 바치어 조나라 왕의 장수를 축복해주시오.” 진나라 왕은 술자리를 마칠 때까지 끝내 조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조나라에 무사히 돌아온 조나라 왕은 인상여의 공이 크다고 하여 상 경上卿의 벼슬을 내렸다. 이때 조나라에는 염파廉頗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조나라 혜문왕 때에 제나라를 크게 무찌른 인물이다. 그의 용맹스 러움은 이미 제후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인상여의 지위 가 높아지자 장군 염파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조나라의 장수로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큰 공을 세웠 다. 이에 반해 인상여는 한갓 입과 혀만을 놀렸을 뿐인데, 이제 지위가 나보다 위에 있게 되었다. 인상여는 본래 비천한 출신이 아닌가. 내 부 끄러워 도저히 그보다 아래 지위에 있을 수가 없다. 내 반드시 인상여 를 보면 모욕을 안겨줄 것이다." 인상여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후로 염파 보기를 꺼려했다. 어느 날이었다. 인상여가 외출 길에 마주오는 염파를 발견하고 먼저 피해 숨어버렸다. 주군의 비겁한 모습을 본 인상여의 문객들이 인상여 곁을 떠나려고 했다. 인상여는 그들을 말리면서 물었다. "그대들은 염장군과 진나라 왕 중 누가 더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하 오?" “그야 물론 진나라 왕이 더 두렵지요.” "그런 진나라 왕도 이 몸이 꾸짖어 부끄러움을 주었소이다. 내가 비 록 늙고 둔하다 하나 어찌 염장군을 두려워하겠소? 내가 깊이 생각해보 건대 진나라가 조나라를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장군이 있기 때문이오. 만약 지금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면 조나라는 온전하지 못 할 것이오. 내가 이렇게 피하는 것은 국가의 위기를 먼저 생각하고 사 사로운 원수는 뒤로 돌리려는 생각 때문이외다.” 이 말을 전해 듣자마자 염파는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가시 회초 리를 짊어진 채 인상여의 문에 와서 사죄하며 말했다. "실로 비천한 사람이 상경의 큰 뜻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문경지우刎頸之友가 되었다. 쥐구멍 안에서 싸움은 용감한 자가 이긴다 조사趙奢는 조나라의 토지세를 징수하는 관리이다. 그가 조세를 징수 하는데, 평원군平原君의 집에서는 조세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조 사는 법에 따라 평원군의 집에서 일을 보는 사람 9명을 죽였다. 평원군 은 화가 나 조사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창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평원군은 오히려 조사를 왕에게 추천하 였다. 왕이 그를 등용하여 세금을 관리하게 하니, 세금이 공평하게 징수되 고 백성들은 부유하게 되었으며 나라의 창고는 가득 차게 되었다. 이때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나라 땅 연여에 진을 쳤다. 조나라 왕이 연여를 구하려고 염파와 악승樂乘에게 물었다. "길이 멀고 험난하여 구원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고개를 흔들었다. 조나라 왕은 또 조사를 불러서 물었다. 그러나 조사의 대답은 좀 달랐다. “길이 멀고 험난한 데다 지역이 협소하므로 그곳에서 싸운다는 것은 마치 쥐 두 마리가 쥐구멍 속에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 연히 용감한 장수가 이길 것입니다." 왕은 조사를 장수로 삼아 연여를 구해오라 명하였다. 조사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 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연여를 포위에서 풀었다. 조나라 혜문왕이 그 공을 인정해 조사를 마복군馬服君에 봉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에 조나라 혜문왕이 죽고 아들이 임금이 되니 그가 효성왕孝成王이다. 혜문왕이 죽은 지 7년이 지났을 때 조나라 군대가 장 평에서 진나라 군대와 마주했다. 이때 조사는 이미 죽고 없었으며, 인 상여는 병이 위독했다. 조나라에서는 염파를 장수로 삼아 진나라와 맞 서게 했는데, 염파는 철옹성을 구축한 채 나아가 싸우지 않고 지키기만 하였다. 이때 진나라가 이간책을 썼다. "진나라가 무서워하는 것은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다." 이 말은 조나라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나라 왕은 이 말을 믿고 조 괄을 새 장수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자 병중에 있던 인상여가 말렸다. “왕께서는 소문만 듣고 조괄을 쓰려 하십니다. 조괄의 능력은 아교풀 로 고정시킨 거문고의 줄을 타는 재주와 같습니다. 조괄은 한낱 자기 아버지가 남긴 병법서를 좀 읽었을 뿐, 중대한 사태의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은 미숙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인상여뿐만 아니었다. 조괄의 어머니도 육친의 정 보다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먼저 생각했기에 자식이 장수가 되면 안 된 다고 조나라 왕에게 간했다.그러나 왕은 끝내 여러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조괄을 장수로 삼았 다. 결국 조괄이 이끄는 조나라 군대는 장평 싸움에서 백기의 진나라 군대에 크게 패해 수십만 명이 생매장당하는 등 45만 명의 병사가 목숨 을 잃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 해에는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 하였는데, 다행히 함락 직전에 초나라와 위나라 제후의 구원에 힘입어 비로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진나라에 당한 패배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 번에는 연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왔다. 조나라에서는 염파를 장수로 삼아 연나라를 물리치게 했다. 염파가 연나라 군대를 호 땅에서 크게 물리치고 연나라를 포위했다. 연나라가 5개 성을 떼어주겠다며 강화를 청하였으므로 조나라가 이를 허락했다. 조나라 왕은 염파에게 위문尉文 땅에 봉하여 신평군信平君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지난날 염파가 장평 전투에서 해임되어 권력을 잃고 돌 아왔을 때 이야기다. 그의 문객들이 염파가 해임됐다는 사실을 알고 죄 다 염파를 떠나가더니 그가 다시 등용됐다는 사실을 알고 금세 다시 모 여들었다. 염파가 화를 내며 말했다. "객들을 몰아내라.” 그러자 문객 중 어떤 사람이 말했다. "아아, 군君이여! 세상 이치를 그렇게 모르십니까? 대체로 사람들은 저잣거리에서 이익을 좋은 것처럼 사겁니다. 군에게 권세가 있으면 좆 고, 군에게 권세가 없어지면 가버립니다. 이것이 본래부터의 이치이거 늘, 무엇을 원망하십니까?" 그로부터 6년 뒤 조나라는 염파에게 위나라의 번양繁陽을 치게 하여 함락시켰다. 효성왕이 죽고 그의 아들 도양왕悼襄王이 뒤를 이으니 염파의 세력도 한풀 꺾이게 되었다. 도양왕은 염파를 물러나게 하고 악승을 장수로 삼 았다. 염파가 화를 참지 못하고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도망쳐 버리 고, 이 때문에 염파도 조나라에 남아 있지 못하고 위나라로 도망가야 했다. 염파는 위나라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위나라의 신용을 얻지 못했 다. 그 사이 조나라는 진나라의 공격을 자주 받아 괴로움을 많이 당했 다. 조나라 왕은 염파를 다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염파의 원수인 곽개鄭開가 염파를 모함하였다. “염파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식사는 잘하는 편입니다. 그러 나 저와 자리를 같이 하는 동안에도 자주 화장실을 드나들었습니다.” 조나라 왕은 염파가 늙고 쇠약하여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나라는 염파가 위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정중히 맞아들였다. 염파는 마지못해 초나라에서 장수가 되었으 나 한 차례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 “조나라 군사를 지휘하고 싶구나." 염파는 조나라를 그리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다 결국 이국 땅 수 춘壽春에서 생을 마쳤다. 죽음을 각오하면 반드시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죽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 여가 화씨벽을 안고 기둥을 노려본 것이라든지, 면지의 회합에서 진나 라 왕의 좌우 신하들을 꾸짖은 행동은 그 상황으로 보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자는 비겁하여 감히 그러한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인상여는 용기를 내었기 때문에 위엄을 적국에 떨쳤고, 조나 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하게 양보하여 그 이름을 태산보다 더 크게 했다. 진실로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소설보다 재미 있는 사기열전
지은이 : 사마천
편역자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