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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문학 작품의 이해편]중국_9#57

중국문학의 향기_9

The "pianlianwen" (parallel prose) is a unique literary style in Chinese literature that emphasizes parallelism and symmetry in its structure. It flourished during the Wei, Jin, and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and continued to be used in the Tang and Ming dynasties. The style is characterized by its focus on formal beauty, matching couplets, tonal patterns, and the use of allusions. This style influenced later literary forms, including the "eight-legged essay" used in imperial examinations.

 

駢儷文 변려문

虹銷雨霽 彩徹雲衢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天一色

변려문()은 중국문학사상 독특한 문체 가운데 하나로 변체문() 또는 변문()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한. 위에서 출현하여 남북조에서 성행했다. 중국의 문자는 독자(獨音字)이기 때문에 자수가 서로 같은 병렬 구식()을 만들 수 있고 또 한 그러한 병렬 구식 안에서 어휘의 대칭까지도 강구할 수 있다. 독립된 문체로서의 변려문은 고문(古文)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나온 것이다. 고문의 형식상 특징은 구절이 일정하지 않고 대구를 요구하지 않으며, 성률을 강구하지 않고 전고의 사용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려문의 형식상 특징은 이와 정반대이다. 첫째, 반드시 대우를 맞추어야 한다. 변려문의 구식은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두구씩 짝을 맞추어야 한다. 앞뒤로 짝이 되는 두 구는 구절의 구조에 있어서 서로 대칭이 될 뿐만 아니라 각 어휘의 품사까지도 서로 대비를 이루어야 한다. 둘째, 4. 6자의 구식을 이룬다. 변려문은 짝이 되는 두 구절의 자수를 일정하게 맞추는 규정이 있다. · 시기에는 대부분 4자구를 위주로 했지만 5자구나 6자구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 러나 제(() 이후로는 ''의 격식[단 접속부사나 어기조사는 포함되지 않는다)이 고정되었다. 그래서 만당(晩唐) 때에는 변려문을 '사륙문' 또는 '사륙체'라고도 했다. 셋째, 평측을 강구한다. 변려문은 각 구절의 글자마다 고정된 평측을 따라야 하는데, 한 구절 안에서는 반드시 '평대측'이나 '대평'을 이루어야 한다. 넷째, 전고를 사용한다. ·진 이후로 변려문에서의 전고 사용 은 그 주요 목적이 문장을 완곡하고 함축적이며 전아하고 정련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구절마다 전고의 사용을 강조하 다 보니 문장이 난삽해지고 뜻을 알기 어려운 폐단에 빠지기도 했다. 변려문은 형식미를 중시하여 형식주의적인 경향을 띠긴 했지 만, 초기의 변려문 중에는 내용성이 비교적 충실하고 사상성도 갖춘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정교한 수식과 화려 한 언어를 추구하여 형식주의에 집착했다. 이러한 변려문이 발달하게 된 원인으로는 낭만적인 유미주의 사조의 지속, 문학 관념에 대한 자각, 성률설의 흥기, 군주와 귀 족의 애호와 제창을 들 수 있다. 변려문은 당·송 이후로 고문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여전히 계속 창작되었다. 특히 송대 이후로는 고문의 세력에 눌려 공식적이고 주도적인 지위는 상실했지만 청말까지 사대부 계 층의 애호를 받아 꾸준히 지어졌다.

위진남북조 변려문

위진남북조 시대는 사회·정치적 원인과 문학사조의 영향 등으로 인해 변려문이 기형적으로 발전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는데, 이에 따라 변려문의 형식 기교도 더욱 정밀해졌다. 특히 남북조 시기는 변려문이 극도로 발전하여 거의 모든 문장이 변화되었는 데, 그 중 유명한 것으로는 공치규(孔稚圭: 448~501)의 「북산이 문(北山)과 구지(丘遲: 463~508)의 「여진백지서(與陳伯之 書)」등을 들 수 있다.

「북산이문」

종산의 정령과 초당의 신령이 연무를 역로로 치달리게 하여 이문을 산마루에 새겼다. 대저 생각건대, 고상한 절의가 세속을 초탈한 풍 채가 있고, 소쇄한 기품이 속진을 벗어난 사상이 있으며, 흰 눈을 헤아려 깨끗함을 견주고, 푸른 구름을 치받아 곧바로 올라가야 하니, 나는 지금 그렇게 알고 있다. 대저 만물 밖에서 우뚝 높이 있고, 안개 밖에서 희고 깨끗하여, 천금을 초개처럼 여겨 돌아보지 아니하 고, 만승을 짚신처럼 여겨 벗어버린 듯하며, 봉황의 울음소리를 낙 포에서 듣고, 나무꾼의 노래를 연뢰에서 만나는 것이 진실로 또한 있는 것이다. 어찌 기약했으랴! 처음과 끝이 같지 아니하고, 푸르다가 누르다가 자꾸 변하여, 적자의 슬픔에 눈물짓고, 주공(楊의 울음에 통 곡할 줄을! 잠깐 자취를 돌렸지만 마음은 물들어 있었고, 혹은 먼저 는 곧았다가 나중에는 더러우니, 어찌 그리도 거짓 되는가! ! 상생 [)은 있지 아니하고, 중씨[]는 이미 갔으니, 산구비가 적막 하여 천 년인들 누가 이들을 기릴 것인가? ......(후략).....

鍾山之英,草堂之靈,馳煙驛路,勒移山庭,夫以耿介拔俗之標,瀟灑出塵 悅 王功便 部 之想度白雪以方,干靑雲而直上,吾方知之矣.若其亭亭物表,咬鮫霞 外,芥千金而不盼,萬乘其如脫,聞鳳吹於洛浦,薪歌於延瀨,固亦有 焉 豈期終始參差,蒼黃反覆,淚翟子之悲,慟朱公之哭,乍迴跡以心染,或先貞而後,何其謬哉!嗚呼!尙生不存,仲氏旣往,山阿寂寥,千載誰賞? .... (후략) ......

당대 변려문

당초에는 남북조의 유풍을 답습하여 변려문이 계속 유행하다가, 고문운동의 주창자인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적극적인 반대로 잠시 주춤했으나 과거제도와 연관되어 지속되었으며, 당 말오대(五代)에 이르러 다시 흥성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초당 때의 왕발()과 만당 때의 이상은(온정균(溫庭筠)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왕발의 「등왕각서(王閣序)」는 사륙변려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등왕각서」

남창은 옛 군이요, 홍도는 새로운 부()이다. 별자리로는 익·진으로 나뉘고, 땅으로는 형산과 여산에 접해 있다. 삼강을 옷깃으로 삼고 오호를 띠로 두르고 있으며, 형만을 당기고 구월을 끌고 있다. 물건의 정화는 하늘의 보배라 용천검(龍天劍)이 견우성과 남두성의 자리를 쏘았고, 사람의 뛰어남은 땅의 신령스러움이라 서유가 진번의 평상을 내리게 했다. 뛰어난 고을이 안개처럼 벌려 있고 준걸한 인재들이 별처럼 달리며, 누대와 해자는 만이(蠻夷)와 중국의 사이를 내려다보고 있고 빈객과 주인은 동남의 훌륭함을 다했다. 고아한 명망을 지닌 도독 염공[閻伯嶼은 의장용 창을 앞세우고 멀리서 왕림했고, 훌륭한 위의를 갖춘 새로 부임한 우문균(宇文)은 수레 휘장을 잠시 멈추었다. 10순의 휴가라 훌륭한 벗들이 구름 같고, 천리까지 맞이하여 접대하니 고상한 벗들이 자리에 가득하다. 오르는 교룡과 일어나는 봉황은 맹학사의 뛰어난 문장이며, 번개처럼 빛나는 칼과 서릿발 같은 창은 왕장군의 무기고다. 엄친께서 현령이 되어 계시므로 가는 길에 이 유명한 지방을 지나게 되었으니, 나 같은 어린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몸소 훌륭한 연회를 만나게 된 것이다. 때는 바로 9월이요, 절기는 가을의 석 달에 속한다. 땅에 괸 빗물은 다하고 차가운 못물은 맑으며, 안개 빛 어리어 저물어 가는 산은 자줏빛이다. 의젓하게 길 위로 곁말을 몰아, 높은 언덕에서 풍경을 찾는다. 천자 아들의 긴 섬을 내려다보며, 신선의 옛 도관을 찾는다. 겹겹이 연이은 산봉우리는 초록빛으로 솟아 위로 구중의 하늘로 나왔고, 나는 듯한 등왕각은 붉은 빛을 흘리며

 

아래로 바닥없는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학의 모래톱과 물오리의 모래톱은 섬들을 빙 둘러 놓여 있고, 계수나무 전각과 목란 궁전은 언덕과 산의 형세를 따라 줄지어 섰다. 아로새긴 문을 열고 조각한

기와를 내려다보니, 산과 들판이 드넓어 시야에 가득 차고 내와 못

은 커서 보는 눈을 놀라게 한다. 집들이 땅에 빽빽이 들어찼으니 종을 울리고 솥을 늘어놓고 식사하는 집이 있고, 큰 배들이 나루에 서 헤매니 푸른 공작과 누런 용을 새긴 배꼬리가 있다. 무지개 사라 지고 비 개이니, 광채가 허공을 뚫는다.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 와 더불어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긴 하늘과 함께 한 빛깔이다. 고기잡이배가 저녁 경치를 노래하니 음향이 팽려의 물가까지 울리 고, 기러기 떼 행렬이 추위에 놀라니 소리가 형양의 포구에서 끊어 진다. 아득히 바라보며 고개 숙여 생각을 읊어내니, 풍류스러운 흥 이 빨리 날아간다. 서늘한 가을 소리를 내니 맑은 바람이 일고, 가냘 픈 노래가 어리어 흰 구름이 멈춘다. 휴원의 푸른 대나무는 기상이 팽택[陶淵의 술통을 능가하고, 업수의 붉은 연꽃은 빛이 임천 치의 붓을 비춘다. 네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지고, 두 가지 어려움 이 아울렀다. 실눈으로 중천을 끝없이 바라보고, 휴일에 즐거운 놀 이를 마음껏 즐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머니 우주의 무궁함을 깨닫 고, 흥이 다하고 슬픔이 오니 차고 비는 것에 명수() 있음을 알 겠다. 장안을 태양 아래서 바라보고, 오나라 도회를 구름 사이로 가리킨다. 땅의 형세가 다하여 남쪽 바다가 깊고, 하늘 기둥이 높아 서 북극성이 멀다. 관산을 넘기 어려우니, 누가 길 잃은 사람을 슬퍼 하리오! 우연히 서로 만나니, 모두가 타향의 길손이다. 대궐 문지기를 생각해도 만나질 못하니, 어느 해에나 선실을 받들겠 는가? ! 시운이 같지 아니하고 운명의 길은 어긋남이 많으니, 풍당 은 쉬이 늙고 이광은 제후로 봉해지기 어려웠다. 가의가 장사에서 굴욕을 당한 것은 성군이 없었던 탓이 아니며, 양홍이 양곡으로 쫓 겨난 것은 어찌 밝은 때가 부족해서이겠는가?

믿는 바는 군자는 가난에 편안하고, 통달한 사람은 천명을 아는 것이 다. 늙을수록 더욱 건장해지니, 어찌 백발노인의 마음을 알리오? 곤 궁할수록 더욱 굳건해지니, 청운의 뜻을 떨어뜨리지 아니한다. 탐천 아래로 바닥없는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학의 모래톱과 물오리의 모래톱은 섬들을 빙 둘러 놓여 있고, 계수나무 전각과 목란 궁전은 언덕과 산의 형세를 따라 줄지어 섰다. 아로새긴 문을 열고 조각한 기와를 내려다보니, 산과 들판이 드넓어 시야에 가득 차고 내와 못 은 커서 보는 눈을 놀라게 한다. 집들이 땅에 빽빽이 들어찼으니 종을 울리고 솥을 늘어놓고 식사하는 집이 있고, 큰 배들이 나루에 서 헤매니 푸른 공작과 누런 용을 새긴 배꼬리가 있다. 무지개 사라 지고 비 개이니, 광채가 허공을 뚫는다.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 와 더불어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긴 하늘과 함께 한 빛깔이다. 고기잡이배가 저녁 경치를 노래하니 음향이 팽려의 물가까지 울리 고, 기러기 떼 행렬이 추위에 놀라니 소리가 형양의 포구에서 끊어진다. 아득히 바라보며 고개 숙여 생각을 읊어내니, 풍류스러운 흥 이 빨리 날아간다. 서늘한 가을 소리를 내니 맑은 바람이 일고, 가냘 픈 노래가 어리어 흰 구름이 멈춘다. 휴원의 푸른 대나무는 기상이 팽택[陶淵의 술통을 능가하고, 업수의 붉은 연꽃은 빛이 임천 치의 붓을 비춘다. 네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지고, 두 가지 어려움 이 아울렀다. 실눈으로 중천을 끝없이 바라보고, 휴일에 즐거운 놀 이를 마음껏 즐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머니 우주의 무궁함을 깨닫고, 흥이 다하고 슬픔이 오니 차고 비는 것에 명수() 있음을 알겠다. 장안을 태양 아래서 바라보고, 오나라 도회를 구름 사이로 가리킨다. 땅의 형세가 다하여 남쪽 바다가 깊고, 하늘 기둥이 높아 서 북극성이 멀다. 관산을 넘기 어려우니, 누가 길 잃은 사람을 슬퍼 하리오! 우연히 서로 만나니, 모두가 타향의 길손이다. 대궐 문지기를 생각해도 만나질 못하니, 어느 해에나 선실을 받들겠 는가? ! 시운이 같지 아니하고 운명의 길은 어긋남이 많으니, 풍당 은 쉬이 늙고 이광은 제후로 봉해지기 어려웠다. 가의가 장사에서 굴욕을 당한 것은 성군이 없었던 탓이 아니며, 양홍이 양곡으로 쫓겨난 것은 어찌 밝은 때가 부족해서 이겠는가? 믿는 바는 군자는 가난에 편안하고, 통달한 사람은 천명을 아는 것이 다. 늙을수록 더욱 건장해지니, 어찌 백발노인의 마음을 알리오? 곤 궁할수록 더욱 굳건해지니, 청운의 뜻을 떨어뜨리지 아니한다. 탐천의 물을 마시고도 상쾌함을 느끼고, 말라버린 수레바퀴 자국에 처해 도 오히려 즐겁다. 북해[조정]가 비록 멀기는 하나 회오리바람을 탈 수 있고, 동쪽 모퉁이[젊은 날]는 이미 갔지만 상위[노년기]는 늦지 않았다. 맹상은 고결했지만 헛되이 보국의 마음만 품었고, 완적은 거짓 미친 척했으니 어찌 막힌 길에서 통곡한 것을 본뜨겠는가? 나는 3척의 미미한 생명이고 한낱 서생이라, 갓끈[벼슬]을 청할 길 없으나 종군의 약관의 나이와 같으며, 붓을 내던질 생각을 하나 종 각의 장풍이 그립다. 잠홀을 백 살에 버리고, 만리에서 새벽과 저녁으로 어버이를 받들리라. 사씨 집안의 보배로운 나무는 아니지만, 맹씨의 꽃다운 이웃에 가까이 하리라. 다른 날에 뜰에서 종종걸음 쳐서, 외람되게도 공리(孔鯉)의 대답으로 모시리라. 오늘 아침에 위 의(威儀)를 바로 하고 용문에 의탁하게 됨을 기뻐한다. 양득의(楊得 意)는 만나지 못했으니 「능운」의 부를 어루만지며 스스로 애석해하 고, 종자기 이미 만났으니 「유수」의 곡을 연주한들 무엇는 이 부끄러우랴? ! 경치 좋은 곳은 흔한 것이 아니며, 성대한 잔치는 두 번 만나기 어렵다. 난정의 잔치는 이미 끝났고, 재택[金谷)은 폐허가 되었다. 헤어짐에 이르러 글을 드리는 것은 다행히 훌륭한 잔치에서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며, 고각에 올라 시를 짓는 것은 뭇 공들께 바라는 바이다. 감히 보잘것없는 성의를 다하여 공손스레 짧은 서를 짓고, 한 마디 글을 함께 지으니 네 운이 갖추어졌다. 반악()의 강물 뿌리고 육기()의 바다 쏟기를 청한다.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패옥과 방울소리에 가무까지 그쳤네. 단청한 기둥엔 아침이면 남포의 구름 날고, 구슬발을 저녁에 걷어 올리니 서산의 비라네. 연못에 비친 한가로운 구름 그림자는 날로 유유한데, 인물 바뀌고 세월 흘러가니 몇 번의 가을 지나갔나? 누각에 있던 천자의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난간 밖 긴 강물만 공연히 절로 흐르는구나!

南昌故郡,洪都新府,星分翼軫,地接衡,襟三江而帶五湖,控蠻荊而引 甌越,物華天寶,龍光射牛斗之墟,人傑地靈,徐孺下陳蕃之榻,雄州霧列, 俊彩星馳,臺隍枕夷夏之交,賓主盡東南之美, 都督閻公之雅望,棨戟遙臨,宇文新州之懿範,帷暫駐,十旬休暇,勝友 如雲,千里逢迎,高朋滿座,騰蛟起鳳,孟學士之詞宗紫電,王將軍之 武庫.家君作宰,路出名區,童子何知?躬逢勝餞, 時維九月,序屬三秋,潦水盡而寒潭,煙光凝而暮山紫,儼驂騑於上路, 訪風景於崇阿,臨帝子之長洲,得仙人之舊館,層巒聳翠,上出重響,飛閣 翔丹,下臨無地,鶴汀鳧渚,窮島嶼之榮回,桂殿蘭宮,列岡巒之體勢.披繡 闥,俯雕甍,山原曠其盈視,川澤盱其駭矚,閭閻撲地,鍾鳴鼎食之家,舸艦 迷津,雀黃龍之軸,虹銷雨霽,彩徹雲衢,落霞與孤鶩齊飛,秋水共長天 漁舟唱,響窮彭蠡之濱,雁陣驚寒,聲斷衡陽之浦,遙吟俯暢,逸興 爽籟發而風生,纖歌而白雲遏.睢園綠竹,氣凌彭澤之樽,鄴水朱華, 光照臨川之筆,四美具,二難.窮睇眄於中天,極娛游於暇日,天高地, 覺宇宙之無窮,興盡悲來,識盈虛之有數,望長安於日下,指吳會於雲間, 地勢極而南溟深,天柱高而北辰遠,關山難越,誰悲失路之人!萍水相逢, 盡是他之客 懷帝而不見,奉宣室以何年?嗚乎!時運不齊,命途多舛,馮唐易老,李廣 難封,屈賈誼於長沙,非無聖主.竄梁鴻於海曲,豈乏明時? 所賴,君子見機,達人知命,老當益壯,寧知白首之心?窮且益,不墜 之志,酌貪泉而覺爽,處涸轍以猶歡,北海雖除,扶搖可接,東隅已逝,桑楡 非,孟嘗高潔,空懷報國之心,阮藉猖狂,豈效窮途之哭! ,三尺微命,一介書生,無路請纓,等終軍之弱冠,有懷投筆,慕宗慤之長 風,舍簪笏於百齡,奉晨昏於萬里,非謝家之寶樹,接孟氏之芳鄰,他日趨 庭,叨陪鯉對,今晨捧袂,喜托龍門,楊意不逢,撫凌雲而自惜,鍾期旣遇, 奏流水以何? 嗚呼!勝地不常,盛筵難再,蘭亭已矣,梓澤丘墟,臨別贈言,幸承恩於偉 餞,登高作賦,是所望於群公,敢竭鄙誠,恭疏短引,一言均賦,四韻俱成, 請灑江,各傾陸海云爾, 王高閣臨江渚,佩玉鳴鸞罷歌舞, 畫棟朝飛南浦雲,珠簾暮卷西山雨, 閑雲潭影日悠悠,星移幾度秋 閣中帝子今何在?檻外長江空自流,

명대 변려문

명대에는 전통적인 변려문보다는 변려문의 변형된 형태인 팔 고문(八股文)이 출현하여 과거시험의 문체로 자리 잡으면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러한 위세는 청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팔고문은 명·청시대의 과거 응시용 문장형식으로 통칭 거업 (畢業)이라 한다. 파제(破題승제(承題기강(입제(入題기고(起股출제(出題)•중고(中股후고(後股). 속고(東股수결 (收結)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파제·승제·기강·입제·기고·중고·후고·속고가 대비와 대우를 사용하여 '팔고' 가 되므로 팔고문이라 부른다. 또한 주로 사서(四書)에서 출제되므로 사서문(四書文)이라고도 하며, ')' ''를 의미한다 하여 팔비문()이라고도 한다. 그밖에 황제의 명령을 '()' 라 하므로 '황제가 명하여 짓는 문예 혹은 도리가 담긴 문장'이라는 뜻으로 제예문(制藝文제의문(制義文)이라 하고, 경전의 도리 가 담긴 문장이라는 뜻으로 경의문(經義文)이라고도 하며, 고문에 상대되는 뜻으로 시문(時文시예(時藝)라고도 한다. 내용은 자신의 의견만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의 어투를 사용하여 성인의 관점을 서술해야 한다. 팔고문의 구성요소 가운 데 파제·승제·기강·입제는 제목 부분이고 기고·중고·후고·속고는 본론 부분이며 수결은 결론 부분이다. 파제는 문장의 제목에 대해 설명하는 주제 부분에 해당하는데, 일반적으로 시험관들이 이 부분을 보고 당락을 결정하므로, 수험생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다. 승제는 주제를 보충하는 부분이고, 기강은 '차부()'·'상위(嘗謂)'·'약왈(若日)' 등의 말을 사용하여 성인의 어투로 문장의 대의를 설명하며, 입제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내용이다. 기고는 총론 부분으로 뒤에 문자상에서 제목을 설명하는 출제가 이어진다. 중고는 가장 중요한 본론으로 자신의 의론을 전개하며, 후고에서는 자신의 감상이나 감탄 등을 덧붙인다. 속고에서는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고, 수결에서 결론을 맺는다. 이러한 팔고문의 형식은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이 실시한 경의 문(經文)에서 비롯되었는데, 명대 성화() 연간에 팔고문으로 정착되어 엄격한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정통(正統가정 (嘉靖) 연간에 가장 극성했다. 팔고문은 사실상 통치자들이 사상 통제를 통하여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명대 중엽에 이르러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사회가 점차 다변화되고 봉건적인 사회질서가 흔들리게 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가장 엄격한 팔고문이 나오게 되었는데, 전체 문장의 자수()뿐만 아니라 각 단락의 자수와 작문 규정 등이 모두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팔고문은 시대적인 의미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었으므로 문학성이나 실용성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큰 가치는 없었다. 명대 팔고문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귀유광(歸有光)을 들 수 있다.

청대 변려문

청대에는 동성파(桐城派)의 고문이 문단을 지배했지만, 복고적 인문학조류에 편승하여 변문파()의 변려문도 자못 유행했 다. 청초의 변려문은 진유숭(陳維崧)을 필두로 오기(吳綺) 등이 활 약했으며, 청 중엽의 변려문은 이른바 변문팔대가(大家:洪 亮吉·孔廣森·袁枚·邵齊燾·劉星煒·吳錫麒·孫星衍·曾煥)가 나와 변문이 고문과 맞설 만큼 크게 유행했다. 청말의 변문은 완원(阮元: 1764~1846)에 의해 대표되는데, 그는 '문필론(筆論)'을 제 창하여 운()이 있는 문장, 즉 변려문과 실용적인 문장구별했으며, 육경이나 『사기』와 같은 문장은 문학으로서의 문장 이 아니고 변려문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라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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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統散文 전통산문

是故弟子不必不如師 師不必賢於弟子 聞道有先後 術業有專攻 如是而已

선진 역사·제자 산문

춘추전국시대에는 사회·경제의 변화, 사학(私學)의 흥기, 문화의 점진적인 발달 등으로 인하여, 열국의 제후들이 각기 사관(史官)을 설치하여 자기네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고, 아울러 사회적으로도 수많은 철학가·문학가·정치가 및 서로 다른 학파의 지식 인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저마다의 견해를 내세우면서 다양한 산문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했다. 이것이 바로 백가쟁명의 상황을 만들었으며 그에 따라 산문 또한 유례없는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산문은 크게 역사 산문과 제자산문철리산문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주요 역사산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경(書經)』은 「우서(虞書)5, 「하서(夏書)4, 「상서(商 書) 17, 「주서(周書)32편의 총 58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부터 하·· 3대에 이르는 제왕들의 정령훈고를 기록한 것이다. 각 편은 서로 연관이 없는 독립된 글로서, 대부분 사실(史實)을 빙자한 허구적인 글이며 함축성, 암시성. 수사성을 갖추고 있다. 『서경』은 역대 고문의 본보기로서 후대의 사서와 산문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춘추(春秋)』는 공자(BC551~BC479)가 노()나라 역사에 근거하여 편찬했다고 하며,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BC722)에서 애공() 14(BC481)까지의 국가대사를 편년체로 엮은 것이다.

문장은 비록 극히 짧지만 자구의 운용이나 구성면은 『서경』보다 훨씬 발전하여 간결하고 평이하다. 『춘추』는 유가의 육경 가운데 하나로서, 그 안에 담겨 있는 포폄(褒貶)의 필법(筆法)과 미언대의 (言大義)의 의법(義法)은 후대 고문가의 창작지표가 되었다. 『좌전(左傳)』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내전(春秋內 傳)』이라고도 하는데, 춘추시대 좌구명()의 작이라고 하며, 노나라 은공 원년(BC722)에서 애공 27(BC468)까지 200여 년간 의 각국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묘사가 상세하고 필치가 간결하 며, 기언(記言)과 기사(記事)가 모두 문학적인 예술성과 감동력을 갖추고 있다. 『좌전』은 유가의 13경 가운데 하나로서 『춘추』의 미언대의를 발양하고 중요한 사실을 많이 보충한 중국 고대의 귀 중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국어(國語)』는 좌구명이 지었다고 하며, 춘추시대 주(),(),(),(),(),(),(),() 8개국의 중요한 역사사실을 나누어 기술한 것이다. 사건에 대한 기술이 간결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상세하며 조리가 분명하지만, 문학상의 성취는 『좌전』에 미치지 못한다. 『국어」는 노나라의 사적을 위주 로 기록한 『좌전』의 부족함을 보충하여 노나라 이외의 기타 여러 나라의 대사를 기술함으로써, 당시의 정치·군사·풍속 및 각종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전국책(戰國策)』은 『국책(國策),「국사(國事),『단장서』,『사어(事語),『장서(長書)』등의 별칭이 있다. 원작자는 미상이며, 한대 유향(劉向)이 편집했다고 한다. () 정왕(貞王) 17(BC452)에서 진시황(秦始皇) 27(BC220)까지 동주,서주,(),(),(),(),(),(),(),(),,중산(中山)의 각국 책사들의 기지와 책략 및 역사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문장이 간결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구성이 치밀하고 조리가 분명하다. 또한 민간의 전설과 적절한 비유를 통하여 설 득력이 매우 강하다. 『전국책』은 선진 역사산문의 최고수준에 도 달한 작품으로서, 전국시대 각국의 정치,사회,군사,외교 등을 고도의 문학수법으로 기술하여, 위로는 『좌전』을 이어받고 아래 로는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어부의 횡재」

조나라가 장차 연나라를 치려 할 때, 소대가 연나라를 위하여 조 혜왕에게 말했다.

“오늘 신이 오는 길에 역수를 건너다가 보았는데, 방합 조개가 막 나와서 햇볕을 쬐고 있을 때 도요새가 그 속살을 쪼자 방합 조개가 껍질을 닫아 도요새의 부리를 물었습니다. 도요새가 '오늘도 비가 오지 않고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방합 조개 너는 죽었다'고 말하 자, 방합 조개 역시 도요새에게 '오늘도 빼내지 못하고 내일도 빼내 지 못하면 도요새 너는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둘이 서로 놓아주지 않으려고 할 때 어부가 둘 다 잡아가 버렸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장차 연나라를 치려 하는데, 연나라와 조나라가 오랫동안 서로 버텨 서 많은 백성들을 피폐하게 한다면, 신은 강한 진나라가 어부가 될 까 두렵습니다. 따라서 원컨대 왕께서는 이를 심사숙고하십시오." 혜왕은그 말이 옳소!"라고 하면서 그만 두었다.

趙且伐燕, 蘇代爲燕謂惠王曰: “今者臣來, 過易水, 蛙方出曝, 而鶴啄其肉, 蛙合而拍其喙.鶴曰: ‘今日不雨, 明日不雨, 卽有死蛙.’蛙亦謂馥曰: ‘今日 不出, 明日不出, 卽有死鶴.’兩者不肯相舍,漁者得而幷擒之今趙且伐燕, 燕趙久相支,以弊大衆,臣恐秦之爲漁父也,故願王熟計之也.”惠王曰: [『戰國策』「燕策二]

 

다음으로 주요 제자산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논어 20편은 유가에 속하며,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공 구(孔丘: BC551~BC479, 또는 仲尼)의 제자들이 지었다. 어록체로서 언어가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대화의 운용이 뛰어나다. 『맹자』 7편 역시 유가에 속하며, 전국시대 노나라 사람 맹가(: BC372?~BC289?, 자는 자흥)와 그 제자들이 지었다. 문장 이 격정적,웅변적,선동적이며 재기가 넘치고 의론이 도도하다.

「하필이면 이득을 말씀하십니까?[何日利]

맹자가 양혜왕을 알현했더니 왕이 말했다. "노인장께서는 천리를 멀다 하지 아니하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할 것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득을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가 있을 따름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라고 말씀하시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내 봉국()을 이롭게 할까?라고 말할 것이고, 선비와 일반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라고 말할 것이니, 위아래로 서로 이득을 놓고 다툰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봉국이며, 천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봉국이니, 만에서 천을 취하고 천에서 백을 취하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진실로 인의를 뒤로 하고 이득을 앞세운다 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린 자는 아직 있지 않으며, 의로우면서 그 군주를 뒤로 하는 자는 아직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또한 인의를 말씀하실 따름이시지 하필이면 이득을 말씀하십니까?"

孟子見梁惠王,王曰: ", 不遠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孟子對曰: "何必 何以利吾國?大夫'何以利吾? 有仁義而已矣,王曰 士庶人曰“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國危矣,萬乘之國,其君者,必千 乘之家乘之國,弑其君,必百乘之家,萬取千焉,千取百焉,不爲不多 矣,苟爲後義而先利,不奪不 未有仁而遺其親者也,未有義而後其君者 利?" ,王曰仁義而已矣,何必 [『孟子』「梁惠王章句]

『순자(荀子) 32편 역시 유가에 속하며,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 순황(BC298?~BC238?, 존칭은 荀卿)이 지었다. 문장 이 냉철하고 기세가 웅혼하며, 구성이 엄밀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비유가 뛰어나다. 후대 논설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민가의 형식을 빌려 쓴 「성상편(成相篇)」과 「부편(賦篇: ···· 5수와 ~2)」은 새로운 문체의 시도로 문학사상 중시할 만한 가치가 있다.

「권학편(學篇)

군자가 말하길, 배움은 그만 둘 수 없다고 한다. 파란색은 쪽 풀에서 나오지만 쪽 풀보다 더 파랗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갑다. 나무가 곧으면 먹줄에 들어맞고, 굽혀서 바퀴를 만들면 그 휘어짐이 그림쇠[컴퍼스]에 들어맞는다. 비록 말리고 햇볕에 쪼인다 하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것은 굽힘이 그것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가 먹줄을 받으면 곧아지고 쇠가 숫돌에 나아가면 날카로워진다. 군자가 널리 배우고 날마다 자신을 세번씩 반성한다면, 아는 것이 명확해지고 행실에 잘못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보지 않으면 하늘의 높음을 알지 못하고, 깊은 계곡에 다가가지 않으면 땅의 두터움을 알지 못하며, 선왕의 남기신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 여러 오랑캐 땅의 아이도 태어날 때는 같은 소리로 울지만 자라서는 습속이 달라지는 것은 가르침이 그를 그렇게 한 것이다.

君子曰 學不可己.靑取之於藍,而靑於藍.冰爲之,而寒於.直中 繩,以爲輪,其曲中規雖有枯暴,不復挺者,使之然也,故木受繩則 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 則知明而行無過矣,故不登高 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 [7] 之大也,于越夷貂之子,生而同聲,長而異俗,敎使之然也.

[노자] 2 81장은 도가에 속하며 「도덕경」 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 이이(: 이름은, 자는 ~~)가 지었다고 한다. 언어가 간결하고 뜻이 심오하며 일부 문장에는 운이 들어 있다.

「제도()]

이름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가 아니고, 이름 할 수 있는 명칭은 영원한 '명칭'이 아니다.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며, '유명'은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상무'는 그 오묘함을 보고자 하며, '상유'는 그 귀결을 보고자 한다. 이 두 가지는 같은 데서 나왔지만 이름만 다르 다. 똑같이 현묘하다고 이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모든 오묘함의 문이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故常 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徽 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之又玄 衆妙之門。[1]

『장자(莊子) 33편 역시 도가에 속하며, '남화경(南華經)』이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송()나라 사람 장주(莊周: BC369?~ BC286?, 자는 子休)와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기세가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특히 우언의 운용이 탁월하다.

「소요유(逍遙)

북명에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하여 ''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변화하여 새가 되는데 이름하여 ''이라 한다. 붕의 등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분격하여 날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에 해일이 일면 장차 남명으로 옮겨가는데, 남명은 하늘의 연못이다. '재해'는 괴이 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재해에서 말하길 "붕이 남명으로 옮겨 갈 때는 물에서 삼천리를 도약하여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위로 올라가 6개월 동안 날아가서 쉰다"고 했다. 아지랑이는 먼지와 티끌로 생물이 숨쉬면서 내뿜는 것이다.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본래 색일까? 아니면 너무 멀어서 끝닿는 데가 없어서 일까?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北冥有魚, 其名爲組, 鯉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鵬之 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 南冥者天池也.齋諧者,志怪者也.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水擊 三千里,搏扶搖而上者九萬里,去以六月息者也.”野馬也, 塵埃也, 生物之 以息相吹也,天之蒼蒼,其正色邪?其遠而無所至極邪?其視下也, 亦若是 [『莊子』「內篇」] 則已矣.

『묵자(墨子) 53편은 묵가에 속하며, 전국시대 노()나래 송나라라는 설도 있음] 사람 묵적(墨翟: BC468?~BC376?)의 제자들이 지었다. 문장이 질박하고 평이하나 논리성이 강하고 논증이 엄밀하여 후대 논변문의 선구가 되었다.

「겸애()

성인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일로 삼는 자이니, 반드시 난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아야만 다스릴 수 있으며, 난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 없다. 비유하자면 의원이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질병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아야만 치료할 수 있으며, 질병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하면 치료할 수 없다. 성인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일로 삼는 자이니, 난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난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마땅히 살펴야 하니,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난다. 신하와 자식이 임금과 아비에게 불효하는 것을 이른바 난이라고 한다. 자식이 자기만 사랑하고 아비를 사랑하지 않 기 때문에 아비를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하며, 동생이 자신만 사랑하고 형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형을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하며, 신하가 자신만 사랑하고 임금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임금을 해치 고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 이것을 이른바 난이라고 한다. 비록 아비 가 자식을 자애하지 않고, 형이 동생을 자애하지 않으며, 임금이 신 하를 자애하지 않는 것, 이것도 역시 천하에서 이른바 난이라는 것이다. 아비가 자신만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식을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하며, 형이 자신만 사랑하고 동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동생을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하며, 임금이 자신 만 사랑하고 신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신하를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은 왜 그럴까?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聖人以治天下事者也, 必知亂之所自起焉, 能治之, 不知亂 之所自起,則 不能治,譬之如醫之攻人之疾者然,必知疾之所自起焉,能攻之,不知疾之 所自起,則不能攻.治亂者何獨不然?必知亂之所自起焉,能治之,不知亂 之所自起,則弗能治,聖人以治天下事者也,不可不察亂之所自起當察 亂何自起,起不相愛,臣子不孝父,所謂亂也,子自愛不愛父,故父 而自利,弟自愛不愛兄,故而自利,臣自愛不愛君,故虧君而自利,此 所謂亂也,雖父之不慈子,兄之不慈弟,君之不慈臣,此亦天下之所謂亂也 父自愛也不愛子,故虧子而自利,兄自愛也不愛弟,故弟而自利,君自愛 也不受臣,故虧臣而自利,是何也?皆起不相愛,

『한비자(韓非子) 55편은 법가에 속하며, 전국시대 한나라 사람 한비(韓非: BC280?~BC233?)가 지었다. 필봉이 예리하고 논 변이 투철하며, 조리가 분명하고 수사를 겸비하고 있다.

「고분편()

술을 아는 선비는 반드시 먼 날의 일을 예견할 줄 알며 일을 헤아림이 밝으니, 헤아림이 밝지 못하면 타인의 은밀한 속셈을 밝혀 낼 수 없다. 법도를 잘 준수하는 선비는 반드시 의지가 강하고 성품이 강직하니, 강직하지 않으면 간사한 자들을 바로잡을 수 없다. 신하가 명령에 따라 일을 행하고 정해진 법령에 의거하여 자신의 직분을 다스리는 자는 '중인권세가 막중한 조정의 권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중인이란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며, 법 령을 어겨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고 나라를 축내서 자신의 집안을 유익하게 하면서 힘으로 군주를 움직일 수 있으니, 이들이 이른바 중인이다. 치술을 아는 선비는 헤아림이 분명하므로 군주에게 신임을 받게 된다면 중인들의 은밀한 심중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며, 법도를 잘 준수하는 선비는 강직하므로 군주에게 신임을 받게 된다 면 중인들의 간사한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치 술을 알고 법도를 준수하는 선비가 등용되면, 지위가 높고 권세가 무거운 신중인]들은 반드시 법도의 밖에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치술을 알고 법도를 준수하는 선비와 권력의 요로를 막고 있는 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智術之士, 必遠見而明察, 不明察, 不能燭私能法之士,必强毅而勁直 勁直,不能矯姦人臣循而從事案法而治官, 非謂重人也,重人也者,無 而撞爲,虧法以利私,耗國以便家,力能得其君,此所謂重人也,智術之 士,明察聽用,且燭重人之陰情能法之,勁直聽用,且矯重人之行. 故 智術能法之士用,則貴重之臣,必在之外矣,是智法之士,與當塗之人, 不可兩存之仇也 [한비자]

그 밖에 안영(晏嬰)의 「안자춘추(春秋), 손무(孫武)의 『손자(孫子),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 열어구의 『열자(列子)』 등도 모두 각기 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선진 산문은 중국 산문 발전의 기초를 다지고 한대 산문과 당대 고문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산 문의 표현기교와 단련을 제고시켰다. 또한 각 저작에 인용된 우언 고사는 후대 각종 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했다.

진·한대 산문

진대를 대표할 만한 작가와 작품은 이사(李斯: ?~BC208)의 「간축객서(諫逐客書)」를 들 수 있다. 「간축객서」는 포진(鋪陳)의 수법을 잘 운용하고 대우의 수사기교를 사용했으며, 필법이 변화무쌍하고 구성이 치밀하다. 또한 이 작품은 소체와 부체를 이어주는 과도기 역할을 수행하여, 한대의 부와 산 문에 영향을 미쳤다.

「빈객의 축출을 간하는 상서[]

신은 관리들이 빈객을 축출할 것을 논의했다고 들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목공은 현사()를 구하여 서쪽으로는 융 땅에서 유여를 취했으며, 동쪽으로는 완 땅에서 백리 해를 얻고 송에서 건숙을 맞이하고 진()에서 비표와 공손지를 내 복()하게 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 출신이 아니지만 목 공이 등용하여 20국을 병합함으로써 마침내 서융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효공은 상앙의 법술을 채용하여 풍속을 바꿈으로써, 백성이 부유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졌으며, 백성이 즐겁게 일하고 제후들이 기꺼이 복종하여, 초와 위의 군대를 얻고 천리의 땅을 차지했으니, 지금까지 그 강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혜왕은 장의의 계책을 채 용하여 삼천의 땅을 빼앗았으며, 서쪽으로는 파촉을 병합하고, 북쪽으로는 상군을 손에 넣고, 남쪽으로는 한중을 취하고 구이를 차지하고 언영을 제압했으며, 동쪽으로는 성고의 요새에 근거지를 두고 기름진 땅을 분할함으로써, 마침내 육국의 합종을 깨뜨려 그들로 하여금 서쪽을 향하여 진()을 섬기게 했으니, 그 공이 지금까지 펼쳐지고 있습니다. 소왕은 범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후를 내쫓고 화양을 방축함으로써 왕실을 강하게 했으며, 벌족의 발호를 막고 제후들을 잘 양성하여 진으로 하여금 제업을 이루게 했습니다. 이 네 군주는 모두 빈객의 공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빈객이 어찌 진을 배반하오리까? ...............(중략)......

신이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풍성하고 나라가 크면 백성이 많 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들이 용감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태산은 한줌 흙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처럼 크게 될 수 있었으며, 하해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처럼 깊게 될 수 있었으며, 제왕은 여러 백성들을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처럼 성덕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은 사방을 구분할 필요가 없고 백성은 나라가 다른 것을 따질 필요가 없으니, 사시가 풍요롭고 귀 신이 복을 내려줍니다. 이것이 바로 오제와 삼왕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지금 일반 백성들을 버려서 적국을 도와주고 빈객을 물리쳐서 제후들을 섬기게 함으로써, 천하의 현사들로 하여금 물러 나 감히 서쪽을 향하지 못하게 하고 발을 묶어 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은 적에게 군대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식량을 싸주는 격입니다. 대저 진에서 나오지 않는 물건 중에도 보배로운 것이 많으며, 진에 서 태어나지 않은 선비 중에도 충성하길 원하는 자가 많습니다. 지금 빈객을 축출하여 적국을 도와주고 백성을 감축하여 원수에게 보태준다면, 안으로는 스스로 허약해지고 밖으로는 제후들에게 원한을 심게 되니, 나라가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란다 해도 될 수 없는 일입니다.

臣聞吏議逐客,竊以爲過矣.昔繆公求士, 西取由余於戎, 東得百里奚於宛, 迎蹇叔於宋, 來丕豹·公孫支於晉.此五子者,不産於秦,而繆公用之,國 二十,遂覇西戎,孝公用商鞅之法, 移風易俗,民以殷盛,國以富彊,百姓樂 用,諸侯親服,獲楚·魏之師, 畢地千里, 至今治彊惠王用張儀之計, 拔三 川之地,西井巴蜀,北收上郡,南取漢中,包九夷制郢,東據成皐之險, 割膏腆之壤,遂散六國之從,使之西面事,功施到今昭王得范睢,廢穰 侯,逐華陽公室,杜私門,蠶食諸侯,使秦成帝業,此四君者皆以客 功.由此觀之,客何負於秦哉?............(中略)............

臣聞地廣者多,國大者人衆,兵彊者則士勇,是以泰山不讓土壤,故能成 其大,河海不擇細流,故能就其深,王者不却衆庶,故能明其德,是以地無 四方,民無異國,四時充美,鬼神降福,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今乃棄 黔首以資敵國,却賓客以業諸侯,使天下之士,退而不敢西向,裹足不入秦, 此所謂藉寇兵而齎盜糧者也, 夫物不産於秦,可寶者多,士不於秦,而願忠者衆,今逐客以資敵國,損 民以盆讎,內自虛而外樹怨於諸侯,求其國之無危,不可得也

한대에는 선진 산문을 계승하고 사회의 안정과 경제의 발전을 바탕으로 산문 또한 많은 발전을 했다. 한대 산문은 크게 정론산문. 역사산문. 철리산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론산문은 시정(時政)을 비판하고 국익과 민생에 관련된 문제 들을 토론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주요 작품에는 가의(賈誼)의 「과진론(論」, 환관(桓寬: BC73전후)의 『염철론(鹽鐵論)』등 이 있다.

「진나라의 잘못을 논하는 過秦論上]

...(전략)...... 또한 대저 진나라의 천하는 작거나 약하지 않았으며, 옹주의 땅과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그대로였다. 진섭의 지위는 제,,,,,,,,중산의 군주보다 높지 않았고, 호미와 창은 낫과 긴 창보다 날카롭지 않았으며, 수자리 서는 병사들은 9국의 군대에 대항하지 못했고, 신중하고 원대한 모책과 행군술,용병술은 지난날의 책사들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 데도 성패가 달라지고 공업이 상반된 것은 어쩐 일인가? 시험 삼아 산동의 6국으로 하여금 진섭과 더불어 그 장단과 대소를 헤아리게 하고 그 권력을 견주게 한다면, 같은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진은 자그마한 땅으로 만승의 권세를 이루어, 8주를 불러들여 항복을 받고 동렬에 있던 제후들을 조회하게 한지가 백년이 넘었으며, 그런 뒤에 천지사방을 한 집으로 만들고 효산과 함곡관을 궁전으로 삼았다. 그러나 진섭이라는 한 사내가 난을 일으킴에 따 라 7대의 묘당이 무너지고 몸은 남의 손에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쩐 일인가? 인의를 베풀지 아니하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前略)...且夫天下非小弱也.雍州之地之固,自若也.陳 之位,不尊於········中山之也棘, 不於鉤戟.長嚴也.謫戍之衆,不抗於九國之師也深謀遠慮,行軍用兵之道, 非及曩時之士也,然而成敗異變,功業相反,何也?試使山東之國,與陳涉 度長絜大,比權量力,則不可同年而語矣然秦以區區之地,致萬乘之權, 招八州而朝同列,百有餘年矣,然後以六合爲家,崤函,一夫作難,而 七廟墮,身死人手,爲天下笑者,何也?仁義施,而攻守之勢異也

역사 산문은 사실(史實)을 기록하고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묘사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주요 작품에는 사마천(司馬遷 BC145 ~BC86)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등이 있다. 사마천은 일찍이 천하의 명산대천을 주유했으며, 부친 사마담 (司馬談)을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는데, 흉노에게 사로잡힌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을 당하자, 발분하여 불후의 저작 『사기』를 지었다. 『사기』는 황제(黃帝 때부터 전한 무제 천한() 말까지 약 2600년 동안의 중국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로, 「본기(本紀) 12, 「세가 () 30, 「서」8, 「표) 10, 「열전(列傳) 70편으 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는 내용상 사상성이 풍부하고 고도의 언어예술을 발휘했으며 인물묘사가 뛰어나다. 『사기』는 후세 정사(正史)의 전범일 뿐만 아니라, 후세 전기문학의 선구가 되었으며, 역대 산문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소설을 비롯하 여 시··희곡 등 모든 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하여 문학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항우본기(本紀)

......(전략)...... 패공이 아침에 백여 기병을 이끌고 항왕을 만나러 와서 홍문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했다. “신이 장군과 함께 힘을 다하여 진을 공격했는데, 장군께서는 하북에서 싸우시고 신은 하남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먼 저 함곡관으로 들어가 진을 격파하고 여기에서 다시 장군을 뵙게 되었습니다. 지금 소인배의 말이 있어 장군과 신 사이에 틈이 생기게 했습니다." 항왕이 말했다. "그것은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말한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하여 이곳에 왔겠소?" 항왕이 그날로 패공을 머무르게 하여 함께 술을 마셨다. 항왕과 항백은 동쪽을 향하여 앉았고 아보는 남쪽을 향하여 앉았는데, 아보는 범증을 말한다. 패공은 북쪽을 향하여 앉았고 장량은 서쪽을 향하여 시립()했다. 범증이 여러 번 항왕에게 눈짓을 하며 차고 있던 패옥을 들어 세 번씩이나 표시를 했으나, 항왕은 묵묵히 응답하지 않았다. 범증이 일어나 나와서 항장을 불러 말했다. "군왕은 사람됨이 모질지 못하니, 자네가 들어가 앞으로 나아가서 헌수하고 헌수를 끝내면 칼춤을 추겠다고 청하여 그 자리에서 패공을 찔러 죽이도록 하게. 그렇지 않으면 자네들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일세." 항장이 곧 들어가 헌수하고 헌수를 끝내고 나서 말했다. "군왕께서 패공과 술을 마시는데 군중에 즐거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칼춤을 추고자 합니다." 항왕이 말했다. “좋다!" 항장이 칼을 빼들고 일어나 춤을 추자, 항백 역시 칼을 빼들고 일어 나 춤을 추면서 항상 몸으로 패공을 막아주는 바람에 항장은 찌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량이 군문에 이르러 번쾌를 만났는데, 번쾌가 말했다. "오늘의 일은 어찌되어 갑니까?" 장량이 말했다. "매우 위급하오! 지금 항장이 칼을 빼들고 춤을 추는데 그 의도는 패공을 찌르는 데 있소.” 번쾌가 말했다. "이 일은 급박하니 신이 들어가길 청하여 그와 함께 목숨을 같이 하겠소이다.” 번쾌가 즉시 칼을 차고 방패를 들고 군문으로 들어갔으나, 창을 든 호위병들이 막아 세우며 들여보내 주지 않자, 번쾌가 방패를 기울여 밀어붙였더니 호위병들이 땅으로 쓰러졌다. 번쾌는 마침내 들어가 휘장을 밀치고 서쪽을 향해 서서 눈을 부라리며 항왕을 노려보았는 데, 머리카락은 위로 솟구치고 눈은 찢어질 정도로 째려보았다. 항 왕은 칼을 집고 꿇어앉은 자세로 말했다. “객은 무얼 하는 자인가?" 장량이 말했다. "패공의 참승 번쾌라는 자입니다.” 항왕이 말했다. "장사로다! 술을 주도록 하라." 한 말 술을 주었더니, 번쾌가 감사의 절을 하며 일어나 선 채로 마셨다. 항왕이 말했다. “돼지 앞다리를 주도록 하라.” 생 돼지 다리 하나를 주었더니, 번쾌가 땅에 방패를 엎어놓고 그 위에 돼지 다리를 올려놓은 뒤 칼을 뽑아 썰어서 씹어 먹었다. 항왕이 말했다. "장사로다! 더 마실 수 있겠는가?" 번쾌가 말했다. “신은 죽음도 피하지 않는데 그까짓 술을 어찌 사양하리까? 대저 진왕에게는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이 있어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에게 형벌을 내려 천하가 모두 배반했습니다. 회왕이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길, '먼저 진을 격파하여 함양으로 입성하는 자가 천하를 차지하기로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패공은 먼저 진을 격파하고 함양으로 입성했지만 털끝만큼도 감히 가까이 한 것이 없으며 궁실을 봉쇄해 놓고 패상으로 군대를 철수하여 대왕께서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일부러 장수를 보내 함곡관을 지키게 한 것은 다른 도적의 출입과 비상사태를 방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애써 고생하고 공이 높은 것이 이와 같은데도 제후로 봉해지는 상은 받지 못했으며, 간사한 말을 듣고 공을 세운 사람을 죽이려 하시니, 이것은 망한 진의 계속일 따름입니다. 제가 생각건대 대왕께서 취하실 방도가 아닌 줄로 압니다." 항왕은 대답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앉아라!" 번쾌는 장량을 따라 앉았다. 잠시 앉아 있다가 패공이 일어나 측간을 가면서 번쾌를 불러 나오게 했다. ......(중략)...... 항왕의 군대가 해하에 주둔했는데 병사가 줄어들고 군량이 다 떨어 졌으며, 한군()과 제후의 군대가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밤에 들어보니 한군이 사방에서 모두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지라 항왕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한이 이미 초를 차지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인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항왕은 밤에 일어나 막사에서 술을 마셨다. ''라는 미인이 있어 늘 데리고 다니면서 총애했으며, ''라는 준마가 있어 늘 타고 다녔 다. 항왕은 슬픈 노래를 격정적으로 부르며 스스로 시를 지어 말했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하지만, 시절이 이롭 지 못하니 추가 나아가지 않네.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 할거나! 우야, 우야, 너를 어찌 할거나!" 몇 곡을 부르자 우미인이 화답했다. 항왕이 몇 줄기 눈물을 흘리자 좌우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쳐다보질 못했다. ......(후략)...............

......(前略)⋯⋯⋯沛公旦日從百騎,來見項, 至澳門,: "臣與將軍 戮力而攻秦,將軍戰河北,臣戰河南,然不自意能先入關破秦,得復見將軍 於此,今者有小人之言,令將軍與臣有。”項曰:“此公左司馬曹無傷言 之,不然,籍何以至此?”項王日因留公與項王·項伯東嚮坐,亞父 南嚮坐,亞父者,范增也,沛公北嚮坐,張良西嚮侍,范增數目項王, 擧所佩 玉玦以示之者三,項王默然不應范增起出,召項莊謂曰:“君王爲人不忍, 若入前爲壽, 壽畢, 請以劍舞,因擊沛公於坐殺之,不者,若屬皆且所虜” 莊則入爲壽,壽畢,:“君王與公,軍中無以,請以劍舞項王曰: “.”項莊拔劍起舞,項伯亦拔劍起舞,常以身翼蔽沛公,莊不得擊,於是張 良至軍門,見樊噲,樊噲曰:“今日之事何如?”良曰:“甚急!今者項莊拔劍 舞,其意常在沛公也.”噲曰:“此迫矣,臣請入,與之同命。噲卽帶劍擁盾入 軍門,交戟之衛士,欲止不內,樊噲側其盾以撞,衛士仆地,噲渗入,披惟西 嚮立,瞋目視項王,頭髮上指,目眦盡裂,項王按歛而:“客何爲者?”張 良曰: “沛公之乘樊噲者也。”項王曰:“壯士!賜之卮酒”則與斗卮酒,噲 拜謝,,立而,項王曰:“賜之彘肩”則與一生彘肩,樊噲覆其於地, 加彘肩上,拔劍切而唱之,項王曰:“壯士!能復?”樊噲曰:“臣死且不 避,卮酒安足辭?夫秦王有虎狼之心,殺人如不能擧,刑人如恐不勝,天下 皆叛之,懷王與諸將約曰:“先破秦入咸陽者王之今沛公先破秦入咸陽,毫 毛不敢有所近,封閉宮室,還軍霸上,以待大王來,故遣將守關者,備他盜 出入與非常也,勞苦而功高如此,未有封侯之賞,而聽細說,欲誅有功之人 此亡秦之續耳,大王不取也。”項王未有以應,:“樊噲從良坐,坐 須臾,沛公起如厠,因招樊噲出......(中略)......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夜聞漢軍四面皆楚歌, 項王乃大驚曰:“漢皆已得楚乎?是何楚人之多也!”項王則夜起,帳中,有 美人名虞,常幸從,駿馬名,常騎之,於是項王乃悲歌慨,詩曰: “力拔山兮氣蓋世,不利兮騅不逝騅不逝兮可奈何,虞兮虞兮奈若何!” 歌數闋,美人和之,項王泣數行下,左右皆泣,莫能仰視.....(後略)............ [「史記』]

반고는 『사기』와 쌍벽을 이루는 『한서』를 지었다. 『한서』는 한 고조 원년(BC206)부터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4(23)까지 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 최초의 단대사(斷代史)로서, 「제기(帝紀) 12, 「표」 8, 「지() 10, 「열전」 7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와 비교해 보면, 『한서』는 『사기』의 「세가」를 없애고 「서」를 「지」로 바꾸었는데, 특히 유흠(劉歆)의 『칠략(七略)』을 근거로 한 「예문지(藝文志)」는 매우 중요한 고대 문헌자료이다. 또한 『사기』는 문장이 질박하고 기세가 강한 반면에, 『한서』는 전아하 고 대구가 많은 정련된 문장이다. 철리산문은 학술을 연구하고 인생철학 및 사회의 각종 근본 문제를 탐구하는 것을 위주로 했다. 주요 작품에는 회남왕(淮南) 유안 (劉安: BC178?~BC122)의 『회남자(淮南子), 양웅(揚雄: BC53~ AD18)의 『태현경(), 왕충(: 27~100?)의 『논형(論衡)』 등이 있다. 왕충의 『논형』은 논리가 정연하고 표현이 생동감 넘치는데, 여 기에는 저술에 종사하는 문유()를 존중하고, 지나친 수식[] 을 반대하고 내용[]을 중시하며, 과장된 표현을 지양하고 간결 한 문장을 추구하고, 귀고천금(貴賤)의 풍조에 반대하는 등 주목할 만한 문학이론이 들어 있다. 한대의 산문은 중국 정통 문단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여 역대 고문가들은 모두 한대 산문을 최고의 표준으로 삼았다. 특히 명 대의 전후칠자(前後) "문장은 반드시 진, 한이라야 한다(文必秦漢)”고 하면서 극히 추앙했다.

 

중국문학의 향기: 중국문학 장르별 이해

김장환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