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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재미있는]사기 열전_82

Confucius was born in 551 BCE in the state of Lu and developed a passion for learning despite growing up in difficult circumstances.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仁" (benevolence) and moral governance, and entered politics, but his philosophy was not accepted in the political realities of his time. He attempted to realize his ideals by teaching his disciples, but he faced limitations due to the political environment. His notable disciples, Yan Hui and Zaiwo, were known for their humility and sense of justice, respectively. Confucius' philosophy became the foundation of Chinese thought and greatly influenced future generations.

인의 정치를 실현하려 고행의 길을 택하다.

 

공자 : 짧기만 했던 공자의 정치 시대

공자孔子는 노나라 양공襄公 22, 그러니까 기원전 551년에 창평향 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송나라의 왕족이었는데, 왕위 경쟁에서 밀려나 노나라로 왔다고 한다. 공자의 이름은 구도이다. 공자가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 었다. 공자의 어머니가 이구산泥丘山에서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눈에 두드러지게 머리에 혹처럼 불룩 튀어나온 데가 있었다. , 짱구 였다. 그래서 언덕 구도 자를 따서 구라고 이름지었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중니仲尼였다. 공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 숙량흘이 죽었다. 숙량홀은 64세였을 때 소녀티를 갓 넘긴 안징재와 결혼하였다. 그는 이미 결혼 경력이 있어 딸 아홉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이 절름발 이여서 후계자로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안징재를 본 순간 아들 욕심이 생겨 결혼하여 공자를 낳았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한 사실이 부끄러워 공자에게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곳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묘소조 차 몰랐던 공자는 그런 사실이 응어리로 남아 어릴 때에는 제사 그릇을 놓고 제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지내기도 했다. 어른이 된 뒤에는 가정 사정이 어려워 대부 계씨의 창고지기로 지냈다. 그후에는 목장에서 가 축을 관리하는 일을 했는데, 공정한 일처리로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학문에 뜻이 있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자는 좋 은 스승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가르 침을 청했다. 그렇게 수 년을 노력한 결과 공자 자신도 차츰 노나라에 서 스승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공자는 주나라에서 예禮에 대해 배우고, 일행과 함께 노자老子를 방문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철학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철학 의 핵심은 인선이다. 공자가 주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그의 제자는 점점 많아졌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현실 정치에 반영하려고 부단히 노력했 다. 그러나 노나라의 질서가 계손씨, 맹손씨, 숙손씨 삼대부의 내란으 로 무너지자 공자는 제나라로 갔다. 이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대부 고소자高昭子의 가신家臣으로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 제나라 군주 경공이 정치에 관해 공자에게 물었다.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 답게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경공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 말이 맞소,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그 본분을 다하지 아니하 면 군주 된 신분으로 내 어찌 입에 음식을 댈 수 있겠소.” 그후 경공이 공자를 다시 불러 물었다. "어떻게 해야 선정善政할 수 있겠소?" 공자가 대답했다. “선정은 국비國費를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경공은 대답에 만족하여 공자를 중용하려고 했으나 재상 안영이 반 대했다. "대개 유학자는 신하로 부리는 데에는 적당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들은 공리공론만 일삼고 고집이 세며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 리로서도 부적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례의식 등 허례허식을 백성 들에게 강요하여 가산을 탕진하도록 만드는 등 백성들에게는 해악의 존 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 정치하는 사람을 나쁜 길로 빠뜨립니다. 벼슬을 구걸하려고 빚을 얻어 떠돌아다니면서 군주를 현혹하지요. 공자 는 쇠약해진 주 왕실의 전통을 계승·전수하겠다며 옛 성인들의 가르침 을 들먹이며 예복이니 의식의 행렬이니 조정의 예식 등에 대해 귀찮게 떠들어댑니다. 사람이 한평생 배워도 공자가 말하는 학문과 의식의 예 를 습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공자를 중용하여 나라의 풍속을 뜯어고치고 서민의 뜻을 바꾸는 것은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뿐입니다.” 그 뒤에도 제나라의 귀족들이 공자를 계속해서 모함했고, 경공 또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공자는 예禮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폐만 끼치는, 필요치 않은 존재임을 깨달은 공자는 제 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성인은 당대 사람들의 질시를 받고

공자의 나이 42세 때 노나라에 또 내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공자는 정치적 뜻을 일단 접고 학문에 힘써, 시詩·서書·예禮·악樂에 관한 연 구를 계속했다. 이후 문하생이 급속히 늘어나 먼 지방에서까지 찾아오 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공자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하는 사이 그의 나이는 어느덧 50세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원숙한 경지에 이르고 제자들은 더욱 많아 졌다. 그동안 공자는 자신의 철학을 정치에 반영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다. 이럴 즈음 공산불유라고 하는 반란자가 공자를 초청하였다. 누구보 다도 나라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반란자들을 미워했던 공자의 반응이 의외였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라는 조그만 땅에서 일어나 마침내 주 왕국을 건설했다. 나 역시 그를 찾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뜻 을 이루고 싶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떠나려 하자 그의 제자 자로子路가 만류했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 정치를 맡긴다면 주나라 조정의 권위를 회복한 평왕처럼 일을 펼치고 싶다." 그러나 제자들의 간곡한 만류로 초청에 응하지 못했다. 그후 공자는 노나라에서 중도라는 고을의 읍재邑宰로 등용됐다. 공자 는 1년 만에 중도를 모범적인 고을로 만들었다. 공자는 이 일로 인정을 받아 마침내 나라의 법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정공定公 10(기원전 500) , 노나라는 제나라와 수호 조약을 맺었 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제나라에서 대부大夫 여서가 경공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공자가 중용되면서 노나라는 날로 강성해지고 있습니다. 이웃나라 에 현인이 있으면 제나라가 위험합니다.” 공자를 잘 알고 있던 제나라 경공은 일리가 있다 싶어 노나라에 사신 을 보내 정공을 친선 회담 명목으로 협곡峽谷으로 불러냈다. 노나라 정 공이 호위대를 동반하지 않고 출발하려 하자 공자가 만류했다. “문사文士의 회합에는 반드시 무사武士를 동반하고, 무사의 회합에는 반드시 문사를 데리고 가야 합니다. 옛부터 제후는 이웃나라를 방문할 때 항상 호위대를 거느리고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노나라 정공은 공자와 함께 무사를 대동하고 회의 장소인 협곡으로 떠났다. 협곡의 회의장에는 단壇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공과 경공이 단상으로 올라가서 술을 주고받는 예禮를 마치자 제나라 관리가 나와 아뢰었다. “양국의 우호를 경축하는 뜻에서 음악을 연주하겠습니다.” 제나라 경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요란한 북소리가 울리며 창과 칼을 든 무용수들이 앞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공자는 위험을 직감하 고 얼른 계단 위로 올라가 넓은 소매를 걷어올리고 말했다. “친선 회담을 축하하는 마당에 오랑캐의 음악이라니, 너희들은 썩 물 러나지 못할까!" 그러나 그들은 물러가지 않고 제나라 경공과 재상 안영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이에 공자가 시선을 돌려 경공과 안영을 힐책하듯 주시하니 그제야 경공이 무용수들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무용수들이 물러가 자 제나라 관리가 다시 나와 청했다. “그럼, 이번에는 궁중 음악을 연주할까 합니다.” 다시 경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광대와 난쟁이들이 춤을 추며 나왔다. 이들 역시 노나라 정공을 해치려는 속셈이었다. 공자가 다시 한 번 강 력하게 요구했다. “비천한 몸으로 제후를 우롱하는 행위는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당장 조처해주십시오." 그러자 광대와 난쟁이들은 그 자리에서 끌려나가 처형되었다. 제나라 경공은 공자를 도저히 당할 수가 없음을 깨닫고 제나라로 돌 아가고 말았다. 경공은 조정에서 신하들을 꾸짖었다. "공자는 군자의 도로 노나라 임금을 보필했다. 하지만 그대들은 오랑 캐의 도로 과인을 가르쳐 군주로서 면목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떨어진 체면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한 신하가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소인은 과오를 범하면 말로써 수습하지만 군자는 행동으로 수습해 야 합니다. 그러니 주군께서 노나라 군주에게 사죄하시려거든, 행동으 로 보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경공은 일찍이 노나라에서 빼앗았던 땅들을 되돌려주고 정공 에게 사신을 보내 사죄의 뜻을 전했다. 대사구 공자는 노나라 정공을 위협하는 삼대부의 권한을 환수하여 군신간의 질서를 명확히 하여 노나라를 안정시켰다. 이 공으로 공자는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56(정공 14, 기원전 496)였다.

끝없는 고행의 길

어느 날 자로가 보니 공자의 얼굴이 희색만면했다. 이에 제자가 비꼬 듯 공자에게 한마디 던졌다. “군자는 희로애락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공자의 대답이 의외였다. "군주의 신임을 받아 백성들 위에 서면 즐겁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공자는 우선 노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한 대부 소정묘를 처형하고 정 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재상이 된 지 석 달이 지나자, 상인들은 속 임수를 쓰지 않고 정직하게 물건을 팔았고, 남녀가 길을 갈 때는 각각 다른 길로 다녔으며, 길거리에 떨어진 남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어 졌다. 또한 노나라를 방문하고 싶어하는 외국인은 관리의 허락 없이 자유롭게 출입했다. 공자의 정치력에 의해 날로 노나라의 규범이 잡혀간다는 소문을 들 은 제나라 경공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공자를 놔두었다간 노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웃인 우리 제나라에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제나라는 노나라를 무너뜨리려 내부 교란술을 썼다. , 춤잘 추는 미녀 80명을 명마 120마리와 함께 노나라로 보낸 것이다. 과연 제나라의 의도대로 노나라 정공과 계환자季桓子는 정사는 돌보 지 않고 제나라에서 온 처녀들의 무용에 넋이 빠지니 나라의 기강이 해 이해지고 문란해졌다. 이를 지켜보면서 공자는 시름에 빠져 마침내 노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공자는 벼슬 자리를 내놓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국 노나라를 등지 고 위衛나라로 갔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도 질시하는 이들의 모함을 받 아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진陳나라로 향했다. 진나라로 가는 도중 광이라는 고을을 지날 때였다. 그런데 광의 고을 사람들이 공자 일행을 포위했다. 전에 양호라는 자가 광 사람들을 탄압 한 적이 있었는데, 공자의 인상착의가 양호와 비슷해 오인한 것이다. 공자가 포위를 당한 채 곤경을 겪기를 5일째. 그런데도 공자는 자신 의 안위는 신경쓰지 않고 뒤따라오고 있는 제자 안회만을 걱정했다. 공 자가 안회의 얼굴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피살된 줄 알았도다." 안회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데, 어찌 제자가 죽을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보며 공자는 의연히 이렇게 말했다. "문왕의 이상적인 정치를 전수해야 할 천명이 내게 있다. 이러한 막 중한 책무가 있는데, 어찌 죽을 수 있겠는가. 천명대로라면 광 사람들 이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광 사람들의 오해가 풀려 공자는 반겨주는 이 없는 고행의 발길을 계속할 수 있었다.

공자의 빼어난 제자들

안회자로 : 스승을 슬프게 한 제자, 안회

공자의 제자인 안회回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子淵이며, 공자 보다 서른 살이 적었다. 안연이 인선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예의의 바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공자는 안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질구나, 회여! 한 그릇의 밥과 표주박 한 그릇의 물로 더러운 빈민 굴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남들은 수치스럽게 생각할 텐데 안회는 유유히 즐기는구나. 어찌 보면 안회는 질문하는 것이 없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면 생활 자체가 도이다. 회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또 안회 앞에서 직접 칭찬한 적도 있었다. “임금이 등용하면 벼슬하여 도를 행하고, 임금이 버리면 숨어 살면서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로구나!" 학문에 몰두했던 안회는 스물아홉에 백발이 되더니 젊은 나이에 세 상을 떠났다. 공자는 제자의 죽음에 통곡했다. “안회가 내 문하에 들어온 뒤부터 제자들과 더욱 친근해졌는데.......”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 누가 가장 학문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가 학문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는 화를 남에게 옮기는 일이 없었으며, 똑같은 과실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 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천하는 양심, 자로

자로子路는 노나라 변卞 땅 사람으로 공자보다 아홉 살이 적었다. 자 로는 심지가 곧았으며 성격이 거칠고 용맹했다. 그는 수탉의 깃으로 만 든 관을 쓰고 수퇘지의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 공자의 문하에 들어오기 전, 그는 한때 공자를 업신여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가 예를 베풀어 서서히 자로를 바른 길로 인도하자, 스스로 유생의 옷차림을 하고 예물을 올려 공자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의 도리는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해야 할 도리를 앞장서서 하고 백성들의 일을 위해 힘써 노력하는 것이다." 다시 자로가 물었다. “그 외에 더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시종일관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성격 급한 자로는 모든 의문을 한꺼번에 다 풀려는 듯 공자에게 이것 저것 다시 물었다. "군자도 용맹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의義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 가 없으면 나라가 문란해지고, 소인이 용맹함을 좋아하고 의가 없으면 도적이 되느니라.” 자로는 한 가지 교훈을 들으면 듣는 즉시 실천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 격이었다. 마치 좋은 말을 실천하기도 전에 다른 새로운 교훈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자로의 성격을 공자는 늘 걱정했다. “한마디의 말로 소송을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로일 것이다. 그는 나보다 용기가 있으나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줄 모른다. 내가 걱정하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자로처럼 강직하고 용맹이 지나친 사람은 제 명대로 살다가 죽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늘 다음과 같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 떨어진 헌 무명 도포를 입고서 값비싼 옷을 입은 귀인과 대면하 는 일이 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자로이다. 도가 땅에 떨어 진 세태에 자로가 도를 깨달은 경지를 비유해볼까? 그는 마루에 올라왔 으나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자로는 공자를 따라 천하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 노나라 대부 계강자 가 공자에게 물었다. "자로는 어진 사람입니까?"공자가 대답했다. “그가 어진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전차 천대를 가진 나라에서 조세 업무를 맡아 다스릴 만한 정치적 역량은 있습니다." 자로가 위衛나라 포蒲 지방의 대부가 되어 공자에게 하직하러 왔을 때, 공자가 이렇게 충고했다. “포 지방은 워낙 드센 무리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 그러니 내 너 에게 충고하노라. 너 자신 먼저 몸가짐을 공경하게 하면 그들의 용맹을 제어할 수 있고, 너그럽고 바르게 행동하면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 다. 이 두 가지를 명심하여 다스리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으리라."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쓰고 죽는다 위나라 영공靈公에게는 총애하는 부인이 있었는데, 남자南子라고 불 렀다. 영공의 태자 괴외는 남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여 국외로 달아났 다. 그리하여 영공은 태자를 폐하고, 손자인 첩輒을 그 자리에 세웠다. 영공이 죽자 위나라에서는 괴외의 아들 첩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출공出公이다. 출공이 왕위에 오른 지 12년 동안 그의 아버지 괴외는 국외에 살면서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 무렵 자로는 위나라 대부 공회의 읍 재邑宰로 있었다. 대부 공회는 국외에 있는 괴외를 왕으로 모시고자 했다. 드디어 공회 가 괴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성으로 쳐들어가니 출공은 노나라로 달 아났다. 그리고 괴외가 임금이 되니 그가 장공莊公이다. 공회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자로는 그 소문을 듣자마자 달 려갔다. 자로는 때마침 위나라 성문에서 나오던 자고子羔(공회의 가신)와 마주쳤다. 자고가 자로에게 말했다. “출공은 달아나 버리고 성문은 이미 닫혔으니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 니다. 공연히 정치적인 난에 말려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로는 굽히지 않았다. "아니오. 녹을 얻어먹는 자는 주군의 환란을 피하지 않는 법이라오." 자로는 결국 성문이 열린 틈을 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괴외가 공회와 함께 대臺로 올라왔다. 자로가 대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왕께서는 어째서 반역자 공회와 자리를 함께합니까? 청컨대 그를 제 손으로 죽이게 해주십시오." 괴외가 들어주지 않자 자로는 불을 놓아 대를 태우려고 했다. 괴외가 두려워 장수 두 명을 내려보내 자로를 공격하였다. 그들의 공격으로 자 로의 갓끈이 끊어졌다. 치명상을 입고도 자로는 이렇게 외쳤다.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 자로는 갓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공자는 위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슬프다, 자로가 죽겠구나!" 하였더니, 과연 얼마 안 되어 자로가 죽은 것이다. 공자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로를 제자로 얻은 뒤부터는 그가 세상의 악을 다 없앴는지 악한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얼마 뒤 위나라 장공의 사자가 공자를 찾아와 아뢰었다. "이번에 새로 왕위에 오르신 임금께선 부자夫子(만인의 스승에 대한 존 칭)를 매우 공경하며 사모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임금께서 특별한 음식 을 부자에게 보내셨습니다. , 받아주십시오." 공자는 일어나 재배再拜하고 음식이 들어 있다는 단지를 받았다. 그 단지 뚜껑을 열어본즉 것으로 담근 고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공자가 그 고기젓을 보고는 제자에게 말했다. "속히 뚜껑을 덮어라." 공자가 사자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제자 자로의 살이구려!" “그렇습니다. 부자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나이까?" “그렇지 않으면 위후衛侯가 나에게 보낼 게 없지요." 공자는 제자들을 시켜 산에다 그 단지를 잘 묻게 했다. 늙은 공자가 탄식했다. “내 항상 자로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할까 염려했더니 결국 비명非命에 죽었구나! 그후 공자는 결코 것으로 담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소설보다 재미 있는 사기열전

지은이 : 사마천

편역자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