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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_115

In 1593, as the Japanese naval frontline became stationary, Admiral Yi Sun-shin managed to blockade the sea routes, significantly diminishing the Japanese military's ability to sustain their war efforts. The Japanese forces gradually regrouped and amassed a formidable fleet of around 900 ships in the South Sea. In response, Yi Sun-shin opted for a strategy of blockading the Kyong Nyeong strait, effectively preventing the Japanese from provoking any engagements and turning the tide in his favor. Recognizing the importance of defense, Yi Sun-shin meticulously guarded the Japanese movements in the Kyong Nyeong strait, using Hansan Island as his base and adopting a defensive strategy.

견내량봉쇄작전

1. 적의 눈동자를 보면서 지켜라

1593년 이른 봄, 전선은 남하하고 있었다. 명나라 이여송의 4만 군 사가 조선 전쟁에 개입했다. 일본군 역시 나름대로 버티기 힘든 상황 이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엄청난 병력 손실이 있었다. 조선의 혹독한 추위와 전염병, 명나라 군의 개입과 조선 의병의 활약으로 그 들은 애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무엇보다 전선이 고착화되고 마침내 일본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 던 가장 큰 이유는 이순신 함대의 남해와 서해 봉쇄였다. 바다를 통한 원활한 보급이 끊기면서 일본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급격히 떨어졌던 것이다.

 

적은 더 늘어나고

1593 4 30, 전쟁이 발발한 지 꼭 일년 만에 조·명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기나긴 일 년이었다. 고작 전란 일 년 만에 조선은 건국 200년 동안보다 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참화 였다. 그 비극 속에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도 감지되었다. 그동안 견고하 게 유지되어오던 신분제의 동요와 백성들의 인식 변화 등은 그래도 긍정적이었다고 나중에 역사학자들이 평가하고 있다. 어쨌거나 전선은 남하하고 있었고 명나라와 일본은 끊임없이 강화 를 모색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국내 정치 상황이 매우 어려웠고 일본 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전쟁보다 강화 쪽에 기운 명 나라의 속셈은 한양을 탈환한 이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조선군이 남 하하는 일본군을 뒤쫓으려 하자 명나라 지휘부는 한강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시간을 벌게 된 일본군은 남하를 서둘렀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 해안에 일본군이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움직임 을 예의주시했다. 명나라 군이 개입했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이 전란을 끝낼 수 없다는 것도 감지하고 있었다. 명나라 군은 4만 대군이라고 하 지만 절반 정도는 노약자로서 전투력이 형편없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반면 일본군의 움직임은 이순신을 불안하게 했다. 당시 이순신은 일본군이 이 땅에서 완전히 철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첩보들이 보고되었다. 적선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였다. 당시 파악된 적선의 숫자는 대략 900여 척, 임진왜 란 초기보다 훨씬 늘어났으며 그동안 이순신이 수백 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는데도 오히려 적선은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900여 척의 전선을 진해 앞바다를 중심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 본 육군 역시 창원 진해 부산 등지에서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 둔지에 성을 쌓았다. 그것은 절대로 이 땅에서 그냥 물러나지 않겠다 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순신은 육군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현재의 적은 전력 손실이 많은 상태, 지금이라도 육군이 적의 배후를 치고 자신이 바다에서 저 들을 맞는다면 전세를 획기적으로 역전시킬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육군에 기대를 걸기에는 조·명 연합군의 전력이 충분치 않았다. 지 난해 진주성을 지켜내고 올해 초에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룬 육군이 지만 아직도 적을 몰아낼 전력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이순신은 오랫동안 해도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적선은 900여 척,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포구를 찾아다니 며 저들을 격침시켜야 할까? 아니면 부산해전처럼 전면전에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인가? 어느 것도 명쾌하지 않았다. 갈수록 싸움은 어려워졌다. 아군의 강점을 잘 알게 된 적은 아예 싸 움을 피하기만 했다. 포구 깊숙이 배를 정박시켜놓고 산 위에 진지를 구축했다. 조총뿐만 아니라 조선 총통까지 노획하여 조선 판옥선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적선은 깨뜨려도 깨뜨려도 오히려 늘어만 가 는 상황, 무엇보다 강력한 육군과의 합동작전이 불가능한 이 상황에 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무엇이 최선인가. 그동안 수집한 첩보를 분 석하며 며칠을 고심하던 이순신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연합함대에 출전 명령을 내렸다.

 

바다 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다

1593 5 7, 이순신 함대는 다시 여수에서 출항했다. 여수를 지 나 남해도와 사천 앞바다를 지나면서 이순신은 감회에 젖었다. 지난 일 년이 마치 꿈속처럼 흘러갔다. 옥포에서 부산해전을 지나 안골포 용천에 이르기까지, 숱한 해전을 치르면서 단 하루도 다리를 뻗고 편 히 잠든 날이 없었다. 항진하는 동안 바라본 바다와 산마루들이 이제 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이순신은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수차례 경상우 병사 김성일과 체찰사 유성룡, 그리고 전라순찰사 권율 등에게 육군 이 부산을 공격해주도록 요청했다. 확답은 없었으나 조선 육군이 퇴 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순신은 여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지금 함대를 출전시킨 것이다. 어느새 조 선 연합함대도 판옥선만도 100여 척으로 늘어나 있었다. 전투 중에도 끊임없이 판옥선을 건조한 결과였다. 여수를 출발한 지 사흘째, 이순신은 한산 앞바다, 견내량이 바라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지난해 한산대첩을 이룬 바로 그 바다였다. 이순 신은 함대를 정박시키고 육로와 해로로 첩보를 띄웠다. 이순신은 다 시 확인할 수 있었다. 진해를 중심으로 적의 전선 900여 척 배치, 그리 고 창원에 일본 육군 정예군의 집결! 결국 평양과 함경도 북단까지 늘 어났던 전선이 축소되면서 적의 전력이 남해안에 밀도 있게 배치된 것이다. 이순신은 싸늘한 냉기를 느꼈다. 멀리 조선 조정과 명나라 본토를 치지 못한 적들이 상대로 삼을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조선 수군이자 자신이 아닌가? 일본 육군 정예군과 900여 척의 일본 수군이 지금 자 신과 조선 수군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넘어 다시 한 번 북상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더 절망적인 소식도 전해졌다. 일본군을 쫓아 남 하하던 조선 육군이 의령과 함안에서 군사를 돌렸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은 창원에 주둔한 적의 주력군과 접전을 벌이지도 않은 채 돌아 가버렸다. "싸웁시다. 지금 곳곳에 적선이 정박하고 있다지 않소이까?" 전투를 주장하는 장수들도 있었다. 벌써 며칠째 이순신은 한산도를 중심으로 함대를 정박시켜놓은 채 척후선만 운용하고 있었다. 어쩌다 가 견내량을 지나 거제 북단까지 전체 함대를 항진시킬 뿐이었다. 일 종의 무력 해상 시위였다. 그러나 그것뿐 정작 전투는 실행하지 않고 있었다. "장군, 무엇이 두렵소이까? 우리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조선 수 군이외다! 이러다가 군졸들의 사기까지 떨어질까 걱정이외다! 칩시 다. 당장!" 이순신은 그런 장수들에게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적은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명나라와 강화 협상을 하고 있다지만 그것 은 언제 깨질지 모를 일, 적은 여전히 남해를 지나 서해로 진출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유인하고 있다. 진해 웅천 안골포 거제 곳곳에 함대를 정박시킨 채 우리가 어느 포구든 깊숙이 들어가 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여느 때처럼 특정한 포구를 향해 공격 하면 저들은 일시에 900여 척의 전선을 동원, 우리를 포위 공격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창원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육군 주력 부대 역시 언제든지 전투에 합세할 것이다. 그렇다면 승산이 있는가? 범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줄 알면서 그 글로 기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순신의 설명에 전투를 주장하던 장수들도 할 말을 잃었다.

 

견내량을 봉쇄하라

그럴 즈음, 급보가 전해졌다. 수많은 적선이 견내량 북단에 집결하 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자 적이 먼저 움직인 것 이다. 이순신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유인하려던 적이 참지 못하고 먼저 나오는가?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되겠지. 어디서 싸울 것인가? 이번에도 역시 적은 견내량을 통해 올 것이고 그렇다면 지난 해처럼 이곳 한산 앞바다인가? 아니다. 적은 이미 이곳에서 참패한 경 힘이 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패배를 당할 저들이 아니지 않은가. 지 난해처럼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대규모 적함과 맞서려면 역시 좁은 물길이 유리할 것이다. 그렇다 면 이번에는 견내량을 내어주면 안 된다. 지난 한산대첩 때는 적을 유 인하기 위해 견내량을 내주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견내량을 막아야 한다! 전진 배치! 이순신은 전 함대를 견내량을 통과하여 견내 량 북단에 배치시켰다. 싸운다면 여기서 맞서 싸우리라! 좁은 물길에 서 맞서리라! 그런데 왜 적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이 순신에게 다시 전해진 급보, 그것은 진주성 함락 소식이었다! 진주성 이 어떤 곳이던가? 지난해 10월 일본군은 진주성에서 치욕적인 패배 를 당했다. 김시민과 진주성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수만의 희생자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진출이 막혀 전황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던 곳이었다. 남하한 일본 육군은 지난해 임진년 패배를 설욕하기 위 해 진주성 공격을 감행, 함락시킨 후 성 안의 모든 조선인을 무차별 학 살했던 것이다. 당시 진주성의 7만 조선인 민관군은 모조리 죽임을 당 했으며 의기 논개도 이때 순국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진주성을 교두보로 삼은 적은 이제 바닷길 을 열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막아야 한다. 당장의 전투로 적선 몇 척을 깨뜨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막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 바닷길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진주성 이 무너지고 육로가 뚫린 이상 여수 본영도 위험할 터였다. 그렇다면 바로 이곳, 견내량, 견내량을 지켜내야 한다. "견내량을 봉쇄할 것이니라!" 이순신은 전 함대에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견내 량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100여 척의 판옥선에 첨자진 진형을 명령했다. 그러고는 견내량 북 단을 틀어막았다. 일본군 전선 몇 척이 저 멀리서 부산하게 움직였다. 저들은 지금 고무되어 있을 것이다. 진주성을 무너뜨린 육군에 뒤지 지 않기 위해서라도 도발해 올지 모른다. 만약 저들이 도발해 온다면 또다시 지난해 한산해전처럼 명운을 건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이순 신은 즉시 인근 산에 신호망을 설치했다. 고성 벽방산, 한산도 고등 산, 통영 미륵산 등 진해와 가덕도 앞바다를 살필 수 있는 지형에 봉화 대를 설치했다. 적의 움직임을 한눈에 감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본대를 바다 가운데 정박시키고 몇몇 함대를 꾸려 견내량 주변 포구를 수색하게 했다. 최대한 함대를 활발하게 운용했다. 지키 는 것도 그냥 서서 지킨다면 적이 아군을 가벼이 볼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언제든지 선제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것처럼 함대를 운용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끼니때마다 밥 짓는 연기를 최대한 피워 올렸다. 교대로 육지나 섬으로 올라가 훈련도 했다. 함대를 이용 한 해상 진법 훈련도 실시했다. 깃발 신호와 나발 신호에 따라 전 함대 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첨자진에서 일자진으로, 돌격 대형에서 항진 대형으로! 수십 척의 배가 좁은 바다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 습은 빠르고 정확했다. 몇 번씩 척후선을 띄우던 일본군은 끝내 정면 승부를 걸어오지 않 았다. 이순신의 방어 태세가 워낙 견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견 내량을 봉쇄하던 이순신은 또 다른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여수의 전 라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는 것이었다. 막아야 할 적과 가장 가 까운 곳에 본영을 설치하려 했다. 그것은 일본군 육군의 예봉을 피하 는 것과 동시에 견내량 봉쇄의 의지를 적에게 과시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의 이러한 결단은 조정에서도 받아들여져 곧 한산도로 삼도 수군통제영을 옮기게 된다. 이보다 약간 먼저 마침내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에서 정2품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명실상부 조선국 해군 총 사령관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견제해오던 원균도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이제는 이순신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지휘권의 통일, 그것은 이순신이 오랫동안 바라오던 것이었다. 통 제사로서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하게 된 이순신은 이후 한산도에서 견내량 바다를 4년여 동안 굳건히 지킨다. 견내량은 일본군과 조선 군의 군사 분계선이 되었다.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곳을 끝끝내 지켜냈던 것이다. 지키는 것도 이기는 것이기에........

 

2. 1선에서 지켜라

지키는 자는 외롭다

 

水國秋光暮

驚寒雁陳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한바다에 가을 햇살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진중 높이 떴구나

근심 가득 잠 못 이뤄 뒤척이는 밤

새벽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

 

<한산도 야음>이라는 이순신의 한시이다. 잘 알려진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와 더불어 한산도 시절에 지은 시가 아닐까 싶다. 나라 의 운명을 짊어진 장수의 시라 하기에는 너무나 서정적인 시구들, 그 러나 견내량을 틀어막고 한산도를 지키던 장군을 생각하면 눈시울 붉 어지는 시이다. 임진왜란 7년을 통해 그 누가 이토록 절실한 우국시를 남겼던가, 적을 눈앞에 두고 노심초사해야 했던, 외로웠던 한 인간의 고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랬다. 이순신은 견내량에서 초조했고 한산도에서 외로웠다. 이순 신이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견내량을 틀어막자 일본군은 함부로 움직 이지 못했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바로 눈앞인 진해 앞바다에 900여 척, 그리고 부산에 많게는 2,000여 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감히 견내량을 넘보지 못했다. 한 번도 그들은 정면 승부를 걸어오지 못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순신의 가장 큰 전략적 목표는 견내량을 지키는 것이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공격과 방어로 이루어진다. 공격을 잘해서 이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방어 전략이 뛰어나 적을 물리친 경우도 많다. 대체로 전쟁은 전력이 강한 쪽이 '공격 앞으로! 하여 전력이 약한 적 을 몰아붙이는 형태였다. 따라서 공격하는 쪽이 이기는 경우가 많았 다. 왜냐하면 이길 만하니까 공격했으므로, 또한 공격받는 쪽에서는 방어에 대한 개념과 전략이 정립되지 못해 맞서 싸우라! 하다가 필 연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이후 차츰 방어 개념이 생기고 방어의 중요 성이 인식되면서 성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성은 견고한 방어선이었 다. 이후 전쟁은 창과 방패의 대결로 바뀌었다. 성이 견고해질수록 성 을 공격하는 무기와 전술이 발달했다. 성을 공격하는 무기와 전술이 발달할수록 성을 지키는 전술 또한 발달했다.

 

이기려거든 방어하라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방어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 다. 1차 대전 당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 방어전이 공격전보다 훨씬 각광받기 시작했다. 전쟁 수행자들은 공격보다 방어가 훨씬 쉽고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공격 전술이 사람들 의 주목을 끌었다. 공격이 훨씬 화려하고 공격으로 얻는 이득이 많았 던 탓이다. 공격의 성공은 곧 정복으로 이어졌으며 전리품은 수많은 장군과 군사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차츰 세계가 안정되고 각 나라마 다 군사적 체계를 갖추어가면서 공격에 드는 비용이 예상 외로 많아 졌다. 이제 전쟁에서도 방어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적의 주력 공격군 을 효과적으로 방어한 후 역공을 가하는 것이 훨씬 비용도 적게 들고 효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수많은 전투에서 얻은 교훈 이었다. 진지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적을 기다린 쪽이 항상 우세했다.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는 적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견고한 방어 체계는 새로운 공격 무기의 출현을 불렀다. 적의 견고한 지상 진지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항공기 개발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긴 가장 유명한 방어 시스템이 바로 프랑스의 마지 노선이었다. 1차 대전 이후 프랑스 육군 장관 A.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마지노선은 총 길이만도 750킬로미터에 이르는 방어선이었다. 마지노선은 지하에 각종 전투 시설물과 토치카를 구축하여 서로 연결 한 현대판 만리장성이었다. 이 마지노선은 벨기에 북서부 국경에서 독 일과 프랑스의 전 국경을 지나 스위스까지 연결되는 난공불락의 요새 선이었다. 1936 10년의 공사 끝에 마지노선이 완공되자 어느 누구 도, 어떤 공격을 하더라도 이 방어선은 뚫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노선도 2차 대전 때 독일 기갑 부대에 의해 붕괴되었다. 전쟁이든 전투든 방어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아군의 전력이 상대 적으로 약할 경우 방어는 최후의 수단이 된다. 전쟁은 철저히 수학 논리가 적용된다. 적선 5척을 깨뜨리면 조선 판 옥선 1척도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산술적으로 적선 500척을 격 침시키면 조선 수군의 전력은 바닥이 난다. 그렇다면 남은 400여 척의 적선과 적의 예비전함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바다를 통해 북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선제공격 대신 견내량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순신이 지킨 자리인 것이다. 왜 하필 견내량이었을까? 비록 견내량이 좁은 물길이라 하더 라도 거제 바깥 바다를 돌아오는 적에게 배후를 허용할 우려도 있는 곳이었다. 또한 전라도로부터 군수 식량 등 보급이 비교적 쉬운 남해 나 순천, 여수 앞바다를 봉쇄선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 이순신은 견내량을 선택했다. 왜였을까? 견내량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적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려고 했 다. 바로 '1'에서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삼도수군통제영도 여수 가 아니라 한산도에 설치했던 것이다.

 

최전선에서 지켜라

누구든지 무언가 지켜야 할 때가 있다. 굳이 전투가 아니더라도 살 아가면서 지켜야 할 때가 있다. 기업가라면 현상 유지를 해야 할 때가 있고, 강력한 경쟁 상대가 있을 때 그의 도전에 자신을 지켜내야 할 때 가 있다. 혹은 닥쳐오는 고난을 견뎌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때 어디서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지키려면 최전방, 1선에서 지켜야 한다. 축구에서도 상대의 공격은 포드진, 즉 아군의 공격 라인에서부터 차단하라지 않는가. 유능한 권투선수는 아무리 수세에 몰려도 뒷걸음 질치지 않는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상대의 예봉을 피하며 반격의 기 회를 노린다. 상대의 주먹 바로 앞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만약 무엇 을 지켜야 한다면 상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야 한다. 더욱 안전 하게 지키겠다고 한번 뒷걸음질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된다. 한 번 실패할 수도 있다. 실패를 거듭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물러나서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 러다 보면 슬럼프에 빠져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 던 일이 너무 힘들어 잠시 쉬어야 할 때, 그때를 지키는 시기라고 한다. 면 그때도 일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마라. 하던 일을 정말로 포기하게 되었다면 빨리 대안을 찾아라! 이미 실패한 일에 연연해하지 말고 다 른 일을 찾고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대안을 마련하라. 그것이 자신을 최전선, 1선에서 지키는 길이다. 실패 앞에서 두려움 없이 꿋꿋하게 버틸 때 언젠가는 실패를 극복 할 수 있다. 한두 걸음만 뒤로 물러나도 다음부터는 실패가 우습게 볼 것이다. 이제 꼼짝없이 실패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순신이 4년 반 동안이나 일본군을 남해 동쪽 바다에 꽁꽁 묶어둘 수 있었던 원인, 그 것은 바로 제1선에서 지켰기 때문이다. 워낙 강경하게 나오는 이순신 에게 적은 감히 대들지 못했던 것이다. 실패와 좌절, 바로 그 코앞에 지켜 선다면 그쪽에서 먼저 질릴 것이다. 실패했는가? 좌절의 황량한 들판을 헤매고 있는가? 그렇다면 실패 쪽으로 더 접근하라! 좌절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라! 그리고 거기 서 지켜라! 좌절과 실패를 우습게 보면서 버티고 서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2차 당항포 및 진해해전

[적을 격리시켜라]

견내량의 대치는 팽팽했으나 그 겨울을 큰 전투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돌아왔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지 만 2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초의 야심대로라면 조선은 이 미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전황은 길어지고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1594 3 3, 고성 당항포에 21척의 일본군 함대가 있다는 보고가 접수 되었다. 이순신의 견내량 봉쇄작전으로 발이 묶였던 일본군은 봄이 되자 서 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견내량 주변에 소규 모 부대를 투입, 조선 수군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물론 일본군의 약탈 행위도 끊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상당 기 간 일본군의 이런 탐색전을 내버려두었다. 대여섯 척씩 나타나는 적선을 분쇄하기 위해 함대를 움직이는 것은 전력 손실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이순신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일본군은 마침내 3월 초, 대규모 함대 를 움직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드디어 출동 명령을 내렸다. 3 3일 심야였다. 어둠을 틈타, 이순신 함대는 일본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견내량을 통과했다. 3 4일 새 벽, 이순신은 20척의 판옥선으로 견내량 북단 입구를 봉쇄하도록 했다. 한 산도가 텅 빈 것을 안 일본군이 견내량을 통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31척으로 당항포 공격 함대를 꾸린 후 이순신 자신은 거제 북단으로 이동, 지금의 부산과 진해 등의 일본군이 당항포 적을 지원할 수 없도록 바다를 봉 쇄해버렸다. 그런 다음 어영담이 이끄는 당항포 공격 함대를 진격시켰다. 어 영담 부대는 진해(지금의 마산시 진동면) 앞바다에서 6척의 적선을 분쇄한 후 어선포 시구질포 등에서 각각 2척의 적선을 불태웠다. 그리고 완전히 고립된 당항포의 적을 향해 진격해 나갔다. 배후는 이순신의 주력군이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3 4일 자정 무렵, 노장 어영담의 특별 공격 함대는 당항포에 주둔하고 있 던 일본 전선 21척을 모조리 격침시켰다. 2차 당항포해전이었다. 이틀에 걸쳐 치러진 제2차 당항포와 진해해전, 이순신은 소규모 적의 준동 을 내버려두었다. 그리하여 적의 규모가 커지자 공격을 결정했다. 그것도 철 저히 적의 후방을 봉쇄, 도주나 지원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다. 봉쇄와 격리, 진해와 제2차 당항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