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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인문학 : 철학_회복탄력성]책 보기#22

[철학_회복탄력성_4]

 

충동통제력이 높다는 것의 의미

우리나라 사람들의 충동통제력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높은 편이다. 레이비치와 샤테의 회복탄력성 검사 도구를 통해 미국인과 비교했을 때, 회복탄력성의 여 러 요소들 중에서 한국인이 더 높은 수준을 보인 유일한 것 이 바로 충동통제력이었다. 다른 요소들은 현저하게 낮았 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한국인들의 충동통제력이 높게 나타나는 것 자체는 일 단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충동통제력이 건강 한 것이 되려면 그것은 반드시 긍정성이나 자율성과 균형 을 이루어야만 한다.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니까,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의미있는 일 이니까 다른 충동을 통제해가면서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은 건강한 충동통제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성이나 자율성 이 동반되지 않는 충동통제력은 단순한 인내심의 발휘이며 이는 점차 우리를 약하게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충동통제력이 높아 보이는 것은 어려서부터 강요받은 참을성에 대한 교육의 결과라 할 수 있 다. 우리의 교육환경은 지나치게 경쟁중심적이다. 내신 성 적 또는 학급의 석차라는 상대적 우위에 최고의 의미를 부 여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한국인들은 해야 할 모든 일을 일단 '참아내야 할 고통'으로 간주하는 습관에 젖게 된 다. 이러한 교육환경 덕분에 비록 외형적으로 충동통제력은 높아 보이고, 따라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하고 일하는 국 민이 되어버렸지만, 이처럼 강요된 충동통제력은 전체적인 창의성과 효율성을 갉아먹는다. 우리나라의 왜곡된 교육환경과 교육철학은 역시 왜곡된 결과로 나타난다. 국가간 학력 비교 조사인 PISA국제학업 성취도평가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중3(15) 학생들의 수 학, 과학, 읽기 등의 학업 성취도는 계속 최상위권의 수준을 보이고 있다.

2009년만 하더라도 65개국 학력 비교를 보 면 우리나라는 읽기, 수학, 과학 세 영역 모두 최상위권(4위 이내)에 들었다. OECD 국가만 놓고 보면 읽기, 수학은 1, 과학은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우리 학생들은 높은 학업성취 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흥미도, 내재적 학습 동기, 학업 효능감(학업에 대한 자신감), 다른 학생들과 팀을 이뤄 학습하는 협동학습에 대한 선호도, 평생학습에 필요한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 등에서는 최하위 수준이었다.

반면 미국과 독일, 프랑스, 핀란드 등 유럽 선진국들은 이 점수가 높게 나왔다. 특히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학업성취도가 훨씬 낮은 미국 학생들마저도 학업에 대한 흥미도나 동기, 학업효능감 등에 있어서는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수학의 경우 한국의 학업성취도는 3위로 최고 수준이었지만 흥미도는 31, 동기부여는 38위로 최하위 수준이었다.

이렇게 학업성취도와 학업흥미도의 수준이 극 과 극으로 나타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또 다른 57개국 학력 비교에서 2006년 과학의 경우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는 5위 정도 수준이었지만, 학업흥미도는 57개국 중 55위로 거의 꼴지였다.

2009년 읽기의 경우도 학업성취도 는 최상위권이었으나 학업흥미도는 28위에 그쳤다. 더욱이 자기학습관리 능력(자기조절능력)에서는 최하위권인 58위 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타인이 강제로 시켜야만 성취도가 높으며, 자기 스스로 흥미를 느끼며 자발적으로 학습하는 능력은 최하위인 것이다. 보통 학업성취도와 학습동기, 흥미도, 효능감은 정적인 상관관계를 보인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공부에 흥미를 느 끼고 자신감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 라 학생들은 공부는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서 훨씬 더 잘 하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도, 동기, 자신감 등은 최하위 수 준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보이는 독특한 현상이다. 다른 나라 학생들의 경우 학업성취도와 학업흥미도, 효능감 은 관련성이 높다. 우리나라만 거꾸로 가고 있다.

 

나약하고 불행한 아이들, 무엇 때문일까

우리나라 학생들은 무엇이 문제이길래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것일까? 사실 이는 어린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친 외적보상 - 당근과 채찍, 처벌과 보상 - 에 의해서만 동기부여를 이끌어내려는 잘못된 교육철학 때문이다. 성적 만을 강조하는 학부모와 학교가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있다. 한국의 입시위주 학교 교육과 조바심치는 학부모들은 아이 들에게 찰고무공 같은 회복탄력성을 심어주기는커녕 바닥 에 떨어지면 산산조각이 나는 유리공 같은 나약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 얼마전 인터넷의 블로그에서 본 이야기다.

여자 중학생 이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워낙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데다 공부도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재였다고 한다.

성격도 쾌활해서 모든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투신자살을 해서 주변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결국 성적에 대한 중압감이 자살의 원인으로 밝혀졌다. 초등학교 때 1, 2등을 하던 그 학생의 성적은 중학교 입학 후 약간 떨어졌고, 이 때문에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어 늘 성적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시험을 앞두고 가출하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청소년들이얼마나 될까. 누가 우리 아이들을 이런 사지로 내모는 것인 가. 사회학자들의 지적처럼 이렇게 어린 아이들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20~30대 젊은층의 자살률은 최근 수년간 크게 증가 해서 자살이 2, 30대의 사망원인 1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자살을 권하는 사회인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 청소년들에게 는 집단적인 불행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다.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 수준은 OECD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우리나라 청소년과 아이들 은 지금 병적인 수준의 불행감을 느끼고 있으며, 집단적인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무 슨 일이 닥쳐도 다 잘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회복탄 력성이 꼭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삶이 활기차고 즐거울 수 있으려면 그들의 회복탄력성을 키워줘야 한다. 아이들의 인 생을 역경으로부터 지켜줄 회복탄력성이라는 보험에 들 필 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아이들을 이토록 불행하고 나약하게 만들고 있 을까? 바로 입시위주의 교육이다.

한국 교육 시스템을 관통 하는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고진감래다. '고통 없이는 아 무것도 얻을 수 없다

No Pain, No Gain'는 이데올로기는 학 부모나 교사나 학생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신 앙과도 같은 신념이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놀 지 말고 공부하라고 이야기한다. 학생이나 학부모나 모두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대립시킨다. 그럼으로써 노는 것 은 즐거운 것이지만, 공부하는 것은 괴로운 것이라는 위험 한 '상식'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킨다. 결국 공부에 대한 부정 적인 느낌만 가득 심어준다. 공부는 재미없고 괴롭지만 훗 날의 즐거움을 위해서 '참아 내야 하는 고통'이 되어버린다. 공부를 고통의 덩어리로 만들어 놓고 그러한 고통을 누가 누가 잘 견디나 하는 고문하기 게임을 집단적으로 하고 있 는 것이 한국의 교육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글이 있어 소개한다.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란 감옥에 갇혀 교 복이란 죄수복을 입고 실내화란 죄수 신발을 신고 공부란 벌을 받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 이 글에는 '학교=감 옥, 공부=, 졸업=석방'이라는 등식이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다. 왜 학생들이 졸업식 때 밀가루를 뒤집어 쓰고 교복을 찢다 못해 알몸 뒤풀이라는 과도한 방식으로 해방감을 표 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가?

학생들에게는 공부가 고통 이고 학교 생활 자체가 억압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학교라는 감옥을 만들어냈는가? 물론 우리 어 른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학교라는 감옥에서 자란 아이들은 다시 대학과 직장이라는 좀더 그럴듯한 감옥으로 옮겨간다. 말하자면 인생 자체가 감옥인 셈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출세지상주의와 경쟁지상주의 사이에 서 시달린다. 초등학교 때 잘해야 중학교 때 성적이 좋고 중학교 때 성적이 잘 나와야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출세할 수 있다는 식이다. 공교육이던 사교육이던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 전체가 좋은 대학 보내기라는 지상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경쟁 위주의 교육환경에서는 공부가 고통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특히 충동억제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어릴 적부터 받는다. 탈 벤 샤하르가 말하는 출세 지상주의자Rat Racer만이 양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잘못된 관념을 바꿔야 한다. 공부 자체의 즐 거움을 가르쳐야 한다. 공부하는 것이 다른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세계 역사를 보면 사람들 이 먹고 사는 문제가 다 해결된 다음에는 늘 지적 유희를 즐 겼다.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여러 가지 창작 활동에 몰입했 다. 그리스 귀족들을 보라. 결국 가장 재미있는 것은 지적 유희, 즉 공부다. 창의적으로 설득력 있는 자기만의 주장과 이론을 만들어내는 너무나 즐거운 놀이, 이것이 곧 학문이 다.

학문과 공부의 즐거움을 가르쳐야 한다. 공자도 논어의 첫 머리에서배우고 익히면 또한 희열을 느끼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 공부의 목적이 권력이나 지혜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바로 짜릿할 정도의 기쁨, 곧 희열에 있음을 뜻하 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확실 히 가질 수 있도록 자율성을 키워줘야 한다. 아이들에게 공 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아빠에게 야단맞지 않기 위해서 혹은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은 불 행한 아이들이다. 자기가 하는 일(공부), 자기가 사는 삶(학 교 다니기)에서 의미와 즐거움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삶의 즐거움을 찾도 록 도와줘야 한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사는 법을 먼저 터득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한걸음 한걸음 즐기면서, 음미 하면서, 행복해 하면서 자기가 선택한 발걸음을 한발 한발 내딛는 법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공부와 학문의 즐거 움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 깊은 의 미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공부의 즐거움을 터득해야 아이들은 한 인간으로서 행 복하게 성장할수 있다. ‘놀지 말고 공부해라'는 아이를 망가 뜨리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고통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오히려 고통 없이 현재를, 지 금 이 순간을, 오늘 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더 많은 성취를 얻을 수 있다(Less Pain, More Gain). 행복한 아이 들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공부도 잘한다. 불행하고 우울 은 아이들은 학업성취도가 날이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 다. 현재를 미래를 위한 투자로만 생각하면 영원히 불행해 진다.

고진감래 이데올로기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고등학교 교실에 걸려 있 는 급훈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천편일률적으로 '성취하려 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담고 있음을 발견 하게 될 것이다. '고진감래' 혹은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 다' 등의 경구는 그래도 점잖은 편에 속한다. '공부할래 맞 아 죽을래?” 그야말로 공부 안 하면 채찍을 가하겠다는 식 이다. 처벌을 회피하기 위해서 - 부정적 요인에 대한 회피동 기공부를 강요하는, 가장 나쁜 방식의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부는 매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 최근에 나온 국가간의 비교 결과를 보자. 글로벌 컨설팅 기업 타워스왓슨이 2010 4 19일에 내놓은 '2010 글로 벌 인적자원 보고서Global Workforce Study'에 따르면 자 신의 업무에 별로 몰입하지 않거나, 마지못해 회사에 다니 는 우리나라의 직장인 비율이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8%에 달해 조사대상 국가 평균치인 38%를 훨씬 상회했다. 뿐 만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는 기업의 성공을 위해 어느 정도 의 추가적인 시간, 지력brainpower, 에너지를 투입하는가 를 의미하는 '회사에 대한 자발적 충성도' 역시 우리나라 직 장인은 평균치인 21%에 크게 못 미치는 6%에 그쳤다. 최 하위 수준이다. 이 조사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우리나라 직장 인 역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는 일에 흥미가 없 다는 뜻이다. 일이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의 대상이 고 따라서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조사는 타워스 왓슨이 지난 2009 11월부터 2010 1월까지 한국의 응 답자 1,000여 명을 포함해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전세 계 22개국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국내 기업의 리더십의 위기로 풀이했지 만 사실은 외적 보상만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문화가 그대로 투영된 결과다. 다른 나라 학생들과는 달리 공부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습관이 몸에 밴 학생들이 자라서 직장인이 되었을 때,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는 일에 흥미를 못 느끼고 마 지못해 하고 있는 것이다.

 

맛있고 몸에도 좋은 음식

탈 벤 샤하르에 따르면 일하는 것을 고통으로, 참아야 할 괴로움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오히려 커다란 성취를 이뤄내 지 못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 들은 모두 자신이 하는 일에서 커다란 즐거움과 사명감과 의미를 찾은 사람들이다. 보다 많은 연봉이나 보다 높은 직 위에 오르기 위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참으면서' 하는 사람 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는 없다. 산에 오르는데,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은 정 상에 오르기까지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고통으로 다가온다. 모든 발걸음이-사실 이러한 발걸음 하나가, 한순간 한순 간, 하루하루 모인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인데도 - 참아야 할 괴로움으로 여겨진다. 즉 인생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괴 로움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나의 삶은 어디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 루하루, 한순간 한순간의 적분이 곧 나의 삶이다. 정상에 오 르는 것을목표로 두기는 하되,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즐기면, 즉 과정을 즐기면 힘들지 않고 정상을 향해 갈 수 있다. 이것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몰입 혹은 최적의 경 험이다.21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성공의 결과라기보다는 '성공에 이르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하 다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이 행복해진다기보다는 행복해져야 회복탄력성 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라(원인분석력)

스토리텔링의 ABC

원인분석력은 내게 닥친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도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도록 원인을 정확히 진단 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부정적인 사건을 지나치게 비관적으 로 받아들이다가 늘 스스로 좌절하고 마는 사람이나, 반대로 지나치게 낙천적으로만 바라보다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는 사람들은 모두 원인분석력이 부족한 것이다. 원인분석 력은 자신에게 닥친 사건들에 대해 긍정적이면서도 객관적 이고 정확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자기조절 능력과 감정통제력은 주로 감정의 문제이며 이는 뇌의 변 연계와 관련된다. 반면 원인분석력은 주로 이성의 문제이며 이는 대뇌피질, 특히 전두엽과 관련이 깊다). 우리가 분노나 좌절 등의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 나의 부정적 감정을 유발했다 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든,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일이 생기든, 누군가와 어떠한 갈 등을 빚던, 그러한 일들 자체에는 그 어떤 본래적 의미도 담 겨져 있지 않다. 그러한 일이 '기분 나쁜 일, 슬픈 일, 화 나 는 일, 짜증나는 일'이 되려면 반드시 나의 해석이 필요하 다. 다시 말해서 나의 분노나 짜증은 외부적 사건이나 사람 들이 자동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내 자 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의 분노나 좌절의 근원은 내 머 릿속에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상상해 보자. 지금 나는 잔잔한 호수 위에 조각배 한 척을 띄어놓고 조용히 낚시를 즐기고 있다.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날씨는 화창하고, 주위는 평화롭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배가 내 조각배를 뒤에서 쿵 하고 박았다. 배가 몹시 흔들리고, 평화로움과 행복감은 갑자기 불쾌감과 분노로 바뀌게 된다. 왠지 무시당한 느낌도 들며, 조용히 혼자 즐길 수 있 는 권리를 침해 당해 억울하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나는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 나의 정당한 분노를 부주의한 배 주인에게 퍼붓기 위해 인 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획 돌려 뒤를 째려본다. 그런데 아뿔사. 그 배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저 빈 배가 물결에 떠내려오다가 내 배에 와서 부딪힌 것이다. 순간 분 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왜 그런가? 그 배가 내 배를 들이받았다는 사실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이 일화는 분노나 좌절이 외부의 사건에서 자동적으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사건에 대한 나의 순간적인 해석이 분노의 원인인 것이다.

어떤 배 가 와서 부딪힌 순간, 내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스토리텔 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부주의하게 혹은 고의로 내 배를 들이받았 다. 그 사람은 나만의 시간을 즐길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나를 무시한 것이다.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 다.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그 사람은 분명 잘못을 했고 따 라서 대가를 치뤄야 한다.”

그러나 뒤를 돌아다보니 빈 배였다. 아무도 없었던 것이 다. 잘못이 있다면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에나 있는 것 이다. 스스로 어색한 미소를 짓는 순간 분노는 사라지고 만다. 나의 스토리텔링이 완전히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분노는 내 머릿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의 결과이지, ‘다른 배가 내 배에 부딪혔다'는 사실에 의해 자동적으로 야기 된 것이 아니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라 불리우는 마틴 셀리그만은 이를 사건accident - 믿음belief - 결과 consequences 'ABC 연결고리'라고 부른다. 흔히 우리는 어떠한 사건(A)이 곧 바로 우리의 감정이나 행동이라는 특정한 결과(C)를 가져온 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반드시 우리의 믿음(B) 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 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결과 도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이 특정한 결과를 가져오려면 우 리의 신념체계에 의해 해석되고 매개되어야 한다. 셀리그만 이 말하는 이 신념체계가 곧 스토리텔링의 방식이다.

 

셀리그만의 논의를 우리의 예에 적용해 보자. 배가 와서 부딪혔다는 사건이 나의 분노라는 결과를 발생시키기 위해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셀리그만은 다양한 사 건들에 대한 반응의 방식을 반성적으로 살펴보면서 특히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신념체계 혹은 스토리텔링의 방식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는그 배에는 당연히 사람이 타고 있었을 것이고 분명 그 사람은 부주의했거나 나를 무시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어떤 불행한 사건이나 역경에 대해 어떠한 해석을 하고 어떠한 의미로 스토리텔링을 부여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불 행해지기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한다. 분노는 사람을 약하게 한다. 화를 내는 것은 나약함의 표현이다. 분노와 짜증은 회 복탄력성의 가장 큰 적이다. 강한 사람은 화내지 않는다. 화 내는 사람은 스스로의 좌절감, 무기력함을 인정하는 것이 다. 분노가 우리의 인생에 닥친 여러 가지 역경을 해결해주 는 경우는 없다. '화난 척'이 때로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언 정, 진정 '화를 내는 것'은 항상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분노는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그 무엇보다도 화내는 사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파괴시킨다. 화를 낼 때 심장의 박동은 가장 불규칙해진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심장병에 잘 걸리 는 것은 통계적으로도 확실히 드러났다.

 

사람의 심장박동수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의사들은 이를 심박변이도heart rate variability라고 부른다.

심박변이 도가 낮은 사람은 수 초 내에도 몇 번씩 불규칙하게 심장박 동수가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반복한다. 하지만 심박변이도 가 높은 사람은 10초 정도의 주기로 심장박동수가 천천히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규치적으로 반복반다. 이러한 심박변 이도는 심장 건강과 직결되어 있다.

각종 심장질환에 걸릴 우려가 높은 사람은 심박변이도가 낮은 사람이다. 그런데 심박변이도는 감정과 직결되어 있음이 오래전에 밝혀졌다.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박변이도가 즉시 낮아진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어떠한 방 식으로 스토리텔링하느냐는 곧 그 사람이 지닌 신념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신념체계는 우리가 어떠한 스토리텔링 을 하느냐를 결정짓는 기본적인 마음의 습관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강한 회복탄력성을 유 지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스토리텔링을 하는 습관을 들여 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에서 다룰 긍정성을 향상시켜 긍정적인 정보처리 루트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자신에게 닥 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 자동적으로 긍정적인 방식으로 스토리텔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잠시 스 토리텔링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은 이야기를 살아가는 동물

기억은 기본적으로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두 종류로 나 뉜다. 단기기억은 전화를 걸 때 잠시 동안 기억했다가 곧 잊 어버리는 식의 기억이다. 즉 뇌에 잠시 저장되었다가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기억이다. 단기기억 에 저장된 정보 중 일부에 체계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장기 기억으로 넘긴다. 이 과정에는 해마체라는 부위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기기억에 저장된 과거의 정보나 체험의 단편들은 의식적으로 인출될 수 있 다. 장기기억은 다시 두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사실기억과 에피소드 기억이다. 사실기억은 단어의 의미라든가 사람의 이름, 도구의 명 칭 등 사실과 관련된 기억이다. 한편, 에피소드 기억은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담고 있는 다양한 체험과 에피소드에 관한 기억이다. 에피소드 기억과 사실기억의 결정적 차이점 은, 에피소드 기억이 관계의 틀로서 시간과 장소에 의존하 는 데 반해 사실기억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23 우리가 흔 히 학습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이라 불리우는 것이 바로 이 사실기억이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경험을 기 억하는 것이 바로 에피소드 기억이다. 이 에피소드 기억이 야말로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결정짓는 정체성을 이루는 기억이며 이는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개개의 수많은 사실기억들을 일정한 개념 덩어 리로 뭉뚱그려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 다. 이것이 곧 이야기하기인 동시에 이야기 만들기이고, 기 억하기고, 경험하기고, 따라서 삶 자체다. 스토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무엇에 관한 이 야기story-about고 다른 하나는 사는 이야기 혹은 살아진 이야기story-lived. 무엇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를 의미한다. 삶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사는 이야기다. 우리는 곧 우리의 이야기를 사는 셈이라는 뜻이고, 우리의 경험이나 삶 혹은 의도가 모두 다 본질적으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고 정의 했다. 그 말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큰 기준이이 야기하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삶 자체를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며 경험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삶 자체가 이야기다. 삶이 이야기라는 것은 '기억+경험+실체' 들이 모 두 일종의 이야기라는 의미다. 이야기에는 항상 주인공이 있고,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 다.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은 스토리텔링인데, 작은 차 원일 수도 있고, 큰 차원의 스토리텔링일 수도 있다. 내가 경험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나와 내가 만난 사람들 이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그 안에 기승전결이 다 들 어가 있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스토리는 내 삶의 일부를 끊 어서 만든 일종의 짧은 단편 영화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점심 시간 후에나는 오늘 점심 때 친구들과 만나서 냉면을 먹고 헤어졌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자.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당신의 실제 경험은 다 음과 같은 것이리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시계를 본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걸 안다. 전화기를 꺼낸다. 전화 를 건다. 친구들과 점심 약속 확인을 한다. 회사 근처 냉면 집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러고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서, 이야기는 사는 이야기다. 우리는 곧 우리의 이야기를 사는 셈이라는 뜻이고, 우리의 경험이나 삶 혹은 의도가 모두 다 본질적으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고 정의 했다. 그 말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큰 기준이이 야기하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삶 자체를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며 경험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삶 자체가 이야기다. 삶이 이야기라는 것은 '기억+경험+실체' 들이 모 두 일종의 이야기라는 의미다.

 

이야기에는 항상 주인공이 있고,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 다.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은 스토리텔링인데, 작은 차 원일 수도 있고, 큰 차원의 스토리텔링일 수도 있다. 내가 경험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나와 내가 만난 사람들 이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그 안에 기승전결이 다 들 어가 있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스토리는 내 삶의 일부를 끊 어서 만든 일종의 짧은 단편 영화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점심 시간 후에나는 오늘 점심 때 친구들과 만나서 냉면을 먹고 헤어졌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자.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당신의 실제 경험은 다 음과 같은 것이리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시계를 본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걸 안다. 전화기를 꺼낸다. 전화 를 건다. 친구들과 점심 약속 확인을 한다. 회사 근처 냉면 집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러고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서, 험하는 것은 경험하는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그 경 험에 대해 부가적으로 이야기한다기보다, 내가 선택하고 의 미를 부여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스토리텔링에 의 해서 나는 나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완성한다. 이처럼 경험이 스토리로 정착되면서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고, 그것 이 곧 삶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곧 삶은 내가 만드는 이야 기다. 나의 정체성은 나의 기억에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나의 경험에 어떠한 스토리텔링을 하느냐 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스토리텔링은 사후적으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행동을 먼저하고 나서 회고적으로만 스토리텔링하 는 것이 아니라, 흔히 사전적인 계획과 의도의 단계에서 이 미 스토리텔링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스토리텔링이 이 루어지도록 여러 가지 행동을 해나간다. , 각본을 머릿속 으로 먼저 쓰고 나서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냉면을 먹 고 나서냉면 먹었다라고 얘기한다기보다는오늘 점심 때엔 친구들과 만나서 냉면 먹어야지라고 사전에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러한 계획이나 의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스토리텔링이다. ,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이야기에 따라 여러 가지 세세한 행위들을 해나간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사는 것이다.

 

이야기를 제대로 살아가는 법

그렇다면 보다 높은 수준의 원인분석력을 갖기 위해서 는 과연 어떠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스 토리텔링의 다음과 같은 세가지 차원에 주목해야 한다. 첫 째, 개인성(나에게만 일어난 일이냐 아니면 나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냐), 둘째, 영속성(항상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만 어쩌다 그런 것인가), 셋째, 보편성(모든 것, 모든 면이 다 그런 것이냐 아니면 그것만 그런 것인가). 회복탄력성이 낮은 사람은 흔히 자신에게 닥 치는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당신이 어떤 사업에 실패했다고 치자. 이러한 역경에 부딪혔을 때, 회복탄력성이 부족한 사람은 이렇게 반응한다. 성공한 사람도 많은데, ''는 실패했을까? 이번에 실패한 것을 보면 나는 앞으로도 또 이런 사업에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왜 '항상 실패만 하는 것일까? 이 사업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왜 다 안 풀리는 걸까. 왜 내 인생의모든 면은 실패투성이일까? 그러나 긍정적이고 행복하며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 은 이와는 반대로 반응한다. 이번의 실패는 아쉽지만, 실패 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만 실패한 것은 아니며 나외에도 실패한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이번 사업에 실패한 것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실패는 아마도 이번뿐일 것이다. 나는 비록 이 사업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일들은 다 잘 하고 있다. 사업이 실패했다고 해서 내 인생의 모든 면이 다 실패한 것은 아니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스토리텔링의 차이는 나쁜 일에 대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일 에 대해서도 스토링텔링의 방식이 반대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경쟁률이 치열한 일류 대기업 입사시험에 합 격했다고 가정하자. 회복탄력성이 낮은 부정적인 사람은 입 사시험에 합격한 것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 합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입사시험만 어쩌다 합격한 것이고, 이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전반 적으로 성공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회복탄력성이 높은 긍정적인 사람은 입사시험에 합격한 것은 내가 잘해서 가능한 것이며, 나의 합격은 언제 나 그렇듯이 내 성공적인 인생의 한 부분이며, 회사에 합격 한 것처럼 인생의 다른 모든 면에서도 나는 다 성공적일 것 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회복탄력성이 낮은 사람의 스토리텔링 방 식은 나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언제나, 모든 면이 다 그렇 다는 식으로 크게 생각하고, 좋은 일에 대해서는 남도, 어쩌다가, 이번 일만 그렇다는 식으로 그 의미를 축소해서 받아 들인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이와는 정반대로 한다. 나쁜 일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축소하고 좋은 일에 대해서는 더 크게 일반화해서 받아들인다. 당신은 어떠한가? 사업 실패나 취업 성공 같은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역경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떠한 스토리텔 링을 만들어내는가? 예컨대 아침에 출근하려고 보니 집 앞 에 주차했던 차를 누가 긁고 그냥 가버렸다. 회복탄력성이 낮은 사람이라면 즉시 이런 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한다. 왜 내 차에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여기에 차를 세워놓은 내가 잘못이지. 왜 나에게는 늘 이런 일이 생기는가? 나는 원래 재수 없는 사람인가? 만약 당신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위와 같다면 빨리 개선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에는 항상 이 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며, 주차한 내가 아니라 긁고 지나간 운전자가 잘못한 것이다. 이런 재수 없는 일은 오늘 어쩌다 생긴 것이며, 비록 재수없는 일이 생겼지만, 액땜한 것이니 오늘 다른 일은 다 잘 될 거다라는 식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원인분석력의 기본이 되는 것은 긍정적인 스토리텔링의 능력이다. 인생에서 최근에 일어난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하는가를 이 세 가지 차원에 서 면밀히 돌이켜 보라. 그리고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비개 인적이고, 일시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들이도록 해야 한다. 물론 좋은 일에 대해서는 개인적이고,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이렇 게 세상 일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들이 면 당신의 회복탄력성은 놀랍게 향상될 것이다.

 

당신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여기 예시된 것을 참고로 해서 당신의 평소 스토리텔링 방식을 스스로 체크해 보자. 만약 좋은 일에 대해서나 나쁜 일에 대해서 왼쪽 방식대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면 당신 의 회복탄력성은 높아지기 힘들다. 되도록 오른쪽의 스토리텔링 방식대로 원인분석을 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해야 한 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상황 1. 열심히 한 프로젝트가 결국 실패했다.

왜 나만 실패 했을까(개인성)? VS. 나만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다(비개인성).

왜 나는 항상 실패할까(영속성)? VS. 이번엔 어쩌다 운 이 나빠 실패한 것일 뿐이다(일시성).

왜 내가 하는 일들은 다 이 모양일까(보편성)? VS. 난 이 프로젝트에만 실패했을 뿐 다른 일들은 다 잘하고 있다(특수성).

상황 2. 주차한 차를 누군가 긁고 가버렸다.

왜 나에게만 이런 재수 없는 일이 생길까. 여기 세워둔 내가 잘못이지(개인성) VS. 차를 긁고 그냥 가다니 양심도 없는 나쁜 사람이구만. 이런 일은 누구나 다 당하는 법(비개 인성).

왜 내게는 늘 이런 재수없는 일이 일어날까(영속성) VS.

오늘은 어쩌다 운이 나쁜 날이구나(일시성). 왜 나는 매사가 이렇게 운이 없을까(보편성) VS. 주차와 관련해서는 내가 운이 나쁘구나(특수성).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상황 1. 꼭 취직하고 싶은 회사로부터 합격통보를 받았다.

나 같은 사람을 뽑다니, 대충 아무나 뽑았나 보군(비개 인성) VS. 나를 뽑다니, 역시 내가 노력한 보람이 있어(개인 성).

합격 운이 좋아 이번에만 어쩌다 붙은 거겠지(일시성) VS.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언제나 다 잘 되었어(영속성).

회사 합격은 어떻게 되었지만 내 인생에 다른 모든 면은 엉망이야(특수성) VS. 회사 합격되는 것을 비롯해서 내 인 생의 모든 면은 다 제대로 되고 있어(보편성).

상황 2. 시험에서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내게 이렇게 좋은 성적을 주다니 채점을 후하게 했군. 누 구나 다 성적을 잘 받았겠군(비개인성) VS. 역시 나는 노력 하면 되는구나(개인성).

어쩌다 이번 시험 운은 좋았구나(일시성) VS. 역시 나는 시험 운은 늘 좋은 편이야(영속성). 이 시험 하나는 어쩌다 잘 봤지만 다른 시험은 아마 망칠거야(특수성) VS. 역시 나는 다른 시험도 다 잘 보게 될거야(보편성)

 

회복탄력성을 읽고

김주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