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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문학 작품의 이해편]중국_11#61

중국문학의 향기_11

The prose of the Wei, Jin, and Southern-Northern Dynasties developed an independent and romantic style as Confucianism declined. Notable works include Ruan Ji's "Biography of the Great Man" and Wang Xizhi's "Preface to the Orchid Pavilion." The prose of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showed different characteristics, with a rise in literary awareness and criticism. In later periods, the Tang Dynasty's Classical Prose Movement and the Ming Dynasty's prose saw debates between tradition and innovation, reflecting various trends in literary style and content.

위진남북조 산문

위진의 산문은 점점 변려화(騈儷化)되는 특성을 띠었는데, 유학이 쇠미함에 따라 유학 경전의 굴레에서 벗어나 산문의 독립성을 자각하고 순문예적인 경향을 추구했으며, 낭만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완적(阮籍: 210~263)의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 왕 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 도연명의 「도화원기」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난정집서」

영화 9(353), 해는 계축년이요, 늦은 봄 초에 회계군 산음현의 난 정에 모여 목욕재계하는 의식을 행했다. 여러 어진 이들이 다 이르고 젊은이와 어른들이 다 모였다. 이 땅엔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와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가 있고, 또 맑은 냇물과 급한 여울이 좌우로 비추며 둘러섰다. 물을 끌어들여서 잔을 곡수(曲水)에 띄우고 차례 대로 줄지어 앉으니, 비록 관현악의 성대함은 없지만 한 잔 술에 한 수 읊는 것이 또한 그윽한 마음을 활짝 펼치기에 충분하다. 이 날, 하늘은 명랑하고 날씨는 맑으며 봄바람이 화창하니, 우러러 우주의 위대함을 보고 구부려 만물의 성대함을 살핀다. 눈을 놀리고 생각을 치달리는 것으로 보고 듣는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니 진실로 즐길 만하다. 대저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한 세상을 부침(浮沈)하면서, 혹은 모든 회포를 꺼내 한 방안에서 마주보며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은 의탁하는 바에 의지하여 형체의 밖에서 방랑하기도 한다. 비록 취하고 버림이 만 가지로 다르며 조용하고 조급함이 같지 않지만, 그 만나는 바에 기뻐하여 잠시나마 자신에게 체득함이 있으면, 흔쾌히 스스로 만족하여 늙음이 장차 이르는 줄도 모른다. 그러다가 자기가 취사 선택한 바가 이미 권태롭게 되면, 감정이 일에 따라 변하여 감개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아까 기뻐하던 것이 잠깐 사이에 이미 옛 자취가 되고 마니, 이로써 감회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목숨의 길고 짧음은 조화의 이치를 따라 마침내 죽음을 기약함에 있어서랴! 옛 사람이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일이다"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오! 옛 사람들이 감흥을 일으킨 연유를 볼 적마다 마치 부절()을 맞춘 것처럼 일치하니, 일찍이 문장을 보고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 으나 이를 마음속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진실로 죽음과 삶을 한 가지로 여기는 것이 허망한 일이고 장수와 요절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망령된 짓임을 알겠다. 훗날에 오늘을 보는 것이 또한 오늘에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슬프도다! 그러므로 이 때 모인 사람들을 차례대로 적고 그들이 술회한 바를 기록해 두니, 비록 세 상이 달라지고 일이 바뀐다 하더라도 감회를 일으키는 까닭은 그 이치가 한 가지일 것이다. 뒤에 보는 사람은 또한 장차 이 문장에 감회가 있을 것이다.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會於會稽山陰之蘭亭,修禊事也.群賢畢 至少咸集地有崇山峻嶺,茂林修竹.又有淸流激湍,映帶左右.引以 爲流觴曲水,列坐其.雖無絲竹管絃之盛,一觴一詠,亦足以暢敍幽情. 是日也, 天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游目騶 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晤言一室之內, 或寄託, 放浪形骸 之外趣萬, 靜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老 之將至, 及其所之,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向之所欣, 俛仰之間, 陳迹, 猶不能不以之 況修短隨化, 終期於盡. 古人云 : "死生亦大矣." 每覽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喩之於懷, 固知一死 生爲虛誕, 齊彭殤爲妄作, 後之視, 亦由之視昔, 悲夫! 故列敍時人, 錄 其所述,雖世殊事異,所以興懷,其致一也.後之覽者,亦將有感於斯文

 

남조의 산문은 역사서에서 뛰어났는데, 『사기』,『한서』,『삼국지』와 함께 4(四史)로 불리는 『후한서』를 편찬한 범엽()과 『송서()』를 편찬한 심약()이 이 시기의 주요 작가이다. 북조의 산문은 남조보다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안지추(之推 531~591)가 지은 『안씨가훈(顔氏家訓)』은 문장이 질박하고 평이하며, 「문장편」에서는 제량의 화려한 문학사조에 대한 반대를 제기했다. 역도원(道元?~527)이 지은 경주 여러 물길의 산수경치와 그 지역의 전설 · 풍물을 묘사한 것으로 청신하고 생동감이 넘치며, 당대 유종원(柳宗元)의 산수유기문에 영향을 미쳤다. 양현지(楊之)가 지은 『낙양가람기 (洛陽伽藍記)』는 당시 번영했던 낙양의 사찰과 주민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것으로 문장이 수려하며 묘사가 상세하되 번잡하지 않다. 한편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어 그에 따른 문체와 작품이 풍부 해졌고, 문학에 대한 자각으로 문학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문학을 논하는 전문가들이 자연히 생겨났다. 이에 따라 비평가들에 의하여 작가와 작품을 비평하고, 문체를 변별하 고, 창작방법을 토론하는 전문서가 계속 나오게 되었다. 주요 작품에는 『전론(),「논문(論文), 『문부(文賦), 「문심조룡(文心雕龍), 『시품(詩品), 『문선(文選)』 등이 있다. 조비(曹丕)가 지은 「논문」은 문학의 지위를 긍정하고 그 의의 및 작용을 높이 평가했으며,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풍격을 강조했다. 또한 문체를 주의(奏議). 서론(書論명뢰(시 부() 4류로 나누고 각각의 특징을 제시했으며, 귀고천금(貴 賤)하는 문학 관념에 반대했다. 「논문」은 위진남북조 문학비 평의 시초로서 후세 문학비평에 많은 논의의 대상을 제공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육기가 지은 『문부』는 작가의 구상력, 대상과 표현의 상관 성, 형식보다는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창작과정상 주제의 명확성, 작품 구성의 치밀성, 수식과 성률의 중요성을 논했다. 또한 문체를 시(),(),(),,(),(),(),,,() 10류로 나누고 각각의 특징을 논했다. 『문부』는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공용론에서 진일보하여 문학의 본질문제를 논의함으로써 후대의 유협()과 종영)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유협(: 464?~521?)이 지은 「문심조룡』은 서문격인 「서지」를 포함하여 총 50편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크게 원리론,문체론,창작론,비평론으로 나눌 수 있다. 원리론에서는 천지자연의 문채는 ''이며 문학은 이러한 자연의 도를 바탕으로 하여 생산된다고 주장했다. 즉 문학창작은 천지자연의 오묘한 조화와 같다고 여긴 것이다. 문체론에서는 문체를 총 33류로 분류하고 각 문체에 대한 명확한 정의, 연원과 변천, 서로 다른 풍격등 문체의 유별(流別)을 논했다. 창작론에서는 사고력·구상력의 작용과 배양, 내용과 형식의 조화[質並, 다양한 수사기교 등을 논했다. 비평론에서는 풍격의 특성과 우열, 작가가 갖추어야 할 재주와 학식, 작가의 시대정신과 환경, 비평의 표준 등을 논했다. 「문심조룡』은 중국 문학사상 최초의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문학이론서로서 비평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종영(鍾嶸: ?~552)이 엮은 『시품(詩品) 3권은 한. 위에서 양 나라에 이르기까지 5언시의 작자 122명을 상,, 3품으로 나누어 품평한 시비평서이다. 그 주요 내용은 기교적인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을 반대하고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음률을 중시, 전고의 사용을 반대하고 '직심()'을 주장, 단순한 비흥()과 부체(賦體)만의 사용을 반대하고 부,,흥의 조화로운 운용을 강조, 내재적인 풍골과 외재적인 수사를 둘 다 중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품평이 너무 주관에 치우쳐 객관성이 결핍되었으며, 작품의 형태를 표준으로 삼고 도리어 중요한 문예사상과 시대환 경을 소홀히 한 점이 결점으로 지적된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시품』은 중국 최초의 전문적인 시비평서로서 중국시가비 평사상 매우 중요한 문헌 가운데 하나이다. 소통(蕭統: 501~531, 昭明太子)을 중심으로 유효위(劉孝威), 유견오(肩吾) 등 고재십학사(高齋十學士)가 엮은 『문선()30 권은 진,한부터 양나라까지 127명의 시,,문장 등을 37류의 문체로 분류하여 모아 놓은 시문 총집이다. 작품 선정의 기준은 경(),(),()의 문장은 제외하고 깊이 있는 내용과 아름 다운 문학적 표현을 갖춘 작품을 대상으로 했다. 『문선』은 당대 이선()이 주를 단 이후로 문선학(文選學)이 일어날 정도로 연구가 성행했으며 중국 문체론의 심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이러한 문학비평서는 후대 중국 문학비평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비평문학가들을 중심으로 유가적인 관점에서 반유미주의문학 사조의 싹이 터서 당대 고문운동으로 이어졌다.

 

당대 산문과 고문운동

당대의 산문은 위진남북조의 화려한 문풍을 혁신하고자 전개 한 고문운동과 연계되어 발전했다. '고문'이란 개념은 한유()가 처음 제기한 것으로, 남북조 이후에 성행했던 변려문의 상대적인 의미로서 선진, 양한의 문체를 계승한 산문을 일컫는다. '고문운동'은 사실상 복고의 기치를 내 세우긴 했지만 문체, 문풍, 언어 등 여러 방면에서 변혁을 시도한 일종의 문학혁신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당대에 고문운동이 일어나게 된 주요 원인으로는 산문 자체의 발전과 정치적인 요인을 들 수 있다. 중국문학은 건안 시대부터 초당에 이르는 수 백년동안 기본적으로 유미주의의 방향으로 발전하여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중하는 화려한 문풍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기풍이 극에 이르게 되자 자연히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문풍에 대한 요구가 제기되었다. 또한 강력한 군주집권제도의 시행으로 정치적인 안정이 계속되자 수백 년 동안 침체되었던 유가 사상이 점점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부응하여 유가의 도통()을 회복하고 실용적인 문학에 대한 요구가 제기되었다. 당대 고문운동을 선도한 사람은 유면(柳冕)을 비롯하여 진자앙(),이화(李華) 등이다. 특히 유면은 문학의 예술적 가치를 부정하고 교화와 윤리에 근간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유면의 이러한 주장은 유가의 문학이론을 정식으로 건립하여 한유. 유종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천 여년 동안 지 속된 유가 도통문학의 정론이 되었다. 그러나 이론 뿐이었고 창작 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복고의 위업을 완성할 수는 없었다. 당대 고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창한 사람은 한유(韓愈)와 유종 원(柳宗元)이다. 한유(768~824)는 존유배불(尊儒排佛)의 학술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문학과 유도(儒道)의 합일을 주장하여 교화와 실용이 문 학의 최고 목적임을 강조하는 문이재도(文以道)의 문학관념을 견지했다. 그의 산문의 특색으로는 풍격이 웅건,분방하고 변화가 다채로우며 명쾌한 점, 언어가 정련되고 명확하며 선명하고 생동적인 점, 표절을 반대하고 언어의 창조성을 강조한 점, 상상력이 풍부하고 비유를 잘 운용한 점등을 들 수 있다. 주요 작품에는 설리문으로 「원도(原道),「사설(師說), 서정문으로 「송맹동야서」, 서사문으로 「장중승전후서(張中丞前後), 풍자문으로 「모영전(毛穎傳), 전기문으로 「유자후묘지명(柳子厚 墓誌銘), 제문으로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등이 있다.

 

[스승에 대한 논설]

옛 학자에게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으니,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학업을 전수해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니 누가 의혹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의혹하면서도 스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의혹은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태어났고 도를 깨달음이 진실로 나보다 앞선다면 내가 좋아서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며, 나보다 뒤에 태어났지만 도를 깨달음이 또한 나보다 앞선다면 내가 좋아서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삼으니, 대저 그 나이로 따져 나보다 먼저 태어나고 나중 태어난 것을 어찌 문제 삼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귀함도 없고 천함도 없고 나이 많음도 없고 나이 적음도 없이 도가 있는 곳이 스승이 계신 곳이다. 슬프도다! 스승의 도가 전해지지 않은지가 오래되었으니, 사람이 의혹됨이 없고자 하나 어렵도다! 옛 성인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오히려 또한 스승을 좇아서 물었는데, 오늘의 많은 사람들 은 성인보다 훨씬 못하지만 스승에게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갈수록 성스러워지고 어리석은 자는 갈수록 어리석어 지는 것이다. 성인이 성인이 된 까닭과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가 되는 까닭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여 스승을 가려서 가르치게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스승 두기를 부끄러워하니, 이는 미혹된 것이다. 저 어린아이의 스승은 그에게 책을 주어 구두를 익히게 하는 자이니, 내가 말하는 도를 전하고 의혹을 풀어주는 자가 아니다. 구두를 알지 못하는 경우와 의혹을 풀지 못하는 경우에 있어서, 어떤 경우는 스승을 두고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작은 것은 배우면서도 큰 것은 버리는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현명하다고 보지 않는다. 무당,의사,악사와 온갖 장인들은 서로 스승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 지 않는데, 사대부라는 족속들은 스승이니, 제자이니 하고 말하면 곧 떼거리로 모여서 비웃는다. 그 이유를 물으면 곧 말하길: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나이가 서로 같고 도가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지위가 낮으면 수치스럽다고 여기기에 족하다 하고 관직이 높으면 아침에 가깝다고 하니, 슬프도다! 스승의 도가 회복되지 않음을 가히 알 수 있다. 무당,의사,악사와 온갖 장인들은 군자가 사람으로 쳐주지 않지만, 지금 그 지혜가 도리어 그들에게 미칠 수 없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성인에게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니, 공자는 담자,장흥,사양,노담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담자의 무리는 그 현명함이 공자에게 미치지 못했다. 공자가 말하길세 사람이 걸어감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다. 이렇기 때문에 제자라고 해서 반드시 스승만 못하리란 법도 없고 스승이라 해서 반드시 제자보다 나으리란 법도 없다. 도를 깨달음에 선후가 있고 술업()에 전공이 있으니 이와 같을 따름이다. 이씨의 아들 반은 17살인데 고문을 좋아하여 육경의 경전(經傳)을 모두 통하여 익혔으며, 시류에 구애받지 않고 나에게 배움을 청해왔 다. 나는 그가 능히 옛 도를 행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사설」을 지어 그에게 준다.

古之學者必有師. 師者, 所以傳道·受業·解惑也, 人非生而知之者, 孰能 無惑? 惑而不從師, 其爲惑也, 終不解矣, 生乎吾前, 其聞道也, 固先乎吾, 吾從而師之, 生乎吾後, 其聞道也, 亦先乎 吾, 吾從之. 吾師道也, 夫庸知其年 之先後生於吾乎? 是故無貴.無賤,無長, 無少, 道之所存, 師之所存也, 嗟乎! 師道之不傳也久矣, 欲人之無感也難矣! 古之聖人, 其出人也遠矣, 且從而問之人, 其下聖人也遠矣, 而取學於師, 是故聖益聖, 愚益愚,聖人 之所以, 愚人之所以爲愚, 其皆出於此乎, 愛其, 師而之於其身也, 則師焉, 惑彼之後之而 其句讀者, 非吾所謂傳其道· 解其惑者也, 句讀之不知, 惑之不解, 或師焉, 或不焉, 小學而大遺, 吾未見 其明也。巫樂.百工之人, 不恥相師. 士大夫之族, 曰師曰弟子云者, 則群 聚而笑之.問之, 則曰: “彼與彼年相若也, 道相似也.”位卑則足差官盛則 近訣,嗚呼! 師道之不復可知矣, ··樂師·百工之人, 君子不齒, 今其 智乃反不能及, 其可怪也! 聖人無常師, 孔子師. 萇弘. 師襄. 老聃. 子之徒, 其 賢不及孔子孔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 ”是故弟子不必不如師, 師不必賢於弟子, 聞道有 先後, 術業有專攻, 如是而已, 李氏子蟠, 年十七, 好古文.六藝經傳, 皆通習之不拘於時, 學於余,余嘉 其能行古道,作師說以貽之.

 

유종원(773~819)은 유교를 근본으로 하고 불교와 노장사상 등을 수용한 학술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문학 내용상의 윤리와 문학 형식상의 수사를 병중하는, 즉 도는 도대로 유가적인 도통을 지니되 문학은 그 예술적인 형식을 빌려 사상을 개혁 · 천명해 야 한다는 문이명도(文以明道)의 문학 관념을 견지했다. 그의 산 문의 특색으로는 웅심, 아건, 청려(淸麗) 등 다양한 풍격을 지닌 점, 언어가 유려하고 비유성, 상징성이 강한 점, 내 용상 현실에 대한 비판성, 풍자성이 강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주요 작품에는 설리문으로 「동엽봉제론(桐封弟論), 전기문으 로 「종수곽탁타전(種樹郭駝傳), 우언문으로 「포사자설(捕蛇者說), 유기문으로 「영주팔기(永州記), 서정문으로 「우계시서 (漢詩)」 등이 있다.

 

「종수곽탁타전(樹郭甕駝傳)

곽탁타는 처음에는 무슨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곱사병이 들어 높직 하게 엎드리고 다니는 것이 탁낙타]와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그를 ''라고 불렀다. 탁타는 이것을 듣고 말했다. "아주 좋소! 내 이름으로 정말 어울리오." 그래서 자기 이름을 버리고 또한 스스로 탁타라 불렀다고 한다. 그 마을은 풍락향이라 하는데 장안의 서쪽에 있다. 탁타는 나무 심는 것을 업으로 했는데, 무릇 장안의 부호들 가운데 나무를 관상하려는 이나 과실을 팔려는 이들이 모두 다투어 맞아들 여 받들어 모셨다. 탁타가 심은 나무를 보았더니, 혹 옮긴다 하더라 도 살지 않음이 없었고 또 크고 무성했으며 일찍 열매가 맺고 수량 도 아주 많았다.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이 비록 가만히 엿보았다가 모방했지만 같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물었더니 탁타가 대답했다. “나는 나무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고 번식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무의 천성을 따라 그 본성에 이르게 할 수 있을 뿐이오. 무릇 식목의 본성은 그 뿌리는 펴고자 하고 북돋음은 편편하고자 하며 그 흙은 옛것이고자 하고 그 다짐은 빽빽하고자 하는 것이오. 이미 그렇게 한 뒤에는 움직이지도 않고 걱정도 않으며 가서는 다시금 돌아보지 않소. 그 심는 것은 자식 같이 하지만 그 놓아두는 것은 버린 것처럼 하면, 곧 그 천성이라는 것이 온전하여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해치지만 않을 뿐이지 크게 하고 무성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 결실을 억눌러 축내지 않게 만할 뿐이지 빨리 열리고 많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은 그렇지 아니하니, 뿌리를 구부리고 흙을 바꾸며 북돋음 하는 것도 지나치지 않으면 부족하게 하지요. 진실로 이것을 위반 하는 자는 곧 또 사랑하기를 너무 은혜롭게 하고 근심하기를 너무 부지런하게 하여, 아침에 돌보고는 저녁에 어루만지며 이미 갔다가 도 다시 돌아보지요. 심한 이는 그 껍질에 손톱자국을 내서 살았는 지 죽었는지를 알아보고, 그 뿌리를 흔들어 엉성한지 조밀한지를 살피니, 나무의 본성이 날로 떠나가는 것이오. 비록 사랑한다고는 하나 실상은 해치는 것이며, 근심한다고는 하나 실상은 원수처럼 대하는 것이오. 그래서 나와 같지 않은 것이니, 내 또한 무엇을 잘한다고 할 수 있겠소?" 묻는 사람이 말했다. "그대의 나무 심는 도를 관리의 다스림에 적용해도 괜찮겠소?" 탁타가 말했다. "나는 나무 심는 것만 알 뿐이며 관리의 다스림은 나의 업무가 아니 오. 그렇지만 내가 시골에 살면서 남의 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 그 명령을 번거롭게 하길 좋아하여 마치 몹시 불쌍히 여기는 듯하지 만 결국은 화를 초래하기 일 쑤였소. 아침저녁으로 관리가 와서 부르며 말하길 '관의 명령이니, 속히 너의 밭을 갈라, 너의 심을 것에 힘쓰라, 너의 거둘 것을 살펴라, 빨리 너의 실을 자아라, 빨리 너의 자은 실을 짜라, 너의 어린 아이들을 키워라, 너의 닭과 돼지를 쳐라 하면서, 북을 울려 이들을 모으고 딱따기를 쳐서 이들을 불러냈소. 그러니 우리 같은 소인들은 아침밥과 저녁밥을 마련해서 관리들을 접대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판에 또한 어떻게 우리의 생활을 더 낫게 하고 우리의 성정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소? 그러기에 병들고 또 게을 러지니, 이러하다면 내가 업으로 하는 것과 또한 비슷하지 않겠소?" 묻는 사람이 기뻐하며 말했다. "역시 훌륭하지 아니한가! 나는 나무 키우는 것을 물었다가 사람 기르는 방도를 얻었소. 그 일을 전하여 관리의 경계로 삼으리다."

郭駝, 不知始何名病僂, 隆然伏行, 有類豪駝者, 故鄕人號之駝, 駝聞之, : “!.” 因捨其名, 亦自謂豪駝云, 曰豊樂鄕, 在長安西, 駝業種樹, 凡長安豪富人觀游及賣果者, 皆迎取養, 視駝所種樹, 或移 徙, 無不活, 且碩茂, 實以蕃, 他植者雖窺伺做慕, 莫能如也. 有問之, 對曰: “橐駝非能使木壽且也, 以能順木之天以致其性焉爾, 凡植 木之性, 其本欲舒, 其培欲平, 其土欲故, 其築欲密, 旣然已, 勿動勿慮, 去 不復顧, 其蒔也若子, 其置也若棄, 則其天者全, 而其性得矣, 故吾不害其 長而已, 非有能而茂之也不抑耗其實而已, 非有能量而蕃之也, 他植者 則不然, 根拳而土易, 其培之也, 若不過焉則不及苟有能反是者, 則又愛之太殷, 憂之太勤旦視而暮撫, 已去而復顧, 甚者爪其膚以驗其生枯, 搖 其本以觀其疏密, 而木之性日以離矣, 雖曰愛之, 其實害之, 雖曰憂之, 其實之故我若也, 吾又何能爲哉?" , 然吾居鄕, 見長人者, 好煩其, 若甚憐焉, 而以禍. 旦暮, 吏而呼 問者曰: "以之道, 移之官理, 可乎?" 駝曰: “我知種樹而已, 官理吾 曰:官命促爾, 爾植, 督爾穫, 圣縁而緖, 織而纓, 而幼玹, 遂而雞 豚!鳴而之, 擊而召之, 吾小人輟殮饔以勞吏, 且不得暇,又何以蕃 吾生安吾性耶? 故病且怠. 若是, 則與吾業者, 其亦有類乎?” 問者噶曰: “不亦善夫!  吾問養樹, 得養人術, 傳其事以爲官戒也.”

 

한유, 유종원은 이론 뿐만아니라 창작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올려 명실 공히 당대 고문운동의 대표자로서 후대 송대의 구양수 (歐陽修) 등이 모두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당대 고문운동이 후대 문학에 끼친 영향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우선 평이하고 질박한 산문을 제창하여 공허하고 화려한 변려문을 쇠퇴 시킨 점, 문학의 실용성을, 주장하여 극단적인 개인주의·유미주의 사조를 일소 시킨 점, 순수한 산문창작에 힘을 기울여 문학상 훌륭한 경지를 이룩한 점 등은 장점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학의 진화원리를 홀시한 복고 설로 후대 귀고 천금의 완고한 문학 관념을 조성한 점, 문학의 실제적인 공효성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문학이 윤리도덕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예술적인 생명과 미의 가치를 잃게 된 점, 지나치게 고문을 중시하여 경··철학이 문학의 정통이 되고 순문학인 시·소설·희곡이 말류가 됨으로써 문학과 학술의 관념이 문란해지게 된 점 등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송대 산문과 고문운동

송대의 산문은 당대보다 질량 면에서 보다 성숙한 발전을 이룩 하여, 이른바 '당송팔대가' 가운데 6명이 송대에서 나왔다. 송초에 고문운동을 선도한 인물은 유개(柳開), 석개(石介),(穆修),윤수(尹洙) 등이었는데, 이들은 만당의 농염한 문체와 송초의 화려한 서곤체(西崑體)를 배격하고, 명도(明道),치용(致用),존한(),중산체(重體),반서곤(反西崑)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문학가라기보다는 이학가(理學家)였으므로 복고의 주장은 강렬했지만 창작적인 뒷받침이 없어서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송초 고문운동이 발전할 기초는 충분히 다졌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유개, 석개등의 이론을 계승 발전시켜 송대의 고문운동을 성공 으로 이끈 대표적인 인물은 구양수(歐陽修)를 중심으로 한 소순·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 이른바 당송팔대가의 강력한 고문운동 집단이었다. 이들은 '명도' '치용'의 기치 아래 문도병중(文道並重문리자연(文理自然자태횡생(姿態)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모두 뛰어난 문학가로서 이론은 물론 창작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김으로써, 한유·유종원 이래 이어져온 복고의 대업을 완수하여 송대의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구양수는 송대 문단의 영수로서, 특히 고문운동을 성공으로 이 끈 장본인이다. 문집으로 『구양문충집(歐陽文忠集)』이 있다. 그의 문풍은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를 당대 한 유와 비교해 보면, 풍격상 한유의 산문이 기운차고 통쾌한陽] 반면에 구양수의 산문은 부드럽고 함축적[)이며, 한유가 도에 치중한 반면에 구양수는 문통()과 도통()의 조화에 힘썼다고 할 수 있다. 대표 작품으로 「붕당론(朋黨論)·「취옹정기」 등이 있다.

 

「취옹정기」

저주를 빙 둘러 모두 산이다. 그 서남쪽의 여러 봉우리에 수풀과 골짜기가 특히 아름다운데, 멀리서 바라보면 빽빽이 우거져 깊고 빼어난 것이 야산이다. 산으로 6~7리를 가면 점점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데, 두 봉우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양천이다. 봉우리를 돌면 길이 꾸불꾸불한데, 날개를 펼친 듯한 정자가 양천 위에 임해 있는 것이 취옹정이다. 정자를 지은 사람은 누구인가? 산의 승려 지선이다. 이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태수 자신이 그렇게 불렀다. 태수가 손님과 함께 와서 여기에서 술을 마셨는데, 조금 만 마셔도 금방 취하고 나이 또한 가장 많았기 때문에 스스로 불러 취옹이라 했다. 취옹이란 뜻은 술에 있지 아니하고 산수에 있으니, 산수의 즐거움을 마음에서 체득하여 그것을 술에다 부친 것이다. 대저 해가 떠서 숲의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돌아가 바위굴이 어두워지니, 어두웠다 밝았다 하면서 변화하는 것은 산간의 아침과 저녁이다. 들에 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그윽하고, 좋은 나무가 빼어나 그늘이 우거지고, 바람과 서리가 높고 깨끗하며, 수위가 낮아져 돌이 드러나는 것은 산간의 네 계절이다.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지 만, 사시의 풍경이 같지 않으니 즐거움 또한 다함이 없다. 짊어진 자는 길에서 노래하고 걸어가는 자는 나무에서 쉬며, 앞사람 이 부르면 뒷사람이 응답하면서 노인과 아이들이 왕래하며 끊이지 않는 것은 저주 사람들의 나들이이다. 시내에 다다라 고기를 잡으니 시냇물은 깊고 고기는 통통하며, 양천으로 술을 빚으니 샘물이 향긋하여 술이 맑다. 산채 안주와 야채를 질펀하게 앞에 벌려 놓은 것은 태수의 잔치다. 잔치가 무르익는 즐거움은 현악기도 아니고 관악기도 아니다. 활 쏘는 자는 적중하고 바둑 두는 자는 이기며, 술잔과 산가지가 뒤섞이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여러 빈객들이 기뻐하는 것이다. 푸르죽죽한 얼굴에 백발을 하고서 그 사이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태수가 취한 것이다. 이윽고 석양이 산에 걸리고 사람들 그림자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은 태수가 돌아 감에 빈객들이 따르는 것이다. 나무 우거진 숲이 그늘져 어두워지자 오르내리며 우짖는 소리는 나들이꾼들이 가서 새 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들은 산림의 즐거움은 알지만 사람들의 즐거움은 모르며, 사람들은 태수의 나들이를 좇아 즐거워할 줄은 알지만 태수가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줄은 모른다. 취했을 땐 능히 그 즐거움을 함께 하고 깨었을 땐 능히 문장으로 펴내는 것은 태수이다. 태수는 누구를 말하는가? 여름의 구양수이다.

皆山也, 其西南諸峯, 林壑尤美, 望之蔚然而深秀者, 也山行 七里, 漸聞水聲潺潺, 而瀉出於兩峯之間者, 釀泉也, 峯回路轉, 有亭翼然 臨於泉者, 醉翁亭也. 作者誰? 山之僧智僭也, 名之者誰? 太守自謂也, 太守與客來於此, 少輒醉, 而又最高, 故自號曰醉翁也, 醉翁之意不 在酒, 在乎山水之間也, 山水之樂, 得之心而寓之酒也 若夫日出而林霏開, 雲歸而巖穴暝, 晦明變化者, 山間之朝暮也, 野芳發而 幽香, 佳而繁陰, 風霜高潔, 落而石出者, 山間之四時也. 朝而往暮 而歸, 四時之景不同, 而樂亦無窮也. 至於負者歌於塗, 行者休於樹, 前者呼, 後者應, 偃僂提播, 往來而不絶者, 人遊也. 臨谿而漁, 谿深而魚肥, 釀泉爲酒, 泉香而酒洌, 山肴野, 雜然 而前陳者, 太守宴也, 宴酣之樂, 非非竹, 射者中, 弈者勝, 觥籌交錯, 起 坐而誼譁者, 衆賓權也, 白髮, 頹然乎其間者, 太守醉也 已而夕陽在山, 人影散亂, 太守歸而賓客從也, 樹林陰翳, 鳴聲上下, 遊人 去而禽鳥樂也, 然而禽鳥知山林之樂, 而不知人之樂, 人知從太守遊而樂, 而不知太守之樂其樂也, 醉能同其樂, 醒能述以文者, 太守也, 太守謂誰? 廬陵歐陽修也

 

중공(1019~1083)은 구양수의 수제자로서 문집으로 [원풍류고]가 있다. 그의 문풍은 전아하고 심약한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대표 작품은 [선대부집후서]등이 있다. 소순(1009~1066)은 구양수의 인정을 받아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며, 문집으로 『가우집(嘉祐集)』이 있다. 그의 문풍은 기세가 드높고 엄숙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대표 작품으로 「권서(), 「형론()」 등이 있다. 소식은 호가 동파(東坡)이며 소순의 장자이다. 문집으로 『동파집』이 있다. 그의 문풍은 거침없고 유창하며 독창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의 산문은 내용이 정론문, 사론문, 서정문, 서사문 및 잡문 등 광범위하고, 필법이 광달()하고, 구상이 자유분방 하고, 언어가 청신하고 정련되어 있으며, 묘사수법이 다채로워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 대표 작품으로 「석종산기(石鐘山記)·「희정기()」 등이 있다.

 

「희우정기」

정자 이름에 ''자를 붙인 것은 '기쁨'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옛날에는 기쁜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물건을 이름 지어서 잊지 않을 것을 보였다. 주공은 처음 벼를 얻고서 그 글을 「가화편(嘉篇)」이라고 이름 지었고, 한 무제는 귀한 솥을 얻고서 그 연호를 '원정(元鼎)’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숙손은 적장을 물리치고서 그 아들을 '교여'라고 이름 지었으니, 그 기쁨의 크고 작음은 같지 않지만 잊지 않을 것을 보인 것은 한 가지이다. 내가 부풍에 온 이듬해에 비로소 관사를 손질하면서 당의 북쪽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끌어들여 나무를 심어서 휴식할 곳으로 삼았다. 이 해 봄에 보리를 기산의 남쪽에 뿌렸 는데, 그 점괘에 풍년이 들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미 한 달이 다 되도록 비가 오지 않자 백성들이 바야흐로 근심을 하고 있었다. 삼월 을묘일이 넘어서야 비가 왔고 갑자일에 또 비가 왔으나 백성들 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정묘일에 큰 비가 와서 사흘 만에 곧 그쳤다. 관리들은 서로 더불어 뜰에서 경하하고, 상인들은서로 더불어 저자에서 노래하고, 농부들은 서로 더불어 들녘에서 박수를 쳤으며, 근심하던 자는 즐거워하고 병든 자는 나았다. 그리고서 나의 정자도 때마침 완성되었다. 그래서 정자 위에서 술을 들어 손님에게 권하며 말했다. “닷새 동안 비가 오지 않아도 괜찮을까?" 대답했다. “닷새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보리가 없지요." “열흘 동안 비가 오지 않아도 괜찮을까?" “열흘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벼가 없지요." "보리가 없고 벼도 없으면, 해는 또 거듭 굶주릴 것이며, 송사가 빈번히 일어나고 도적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니, 그러면 내가 그대 들과 함께 비록 한가롭게 이 정자에서 즐기고자 한들 그것이 될 수 있겠는가? 지금 하늘이 이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고 처음엔 가물었 다가 비를 내려주시어, 나와 그대들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한가롭게 정자에서 즐길 수 있게 한 것은 모두 비가 내려 준 것이니 또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미 그것으로 정자를 이름 짓고 또 따라서 노래했다. "하늘이 구슬을 뿌리더라도 추운 사람은 그것으로 저고리를 만들 수 없고, 하늘이 옥을 뿌리더라도 배고픈 사람은 그것으로 곡식을 만들 수 없네. 한 번에 사흘 동안 비가 온 것은 이 누구의 힘인가? 백성들은 태수라고 하지만 태수는 아니라고 하네. 천자에게 돌리지 만 천자는 그렇지 않다고 하네. 조물주에게 돌리지만 조물주는 자신의 공이라 하지 않네. 허공에게 돌리지만 허공은 아득하기만 하네. 무어라 이름 할 수 없는지라 내가 그것으로 나의 정자를 이름 짓네."

亭以雨名, 志喜也。古者有喜, 則以名物, 示不忘也, 周公得禾而名其書, 漢 武得鼎以名其年, 叔孫勝敵以名其子。其喜之大小不齊, 其示不忘一也。予至扶風之明年, 始治官舍, 亭於堂之北, 而鑿池其南, 引流種樹, 息之所, 是歲之春, 雨於岐山之陽, 其占有年, 而彌月不雨, 民方以 爲憂, 越三月乙卯, 乃雨, 甲子又雨, 民以爲未足, 丁卯大雨, 三日乃止。官吏相與慶於庭, 商賈相與歌於市, 農夫相與於野, 憂者以樂, 病者以愈, 而 吾亭適成 於是擧酒於亭上, 以屬客而告之曰: “五日不雨可乎?”: “五日不雨, 則無 麥,“十日不雨可乎?” : “十日不雨, 則無禾。”“無麥無禾, 歲且薦饑, 獄訟 繁興, 而盜賊滋熾, 則吾與二三子, 雖欲優遊以樂於此亭, 其可得耶? 今天 不遺斯民, 始旱而賜之以雨, 使吾與二三子, 得相與優遊以樂於亭者, 皆雨之賜也, 其又可忘耶?” 以名亭, 又從而歌之,歌曰: “使天而雨珠, 寒者不得以為襦 使天而雨玉, 饑者不得以粟一雨三日, 誰之力?民日太守, 太守不有, 歸之天子, 天子曰不然,歸之造物, 造物不自以, 歸之太空, 太空冥冥, 不可得而名, 吾以名吾亭(蘇轍:1039~1112), 是否至『習習 (欒城集)

 

소철(蘇轍: 1039~1112)은 소식의 동생이며, 문집으로 『난성집 集)』이 있다. 그의 문풍은 경쾌하고 민활한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주론(周論)·「육국론(國」 등이 있다. 왕안석(1021~1086)은 신법()을 추진한 대 정치가이자 문학가로서, 문집으로 『임천집(臨川集)』이 있다. 그의 문풍은 간결 하면서도 기상이 특출한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독맹상군전(讀孟嘗君傳)」 등이 있다.

 

「맹상군전」을 읽고讀孟嘗君傳]

세상에서는 모두 칭찬하길, 맹상군이 선비를 잘 얻었는지라 선비들이 그 때문에 그에게 돌아와서 마침내 그 힘에 의지하여 호랑이와 소리 표범 같은 진나라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 맹상군은 다만 닭 울음 나 내고 개 시늉을 하며 좀도둑질이나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일 뿐이니, 어찌 족히 선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그렇지 않았다면 제나라의 부강함을 손에 쥐고서 한 명의 선비를 얻더라도 마땅히 남면하여 진나라를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인데, 오히려 어찌하여 닭 울음소리나 내고 개 시늉을 하며 좀도둑질이나 하는 무리의 힘을 빌렸단 말인가? 대저 닭 울음소리나 내고 개 시늉을 하며 좀 도둑질이나 하는 무리가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선비가 이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世皆稱孟嘗君能得士, 士以故歸之, 而卒賴其力, 以脫於虎豹之秦, 嗟乎 孟嘗君特雞鳴狗盜之雄耳, 豈足以言得士? 不然, 擅齊之强, 得一士焉, 宜 可以南面而制秦, 尙何取雞鳴狗盜之力哉? 夫雞鳴狗盜之出其門, 此士之所 以不至也。

 

그 밖에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鑑)』 등도 북송 문단이 거둔 훌륭한 수확이었다. 남송의 산문은 성리학의 발전과 함께 북송과는 달리 보다 실용 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주돈이(정호(程顥). 정이(장재(). 주희(朱熹) 등 이른바 도학파들은 문채는 고려하지 않고 재도()에만 목 표를 두어 '문학무용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평이한 백화로 기록한 어록체()를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이해하기는 쉬웠으나 문학성은 다소 결여된 측면이 있었다. 이 중에서 주돈이의 [애련설] 깔끔한 소품문으로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이다.

 

연꽃을 사랑하는 이

수륙의 초목의 꽃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진나라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당나라 이후로 세상 사람들은 목단을 매 우 사랑했다. 나는 홀로 연꽃이 진흙 속에서 나오지만 그것에 물들 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통해 있고 밖은 쭉 곧아 넝쿨지지도 않고 가지도 없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 깨끗하게 서 있어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만만하게 다룰 수 없음을 사랑한다. 나는 국화는 꽃 중의 은일한 자이고, 목단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인 자라고 생각한다. !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엔 들은 적이 드물다. 연꽃을 사랑하는 이는 나와 함께 하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목단을 사랑하는 이는 응당 많을 것이다!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晉陶淵明獨愛菊, 自李唐來, 世人甚愛牡丹. 予獨愛蓮之出淤泥而不染, 漣而不妖, 中通外直, 不蔓不枝,香遠益,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翫焉, 予謂菊花之隱逸者也, 牡丹花之富貴者也,, 花之君子者也, ! 菊 之愛, 陶後鮮有聞蓮之愛, 同者何人?牡丹之愛, !

 

이들이 사용한 어록체 산문은 선진시대의 『논어』. 『맹자』에 그 근원을 둔 것으로, 대부분 문답체와 대화체의 평이한 구어로 인생의 도리를 설파했는데, 주희(1130~1200)의 「주자어류( )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어록체 산문이 발전하게 된 원인은 고문운동이 성공을 거두어 평이한 산문이 점점 구어에 가까워진 때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도학가 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 알기 쉬운 구어가 그들의 작품에 널리 채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송대 백화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소설을 비롯한 민중문학의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그 밖에 진량(),엽적() 등의 공리파는 도학파와 비슷한 문풍을 지녔으나, 정치·경제 등 실용적인 공용성(用性)에 보 다 역점을 두었다.

 

명대 산문

명대 산문과 문학유파는 복고를 주장하는 큰 흐름과 이에 반발하는 조류로 대별할 수 있는데, 그 시기별로 대표적인 문학유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명초의 문단을 주도했던 주요 인물에는 우언체(寓言體)로 시정 (時政)과 현실을 풍자한 유기 (: 1311~1375), 의리(義理사 공(문사()의 통일을 주장한 송렴(宋濂: 1310~1381), 호방한 필치로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고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방효유 등이 있다. 이들은 심각하고 꼿꼿한 풍격으로 사회의 여러 단면을 반영했지만, 전아한 문장 풍격은 이후 대각체가 발전할 실마리를 제공했다. 삼양(三楊 : 楊土奇, 楊榮, 楊溥)으로 대표되는 대각체(大閣體)는 태평성대와 제왕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 대부분이며, 형식은 온화,전아,미려함을 추구했다. 대각체 산문은 창의성과 내용성이 결여되고 작품이 천편일률적이어서 문학성은 별로 높지 않다. 이동양(李東陽: 1447~1516)으로 대표되는 다릉파(茶陵派)는 전아하고 화려함을 추구했는데, 대각체처럼 내용과 생기가 없었다. 이러한 다릉파의 문풍은 이후 복고파에 영향을 미쳤다. 전칠자(前七子 : 李夢陽,何景明,徐禎卿,邊貢,王廷相,康海,王九)와 후칠자(後七子: 李攀龍,王世貞,謝棒,宗臣,梁有譽,徐中行,吳國倫)에 의해 주도된 복고파는 명대의 복고적인 조류를 선도. 발양하여 마침내 명대 문단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문장은 반드시 진한을 따르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좇아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올바른 모방은 창작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복고파의 산문은 명초의 대각체와 팔고문의 구속을 타파한 점에는 의의가 있었으나, 모방과 표절을 일삼는 형식주의에 빠져 문학성이 결여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당순지(唐順之: 1507~1560). 귀유광(歸有光: 1506~1571)으로 대표되는 당송파(唐宋派)는 처음으로 복고파에 대한 반기를 들었는데, 그들은 문학의 시대성과 작가의 개성을 중시하고 모방을 반대했으며, 당송팔대가의 문장을 전범으로 삼았다. 그들의 주장은 혁신적이었지만 작품 창작과 역량이 부족하여 큰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명대의 문단은 공안파(公派)에 이르러 가장 강력하게 복고파에 대항할 수 있었다. 공안파를 선도한 인물은 이지(:1527~ 1602, 또는 卓吾)인데, 그는 양지(良知)의 자유를 주장한 왕양명(王陽明) 학파의 좌파(左派)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지는 '동심설(童心設)'을 주장하여 위선적인 도학을 반대하고 진실한 감정표현 을 중시했으며, '귀고천금(貴賤)'의 완고한 문학 관념을 부정 하고 복고를 반대했으며, 통속문학의 가치를 중시하고 봉건적인 문학관의 타파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공안파의 중심인물인 삼원(三袁宗道,袁宏道,袁中道)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그들은 문학의 시대성과 진화 성을 분명하게 인식하여 옛 것의 모방을 문학의 퇴보로 여겼으며, 격조나 격률에 얽매이지 않고 진솔한 개성의 발로인 성령(性 靈)을 담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학작품의 내용성과 소설이나 희곡의 문학적 가치를 중시했다. 그들의 주장 가운데 진솔한 개성표현은 명말 소품문(小品文)의 출현과 번영을 가져왔고, '성령설'은 청대의 문학창작과 문예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속문학에 대한 옹호는 명말 풍몽룡(馮夢龍김성탄(金聖嘆) 등의 속문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종성(鍾惺: 1572~1624)·담원춘(譚元春)으로 대표되는 경릉파 (陵派)는 공안파의 아류가 지나친 개성적인 표현으로 말미암아 천박함으로 흐르자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그윽하고 특이한[幽深 '풍격을 표방했는데, 나머지 주장은 공안파와 거의 같다. 명말에는 공안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소품문이 등장하여 침 체된 문단에 참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명말의 소품문을 선도한 주요 작가와 작품에는 서위(徐渭)의 「활연당기(豁然堂記), 원광 도(袁宏澎1566~1610)의 「만유육교대월기 (遊六橋待月記), 종 성의 「완화계(花溪記)」등이 있다.

 

[저녁에 여섯 다리를 거닐며 달맞이 하다]

서호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봄날 달 뜰 때이다. 하루 가운데 아름다 운 것은 아침 안개와 저녁 산기운이다. 올해는 춘설이 심히 많이 와서 매화가 추위 때문에 늦게 피는 바람에 살구꽃, 복사꽃과 함께 차례로 개화하여 특히 장관이었다. 친구 석궤가 나에게 자주 말하 길: "부금오의 정원에 있는 매화는 장공보의 옥조당에 있던 옛 물건이니 빨리 보러 가세!"라고 했지만, 나는 그때 복사꽃에 끌려서 결국 차마 호숫가를 떠나지 못했다. 단교로부터 소제에 이르는 일대는 초록 안개와 붉은 연무가 20여 리나 가득 차 있었다. 노래 소리는 바람이 부는 듯했고 분에 젖은 땀은 비가 오는 듯했다. 화려하게 차려 입은 부녀자들이 제방 가의 풀밭에 많이 있어서 너무나도 곱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항주(杭州) 사람들이 서호로 놀러 나오는 것은 오시,미시,신시[오전 11시부터 오후 5] 세 때 뿐이다. 그러나 사 실 호수 빛이 비취색으로 물드는 아름다움이나 산기운이 색을 칠하는 오묘함은 모두 아침 해가 막 뜰 때나 석양이 아직 지기 전에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극에 이른다. 달 뜬 풍경은 더욱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꽃의 자태와 버들의 정, 산의 얼굴과 물의 뜻은 또 다른 일종의 멋과 맛이다. 이 즐거움을 남겨두어 산의 스님과 놀러 나온 객과 함께 받아 즐기니, 어찌 속된 선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西湖最盛, 爲春爲月. 一日之盛, 爲朝姻, 爲夕嵐, 今歲春雪甚盛, 梅花爲寒 所勒, 與杏桃相開發, 尤爲奇觀, 石簧數爲余言 : “傅金吾圍中梅 張功甫 玉照堂物也, 急往觀之!” 余時爲桃花所戀, 竟不忍去湖上, 由斷橋至蘇堤 一帶, 綠烟紅霧, 彌漫二十餘里, 歌吹爲風, 粉汗爲雨. 羅之盛, 多堤 之草,艶冶極矣. 然杭人遊湖, 止午未申三時, 其實湖光翠, 設色之妙, 皆在朝日始出, 夕春未下, 始極其濃媚月景尤不可言. 花態情, 山容水意, 別是一種趣味. 此樂留與山僧遊客受用, 安可爲俗道哉!

이어서 소품문의 문학성을 제고시킨 중심인물은 장대(張岱: 1597~1689?)인데, 그의 문장은 진실한 감정과 개성이 뚜렷하며 자연스럽고 청려하여 명대 소품문의 대가로 손꼽힌다. 문집으로 『도암몽억(陶庵夢憶),『서호몽심(西湖夢尋)』등이 있다. 이러한 소품문은 종래 경(()의 고문이나 당송팔대가의 문장과는 경향을 달리하며, '재도()'의 문학 관념에서 벗어나 산문의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을 가능케 했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청대 산문

청대의 산문은 고증학으로 대표되는 청대의 학술사상과 밀접 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청초의 고문은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 왕부지의 이른바 '3유로(三遺老)'와 후방역(侯方域: 1618~1654), 위희(1624~1680), 왕완(1624~1690)의 이른바 '3대가'에 의해 주도되었다. 3유로는 명도(明道)와 재도()에 바탕을 둔 경 세치용의 학문을 주장하여 명대의 의고주의나 공안, 경릉파의 낭만주의적인 문장을 배격하고 자연스럽고 유창한 문장을 추구했다. 3대가는 명말의 경박한 문풍을 배격하고 한유, 구양수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아 평담하고 질박한 문장을 추구했다. 청 중엽의 고문은 동성파(桐城派)와 양호파(陽湖派)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그 주도권은 동성파가 쥐고 있었다. 동성파라는 명칭은 방포, 유대괴(劉大樞), 요내(), 증국번등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 출신인데서 비롯되었다. 방포(1668~1749)는 문장과 도(), 문인과 성인의 일체화를 주장했으며, 유교의 도의(道義)로서 『춘추(春秋)』의 미언대의 言大義)를 바탕으로 한 '()'와 『춘추』의 포폄의 필법을 체득한 뒤 『좌전(左傳),『사기』 및 당송팔대가의 고문법을 종지로 삼는 '()'의 구비를 요구했다. 또한 고문과 순문학인 시,,부를 엄격히 구분하고 속문학인 소설,희곡 등을 경시했으며, 문장의 최고 규범을 육경()과 『논어』,『맹자』,『좌전』,『사기』,당송 팔대가,명대 귀유광(歸有光)의 순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전아하고 순정()한 문장표현을 주장했다. 유대괴(1698~1780)는 방포의 의법설(義法說)에 작자의 정신에 해당하는 '신기(神氣)'와 문자의 음조에 해당하는 '음절(音節)’을 보충하여 문장의 문학적인 미를 추구했다. 요내(1731~1815)는 한대 훈고학과 송대 성리학의 겸비를 이 상으로 삼아, '의리','고증','문장'의 삼위일체를 추구했으며, 유대 괴의 '신기'를 보충하여 '신리기미(神理氣) [문장의 내용과 정신]를 주장하고 '음절'을 확충하여 '격률성색(格律聲色)'[문장의 수사와 형식]을 주장했다. 또한 진,한으로부터 방포 유대괴에 이르기까지 각 가의 고문을 엄선, 분류하고 문체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첨부한 「고문사류찬(古文)』을 편찬하여 실제적인 문장 규범을 제시했다.

 

태산에 올라 [登泰山記]

태산의 남쪽엔 문수가 서쪽으로 흐르고 그 북쪽엔 제수가 동쪽으로 흐르는데, 남쪽 계곡은 모두 문수로 들어가고 북쪽 계곡은 모두 제수로 들어간다. 그것을 남과 북으로 나누는 것은 옛 제()나라의 장성이다. 가장 높은 곳은 일관 봉인데 장성 남쪽 15리에 있다. 나는 건륭39(1774) 12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바람과 눈을 따라 제하와 장청을 지나고 태산의 서북쪽 계곡을 통과하고 장성의 성벽을 넘어 태안에 도착했다. 이 달 정미일에 지부로 있던 자영 주효순과 함께 남록으로부터 올라갔다. 45리를 가니 길에 모두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었는데 그 층계가 7천여 개나 되었다. 태산의 정남향으로 세 개의 계곡이 있다. 중계는 태안성 아래를 휘감고 있는데, 역도 원이 말한 환수이다. 나는 처음에 중곡을 따라 태산으로 들어갔는 데, 절반 정도 가다가 중령을 넘어 다시 서곡을 따라 그 정상에 도착했다. 옛날에 태산에 오를 때는 동곡을 따라 들어갔는데, 그 길에는 천문이 있다. 동곡은 옛날에는 천문계수라고 했는데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다. 지금 지나온 중령과 산 정상에서 벼랑이 길을 막고 있는 곳을 세상에서 모두 천문이라 부른다. 그 길은 중간에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안보이고 얼음이 얼어 미끄러워서 계단을 거의 올라 갈 수 없었다. 위로 올라갔더니 푸른 산이 눈을 이고 있고 눈빛이 남쪽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석양이 성곽을 비추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니 문수와 조래산이 그림과 같고 산 중턱에는 안개가 띠처럼 걸쳐 있었다. 무신일 그믐 오경에 자영과 함께 일관정에 앉아 일출을 기다렸는데, 큰 바람이 쌓인 눈을 날려 얼굴을 때렸다. 일관정 동쪽은 발 아래부터 모두 눈이 가득했다. 잠시 구름 속에서 저포놀이의 말처럼 수십 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은 산이었다. 하늘 끝으로 구름이 한 줄기 이상한 빛을 띠더니 잠시 후 오색 무늬를 이루었으며, 태양 위로는 단사를 칠한 듯 새빨갰고 아래로는 붉은 빛이 흔들리며 떠받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곳이 동해라고 했다. 일관정 서쪽의 봉우리를 돌아보니, 어떤 곳은 해가 비치고 어떤 곳은 그렇지 아니하여 붉은 색과 흰 색이 섞여 있었는데 모두 곱사등이 같았다. 일관정 서쪽에는 동악대제(東嶽大帝)의 사당이 있고 또 벽하원군의 사당이 있으며, 황제의 행궁이 벽하원군 사당의 동쪽에 있다. 이날 길에 있는 석각을 보았는데, 당나라 현경 연간 이후로 옛 석각들이 모두 마멸되어 보이지 않았다. 길에 있지 않고 후미진 곳에 있는 석각은 미처 가보지 못했다. 산에는 돌이 많고 흙은 적었는데, 돌은 검푸른 색으로 대부분 네모 반듯했고 둥근 것은 드물었다. 잡목은 적었고 돌 틈에서 자라는 소 나무가 많았는데 모두 끝 부분이 평평했다. 얼음이 얼고 눈이 와서 폭포수는 없었으며, 새나 짐승의 소리와 자취도 없었다. 일관봉 주위의 몇 리 이내에는 나무가 없었고 눈이 사람 무릎까지 쌓여 있었 다. 동성의 요내 씀.

泰山之陽, 汶西流. 其陰, 濟東流, 陽谷皆入汶, 陰谷皆入濟. 當其南北 分者, 古長城也, 最高日觀峰, 在長城南十五里, 余以乾隆三十九年十二月, 自京師乘風雪, 歷齊河·長淸, 穿泰山西北谷, 越 長城之限, 至於泰安, 是月丁未, 與知府朱孝純子潁由南麓登四十五里, 道 皆砌石, 其級七千有餘, 泰山正南面有三谷, 中谷泰安城下, 酈道元 所謂環水也, 余以道, 越中, 復循西谷, 至山 循東谷入, 道有天門, 東谷者, 古謂之天門溪水, 余所不至也, 今所經中嶺及 山道者, 世皆謂之天門云道中迷霧滑, 確幾不可登上 山負雪, 明燭天南, 日照城郭, . 祖徠如畵, 而半山居霧若帶然 戊申晦, 五鼓, 與子潁坐日觀亭, 待日出, 大風揚積雪擊面, 亭東自足下皆 雲漫稍見雲中白若樗蒲數十立者, 山也. 極天雲一般異色, 須東成五彩, 日上正赤如丹, 下有紅光動搖承之或曰此東海也, 回觀日觀以西峰, 或得 日, 皓色, 而皆若僕, 亭西有岱祠, 又有碧霞元君祠皇帝行宮 碧霞元君洞東, 是日, 觀道中石刻, 自唐顯慶以來, 其遠古刻盡漫失. 僻不 當道者, 皆不及往. 山多石, 少土, 石蒼黑色, 多平方, 少圓少雜樹, 多松, 生石鱗, 皆平頂, 氷雪, 無瀑水, 無鳥獸音迹. 至日觀數里內無樹, 而雪與人膝齊. 桐城姚 記 『惜抱軒文集』卷14]

 

증국번(1811~1872)은 기본적으로 방포와 요내의 설을 계승했지만 그들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했다. 그래서 요내의 『고문사류 찬』의 고문 선정범위가 좁은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경,,자서의 문장도 가려 뽑아 『경사백가잡초(經史百家雜鈔)』를 편집함으로써 동성파의 주장을 확대시켰다. 동성파의 이러한 주장 가운데 실제의 강구, 논리의 중시, 질박 한 문풍의 창조 등은 장점이지만, 지나치게 '의법'에 매달려 결과 적으로 팔고문(八股文)을 조장한 것은 단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 나 동성파의 문풍은 당시의 학술과 결합하여 청말까지 산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성파의 방계(傍系)로서 등장한 양호파(陽湖派)는 중심인물인 운경(장혜언(張惠言) 등이 모두 강소성(江蘇省) 양호현(陽湖縣) 출신인데서 그 명칭이 비롯되었다. 양호파는 육경과 당송팔 가문 외에 제자(). 사가(史家). 잡가()의 문장도 취했기 때문에, 아정하기만 한 방포나 요내의 문장과는 달리 문장의 기세가 호방하고 표현이 심후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청말의 고문은 동성파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주요 인물에는 동성파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문체로 우수한 산문을 창작한 공자진(龔自珍위원(魏源), 청말에 대량으로 발행된 신문과 잡지에 평이하고 통속적인 문장을 기고하여 새로운 산문의 기풍을 조성한 양계초() 등이 있다.

 

공자진 [병매관기]

강녕의 용반과 소주의 등위와 항주의 서계는 모두 매화 산지이다. 어떤 이가 말하길매화는 휘어져야 아름답고 곧으면 맵시가 없으며, 틀어져야 아름답고 똑바르면 볼품이 없으며, 성기어야 아름답고 빽빽하면 자태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 이것은 문인화가들이 마음으로는 그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기준으로 천하의 매화를 평가한다고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바이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곧은 것을 베고 빽빽한 것을 쳐내고 똑바른 것을 자르게 하여, 매화를 빨리 죽게 하고 매화를 병들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돈을 벌게 할 수는 없다. 매화를 틀어지게 하고 성기게 하고 휘어지게 하는 것은 돈 벌기에 급급한 우둔한 사람들이 그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문인화가들이 자신의 괴벽한 취미를 매화 파는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서, 그 똑바른 것을 베어서 곁가지를 키우고 그 빽빽한 것을 쳐내서 어린 가지를 죽이고 그 곧은 것을 잘라서 생기를 막음으로써 높은 값을 구하는 것이니, ·절 지방의 매화는 모두 병이 들었다. 문인화가들이 끼친 심한 화가 이지경에 이를 줄이야! 나는 삼백 개의 매화 분재를 샀는데 모두 병든 것이었고 온전한 것 은 하나도 없었다. 사흘 동안 울고 나서 그것들을 치료해주고 풀어주고 순리대로 살게 해주겠다고 맹세한 뒤, 화분을 깨뜨려 모두 땅에 묻어주고 동여맨 끈을 풀어주었다. 5년을 기약으로 반드시 그것을 회복시키고 온전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본래 문인화가 는 아니지만 그 심한 질책을 달게 받고서 병매관을 열어 그것들을 수집해 두었다. !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많은 한가한 날과 또 더 많은 한가한 땅을 얻어서, 강녕·항주·소주의 병든 매화를 널리 수집하여 나의 남은 세월을 바쳐 매화를 치료할 수 있을까!

江寧之龍蟠, 蘇州之鄧尉, 杭州之西溪, 皆産梅. 或曰: “梅以曲爲美, 則無, 以欹爲美, 正則無景, 以疏, 密則無態固也, 此文人畫士, 心知其意, 未可明詔大號, 以繩天下之梅也, 又不可以 使天下之民, 斫直·刪密·鋤正, 以夭梅·病梅爲業以求錢也梅之欹·之疏 ·之曲, 又非蠢蠢求錢之民, 能以其智力, 有以文人畫士孤癖之隱, 明 告梅者, 斫其正, 養其旁條, 刪其密, 夭其稚枝, 鋤其直, 遏其生氣, 以求 重價, 而江·浙之梅皆病, 文人畫士之禍之烈至此哉! 予購三百盆, 皆病者, 無一完者, 旣泣之三日, 乃誓療之·縱之·順之, 毁其 盆, 悉埋於地, 解其棕縛, 以五年, 必復之·全之, 予本非文人畫士, 甘 受詬厲, 辟病梅之館以貯之 嗚呼! 安得使予多暇日, 又多閑田, 以廣貯江寧·杭州·蘇州之病梅, 窮予生 之光陰以療梅也哉! [『定庵續集』卷3]

 

중국문학의 향기: 중국문학 장르별 이해

김장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