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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인류의 지혜]인도_11#60

인도_11

Guru Nanak, the founder of Sikhism, emphasized the oneness and transcendence of God, viewing all religions as pathways to understanding the divine essence. Sikhism later took on a warrior-like nature, with Guru Gobind Singh, the last guru, declaring the scripture as the final authority. Mahatma Gandhi led India's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non-violence and the power of truth, focusing more on inner transformation than societal change. Maharishi Mahesh Yogi advocated for transcendental meditation as a means to achieve inner peace and spiritual enlightenment.

구루 나나크

시크들은 인도의 인구 가운데 2%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이들이 인도의 정치적·종교적인 발간에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다. 창시자인 구두 나나크 가 세운 시크교의 기초는 신은 여럿이 아니라 단 하나이고 초월적이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행 태도 없는데, 자신이 창조한 세상 어느 곳에나 큰 재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힌두교의 브라만 과 비슷한 개념이다. 나나크는 이 신을 부를 때 이러 이름을 사용했다. 그 중에는 힌두교 신들의 이름도 있고 알라의 다양한 측면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이슬람식 이름들도 있다. 그는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는 어떤 신에 마음을 집중하면 그 신의 진정한 본성과 정수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 그에게 있어서 모든 종교는 환영의 결과일 뿐다. 이다. 그 어떤 종교도 숭배자의 마음이 물질적 시 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 이다.

구루 나나크는 대표적인 사회변혁가이기도 다. 그는 파리아라고 불리던 불가촉천민들과 그 밖의 다른 힌두교 하층민들의 비참한 상황에 주 목했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바크타를 강조하면서 하층민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로 해탈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카스트 세도의 부당함을 직시하고 이에 반대했으며, 모든 시 크들에게 똑같은 성 싱Singh(사자)을 쓰도록 했 다. 시크교 사원과 모든 시크교 공동체에서는 그 의 제자들이든 숭배자들이든 모두가 함께 밥을 먹고 동등한 대접을 받도록 했다.

나나크의 가르침은 제2대 구루인 앙가드가 편 찬한 <아디 그란트>(첫번째 경전) <그란트 사히 브>(신의 경전)라는 두 권의 경전에 집약되어 있 다. 시크교의 성격은 제5대 구루인 아르준이 폭력 에 의해서 죽은 이후 일대 전환을 맞게 된다. 관 대했던 황제 아크바르가 죽은 후, 구루 아르준은 새 황제 자한기르의 아들인 쿠스루 왕자가 그 아 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지원금을 건넸다가 발각되어 벌금형이 내려졌는데, 이에 반발 하다가 결국 고문을 당한 끝에 죽음을 맞고 말았 다. 그 이후 시크들은 평화주의를 버리고 점차적 으로 전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0대 구루인 고빈드 싱의 지도 아래 시크들은 군사적 조직으 로 재편되었다.

10대 구루인 고빈드 싱은 마지막 구루이기 도 하다. 1708년에 암살되었는데 그는 이미 죽기 전에 앞으로 더 이상의 구루는 없을 것이며, 땅에 신을 대신하는 권한은 <그란트 사히브> 안에만서 있게 될 것이라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시크들은 그 이후 지도자(시르다르)들이 이끄는 여러 그룹 으로 나뉘어졌으며, 현재 인도 전역에 퍼져 있다.

 

마하트마 간디

모한디스 카람찬드 간디 (1869~1948)는 현대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힘이었다. 그 자신은 그 저 진리를 좇는 구도자일 뿐이라고 했지만 아시 아 사람들에게, 아니 전 세계의 눈에 비친 간디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었으며, 타협하지 않는 평 회주의자요, 두려움을 모르는 이상주의자, 정열 적인 지도자 그리고 겸손한 애국자로서 진정한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칭호를 들을 만한 인 물이었다.

간디는 구자라트의 카티아와르 반도 정부에서 부유한 장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런던에서 법률 공부를 했다. 1893년 그는 뭄바이에서 훌륭한 돈 벌이가 되는 법 관련 일을 그만두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갔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22 년간 있으면서 백인정부의 부당한 차별에 항거해 대중시위를 주도하는 등 인도인 이민자들의 권익 을 옹호했다. 이때 간디는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실천방법이 설득과 비폭력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4년에 그는 인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독립 과 인도 국민회의당의 활동을 위한 투쟁에 전력 을 쏟기 전에 1년 동안 상황을 지켜보고 배우면서 생의 나머지 부분을 끌어갈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 력을 미친 것은 아힌사(비폭력) 교리였다. 이것은 그의 고향 구자라트에서 익힌 종교적 교리였다. 간디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에서 이 비폭 력사상의 근거를 발견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약 성서>(특히 산상수훈)에서도 그리고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의 글에서, 인도의 시인 라이찬드바 이.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 그리고 서로 연락하 고 지냈던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의 글 등에서도 공통되는 요소들을 발견했다. 이러한 근거들을 가지고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진실의 힘) 운동을 조직하고 주도해 나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실은 가장 중요한 신의 이름이다". 사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 해도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없다. 또 그는 눈앞의 편의를 위해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원칙들은 부정적인 태도나 수동적인 태도 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원칙 들은 간디에게 대단히 적극적이고 정치적인 무기 가 되었다. 간디는 이성적으로든 비협력운동을 통해서든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을 때는 금식을 하거나 기꺼이 투옥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 의 마음속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고, 그래 야 진실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 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 문이다.

간디는 사실 사회의 변혁보 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인도가 자 유를 얻게 되기를 소망했던 그 의 꿈은 독립을 한 후에도 이루 어지지 않았다. 그는 물질만능 주의와 카스트 제도의 부당성으 로부터 인도가 진정한 자유를 얻기를 꿈꾸었다. 그래서 간디 는 본격적인 정치적 운동을 벌이기 전에 남아프리 카 공화국에서부터 입어왔던 서양식 옷을 버리고 몇백만 인도의 농민들이 입는 도티부터 입었다.

1920년 영국 총독은 이슬람교도와 불교도 군 대를 동원해 암리차르에서 평화로운 집회를 열고 있는 군중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간 디는 영국인들의 인도통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 후 투옥되었던 기간을 제외한 17년간 간 디는 영국에 대해서 한 번 반항하고 한 번 협상하는 식으로 인도 전역에 시민불복 종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1947년 결 국 독립이라는 승리가 찾아왔지만 승리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인 도는 이제 두 개로 쪼개졌다. 간디 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화해를 이끌어내려고 하다가 여기 에 분노한 힌두교 광신자의 손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

나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창원 지혜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그곳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히말라야에서 내려왔다. 나는 이 기술을 명 상이라고 부른다... 명상을 통해서 인 간은 생명과 그 정수, 창조성, 지혜, 평 화 그리고 행복이 깃들어 있는 자신 안 의 가장 깊은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초월명상법 TM Transcendental Meditaion의 주창자인 마하리시 마해 시 요기가 공언한 것이다. 마하리시 마해시 요기는 아마도 힌 두교 철학을 서양으로 이식시키는 데 가장 성공한 인물로 꼽힐 수 있을 것이 다. 1994년까지 세계적으로 108개 나라 에 3만 명의 훈련된 강사들을 보유한 1,200개의 TM 센터가 생겼다. 그는 대 학교도 두 군데나 설립했다. 스위스에 마하리시 유럽 연구대학교가 있고 미국 아이오와 주에 마하리시 국제대학교가 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자금이 모아 겼다. 지금은 유럽에서 주요한 TM 아슈 람 가운데 하나가 된 잉글랜드의 교외의 에 있는 거대한 멘트모어 타워를 살때 는 2,500만 파운드를 지불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하리시는 1917년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마해 시 바르마이다. 그는 스와미 브라마난다를 스승 으로 모시고 공부했는데, 이 스승이 가르친 요가 승을 그가 후에 TM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 다. 그는 1957년에 인도에서 영성혁신운동을 시 작했고, 다른 구부들과 달리 영성에 대한 강조보다는 세속적인 심리학적 성격을 띤 자신만의 교 의를 통해 195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TM을 종교로 보는 데 반대하고, 행위 위 주의 의식과 신비주의적 요소를 배제하려고 끊임 없이 노력했다. 그의 목표는 개인의 내재된 가능성이 저절로 완전히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격적 개발과 해탈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그가 환각제 사용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의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강한 열망과 함께 하지 못했다.

인도의 많은 전통적인 구루들은 세상에 대한 포기를 가르쳤지만, 마하리시는 개개인이 각성한 다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말하자 면 그는 영혼의 해탈이 아닌 인간의식의 해탈을 약속한 것이었다.

 

사이바바

사이 바바는 인도의 모든 성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바가반(구 세주)이라고 부르고, 그를 땅에 떨어진 바크티(경 건한 신앙)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이 부패한 시 대에 지상에 내려온 브라만의 화신이라고 생각한 다. 사이 바바는 그를 묘사하는 엄청난 분량의 신 화적·종교적 문헌들 속에 묻혀 있는 수수께끼 같 은 인물이다. 그는 초능력으로 특히 유명한데, 그 자신은 이러한 초능력이 그를 설명하는 명함이고 신성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한다.

사이 바바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 에 갑작스러운 과정을 통해서였다. 1940년 그의 나 이 13세 때 그는 무아경 속에서 한바탕 웃고 울고 노래를 부르는 이상한 황홀경에 길게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어나더니 가족과 이웃에게 단 과자와 여러 가지 선물들을 초능력으로 만들어 주면서 자신이 몇 해 전에 죽은 요기 시르디 사이 바 바의 화신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학생시절에도 이러한 기적적인 행동이 수시로 일어났고, 그가 18 세가 되었을 때는 이미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 여 안드라프라데시에 암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1990년까지 그의 추종자들은 인도에만 600만 명, 세계적으로는 64개 나라에서 5,000만 명에 이르렀 다. 사이 바바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모든 카스트. 계급·인종·종교를 막론하고 모여들었다. 그는 자신이 절대자의 화신이기 때문에 모든 개체적인 종교나 종파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사이 바바의 종파는 그 열렬한 바크티를 특징 으로 한다. 사이 바바의 추종자들은 그를 윤리적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 주는 구루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사랑이 구현된 그 자체로서의 신이라고 믿는다.

신도들은 사이 바바가 신의 화신으로서 자신들을 항상 굽어보고 있으며 개개인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며 보살펴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초능력 으로 동시에 여러 장소에 나타날 수 있을 뿐 아니 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를 믿는 사람이 아 니면 그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사이 바바의 신성한 사랑의 선물은 허공에서 물건을 생겨나게 하는 마술과 같은 초능력으로 상징된다. 그는 보석, 단 과자, 향수, 자신의 사진. 여러 신들의 신상 등을 허공에서 마음대로 뽑아 내듯이 나타나게 한다. 그는 이렇게 생겨난 것들 을 프라사드(은총)로 추종자들에게 준다. 이것들 은 일단 신격과의 접촉을 통해서 정화된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영광스러운 물건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의 프라사드는 신이 그 신도에게 내려 준 사랑의 상징이 된다.

 

라즈니쉬

바가반(구세주) 라즈니쉬는 1981년 다음과 같은 중대한 발표를 하면서 미국에 들어 섰다. "나는 미국이 기다려 온 바로 그 구세주이다". 라 즈니쉬는 서양에 4년 밖에 머 물지 않았지만, 그 기간에 그 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 5,000명을 수용하는 260km² 의 도시를 만들 정도였다. 그 러나 그는 1985년 불명예스 럽게도 수갑이 채워진 채 인 도로 추방되었으며 인도에서 1990년 생을 마쳤다.

라즈니쉬는 1931년 마디 아프라데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이름은 라즈니쉬 찬드라 모한이 었으며, 자이나교도인 조부모가 그를 키웠다. 그 는 17세의 나이에 벌써 삼매의 경지에서 환희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리고 21세 때 영적인 '폭발' 을 경험하며 득도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에도 공부를 계속해서 1958년에는 자발푸르 대학교의 철 학과 교수가 되었고 9년 동안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당시에 그는 힌두 철학과 서양 철학 을 가르치면서 인도 전역 을 여행했는데, 역사의 전 면에 나선 종교의 한계에 대해서 항상 날카롭게 경 고했다. 그는 힌두교의 윤 리와 사회적·성적 억압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으며, 1967년 급기야 대학을 사퇴했다.

1970년에는 라즈니쉬 가 자신의 이름 앞에 '바가 반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 켰는데, 그를 따르는 소위 '비주류 종교인인 추종자 들에게 산야신이라는 칭 호를 붙인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었다. 그는 점점 힌두교의 주류 세력에 대해 적대감을 표현 함으로써 인도에서 문제가 불거졌지만, 그 기간 에 서양인 추종자들은 몇천 명씩 마하라슈트라에 있는 그의 암자로 몰려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7년 동안 지내면서 추종자들과 매일 담화를 나누고 650여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그의 저서들은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1981년 그는 미국으로 조용히 떠나기 전에 침 묵의 서약을 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오리건에 있 는 작은 마을에 목장을 사서 이상도시로 라즈니 쉬푸람을 건설했다. 중앙에 있는 강당은 2 5,000명을 수용할 만한 규모였고, 단지 안에는 호 화 호텔과 농장부지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라즈 니쉬의 추종자들에 의해 세워졌고, 특히 처음 몇 년 동안은 상당한 번영을 이루었다.

1984년에 이르자 라즈니쉬와 그의 단체는 문 신비스 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침묵의 서약을 깼지 만 이미 이전의 화려한 화법을 그대로 구사하지 는 못했다. 라즈니쉬푸람은 안전요원들이 그 주 변을 순찰하는 등 점점 전투태세를 갖춘 캠프와 비슷해져 갔다. 지역 사람들도 점점 라즈니쉬 추 종자들을 멀리했다. 게다가 라즈니쉬가 그리스도 교에 대해 퍼부은 비난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대단히 자극했다. 결국 연방정부는 그를 불법결 혼을 주선한다는 혐의로 고소했고, 라즈니쉬는 인도로 추방되었다.

 

 

크리슈나 의식

바크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는 평생 50여 권 의 저서를 써서 총 1,000만 권 정도를 발행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가 1969년 설립한 '크리슈 나 의식을 위한 국제협회(ISKCON)', 별칭으로는 흔히 하례 크리슈나라고 부르는 이 단체의 이름 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는 젊은 추종자들이 거리에서 책과 팜플렛을 나 누어 주는 모습이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춤추고 북을 두드리고 크리슈나(62~63쪽 참조) 찬가를 부르는 이름은 머리를 삭발하고 사프란으로 물들 인 옷을 입는다.

크리슈나 의식의 신학은 15세기의 요기 차이 타니아의 가르침, 즉 황홀경을 중시하는 비슈누 파의 학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차이타니아는 바 크디 사상의 대표적인 하자있고, 특히 인도 동부 를 대표하는 최고의 종교부흥 운동가였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크리슈나의 화신으로 떠받들어졌 고, 스와미 프라부파다가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슈누파 구루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차이타니아는 바울파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이 집단은 요가적 고행을 하면서 인도 전역 종교적 찬양과 시를 읊고 결식을 하면서 다녔을 다. 의식적으로 하나가 되어 무아경에 이르는 것 을 중요하게 생각한 비슈누파 바크티는 의식이 둘로 나뉘는 것을 환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성 적 결합을 하나의 의식으로 인정하는 탄트리에서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 또 인간적 사랑을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고, 무아 경의 최면상태에서 크리슈나를 기억하는 만트라 와 신성한 찬가들을 부르면서 헌신적으로 크리슈 나를 숭배했다.

인도에서 영적 지혜를 가르친 다른 많은 지도 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와미 프라부마다의 생애는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다소 전설적으로 각색되었 그는 1896년 캘커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다. 절의 이름은 아바야 차란 데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 점술가들이 예언하기를 그가 70세가 되면 서 양으로 크리슈나 바크티를 설파하러 떠날 것이라 고 했다고 한다. 그의 부모가 비슈누파 신도였던 만큼 그는 바크티 문학 속에 묻혀 자랐으며, 음식 도 순수한 채식만 했다. 1922년 요기 스틸라 바크 티시단타 사라스바티를 만났고, 10년 후에 그의 제자로 입문했다. 프라부파다의 스승은 1936년 죽기 전에 세계에 크리슈나 의식을 전파할 수 있도록 프라부파다가 가진 영어 실력으로 책을 쓰 라고 했다. 그는 1965년 미국으로 떠났고, 캘리포 니아의 꽃의 힘 운동이 정점에 도달한 분위기 속에서 샌프란시스코에 '크리슈나 의식을 위한 국제협회를 설립했다.

프라부파다는 크리슈나에 대한 완전한 믿음의 길을 따르면 크리슈나 의식으로 향하게 된다는 일종의 자아실현의 이론을 가르쳤다. 그는 고기. 달걀, , , 커피 그리고 마약 등을 일체 금했으 며, 성관계도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만, 그것도 오 로지 자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만 하도록 했다. 서양인 추종자들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이 힌두교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순수한 크리슈 나 의식의 수행자들은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를 여러 힌두교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기보을 다 유일한 신이자 신의 지고한 인격이라고 주상 한다.

 

순례여행

신성한 일곱 개 도시

인도의 성지들은 속세와 신들의 영역 사이에 있는 티르타(여울)라고 불린다. 그 런 성지들은 갠지스처럼 강일 수도 있고, 시바의 거처인 히말라야의 카일라사 처럼 산일 수도 있다. 시바파 신앙의 성지에는 대개 아마르나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링가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아마르나트에 있는 이 링가(67 쪽 참조)는 인도와 티베트의 국경 근처 동굴 안에 석순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해마다 몇천 명에 이르는 힌두교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들이 땅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는 성소들은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례의 입구역할을 하 기도 한다.

힌두교의 인도에는 순례여행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일곱 개의 성스러운 도시가 있는데, 갠지스 강(162~163쪽 참조)을 따라 바라나시와 하르드와르가 있고, 라마의 탄생지인 아요디아, 크리슈나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투라, 크리슈 나가 성인이 되어 통치했던 곳이며 크리슈나 바수데바가 태어난 곳 이기도 한 드와르카, 타밀나두에 있는 시바파 신앙의 사원도시인 칸치푸람(164 꼭 참조), 그리고 쿰바멜라 축제(162쪽 참조) 1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우자인이 있다.

힌두교도에게 가장 신성한 순례여행 코스는 신화적인 인도의 지도상에서 중 심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신성한 네 도시, 즉 북쪽의 바드리나트, 동쪽의 푸 리, 남쪽의 라메슈와람, 서쪽의 드와르카를 경유하는 것이다. 바드리나트는 히 말라야의 높은 고지에 있는데, 갠지스 강의 원천이 그 가까이에 있다. 푸리와 드 와르키는 크리슈나 숭배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순례지인 동시에 시바 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이다. 푸리는 6월 중순경에 마차순례 축제를 여는데, 이 때 몇천 명의 숭배자들이 거리마다 수레에 자간나타(크리슈나의 변형 신)와 그 형인 발라라마 그리고 여동생 수바드라의 상을 모신 신단을 싣고 행진하는 모 습을 볼 수 있다. 라메슈와람은 인도대륙과 스리랑카 사이에 있는 섬이다. 이곳 은 또 라마가 아내인 시타(53쪽 참조)를 구출하려고 스리랑카로 가기 위해서 경유했던 곳이다.

갠지스 강 지역의 순례여행

갠지스 강은 인도에서 가장 신성한 강이다. 힌두교도들은 갠지스 강물이 영원 히 흐른다고 믿고 있으며, 그 원천은 우주의 중심이며 신들이 머물고 있다는 매부산(137쪽 참조)의 정상에 있다고 한다. 바로 그곳에서 갠지스 강은 시바의 머리카락으로 일단 흘리들었다가 땅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은 이 강 을 강가 여신(79쪽 참조)으로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강을 끼고 형성된 바라 나시, 알라하바드, 하르트와르 등의 도시들은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순례자들은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함으로써 전생과 이생에서 쌓은 업 을 씻고 상서로이 환생하기를 기원한다.

갠지스 강의 원천에서 가장 가까운 사원은 강고트리라는 자그마한 산악 마 을에 있는데 3,140m나 되는 고도에 있다. 또 다른 히말라야 주변의 성지 리시 케시에서도 차로 반나질은 족히 걸리는 거리이다. 갠지스 강의 실제 원천인 가 우무크는 4.225m 고도에 있으며 거기에서 하루를 더 걸어가야 한다. 강코트리 의 빙하는 바기라티 강과 만난다. 깃발과 작은 사원 하나가 이곳이 갠지스 강의 원천 지점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고행자들은 그 근처 동굴에서 명상을 한다. 여기에서 다소 가까운 케다르나트에 있는 사원은 3,580m 고도에 있는데, 이곳 은 시바 숭배자들에게 특히 잘 알려진 순례지이다. 온천과 함께 있는 바드리나 트 사원은 나르 파르바트와 나라야 나파르바트 봉우리 사이를 흐르는 계곡에 있다.

갠지스 강을 따라 평야를 가로질러 벵골 만으로 이어지는 순례 코스는 인도 에 있는 힌두교의 성스러운 일곱 개 도시(161쪽 참조) 가운데 하나인 하르드와 르에서 시작된다. 갠지스 강물은 산에서부터 좁은 협곡을 거쳐 내려와서 두 개 의 큰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 지점에 돌 사자가 세워져 있다. 성지로서 하르드 아르의 중요성은 그 위치와 강물의 영적 순수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정화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인도의 내륙 어느 곳에든 이 강물을 가지고 간다. 이 곳에서는 12년마다 거대한 규모의 축제가 벌어지는데, 그것은 몇백만 명이 모 이 이 강물에 몸을 담그는 룸바펠라 축제이다. 이 축제는 하르드와르, 우자인, 나시크 그리고 알리하바드를 돌면서 열린다. 1989년 알라하바드에서 열렸을 때 는 1,5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찾아와 강물에 몸을 담갔다. 알라하바드는 프 라이크(제사장소)라고도 불린다. 브라마가 이곳에서 제의를 지냈기 때문에 그 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이 순례지로서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갠지스 강 과 아무나 강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지하통로로 해서 갠지스 강으로 효 른다는 신화적인 사라스바티 강이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그 어떤 성지보다도 많은 순례자들에게 매력적인 도시 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갠지스 강을 따라 상서로운 분위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바라나시의 옛 이름은 빛의 도시'라는 뜻의 카시였다. 시바가 비슈비니다. 즉 우주를 통치하는 신으로 나타나 이 도시를 다스렸다고 한다. 바라나시에서 가 장 규모가 큰 사원이 비슈바나타 사원이다.

갠지스 강물은 시바의 무한한 능력을 상징한다. 바라니시는 불교도와 자이 나교도들에게도 신성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부처가 바라나시를 방문했고, 사르나트 가까이에 있는 사슴공원(34쪽 참조)에서 신법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도 이 도시에서 살았다. 불후의 시인 카비르도 이곳에서 살았다

 

남부 인도의 시바파 성지순례

남인도의 사원순례를 시작할 때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곳은 타밀나두의 남쪽 해안가에 있는 마드라스 근처의 마밀라푸람(지금의 마하발리푸람)이다. 마말 라푸람은 인도의 힌두교 사원들 가운데 가장 개성이 뚜렷한 곳이다. 이곳에는 70여 개의 바위를 깎아 만든 기둥과 동굴 그리고 조각들이 남아 있고, 유명한 쌍둥이 해안에는 사원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바위를 깎아 만든 이곳의 사원들은 남인도의 초기 건축형태를 잘 보여 준다. 바위에 새겨진 세밀하고 정 교한 조각들은 4~9세기에 남인도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던 팔라바 왕국이 남긴 것이다.

좀더 북쪽으로 가면 칸치푸람이라는 사원도시가 있는데, 이곳은 9~13세기 에 걸쳐 촐라 왕조와 팔라바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칸치푸람은 일곱 개의 성 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150개가 넘는 사원들에 다양한 신 들이 모셔져 있다. 주로 시바파 신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지는 카일라사나타 단지인데, 시바 나타라자와 두르가에게 바친 카일라사나타 사원과 에캄바레슈바라 시바 사원도 있다. 남인도에 있는 다섯 군데 사원의 링가들은 흙 물··공기 하늘의 다섯 가지 원소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사원들을 일일이 도는 것은 시바파 신앙인들 에게는 매우 중요한 순례라고 할 수 있다. 흙을 상징하는 링가는 칸치푸람의 에 캄바레슈바라 사원에 있고, 물을 상징하는 링가는 티루치라팔리의 사원도시 가 까이에 있는 스리랑감 섬의 잠부케슈바라 사원에 있는데, 자연샘물로 채워진 작은 못 속에 영원히 가라앉아 있다고 한다. 불을 상징하는 링가는 티루반나말라이에 있다. 이곳의 사원이 남부 인도에 있는 시바 사원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티루반나말라이는 특히 11월 말에 열 리는 불의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시바의 신화적인 등장을 상징하기 위해서 10 일과 마지막 날 밤에 거대한 장작불을 피운다.

공기 혹은 바람을 상징하는 링가는 칼라하스티에 있다. 안드라프라데시의 남 쪽 스바르나무키 강기슭에 자리잡은 칼라하스티는 비자야나가라 왕조의 종교적 인 수도였으며, 바람의 링가가 안치된 칼라하스티슈바라가 그 중심이 된다.

다섯 번째 요소인 하늘 혹은 우주를 상징하는 링가는 졸라 왕조 때 시바 나 타라자와 그의 환희의 춤 '아난다 탄다바'에 바쳐진 치담바람(134쪽 참조)의 사원에 있다. 수정으로 된 치담바람 링가는 다섯 가지 링가 중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다른 네 가지를 포함하고 또 초월하는 시바의 하늘로 된 다섯 번째 얼굴 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인도에서 가장 큰 시바 사원은 탄자부르에 있는 브리하디슈바라 사원일 것이다. 이 사원은 9~13세기에 졸라 왕조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 다. 이곳의 링가는 높이가 3.6m나 되며 남쪽에 위치한 사원건물의 고푸라 아 래에 있다. 이곳에 있는 벽화와 청동조각들은 시바과 예술의 백미라고 할 만 하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성지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와 부처가 살고 가르침을 전하고 생을 마친 성지 대부분이 갠지스 강 주변에 있다. 세계적으로 불교의 가장 중요한 성지는 부다 가야로 부처가 득도(32~33쪽 참조)했다는 성소이다. 부다가야는 비하르 주 가 야의 남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비하르라는 이름도 산스크리트 비하라 vihara, 즉 불교 수도원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야도 중요한 성지 가운 데 하나이다. 이곳에 있는 비슈누파다 사원은 힌두교 신 비슈누가 돌에 발자국 을 남겼다는 곳이다. 사원의 마당에는 보리수가 있는데, 그 아래에는 부처가 6 년간 앉아서 명상을 했다는 자리가 있다. 부다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사원은 불 교의 가장 유명한 성물인 보리수의 후예가 있는데, 부처가 이 나무 아래에서 깨 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나무 아래에는 바지라사나(금강좌)라는 것이 있는데, 부 처가 해탈을 얻은 실제 장소라고 한다.

우타르프라데시에 있는 바라나시의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사르나트 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사슴공원에서 부처가 첫 설법(34쪽 참조)을 했다고 한 다. 그 정확한 장소를 표시한 다메카 스투파는 30m 높이로 서 있다. 우타르프 라데시의 동쪽에 있는 쿠시나가라는 실제 부처가 죽음을 맞이하고 화장한 장소 이다. 네팔 국경을 넘어 조금 가면 부처의 탄생지인 룸비니가 있다.

바라나시는 자이나교에서도 주요한 성지이며 성지순례의 중심지이다. 23대 티르탕카라인 파르슈비는 바라나시에서 태어나고 장년기까지 살았다고 한다. 또 이곳은 네 명의 다른 티르탕카라들이 해탈에 이른 장소이기도 하다. 아요디 아 부근은 수많은 자이나교 성인들과 연관이 있으며, 첫번째 자이나교 출신 군 주였던 바라타가 다스리던 시기의 수도이기도 했다. 파트나에서 남동쪽으로 32km를 가면 비하르 지역의 수도였던 파바가 있는데, 이곳은 24대 티르탕카라 인 마하비라가 임종한 곳이다. 연못 한가운데 있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잘만디 르 사원이 그의 화장터를 기념하는 곳이다. 파트나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바이살리는 마하비라가 태어난 곳이다.

백의파 자이나교도들에게는 5대 산이 성지이다. 아부 산, 기르나르 산, 샤트 룬자야 산, 삼네타 산 그리고 제1대 티르탕카라인 리샤바나타가 해탈했다는 전 설적인 이슈타파다 산이 그것이다. 기르나르 산은 구자라트의 서쪽에 있으며, 옛 수도였던 주나가드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이곳에 있는 16개의 사 윈들은 자이나교 사원단지로 가장 큰 규모인데, 22대 티르탕카라인 아리슈타 네미에게 바쳐진 것이다. 아부 산 정상에 있는 딜와라 마을에도 리샤바나타와 아리슈타네미를 기리기 위해 대리석으로 지어진 사원들이 있다.

'적을 정복한 산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샤트룬자야 산은 구자리트에 있는 팔리타나에서 두 시간 정도 더 올라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인도에서 가장 큰 백의과 사이니교 사원이 이곳에 있다. 이곳에는 자이나교 성소가 1,000군데가 넘고 사원만 해도 800개가 넘는다.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다른 모든 심지를의 방문을 합한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한다. 이곳은 바라타가 시었다고 하며, 리샤바나타도 방문한 곳이다. 또 앞으로 나타난 19명의 티르탕카라들이 이곳을 근거로 가르침을 펼 것이라고 전해진다. 슈라바나벨콜라는 공의파 자이나교 행사들의 성소로서 마이소르와 카르나타카에 있는 방갈로르의 중간에 있다. 이 곳의 대언덕에는 해탈을 한 첫번째 인간이라고 전하는 콤마테슈바라의 상이 18m나 되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바로 인접해 있는 소언덕은 공의과 성지로 곰마테슈바라의 상이 있으며, 금식으로 죽음을 맞는 자이나교 특유의 관습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명상

얀트라의 의미

얀트리는 산스크리트로 도구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명상(110쪽 참 조)에 사용되는데, 특히 탄트라 수행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선으로 그린 상징적 인 도해이다. 얀트라는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빛을 내는 다양한 종류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다양한 에너지의 형태가 얀트라를 이루는 다양한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원 등의 조합을 통해서 표현되고, 창조의 근원은 점 한 개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탄트라에서 많이 사용하는 아홉 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스리 얀트라는 데비 여신(78~79쪽 참조)의 아홉 개 이름을 의미한다. 아래로 향한 다섯 개의 삼각형은 요니(여성 성기), 네 개의 위를 향하는 삼각형은 링가(남성 성기)이다. 삼각형은 시바의 다섯 얼굴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시바가 품고 있는 다섯 개의 링가와 다섯 개의 원소(164~165쪽 참조)를 의미한다. 흰색, 붉은색 그리고 검은색 등 삼각형의 색깔도 각기 신의 다른 세 가지 기능, 즉 창조, 보존 그리고 파괴를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물질적 존재들을 정의하는 세 가지 성질 이기도 하다. 삼각형은 또한 힌두교의 삼신 즉 브라마, 비슈누, 시바를 상징하기도 한다. 얀트라에 여러 가지 바탕색이 사용된 것은 얀트라가 만들어지는 목적에 따라 그에 맞는 색을 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노란색과 붉은색은 일반적으로 얀트라의 긍정적인 힘을, 갈색이나 청색 등 어두운 색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의미를 나타낼 때 쓰였다.

얀트리에 대해서 명상을 하면 이러한 에너지들이 수행자의 마음속에 내면화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행의 과정으로서 인간의식의 다양한 단계로 나아 갈 수 있게 된다. 명상하는 사람은 먼저 얀트라에 대해서 집중을 하고, 그 다음 에는 눈을 감고 명상을 하여 제3의 눈이라고 하는 일종의 마음의 눈으로 얀트라 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하며, 마지막으로는 얀트라의 상세한 외형을 떠올리도록 한다. 초심자는 처음에는 여러 층의 원들이 각기 다른 의식의 표면적 단계를 나 타내는 복잡한 얀트라를 떠올리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숙련된 명상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복잡한 얀트라를 떠올리고 나면 숙련된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보다 추상적 인도해를 떠올린다. 추상적인 얀트라들은 결국 얀트라의 중심에 있는 점(빈두) 을 강조하는 것이다. 점은 우주의 중심을 나타낸다. 바로 그 점을 향해 모든 것 을 집중하고 의식도 집중하는 것이다. 결국 명상을 하는 사람과 그 명상의 대상 이 하나가 되고, 명상의 도구로서 점마저도 최종적으로는 용해되는데, 이것이 바로 상징물과 우주를 하나로 만드는 통합이다. 탄트라 수행을 할 때 초심자는 처음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력을 높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가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프라나 프라티스타 의식을 거쳐야 하는데, 이것은 안트라를 호흡 속에 넣는 것이다. 오 른쪽 콧구멍을 통해서 숨을 내보내면서 얀트라가 내포하고 있는 이제까지의 '속세의 공간을 내보내는 식으로 정화하거나 또는 만트라 묵송을 통해서 정화 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얀트라를 이용하는 명상인데, 네 개의 방향으로 난 네 개의 ''이 둘러싸고 있는 얀트라의 가장자리 부분에 집중하는 명상부터 시작한다. 가장자리는 분노, 욕망 그리고 두려움과 같은 타오르는 열정을 상징한다. 이렇 게 얀트라의 외곽으로 된 원들로 표현되는 의식의 표면적 단계를 통해 상승해 가면 수행자는 신체적인 자아를 초월하고 미세한 내부적 원으로 들어가서 점차 적으로 의식이 깨어나게 된다. 하지만 숙련된 사람은 외부의 얀트라를 사용하 지 않고도 마치 우주 전체를 관망하듯이 한가운데 있는 점으로부터 펼치기 시 작해서 그 전체 이미지를 떠올린다. 일단 도해가 완전히 떠올려지면 수련자는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명상을 시작하고, 중앙의 점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 라감으로써 상징적으로 물질적 우주를 해체하는 것이다.

 

태양신에 대한 경배

수리아 나마스카르, 즉 태양신에 대한 경배는 우주의 원초적인 에너지(샤크티) 에 대해 경배하고, 본격적으로 요가를 시작하기 전에 신체의 힘을 돋우기 위해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해오던 일종의 예배동작이다. 이것은 동트기 바로 전 떠 오르는 태양 에너지를 받아들임으로써 혈액과 장기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태양신에 대한 경배는 일곱 가지 요가적 자세의 연결동작으로 이루어져 있 다. 한 자세에서 다음 자세로 바꾸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어진 흐름이 되도 록 하는데, 이것을 여러 번 반복하되 점점 빠른 속도로 한다. 중요한 것은 자세 들이 연결되는 흐름인데, 한 자세에서 다음 자세로 넘어갈 때 그 흐름이 하나의 동작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일곱 가 지 자세의 순서를 거꾸로 좋아 처음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도 그 효 틈을 유지한다. 이 일곱 가지 자세들은 그때그때 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한다.

1) 발 뒤꿈치를 모으고 똑바로 서서 양손을 가슴 높이에 모아 합장하는 타다사나(인사) 자세를 취한다.

2) 숨을 들이쉬면서 우르드바 하스타사나 자세, 즉 양발을 쭉 펴서 귀 뒤로 젖히는 자세를 한다. 하체는 그대로 두고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펴서 양쪽 귀가 닿게 하면서 올리고, 상체 전체를 뒤로 젖힐 수 있을 만큼 젖힌다.

3) 숨을 내쉬면서 우타나사나 자세를 한다. 상체를 앞으로 구부리는데 다리는 구부리지 알고 똑바로 펴고, 머리는 바닥 쪽으로 향하면서 코를 무릎에 닿게 한다. 영슨은 손해 을 펴서 양쪽 발 옆의 바닥에 나란히 댄다.

4) 숨을 한 번 들이션 다음 왼쪽 다리를 뒤쪽으로 곧게 펴되, 발골은 바닥에 닿게 한다. 양말 은 옆구리에 꼭 붙여 아래로 내리고 손은 오른발과 나란한 위치에서 바닥에 댄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구부려서 앞으로 내민다.

5) 이번에는 숨을 내쉬면서 아도 루카 스바니사나 자세를 한다.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은 그대 로 두고 뒤로 살짝 뛰듯이 하면서 앞으로 내밀었던 오른쪽 다리만 뒤로 끌어와 양쪽 발을 뒤 공치가 바닥에 닿게 하여 나란히 둔다. 그리고 상체를 구부려 턱이 가슴에 닿게 하면 엉덩이 는 치켜 올린 자세가 되는데 시선은 자연스럽게 양다리 사이로 보이는 뒷면을 보도록 한다.

 

6) 숨을 들이쉬면서 가루랑가 단다사나 자세를 한다. 뒤쪽 으로 살짝 뒤듯이 하면서 발 무릎 가슴이 바닥에 닿도록 거의 엎드리는 자세를 하고 몸무게를 발가락에 모은다. 손 바닥은 박 미고 가슴 위치에서 바닥을 짚는다. 엉덩이는 약 간만 틀린 상태이야 한다. 자세가 다 만들어질 때 숨을 내쉰다.

7) 마지막은 우르드바 무카 스바나사나 자세로, 앞의 자세에서 상반신만 일으켜서 가슴을 위로 들어 올려 바깥쪽으로 먹고 폐로 한껏 공기를 들이마신다. 목도 자연스럽게 뒤로 젖힐 수 있을 만큼 젖한 다. 양손은 앞에서와 같이 펴서 바닥에 대어 몸무게를 지탱한다. 숨을 한 번 쉬고 나서 이제 이 순서들을 거꾸로 쫓아 다시 타다시나 자세까지 돌아가면 여기까지가 한 횟수이다. 태양신에 대한 경배는 몸의 상태에 따라서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번 반복한다. 어떤 요 가 스승들은 이것을 수행자 자신의 나이만큼 반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도 리처드 워터스톤 치음/ 이재숙 옮김 종교와 의례, 신과 우주, 명상과 요가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