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학의 향기_8
Sanqu (散曲) is a new poetic form that emerged during the Yuan Dynasty, characterized by its emphasis on musicality. It was influenced by various factors, including the decline of traditional forms and the impact of minority music. The structure of Sanqu includes Xiaoling (short lyrics), Daguoqu (extended pieces), and Tugu (suite-like compositions). Over time, it evolved to become more lyrical and refined, especially in the late Yuan and Ming dynasties, with notable figures like Zhang Jiu and Shi Xian contributing significantly. However, during the Qing Dynasty, Sanqu's independence waned as it was absorbed into drama and lost its original musical essence.
散曲 산곡
산곡(曲)은 "원대에 등장한 새로운 운문형식으로 음악성이 보다 강조되었다. 곡조상 희곡인 잡극(劇)에서 사용하는 곡패(曲牌)를 산곡에서도 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잡극과 산곡을 통칭하여 일반적으로 '원곡(曲)'이라 한다. 원대에 산곡이 등장하여 발전하게 된 원인은 우선 내재적인 요인으로 송사의 쇠락을 들 수 있다. 본래 민간에서 발생하여 노래 '부를 수 있었던 통속 문학으로서의 사가 문인들의 참여로 점차 음률과 수사를 중시하여 귀족의 전유물이 되자, 일반 민중과 가기(歌妓)들이 새로운 형식의 시가를 찾게 되어 산곡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이민족 음악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여진족(如眞族: 金)과 몽고족(蒙古族 : 元) 차례로 중원을 차지하면서 그들의 호악(胡)이 전입되었는데, 기존의 사로는 더 이상 호악의 리듬과 박자에 맞출 수 없게 되어 자연히 새로운 형식의 산곡이 생겨나게 되었다.
산곡의 체제에는 기본 형식인 소령(小令)과 이것을 연결한 대 과곡(帶過曲)과 투곡(套曲)이 있다. 소령은 민간에서 유행하던 소곡(小曲)이 문학적인 도야를 거쳐 완성된 형식으로 내용이 통속적이며 표현이 진지하다. 대과곡은 합조(合調)라고도 하며, 자수(字數)가 짧은 소령으로는 비교적 긴 서술이나 묘사를 하기에 쉽지 않기 때문에 2~3곡을 합쳐 표현하는 형식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소령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투곡은 투수(套數)·산투(散套)· 대령(大)이라고도 하며, 몇 곡의 소령과 합조를 연결한 조곡(組 曲)의 형식이다. 투곡은 동일한 궁조(宮調)에 속하는 곡으로 연결해야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운(韻)을 사용해야 하며, 각 투 곡의 마지막에는 곡의 끝남을 알리는 미성(尾聲)을 붙여야 하는 등 정해진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산곡은 사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자유로운 특색을 지니고 있 다. 형식상 모두 자유로운 장단구의 형식이지만 산곡은 구절마다 정해진 자수 외에 많은 친자(字)를 삽입하여 훨씬 변화가 심하고 자유롭다. 용운(用韻)상 사는 평측을 따져 하나의 운만을 사용하지만 만일 2가지 운을 쓰려면 반드시 換韻해야 함], 산곡은 입 성이 소실되고 평·상·거 3성을 통압(通押)할 수 있어서 용운이 매우 자연스럽다. 풍격상 사는 전아하지만, 산곡은 매우 통속적이고 대중적이다. 제재상 산곡은 사보다 훨씬 다양하여 표현범위가 확대되었다.
원대 산곡
원대 산곡의 발전은 잡극과 마찬가지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 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기의 산곡은 잡극의 경우처럼 솔직하고 질박한 풍격을 지니고 있고, 언어상 자연스러운 백화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생동감이 넘치며, 내용상으로도 현실을 반영하는 데 주력했다. 이 시기의 작가는 아직 전문화되지 않아서 잡극 작가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대표적인 작가에는 관한경(關漢卿: 1246전후), 백박(白樸:1226~1285?), 왕실보(王實甫: 1234전후), 마치원(馬致遠: 1251전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앞의 세 사람은 청려파(淸麗派)라고 하고 마치원은 호방파(豪放派)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전기의 산곡은 호방파가 주도했으며 마치원에 이르러 곡의 내용과 의 경(意境)이 확대되어 산곡의 문학성이 제고되었다.
관한경 [이별의 정]
【남려】 【사괴옥】
님 떠나보내고서도, 마음으론 잊기 어려우니, 한 점 보고픈 마음 어느 때나 끊어질까요?
난간에 기대어 옷소매로 눈송이 같은 버들 솜 털어요.
시내는 또 가로 흐르고, 산은 또 막아서는데도, 님은 끝내 가버렸어요.
自送別,心難捨,一點相思幾時絶? 憑欄袖拂楊花雪 溪又斜,山遮,人去也.
백박 「어부의 노래[漁父詞]」
[쌍조(雙調)】 【심취동풍(沈醉東風)】
강기슭엔 누런 갈대, 나루터 어귀엔 흰 네가래, 강둑엔 푸른 버드나무, 여울목엔 붉은 여뀌.
목숨과 바꿀 친구는 없지만, 세상의 명리 잊은 벗은 있으니, 가을 강에 점점이 노니는 해오라기와 갈매기라네.
그 오기는 인간 세상의 만호후를 깔보나니, 글자도 모르는 안개 낀 파도 속의 고기 낚는 늙은이라네.
黃蘆岸白蘋渡口,綠楊堤紅蔘灘頭 雖無刎頸交,却有忘機友,點秋江白鷺沙鷗 傲殺人間萬戶侯,不識字烟波釣
마치원 [가을 상념]
[쌍조(雙調)】 【야행선(夜行船)】
백 년 세월은 꿈꾸는 나비와 같은 것, 다시 고개 돌려보니 지난일 한탄스럽네.
오늘 봄이 오지만, 내일 아침엔 꽃이 질 터이니, 밤 깊어 등불 꺼지기 전에 어서 잔이나 드시오.
百歲光陰如夢蝶,重回首往事堪嗟. 今日春來,明朝花謝. 急罰盞夜闌燈滅,
[교목사(喬木]
생각하니 진(秦)나라 궁전과 한나라 궁궐, 모두 소와 양 뛰노는 시든 풀밭 되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어부와 나무꾼이 할 얘기 없겠지.
황폐해진 무덤 널브러졌고 동강난 비석 나뒹구니, 어느 게 용인지 뱀인지 가리지 못하겠네.
想秦宮漢闕,都做了衰草牛羊野. 不恁漁樵無話說 縱荒墳橫斷碑,不辨龍蛇
【경선화(慶宣和)】
여우와 토끼굴로 던져진, 영웅호걸의 무덤은 얼마나 되나?
삼국이 정립했다가 다시 두 동강났으니, 위나라인가? 진(晉)나라인가?
投至狐踪與兎穴,多少豪傑, 鼎足三分半腰折,魏耶,晉耶.
【낙매풍(落梅風)】
하늘이 부자로 만들었더라도, 너무 호사 부리지 마시라.
밤낮 좋은 시절은 많지 않은 법이니. 수전노의 마음 무쇠처럼 다지다간, 금당의 청풍명월 하릴없이 저버릴 테니.
天富,莫太奢. 無多時好天良夜 看錢奴硬將心似鐵,空辜負錦堂風月,
[풍입송(風入松)]
눈앞의 붉은 해 또 서쪽으로 기우니, 세월은 비탈길 내려가는 수레처럼 빠르네.
새벽 되어 맑은 거울 속에 흰 눈이 더 내렸으니, 침상에 오를 때면 신발과 하직한다네.
비둘기 집 짓는 솜씨 서툴다고 웃지 마시라, 알 수 없는 꿍꿍이속 한결같이 멍청한 척 할 뿐이라네.
眼前紅日又西斜,疾似下坡車. 曉來清鏡添白雪,上床與鞋履相別. 莫笑鳩巢計拙,葫蘆提一向裝呆,
【발부단(不)]
명리도 다하고, 시비도 끊어져, 속세의 티끌일랑 문 앞에서 일지 않네.
푸른 나무는 적당히 집 모퉁이 막았고, 파란 산은 알맞게 무너진 담장 메웠는데,
게다가 대나무 울타리에 초가집도 누릴 수 있다네.
利名竭,是非絶,紅塵不向門前 綠樹偏宜屋角遮,靑山正補墻頭缺,更那堪竹籬茅舍.
【리정연살(亭宴)】
귀뚜라미 소리 듣고서야 비로소 편히 쉬나니, 닭 울면 온갖 일 시작되어 쉴 틈이 없네.
명리를 다투는 것, 어느 해에나 그치려나? 빽빽하게 둘러쳐서 개미는 전쟁 벌이고,
어지럽게 뒤섞여 벌은 꿀 따 모으고, 시끄럽게 모여들어 파리는 다투어 피를 빠네.
배공의 녹야당, 도령의 백련사
가을 되면 좋아하는 것들은, 이슬 머금은 노란 꽃 따는 것,
서리 맞은 자줏빛 게 삶아 먹는 것, 단풍잎 태워서 술 데워 먹는 것이라네.
인생에는 한정된 술잔 있으니,
몇 번이나 등고절[중양절] 맞을까? 부탁하노니, 미욱한 아이야 기억해 두어라,
설사 공복해融가 나를 찾아온다 하더라도, 동리는 이미 취했다고 말하렴.
蛋吟一方寧貼,鶴鳴萬事無休歇 争名利,何年是徹 密匝匝蟻排兵,亂紛紛蜂釀蜜,鬧攘攘蠅爭血, 裴公綠野堂,令白蓮社
愛秋來那些,和露摘黃花,帶霜烹紫蟹,煮酒燒紅葉, 人生有限杯,幾個登高節, 囑咐俺頑童記者,便北海探吾來,道東籬醉了也,
후기의 산곡은 시와 사의 영향을 받아 전아하고 미려한 풍격을 지니게 되었고, 언어상 조탁을 추구하고 대우와 성률을 강구하여 형식화되었으며, 내용상으로도 현실에서 벗어난 서정 위주의 작 품이 많다. 이 시기에는 전문적인 산곡 작가가 나와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 였는데, 대표적인 작가에는 관운석(石)·정광조(鄭光祖)·장가구·교길(吉) 등이 있다. 장가구(1317전후)는 질량면에서 원대 산곡의 최고봉에 올랐으며, 산곡집으로 『소산악부(小山樂府)』가 있다. 그는 분운(分韻)과 분제(題)의 형식으로 자신의 곡재를 자랑하는 응수작들을 많이 지었고, 서경·서정·영물·송별·회고·설리·증답 등 다양한 내용을 묘사하여 곡의 내용을 확대시켰으며, 조탁·대구·곡률의 추구로 산곡의 아화雅化)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금의 절 창(唱)'이니 '산곡의 이백과 두보'라는 등의 칭송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질박하고 생기 있는 산곡 본연의 면모를 잃고 유미주의 적인 경향을 띠었다.
장가구 좋아하는 산 정자 위에서 [山亭上]」
[쌍조(雙調)】 【전전환】
작은 난간에, 새로운 대나무 장대 두세 개 더 세웠네.
조홀(朝) 거꾸로 들고 턱 받친 채 바라보니, 나에게 한가로움 허락해주네.
소나무 바람에 옛 벼루 차갑고, 이끼 덮인 흰 바위 빛나는데,
파초 비에 성긴 꽃 벙글어졌네. 청산은 날 좋아하고, 나는 청산을 좋아하네.
小欄干,又添新竹兩三竿, 倒持手版搘願看,容我偷閒, 松風古硯寒,蘚上白石爛,蕉雨疏花縦. 靑山愛我,我愛靑山.
한편 원대에는 산곡과 희곡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참고가치가 있는 두 권의 책이 나왔는데, 『녹귀부』와 『중원음운』이 그것이다. 「녹귀부』는 종사성(嗣)이 지은 것으로, 원대 초기부터 자기와 같은 시기 (1321 전후)까지 107작가의 소전(小)과 458종에 달 하는 그들의 작품목록을 수록해 놓았는데, 원대 잡극과 산곡 작가 및 그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중원음운』은 주덕청(周德淸: 1314전후)이 지은 곡운서(書)로서, 부록에 작곡법·곡률론·산곡비평 등이 실려 있는데, 원대의 곡률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명대 산곡
명대에도 원대 산곡의 전통을 계승하여 많은 작가들이 나왔지만, 그 성격면에서는 원대와 많은 차이를 보였다. 명대 산곡은 명대 중엽에 새롭게 등장한 곡조인 곤강(崑腔)의 유행을 기점으로 하여 그 성격이 크게 변했다. 곤강이 등장하기 이전에 북방에서는 원대 산곡의 기반이 되었던 북곡(北曲)이 널리 유행했으나, 곤강이 등장한 이후로는 북곡이 몰락함에 따라 명대 산곡의 기반이 되는 음악 또한 곤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따라서 명대 산곡은 미려하고 수식적인 곤강을 사용함으로 인해 화려하고 수사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산곡 본래의 질박하고 생기 넘치는 특성을 많이 잃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명대는 문학사상 방면에서 복고주의와 예교주의가 주도되던 시대였던 만큼 산곡도 전시대의 작품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경향이 강했다. 명대의 산곡은 전체적으로 북방과 남방이 뚜렷한 차이를 보였는데, 강해(海), 왕구사, 풍유민(馮惟民) 등의 북방 출신 작가들은 북곡을 바탕으로 한 남성적이고 현실적인 경향의 작품 을 많이지었으며, 양진어(辰魚),심경(沈),시소신 등의 남방 출신 작가들은 남곡을 바탕으로 한 여성적이고 감성적인 작품을 많이 지었다. 이 중에서 풍유민과 시소신은 명대 산곡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풍유민(1511~1580)은 산동성(山東省) 출신으로, 원대 산곡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여 발휘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산곡은 우선 소재와 제재가 다양하여 묘사범위가 넓었고, 방언과 속어를 잘 활용하여 생동감이 넘치며, 북곡과 북방의 굳건한 기풍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힘찬 기세를 잘 표현했다.
「벼슬을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오다」
【중려조(中呂調)】 【조천자]
청빈한 벼슬 그만 두었나니, 그간 온갖 고생 많이 했네.
천리 밖에 소식 끊어졌고, 오랑캐 땅 먼지는 풀썩풀썩 갈 길은 가물가물한데, 급히 고개 돌려보니 굴레가 없네.
신정에선 눈물 뿌렸으나, 고향에선 마음 즐거우니, 세상 일 길고 짧은 것 상관 않네.
동쪽으로 흐르는 파란 물굽이 돌아, 서산의 푸른 봉우리 보며, 갈매기 몇 마리 찾아 짝으로 삼네.
罷淸貧一官, 受艱辛百般. 千里外音書斷, 胡塵滾滾路漫漫, 急回首無羈絆, 灑淚新亭,甘心舊瞳,不關情長共短.
繞東流綠灣,看西山翠讚,覓幾個鷗爲伴.
시소신(1581~1640)은 강소성 출신으로, 명대 산곡의 예술성을 한 차원 높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명말 산곡계의 유미주의적인 편향성을 탈피하여 남방과 북방의 특질을 겸비했으며, 청순하고 소탈한 기풍을 담아냈다. 그는 낭만적인 풍류객 으로 서정적인 염곡(艶曲)을 많이 지었으나 서경(敍景)에도 뛰어 났다.
「빗속의 풍경」
【남상조(調)】 【황앵아(黄鶯兒)】
보슬비에 젖는 기름진 밭 몰려드는 검은 구름, 저물어가는 하늘. 아득한 사방 들판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
서쪽 마을에 걸린 술집 깃발, 동쪽 하늘에 걸린 무지개 어부가 부르며 그물 말리는 수양버들 강 언덕, 나무다리 근처,
문 두드리는 소리 속, 도롱이 삿갓, 멀리 돌아가는 배.
嫩雨濕肥田.暗雲堆,欲暮天. 平迷四野聞人喚.西村施懸,東天秦懸. 漁歌眼網垂楊岸,木橋邊. 敲門聲裏,蓑笠遠歸船.
청대 산곡
청대의 산곡은 전반적으로 침체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산곡의 독립성이 약화된 점을 들 수 있다. 원대의 여러 뛰어난 작가들에 의해 독립된 지위를 확보했던 산곡은 명·청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한 희곡에 흡수되어 제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청대 한족 사대 부들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들 수 있다. 산곡은 이민족 왕조인 원 대에 성행했기 때문에 한족 사대부들의 보수적인 문화적 풍토로 인해 서민적이고 통속적인 산곡이 상대적으로 침체되었던 것이다. 산곡은 원래 노래의 가사로서 음악성이 매우 강조되었으나, 청대의 산곡은 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음악과 분리되어 시처럼 지어져 산곡 본연의 모습에서 멀어져 있었다. 청대 산곡 작가들은 대부분 서민적이고 남성적인 원대 초기의 산곡보다는 세련된 운 치를 중시하는 원대 후기의 산곡, 특히 장가구(張可久)와 교길의 산곡을 추종했다. 이들 가운데 원대산곡의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린 작가로는 조경희(趙慶熺)를 꼽을 수 있다.
辭賦
사부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會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초사
『시경』의 뒤를 이어 초국(國)에서 출현한 또 다른 체재의 문학 형식은 '초사'이다. '초사'는 초 땅의 가사라는 뜻이다. 주요한 작가들이 모두 초인(楚人)이었고, 또한 그들의 작품이 대부분 초어(楚語)와 초성(楚聲)을 사용했으며, 초지(地)와 초물(楚物)을 기록했으므로 '초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초사'라는 명칭은 한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사마천(司馬)의 사기(史記)』「혹리열전(酷吏列傳)」에서 "주매신買臣)이 초사로써 장조와 함께 총애를 받았다[買臣以楚辭與助俱幸]"고 한 기록이 그것이다. 또한 전한(前漢)의 유향(劉向)은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인 굴원(原)과 송옥(玉) 2사람의 작품을 집록하면서 그들과 같은 시대의 당륵,경차및 한대의 장기,동방삭,회남소산,왕포와 자신의 작품등 총 16편의 작품을 한데 모아 「초사』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후한(後漢)의 왕일 (逸)은 『초사』에다 자신의 작품 1편을 추가하여 총 17편을 수록한 『초사장구(辭章句)』를 펴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초사’는 초나라 사람이 이러한 새로운 시가 형식으로 지은 작품뿐만 아니라 한대 사람들이 이러한 형식을 사용하여 지은 작품까지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라고 하겠다. 『초사장구』에 수록된 작품을 기준으로 하면, 초사는 전국시대 말기(BC 4세기)에서 전한(前漢) 초기(BC 2세기)까지 약 200여년 사이에 창작되었는데, 대부분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므로 남방문학이라 할 수 있다. 초사의 출현은 중국문학사상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4언을 위주로 하고 편폭이 비교적 짧은 『시경』에 비하여 확실히 진일보한 형태를 지녔다. 초사는 확대된 편폭, 풍부한 내용, 화려한 문채, 3언과 6언을 위주로 한 자유로운 구법(法) 등을 활용하여 비교적 복잡한 사상내용이나 감정의 변화를 낭만적인 수법으로 잘 표현해 냈으며, 서정적인 분위기 또한 뛰어나다. 『초사』의 대표적인 작가는 중국 문학사상 최초의 위대한 시인 인 굴원(原: BC339?~BC278?)을 들 수 있다. 그의 이름은 평 (주) 또는 정칙(正郞), 자는 원(原)또는 영균(靈)으로 초 왕실과 동성이었다. 회왕(王) 초기에는 큰 신임을 받아 삼려대부(三閭 夫)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나중에는 상관대부(上官大夫)들의 참소를 받아 유배당했으며, 경양왕(頃王) 때에 다시 추방당하자 돌을 안고 멱라강에 투신자살했다. 그는 「이소」·「천문)」·「구가」등을 지었는데, 그의 작품에는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열정, 회재불우(懷才不遇)의 비분, 강렬한 정치성향, 불 굴의 분투정신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초사의 대표작이자 굴원의 대표작인 「이소(離騷)」는 전편 375구 2,461자에 달하는 중국 고대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긴 시이며 가장 뛰어난 개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소'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근심을 떠나다', '근심을 만나다', '발음상 牢騷(láosão)와 비슷하므로 굴원 자신의 불평을 나타낸다' 등의 해석이 있다. 「이」는 당시의 남방문학을 대표하는 개인적인 작품으로, 열 정적이고 자유분방한 풍격을 지니고 있으며 풍부한 상상력으로 낭만주의 정신을 발휘했다. 또한 무술·미신 등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역사고사·신화.전설 등을 대량으로 수용하여 제재의 폭을 넓혔으며, 초국의 자연환경과 지리적 색채를 잘 묘사했다. 형식상으로는 3자 위주의 장구(句)로서 중복이 없고 '혜(兮)'. '사(些)'자 등 조자(字)의 운용이 뛰어나다. 또한 조직적이고 세 련된 수식으로 문채가 화려하고, 비유와 상징수법이 뛰어나며, 초성(聲)·남음(南)을 사용한 남방음악의 결정체로서 생동감 넘치는 초국의 방언 · 구어를 구사했다.
「시름 노래」
고양 임금의 먼 자손이며, 나의 아버님은 백용 어른이시네. 인(寅)의 해 바로 첫 정월, 경인 날 내가 태어났네.
아버님이 내가 처음 날 때를 헤아려 보시고, 비로소 내게 아름다운 이름 지어주시니,
이름은 정칙이라 하고, 자는 영균이라 하셨네.
날 적부터 안으로 고운 성품 지녔고, 게다가 뛰어난 재주까지 갖추어,
강리와 벽지 같은 향초를 걸치고, 추란을 엮어 허리에 찼네.
이 몸 닦기를 매양 부족한 양, 행여 저 세월이 나와 함께 하지 않을까,
아침엔 비산의 목란을 캐고, 저녁엔 모래톱의 숙망을 땄네.
...... (중략)......
길을 살피지 못한 걸 후회하며, 우두커니 서서 내 장차 돌아갈까 주춤하네.
내 수레 돌려 옛 길로 돌아가니, 길 잘못 든 지 아직 멀지 않았네.
난초 향긋한 못가에서 내 말 걷게 하여, 산초 언덕으로 달려가 잠깐 예서 쉬네.
나아갔으나 들어가지도 못한 채 허물만 만났으니, 물러가 장차 다시 나의 본래 품성이나 닦으리.
마름 연잎 마름질하여 저고리 짓고, 연꽃 모아 치마 짓네.
날 알아주지 않더라도 또한 그만이니, 진실로 내 마음 진정 꽃다운 것 이라네.
내 관은 산처럼 우뚝 솟았고, 내 허리띠는 치렁치렁 광채 어렸네.
방향과 악취 섞여 있는 속에서도, 오직 밝은 천성은 아직 이지러지지 않았네.
갑자기 뒤돌아 시선을 흘리며, 장차 사방 끝을 구경하러 갈까 하네.
띠에 고운 것 많이 꾸미니, 꽃다운 향기 서언이 풍기네.
인생은 각자 즐기는 바 있으니, 나는 홀로 결백함 좋아하여 도리로 삼네.
비록 몸이 찢겨져도 변치 않을지니, 어찌 내 마음 고칠 수 있으랴?
이런 날 두고 우리 누님은, 거듭거듭 날 나무라시네.
"곤은 강직함 때문에 몸을 망쳐, 끝내 우산의 들판에서 죽었단다.
네 어이 충직과 결백을 즐겨, 이 어여쁜 절개를 너만이 두느냐?
납가세·꼴·도꼬마리로 집안이 가득한데, 왜 너만 홀로 떨어져 가까이하지 않느냐?
남에게 일일이 말할 수 없으니, 누가 너의 충정을 알아주겠니?
세상은 모두 당파 짓길 좋아하는데, 어쩌자고 너만 홀로 외롭게 내 말 듣지 않니?"
…...(중략)......
난에 이르길, 그만 두어라! 나라에 사람 없어, 날 알아주지 않으니, 고국은 생각해서 무얼 하겠나?
이미 함께 바른 정치 펼칠 이 없으니, 내 장차 팽함님 계신 곳으로 가려네.
帝高陽之苗裔兮,朕皇考伯庸 攝提貞于孟陬兮,惟庚寅吾以降 皇覽揆余初度兮,肇錫余以嘉名, 名余曰正則兮,字余日靈均 粉吾既有此内美兮,又重之以能 江離與辟芷兮,初秋蘭以爲佩, 汨余若將不及兮,恐年歲之不吾與 朝搴之木蘭兮,夕攬洲之宿莽, ......(중략)......
悔相道之不察,延佇乎吾將反, 回朕車以復路兮,及行迷之未遠 步余馬於蘭皐兮,椒丘且焉止息, 進不入以離尤兮,退將復脩吾初服, 製芰荷以為衣兮,集芙蓉以為裳, 不吾知其亦已兮,苟余情其信芳 高余冠之岌岌兮,長余佩之陸離 芳與澤其雜糅合,唯昭質其猶未
忽反顧以遊目兮,將往觀乎四荒. 佩繽紛其繁兮,芳菲菲其彌章 民生各有所兮,余獨好脩以為常, 雖體解吾猶未變兮,豈余心之可懲
女之嬋媛,申申其詈予 日𩶘直以亡身兮,終然乎羽之野 汝何博謇而好,紛獨有此節 薋菉葹盈室,獨離而不服,
衆不可戶說兮,孰云察余之中情 世擧而好朋兮,夫何獨而不予聽 ..... (중략) ......
亂曰, 已矣哉,國無人兮,莫我知兮,又何懷乎故都, 旣莫足與爲美政兮,吾將從彭咸之所居,
「저 하늘에 묻노니」
아득히 먼 태고적 일을, 누가 입 열어 전한 것일까? 천지도 아직 나뉘기 전인데, 무얼 가지고 생각해냈을까?
밤낮도 모르던 어두운 적에, 누가 이것을 캐냈을까? 뜬 기운 속에 현상뿐인 것을, 어떻게 해서 알 수 있었을까?
밤낮이 교대로 오가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런 건가? 음양이 어울려 만물을 내니, 근본은 뭐고 어떤 게 변화인가?
하늘은 둥글고 아홉 층이라니, 누가 이것을 설계했을까? 도대체 이건 누구의 공로며, 누가 처음 만들어냈을까?
수레바퀴 줄은 어디다 맸나? 하늘의 끝은 어디에 있나? 여덟 기둥은 어디에 닿았나? 동남쪽 기둥은 왜 이지러졌을까?
아홉 층 하늘의 경계는, 어디서부터 어디로 이었나? 너른 천지에 모퉁이도 많을 텐데, 그 많은 수를 누가 알려나?
하늘과 땅은 어디서 겹쳤나? 열두 진(辰)은 누가 나눠 놓았나?
해와 달은 어디다 매어 놓았나? 숱한 별들은 누가 벌려 놓았나? 아침에 해가 탕곡에서 나와,
몽수(水)가에 와 잠자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가는, 그 거리는 얼마나 될까?
무슨 덕(德)이 있어 저 달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나? 이익이 도대체 뭐기에, 토끼는 달의 뱃속에서 살까?
여기는 어떻게 지아비도 없이, 아홉 아들을 두었을까? 백강은 어디서 살고 있나? 화기(和氣)는 또 어디에 있나?
어딜 닫기에 어두워지나? 어딜 열기에 밝아지나? 동방의 별 밝기 전에는, 태양은 빛을 어디다 감춰 두나?
곤륜산 위 현포에, 신령이 있는 곳 어디일까? 아홉 층 성을 쌓았다는데, 그 높이는 얼마나 될까?
곤륜산 사방의 문은, 도대체 누가 드나드는 걸까? 서북쪽 문은 열려 있다는데, 어떤 바람이 통하는 걸까?
해가 어딘들 안 이를까 만은, 용은 왜 횃불을 비출까? 아직 희화도 오르지 않았는데, 약목 꽃은 어떻게 빛날까?
따스한 겨울은 어느 곳에 있을까? 추운 여름은 어느 곳에 있을까? 어디에 석림이 있을까?
어떤 짐승이 말을 잘 할까? 곰을 업고 노는 것일까? 머리 아홉 달린 이무기는, 나는 듯 훌쩍 어디 있을까?
불사의 나라는 어디 있을까? 키 큰 사람은 어딜 지킬까? 아홉 갈래로 넌출진 마름, 수삼 꽃은 또 어디 있을까?
신령한 뱀이 코끼릴 삼킨다니, 그 뱀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흑수와 현지산, 뿔 없는 용이 어디에 있어서,
그리고 삼위산은 어디에 있을까? 오래 살아서 죽질 않는 다니, 수명은 얼마로 끝나는 걸까?
농어는 바다 어디서 살까? 기작은 또 어디서 살까? 예는 어째서 해를 쏘았나? 까마귀는 어디에 떨어졌을까? .... (중략)....
曰, 逐古之初 誰傳道之? 上下形, 何由考之? 冥昭瞢闇, 誰能極之? 馮翼惟像, 何以識之? 明明閶闔, 惟時何為? 陰陽三合, 何何化? 圜則九重, 孰營度之? 惟何功, 孰初作之? 斡維焉? 天極焉加? 何當? 東南何虧? 九天之際, 隅隈多有, 誰知其數? +二?
日月安屬? 列星安? 出自湯谷, 次于蒙汜, 自明及晦, 所行幾里? 夜光何德, 厥利維何, 而顧菟在腹? 女歧無合夫, 取九?
伯强何處, 惠氣安在? 何闔而晦? 何開而明? 角宿未旦, ….(중략)...... 曜安? 崑崙縣圃, 其安在? 增城九重, 其高里?
四方之門, 其誰從? 西北辟啓, 何氣通 日安不到, 燭龍何照?, 羲和之未揚, 若華何光? 何? 何? 何言?
焉有龍蚪, 負熊以遊? 雄虺九首, 忽? 何所不死? 長人何守? 靡九衢, 華安居? 靈蛇吞象, 何如? 黑水玄趾, 三危安在?
年年不死, 壽何所止? 鯪魚何所? 堆處? 日? 烏解? ...(중략)...
초사는 굴원 이후 송옥[「구변(九)」·「초혼(招魂)」 등을 지음, 당륵, 경차 등을 거치면서 정식으로 문학상 하나의 문체로 정립된 후에, 가의(賈誼) [「석서(惜誓)」지음], 동방삭 「칠간(七諫)」 지음], 장기 [「애시명(命)」지음], 왕포 「구회(九懷)」 지음], 유 「구탄」 지음, 왕일[「구사(九思)」 지음] 등과 같은 한대의 많은 작가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었다.
''초사'는 후대 부(賦)와 변려문(騈儷文)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특히 7언시의 생성에 많은 영향을 미침으로써, 중국문학사상 중 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고부(한부)
고부)는 초사를 비롯하여 한대(漢代)의 부와 그 후 진대 (晉代)까지 통행하던 부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한부(漢賦)를 지칭한다. '부'는 주로 한대에 성행한 시대적인 특징이 강한 문체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부'를 언급할 때는 그 앞에 '한'자를 붙이곤 하는 데, 이것은 바로 한대를 대표하는 문학형식이 '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부의 구법은 반문 반시(半文半詩)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즉 구법이 들쭉날쭉하고 장단이 일정하지 않아 산문의 특색이 있는 반면에 성률을 강구하고 압운을 하여 시가의 특색도 함께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시와 산문의 경계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의 구성은 대체로 '서(序)'와 '본문', 그리고 '난(亂)' 또는 '신 (訊)'이라고 부르는 결말의 3부분으로 구성된다. '서'에서는 주로 부를 짓게 된 원인을 설명하고, '본문'에서는 부의 중심내용을 기술하며, '난'에서는 전편의 대의를 개괄하거나 작자의 직접적인 의론을 전개한다. 부의 묘사상 특징은 수많은 아름다운 형용사와 명사, 동사 등을 교묘하게 배열하여 수사미를 증가시키고, 하나의 제목 아래 내용과 별로 관계없는 제재까지 모두 끌어들여 나열함으로써, 편 폭은 길어졌으나 내용은 공허한 경우가 많다. 또한 작자가 자신의 학문을 과시하기 위하여 일부러 어려운 전고와 기이한 글자를 사용함으로써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가 흥성하게 된 원인으로는 우선 문학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시경』으로 부터 초사가 나오고 초사로부터 부가 나왔 다는 문체 자체의 연변(演變)을 들 수 있다. 사회발전에 따른 측 면에서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안정됨에 따라 문학적으로도 일종의 과장되고 미려한 내용을 추구하게 되어 부의 발전을 촉진시켰 다. 학술적으로는 무제(武帝)가 유학을 국시(國是)로 정하고 다른 학술을 통제하자 모든 학자들이 유가 경전의 연구에 매달려 서정 문학이 침체되었는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부가 발전하게 되었 다. 그 밖에 헌부(賦)·고부(考賦) 제도의 영향도 들 수 있다. 한대부의 연변과정은 형성기 · 전성기 · 모방기 · 전변기의 4단 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형성기는 초사의 형식을 답습하여 그 체 재와 수법이 형성된 시기로서, 주요 작품에는 가의(賈誼: BC201 ~BC169)의 「조굴원부(弔屈原賦)」 등이 있다.
「굴원을 애도하며[弔屈原賦]」
..... (전략) ......
아! 슬프구나! 상서롭지 못한 때를 만나심일세.
난새와 봉황은 엎드려 숨어 있고, 솔개와 올빼미는 드높이 날개 치네.
용렬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높이 드러나서, 참소와 아첨으로 뜻을 얻네. 성현은 거꾸로 끌려 다니고,
방정한 이는 거꾸로 섰네. 변수)와 백이(伯夷)를 더럽다 하고, 도척)과 장교(莊)를 청렴하다 하네.
명검 막야를 무디다 하고, 날 무딘 칼을 날카롭다 하네. 아! 묵묵히, 선생은 까닭 없는 화를 당하셨네.
주나라 보정(鼎)을 굴려서 내버리고, 큰 표주박을 보배라 하네. 지친 소에 멍에 매어 끌고, 절름거리는 말을 곁말로 쓰네.
천리마는 두 귀를 늘어뜨린 채, 소금 수레를 끄네. 귀한 장보관(冠)을 신발 밑에 까니, 점점 오래 있을 수 없네.
아! 슬프게도 선생이, 홀로 이 허물에 걸리셨네.
...(前略)
烏虜哀哉兮, 逢時不祥, 鸞鳳伏竄兮, 鴟鴞翺翔 關茸尊顯兮, 醜謏得志. 賢聖逆电兮, 方正倒植 謂隨夷溷兮, 謂跖蹻廉
莫邪爲鈍兮, 鉛刀爲銛, 于嗟默默, 生之亡故兮. 斡棄周鼎, 寶康瓠. 騰駕罷牛, 駱蹇驢兮. 驥垂兩耳, 服鹽車. 章甫薦履,
漸不可久兮. 嗟苦先生, 獨離此 ............. (後略)...
전성기는 한대부가 정형을 갖추고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시기로 서, 형식상 장편의 산체장부(體長賦)가 주류를 이루었다. 주요 작품에는 사마상여(司馬相如: BC179~BC118)의 「자허부(子虛賦)」 ・「상림부(上林賦)」 등이 있다.
「자허부」
.....(전략)......
신이 듣자오니 초나라에 일곱 못이 있다는데 일찍이 그 중 하나만 보았고 나머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신이 본 것은 다만 소소한 것뿐으로 '운몽'이라 합니다. 운몽은 사방이 900리이고 그 안에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은 구불구불 첩첩이 쌓여 있고 가파르게 높이 솟아 있으며 산봉 우리가 들쭉날쭉하여 해와 달을 가리고, 어지럽게 뒤섞여 위로는 푸른 구름 위로 치솟고 옆으론 울퉁불퉁 비탈져 있고 아래론 강물에 연이어져 있습니다. 그 흙은 단사·청사·적토·백토가 있고, 노란 석 영, 흰 석영, 주석, 벽옥, 금, 은이 나는데, 여러 가지 색깔이 찬란하여 용 비늘이 반짝이는 듯합니다. 그 돌은 적옥·매괴옥· 임옥·민옥·곤오옥·감옥·늑옥·현려옥·연석·무부가 있습니다. 그 동쪽엔 혜초 밭이 있는데, 두형·난초·백지·두약·야간·궁궁·창포··강리·미무·제자·파저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 남쪽엔 평원과 넓은 못이 있는데, 오르내리며 비스듬히 길게 뻗쳐 있고 움푹 아래로 들어가 펑퍼짐하게 펼쳐져 있으며, 장강에 닿아 있고 무산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 높은 건조한 곳에서는 짐·석·포·려·벽·사와 푸른 풀들이 자랍니다. 그 낮은 습지에서는 장랑·겸가·동장·조호·연우·고로·암려·현우와 같은 여러 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서쪽엔 솟구치는 샘과 맑은 연못이 있어 부딪히는 물결이 세차게 흘러가는데, 겉에는 연꽃과 마름 꽃이 피어 있고 안으로 큰 돌과 흰 모래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엔 신령스런 거북과 교룡· 악어 대모자라가 있습니다. 그 북쪽엔 울창한 숲과 거대한 나무가 있는 데, 편나무·남나무·예장나무·계수나무·산초나무·목란· 황벽나무·붉은 버드나무·귤나무·유자나무가 향기를 풍깁니다. 그 위로는 원 추새·공작·난새·나는 원숭이·야간이 살고, 그 아래로는 흰 호랑이·검은 표범·만연·추안등의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후략)......
....(前略)...
臣聞楚有七澤, 嘗見其一, 未睹其餘也, 臣之所見, 蓋特其小小者耳, 名日 雲夢雲夢者, 九百里, 其中有山焉. 其山則盤汗嵬鬱, 隆崇崔萃,岑峯參差, 日月藏虧,交錯糾紛, 上干靑雲, 寵 池陂陀,下屬江河,其土則丹靑楮堊, 雌黃白均, 錫碧金銀, 衆色炫耀, 照爛 龍鱗,其石則赤玉玫瑰,琳瑁昆吾,瑊玏玄厲,礫石碔硃,其東則有蕙圃, 衡蘭若,窮菖浦江籬蕪,諸柘巴苴.其南則有平原廣澤,登降陁靡,案
衍壇曼,緣以大江,限以巫山,其高燥則生葳薪苞,薛莎靑,其濕則 生藏葭,東藤彫胡,蓮繭触,菴閱,衆物居之, 不可圖.其西則 有湧泉淸池,激推移,外發芙蓉菱華,內隱鉅石白沙,其中則有神能蛟羅, 瑁其北則有陰林巨樹,鞭梢豫章,桂椒木蘭,欒離朱楊,權梨楊栗, 橘柚芬芳,其上則有鵷鶵孔鸞,騰遠射干,其下則有白虎豹,嫚蜒驅犴
......(중략)......
모방기는 전인의 작품의 제목·체재·묘사수법 등을 모방·계승 한 시기로서, 주요 작품에는 양웅(揚雄: BC53~AD18)의 「촉도부 (蜀都賦)」, 반고(班固: 32~92)의 「양도부(兩都賦)」 등이 있다. 전변기는 이전의 산체장부(賦)에서 서정성을 위주로 한 단부(短賦: 小賦)로 전변한 시기로서, 이러한 개성적이면서도 청 신한 단부는 부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작품 에는 장형(張衡: 78~139)의 「귀전부(歸田賦)」가 있다.
[전원으로 돌아가며]
도읍에서 노닌 지 오래 되었지만, 시국을 바로잡을 훌륭한 계책 없네.
하릴없이 냇물 가에서 물고기 잡길 바라지만, 황하가 맑아지길 기다려도 기약이 없네.
옛날 채택(蔡澤)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애태우다가, 당거(唐擧)를 찾아가 관상을 보고 의혹을 풀었네.
천도의 현묘함은 헤아릴 수 없으니, 어부를 따라 함께 즐겨야겠네.
속세의 먼지 털어버리고 멀리 떠나, 세상일과는 영영 이별하려네.
때는 한봄 좋은 달, 시절 화창하고 날씨 맑네. 들판은 빽빽이 우거지고, 온갖 풀들 무성하네.
물수린 날갯짓하고, 꾀꼬린 슬피 울며, 서로 목 부비며 위아래로 날면서, 판관 꾹꾹 우짖네.
여기에서 소요하며, 애오라지 마음 즐겁게 해야지. 큰 호숫가에선 용 울음소리 내고, 산언덕에선 호랑이 울음소리 지르네.
위로는 주살 날리고, 아래로는 긴 강물에 낚시 드리우니, 화살에 맞아 죽고, 미끼 탐하다 낚싯바늘 삼키네.
구름 사이로 나는 새 떨어뜨리고, 깊은 연못 속에 잠긴 고기 낚아 올리네. 그러다 어느덧 해지면, 달이 떠오르네.
노니는 지극한 즐거움 다하느라, 비록 여러 날 되어도 수고로움 잊네.
노자가 남긴 교훈을 떠올리며, 수레 돌려 내 초가로 돌아와, 오현금을 날렵한 손가락으로 타고, 주공과 공자의 책을 읊네.
붓 휘둘러 멋진 글 짓고, 삼황의 법도 써보네. 진실로 세상밖에 마음 풀어놓으니, 영화와 굴욕이 어떠한지 어찌 알리오?
遊都邑以永久,無明略以佐時, 徒臨川以羨魚,俟河清乎未期, 感蔡子之慷慨,從唐生以決疑, 諒天道之微昧,追漁父以同嬉, 超埃塵以遐逝,與世事乎長辭, 於是仲春月,時和氣清, 原隰鬱茂,百草滋榮 王雎翼,鴿鶴哀鳴, 交頸頡頏,關關嚶嚶, 於焉逍遙,聊以娛情,
爾乃龍吟方澤,虎嘯山丘, 仰飛纖繳,俯釣長流, 觸而,貪餌鉤, 落雲間之逸禽,懸淵沈之魦鰡 于時曜靈俄景,係以望舒, 極般遊之至樂,雖日夕而忘劬. 感老氏之遺誡,將迴駕乎蓬廬. 彈五絃之妙指,詠周孔之圖書 揮翰墨以奮藻,陳三皇之軌模 苟縦心於物外,安知榮辱之所如,
한대의 부는 통일제국의 막강한 국세를 상징하는 시대적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완곡한 풍간(諫)의 의미를 함축함으로써 문 학의 공효성도 지니고 있다. 또한 현란한 수사, 단어의 나열, 벽 자의 운용 등으로 말미암아 후대 중국 문학의 어휘를 풍부하게 하고 어구의 단련과 묘사기교를 증진시켰다. 한편 부의 흥성으로 말미암아 후한 때 '문장'의 개념이 출현하여 초보적으로 나마 문학 과 학술의 분리를 모색함으로써 문학 관념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변부(배부)
변부(賦)는 변려문(騈文)에 근접한 일종의 부체(賦體)로 배 부(賦)라고도 하는데, 위진남북조 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당대 (唐代)까지 통행되었다. 변부는 전편에 대구를 사용하고 반드시 압운을 하여 변려문과 유사하다. 즉 변려문의 특징을 갖춘 부라 할 수 있다. 주요 작가와 작품에는 조식의 「낙신부(洛神賦)」, 좌사의 「삼도 부(三都賦)」,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등이 있다.
[강남을 애절하게 그리며]
우리 선조께서 유(庾) 벼슬 맡아 주나라를 섬기신 이래, 대대로 공을 세워 유씨 일족이 이뤄졌네.
한나라 들어서자 임금을 보좌했고, 치국의 도리 논하여 관직 맡으셨네.
숭산과 화산의 정기 이어받고, 하수와 낙수의 물결에 젖어,
낙수를 등지고 대대로 살아왔고, 황하 가에 자리 잡고 편안하게 지내왔네.
영가 연간에 이르러 정치가 혼란되고, 중원에 군주가 없게 되자,
백성들은 집 잃은 채 담벼락에 기대어 자고, 길에는 승냥이. 호랑이 같은 폭도들만 날뛰었네.
왕족들은 남쪽으로 피난 가고, 별들은 왕실이 동천할 것을 계시했네.
저들은 장강을 건너가 새나라 세웠고, 우리 조상들도 따라 옮겨가니,
남양 땅 쪼개 봉지로 내렸고, 동악을 갈라 영지로 주셨네.
송옥의 옛 집에 잡초 뽑아 집을 삼고, 임강부 옛 터에 길을 다시 내었네.
............
我之掌庾承周,以世功而爲族, 經邦佐漢,用論道而當官. 禀嵩華之玉石,潤河洛之波瀾, 居負洛而重世,邑臨河而安, 逮永嘉之艱虞,始中原之乏主 民枕倚於墙壁,路交橫於豺虎, 値五馬之南奔,逢三星之東聚, 彼凌江而建國,始播遷於吾祖, 分南陽而賜田,裂東岳而胎土. 誅茅宋玉之宅,穿徑臨江之府, .....(後略)......
율부
율부(律賦)는 당대에 크게 유행하여 청대의 고시부(考試賦)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것인데, 율시(律詩)의 영향을 받아 형식상으로 더욱 정제되었다. 대구를 짓는 것은 변부와 같지만 용운(用韻)은 엄격하게 한정되었으며 때로는 운으로 제목을 삼는 경우도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왕발(王勃)의 「한오서봉부(寒梧棲鳳賦)」와 두목 (杜牧)의 「아방궁부(阿房宮賦)」 등이 있다.
문부
문부(賦)는 송대의 문인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후세의 응수 문(應) 가운데 이 문체를 많이 응용했다. 송대에는 고문운동 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율부에 염증을 느껴 형식상의 규율을 과감 히 탈피하여 전편 가운데 몇 군데만 압운하는 형식으로 개혁했 다. 그래서 부에서도 격률에 구애 받지 않고 설리(理). 서정·서 사를 자유롭게 기술함으로써 거의 산문에 가까운 문체가 되었다. 다시 말해 운이 들어 있는 고문이라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에는 구양수(歐陽修)의 「추성부(秋聲賦)」와 소식(蘇軾)의 「전·후적벽부(前後赤壁賦)」 등이 있다.
「전적벽부(前壁賦)」
임술년(1082) 가을 7월 16일에 소자가 객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적 벽 아래에서 노닐었는데, 맑은 바람은 서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는지라, 술을 들어 객에게 권하고 「명월」의 시를 읊으며 "요조"의 구절을 노래했다. 조금 있으니 달이 동산 위로 나와서 남두성과 견 우성 사이에서 배회했다. 흰 이슬은 강물에 비껴 있고 물빛은 하늘 에 닿아 있었다. 한 조각 작은 배를 가는 대로 맡겨 둔 채 한없이 넓은 강물 아득한 데를 넘어 가노라니, 하도 넓고 커서 허공에 올라 바람을 탄 듯 그 머무를 곳을 모를 것 같았고, 두둥실 가벼이 떠올라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선 채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 듯했다. 이에 술을 마셔 흥이 오르자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계수나무 노와 목란 삿대로 맑은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를 치고, 흐르는 물에 반짝이는 달빛을 거슬러 올라가네. 아스라한 나의 회포여! 하늘 한쪽에서 아름다운 이를 바라보네.”라고 노래했다. 객 가운데 퉁소를 부는 사람이 있어서 노래에 맞춰 화답했는데, 그 소리가 하도 구슬퍼서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흐느껴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했고, 여음이 가냘프고 길게 이어져 실처럼 끊어지지 않으니, 깊은 골짜기에 잠겨 있던 교룡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작은 배에 사는 과부를 흐느끼게 했다. 소자가 정색하며 옷깃을 바로잡고 곧추 앉아 객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퉁소 소리가 그러하시오?" 객이 대답했다. “달이 밝으니 별이 드물고 까막까치는 남쪽으로 날아가네'는 조맹 덕의 시가 아니오? 서쪽으로는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이 서로 얽혀 나무들이 빽빽하고 푸르니, 여기 가 조맹덕이 주랑(周)에게 곤욕을 당한 곳이 아니오? 바야흐로 형주를 격파하고 강릉으로 내려가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갈 적에, 배 들은 천 리까지 잇닿아 있고 깃발들은 하늘을 뒤덮었는데, 술을 걸러 강을 내려다보며 창을 비껴 누이고 시를 지었으니, 정말로 일대의 영웅 이러니 지금엔 어디에 있단 말이오? 하물며 내가 그대와 함께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 새우와 짝하고 고라니. 사슴과 벗 함에랴! 한 조각 작은 배를 타고 술 뒤웅박을 들어 서로 권하 노라니, 하루살이 목숨을 천지에 붙이고 있는 건 망망한 푸른 바다 무궁함을 부러워하며, 나는 신선을 옆에 끼고 마음대로 노닐고 밝은에 한 알의 좁쌀과 같소. 내 목숨이 잠시 잠깐임을 슬퍼하고 장강의 달을 끌어안고서 오래도록 사는 것은 갑자기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여음을 슬픈 가을바람에 부쳐 본 것이오." 소자가 말했다. “객은 또한 저 물과 달을 아시오? 가는 것이 이와 같지만 일찍이 가버린 적이 없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지만 마침내 사라지거나 커지는 일이 없소. 대개 장차 그 변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천지는 한 순간도 그대로일 수 없으며, 그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는 것 이오. 그러니 또 무엇을 부러워 하리오! 또한 대저 천지 사이에 만물은 각각 주인이 있는 법이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비록 터럭 하나라도 취하지 말 것이지만,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만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경치가 되니, 아무리 취해도 금함 이 없고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것 이오. 이것은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창고이며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는 바이오." 객이 기뻐서 웃으며 잔을 씻어 다시 따라주니, 안주는 이미 떨어졌 고 잔과 접시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서로 더불어 배안에서 베 고 누운 채 동녘이 이미 밝은 줄도 몰랐다.
壬戌之秋七月旣望,蘇子與客泛舟遊於赤壁之下.淸風徐來,水波不興. 擧酒屬客,誦明月之詩,歌窈窕之章,少焉,月出於東山之上,徘徊於斗牛 之間,白露横江,水光接天,縱一葦之所如,凌萬頃之茫然,浩浩乎如馮虛 御風,而不知其所止,飄飄乎如遺世獨立,羽化而登仙.
於是飲酒樂甚,扣舷而歌之,歌曰:“桂蘭槳,擊空明兮诉流光,渺渺 予懷, 望美人兮天一方.” 客有吹洞簫者,倚歌而和之,其聲嗚嗚然,如怨如 慕,如泣如訴,餘音扇扇,不絶如纓舞幽壑之潛蛟,泣孤舟之斄婦, 蘇子愀然,正襟危坐,而問客曰:“何為其然也?”
客曰:“月明星稀,烏鵲南飛,此非曹孟德之詩乎?西望夏口,東望武昌, 山川相繆,鬱乎蒼蒼,此非孟德之困於周郎者乎?方其破荊州,下江陵,順流而 東也,舳艙千里,旌旗蔽空,釃酒臨江,橫槊賦詩,固一世之雄也,而今安在 哉?況吾與子漁樵於江渚之上,侶魚蝦而友麋鹿,駕一葉之扁舟,擧匏樽以 相屬,寄蜉蝣於天地,渺滄海之一粟,袁吾生之須臾,羨長江之無窮,挾飛仙 以遨遊,抱明月而長終,知不可乎驟得,託遺響於悲風”
蘇子曰:“客亦知夫水與月乎?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虚者如彼,而卒莫 消長也,蓋將自其變者而觀之,則天地會不能以一瞬,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而又何羡乎!且夫天地之間,物各有主,苟非吾之所有, 雖一豪而莫取,惟江上之清風,與山間之明月,耳得之而為聲,目遇之而成 色,取之無禁,用之不竭,是造物者之無盡藏也,而吾與子之所共適” 客喜而笑,洗盞更酌,肴核盡,杯盤狼藉,相與枕藉乎舟中,不知東方之旣白,
중국문학의 향기: 중국문학 장르별 이해
김장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