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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_113

The Battle of Busan was noteworthy for Admiral Yi Sun-sin's decision to engage in all-out warfare by attacking the Japanese stronghold at Busan. This battle was a challenge for the Joseon navy, with only 80 ships facing off against a Japanese fleet of 500. Despite the odds, Yi Sun-sin managed to inflict significant damage on the Japanese supply lines and front lines. Winning the all-out warfare, Yi Sun-sin broke the morale of the Japanese forces and shifted the momentum of the war. His victories also led to the intervention of the Ming dynasty, which further weakened the Japanese army.

                                   [작은 싸움만으로는 부족하며 모든 싸움은 전면전을 위한 것이다]

 

부산해전

1. 전면전 없는 승리란 없다

가을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5개월, 그 짧은 기간에 조선 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새로 나라를 세운 지 꼭 200년째 되는 해 터진 전란, 준비 없이 당한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백성들이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고향을 등지고 그리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다. 농사는 이미 작 파한 상태! 이대로라면 올 겨울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전황은 더욱 어려워져가고 전선은 고착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평양성에 주둔하고 조선은 의주 에서 피난 조정을 꾸리고 있었다. 임금은 여차하면 압록강 건너 명나라로 넘어갈 심산이었다. 명나라로서는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조 선왕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뒤로 수십만 일본 대군을 달고 들어올 것이기에 가능하면 조선 왕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조선의 조정에서는 명나라 구원병 문제로 오래 도록 애를 태웠다. 처음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합세하여 명을 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오랜 전쟁의 역사를 가진 그들의 의심 많은 속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명나라 구원병 1,000여 명이 왔 다가 평양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가 버렸다. 일본군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더 이상 조선 정부를 쫓다가는 명나라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일본이 이긴다는 보장 이 없었다. 무엇보다 바다를 장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감이 이들 을 평양성에 묶어놓았다. 한편 이순신도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기상천외한 함대 시위 로 일본 해군을 부산에 묶어두기는 했으나 문제는 일본 육군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버려두었던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1차 금산전투에서 의병장 고경명이 전사했으며 2차 금산전투에서도 조헌을 비롯한 1,500여 조선 의승병들이 전멸, 일본군은 전주를 차지했다. 이순신은 이것이 가장 불안했다. 전주의 일본 육군이 여수의 전라 좌수영을 향해 진격해 온다면? 육군의 진격과 발맞추어 부산에 아직 도 남아 있는 적의 대규모 해군이 합세, 수륙합동작전으로 여수의 전 라좌수영 본영을 공격해 온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조선 수 군은 일본 육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바다에서는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지만 일본 육군은 이미 100년에 걸친 통일전쟁으로 실전 경험을 쌓을 만큼 쌓은 정예 군사들, 그들의 칼날을 어찌 조선 수군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운명을 건 전면전이다

한산도와 안골포해전 이후 이순신은 판옥선을 더 건조하고 신병들 을 모집, 수군의 전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수륙양공 에 충분히 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할 묘수가 필요했 다. 이순신은 고심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심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결단이었다. "부산포를 칠 것이오!" 이순신은 마침내 결심했다. 휘하 장수들 중 일부가 펄쩍 뛰었다. 부 산은 바로 왜적의 본거지가 아니던가. 그곳은 수만 명의 일본군과 500 여 척의 일본 함대가 집결해 있는 명실상부 일본군의 심장부였다. 그 런데 조선 판옥선은 삼도 수군이 연합해봐야 고작 80여 척! 이순신은 80 500의 싸움을 하려는 것이다. 이 전면전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조선 수군이 지는 날이면 조선 수군뿐만 아니라 조선이라 는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었다. 불리한 면은 또 있었다. 여수에서 부산까지는 먼 길이었다. 그 먼항 해 끝에 지친 군사와 격군들이 제대로 전투를 치를 수 있을 것인가. 그 리고 부산으로 가는 도중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산의 일본군은 충분히 전력 을 가다듬고 조선군은 전력이 약해질 것이 뻔했다. 조선 수군이 부산 을 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조선 육군과 합동으로 부산을 치는 것이었다. 육군이 육지의 적을 바다로 내몰아준다면 수군으로서도 해볼 만한 싸움이다. 육군의 도움 없이 조선 수군만의 단독 작전으 로 부산을 장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부산 공격이라는 전면전을 내세운 것이다. “그렇소, 이건 전면전이 될 것이오. 양측의 명운이 걸린 전투가 될 것이오. 그러나 전면전 없는 승리는 있을 수 없소. 만약 우리가 부산을 쳐서 적의 보급망과 본거지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다면 적은 더 이상 전선을 확대하지 못할 것이며 지금 전주에서 우리 배후를 위협하는 적 의 육군도 함부로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부산을 칩시다! 이 전면전에서 꼭 이깁시다. 이겨서 이 전란을 하루빨리 끝장냅시다.” 반대하던 장수들도 이순신의 논리에 설득되었다. 드디어 부산을 향 해 기나긴 출정이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연안 해역을 철저히 수색하 며 부산으로 접근했다. 이미 부산에도 대규모 조선 함대가 쳐들어온 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산도 패전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조선 수군을 만나면 맞서 싸우지 말고 피하 라는 엄명이었다. 일본군은 이 명령에 충실했다. 그들은 부산을 중심으로 500여 척의 전선을 배치한 채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일본 군의 태도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포구에 밀집 대형으로 정박해 있는 적의 본거지, 그곳을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공격한다면 적에게 심대 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저항을 넘어 적의 심장부로!

그날은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었다. 이순신 함대가 부산 근처의 가덕도에서 숙영을 한 후 부산을 치기로 한 그날 1592 9 1, 폭풍 이 불었다. 장수들은 이 바람에 배를 띄우고 전투를 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했다. 일부는 배를 돌려 귀환했다가 다음 기회에 다시 부 산을 치자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호했다. 전면전을 준비했다가 등을 돌리면 적의 사기만 높여줄 것이며 또한 적이 배후를 치지 않는 다는 보장이 없다는 논리였다. 오히려 폭풍이 적선을 포구에 꽁꽁 묶어둘 거라며 이순신은 전면전 감행을 주장했다. 이순신은 출전 명령을 내렸다. 가덕도를 출발, 부산 방면으로 항진 해 나갔다. 몰운대 앞을 지날 때는 역풍과 높은 파도로 항진이 지체되 었다. 일본군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소규모 전초 부 대를 내세워 조선 함대의 예봉을 꺾으려 했다. 몰운대 지나 화준구말 앞에서 적의 제1전초대 5척을 만나 격파했다. 이후 다대포 8, 두송 말 앞바다 9척 등의 제2, 3의 일본군 전초부대를 격파했다. 이제 조선군 연합 함대는 거칠 것 없이 부산포를 향해 나아갔다. 드 디어 부산포 입구인 절영도(지금의 영도)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여기에 도 방어벽을 치고 있었다. 대선 4척을 동원하여 좁은 물목을 막고 있 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주력군은 부산포 깊숙이 정박시켜놓았다. 당 시 부산포 일본 전선은 약 500여 척, 이들도 조선 수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나름의 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총통이었다. 일본군은 조선 육군으로부터 노획한 총통을 부 산포 언덕에 설치, 조선 함대를 포격할 준비를 갖춘 것이었다. 지금까 지 일본군은 해전에서 조총과 활로만 대적했기에 조선 수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조선이 만든 총통으로 조선 함대를 공격하 려는 것이었다. 그들도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그동안은 배가 견고하 지 못해 총통을 함재하지 못했다. 그랬던 것을 이제는 육지에 총통을 설치, 조선 판옥선을 포격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초량목 좁은 물목의 일본 결사대 4, 그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자 신들이 본대 500척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이순신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덕도를 출발한 후 역풍과 적의 전초대에 막혀 예상보다 항해 시간이 길어졌던 것이다. "거북선을 선두에 세워라!"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두 척의 거북선이 함대의 전면으로 나갔다. 두 척의 거북선은 순식간에 네 척의 일본군 대선을 격침시켜버렸다. 이것을 본 조선 수군 진영에서는 함성이 올랐다.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드디어 부산 포구 앞바다! 이순신은 빼곡하게 정박해 있는 적선을 바라보았다. 저들이었다. 수십만 대군을 싣고 바다를 건너와 이 땅을 전쟁의 참화에 빠지게 한 저들, 그 주력군이 부산 포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들만 격파한다면 이 전쟁의 물길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일본군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포구와 그 주변 의 언덕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배를 포기하면서까지 조선 수군에게 타 격을 입히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저들을 어찌 할 것인가. 어차피 우 리는 수군, 상륙전은 감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선은 적의 보 급선이자 전함인 적선을 최대한 깨뜨려 일본과 조선을 오가는 왜적의 발을 묶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남해와 서해 바다를 넘보지 못하도 록 심대한 타격을 입혀야 한다. "장사진을 펼쳐라!" 장사진(長蛇陳)은 글자 그대로 함대를 긴 뱀처럼 세우는 것이었다. 앞선 전선의 꼬리를 물고 따라가는 진법으로 좁은 해협을 통과할 때 주로 사용하는 진법이었다. 항진할 때는 일렬 종대, 포격을 할 때는 일 렬 횡대의 형태가 되었다. “적은 총통으로 무장했다. 전선 사이 간격을 넓혀라! 그리고 모든 전선은 이동하면서 포격을 해야 할 것이니라!" 이순신의 명령대로 80여 척의 판옥선이 일렬 횡대로 정렬했다. 그 리고 사거리를 유지하면서 부산 포구의 오른쪽으로 천천히 접근해들 어갔다. 크게 원을 그리면서 길게 따라 들어가는 조선 함대! 마침내 적 선이 사거리 안에 들어왔다. "방포하라!" 이순신의 명령에 의해 조선 함대가 포격을 시작했다. 전함대가 부산포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가며 연이어 포격을 가했다. 앞선 배가 지나가면서 포격을 하면 뒤따라가는 배가 연속으로 포격했다. 그리고 포격을 마친 배는 다시 함대의 맨 뒤에 정렬, 다음 포격을 감행 했다. 80여 척의 판옥선이 마치 수레바퀴가 돌듯 돌아가며 부산포의 500여 일본 배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일본군들도 응사해 왔다. 높은 언덕에서 쏘는 조선 총통은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조선군으로부터 노회한 총통을 조선 포로들을 시켜 발포했다. 조선 판옥선 몇 척이 포 격에 맞아 파손되기도 했다. 하갑판에 구멍이 뚫려 물이 새면 격군들이 재빨리 판자를 대고 막았다. 이렇게 응급조치를 해가며 기나긴 포격전이 진행되었다. 동시에 두 척의 거북선은 그대로 돌격을 감행, 배 위에서 저항이 거의 없는 적선을 마구 격침시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전선이 당하는 모습을 본 일본군들의 저항도 거셌다. 그들도 끊임없이 포격을 감행 했다. 그러나 명중률은 극히 떨어졌다. 조선 함대는 이동하면서 밀집 해 있는 적선을 향해 포격을 하는 반면 일본군은 배끼리 간격을 유지 한채 빠르게 움직이는 조선 전선을 향해 포격을 했기 때문이다. 부산 앞바다는 순식간에 포연과 포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조선 수 군들은 가라앉기 시작하는 일본 배에 연신 불화살을 날렸다. 그들의 깃발이 타고 지휘소가 탔으며 갑판이 불탔다. 나중에는 검은 연기에 시야가 가려졌다. 그것은 조선군을 더 유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끝없 는 포격으로 조선군의 총통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물을 부어 식혀가 며 총통을 발사했다. 충분히 준비했던 화약과 장군전, 단석 등의 무기 가 떨어진 판옥선도 있었다. 이순신은 오늘의 전투에 모든 화력을 쏟 아 붓도록 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전세 또한 기울었다. "전 함대 포격 중지! 퇴각하라!" 이순신은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때리다가 지치 는 격이었다. 이 정도면 왜적이 다시는 함부로 발호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 부산 앞바다에 수장된 일본 배는 모두 130여 척! 전쟁 발발 이후 단일 전투로 조선 수군, 아니 조선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다. 적어도 적군 2만 명 이상이 탈 수 있는 배를 단 한 번의 전투로 격침시켰던 것 이다. 이순신은 불타는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면 천천히 함대를 후진시 켰다. 벼르고 별렀던 이순신의 전면전이 승리로 끝나는 장면이었다.

 

2. 전면전을 피하지 마라

작은 싸움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쟁이 반 년 가까이 이어지던 시기, 이순신은 다시 한 번 전황을 짚 어보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란, 그리고 이제 곧 겨울, 과연 언제 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이순신은 냉정하게 정세를 분석했 다. 그러고는 오래 전부터 내심 작정하고 있던 결론을 내렸다. 전면전이었다. 전면전, 아군과 적군의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일대 접전을 벌이는 전투! 그것은 화려하긴 하지만 위험한 작전이기도 했 다.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면전에서 패배하면 미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500여 척의 적선을 80척의 판옥선으로 공격한다. 만약 포위라도 당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적은 타격만 입을 뿐이지만 조선 수군은 전멸 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전면전을 결심했다. 지 금 전면전을 벌이지 않으면 더 어려운 지경에 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 다. 위험성도 크지만 이 전면전에서 이긴다면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전란 자체를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다. 첫 출전 이후 약 4개월, 이순신은 아홉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언제부턴가 전면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해안 각 포구에 흩어져 있는 수십 척의 적선을 깨뜨리는 것은 전황에 결정적인 구실 을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전면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이순신은 40여 일 전, 안골포해전 직후 함대 시위를 벌여 적의 기세를 꺾어 시간을 벌었다. 전면전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본 육군이 압박해 오는 시점, 일본으로서 는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은 그때, 이순신은 먼저 정면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그것은 계획대로 보기 좋게 성공했다. 부산해 전 이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그해 가을과 겨울은 큰 전투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눈치만 살피던 명나라가 전쟁에 적극적으 로 개입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면전을 위한 조건

세계 전쟁사를 뒤져보면 어느 전쟁이든 전면전은 큰 위험을 내포하 고 있었다.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는 것으로 미국과 전면전을 시도했 던 일본의 선택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수많은 장군들이 전 병력을 동원하여 '돌격 앞으로!'를 외치다가 처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승부는 전면전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장수들이 적의 배후를 치고 보급망을 끊고 적을 속이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결국은 언제고 치러야 할 전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단계를 밟는 것이다. 게릴라전만으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세계 최강 미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정글전과 게릴라전, 동굴전을 벌였던 북베트남군 도 결국은 마지막 '구정 대공세'라는 전면전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 었다. 칭기즈칸의 세계 정복도 결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전면전의 결과였으며 나폴레옹의 정복전 역시 총력을 다한 전면전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언제 전면전을 단행해야 하는가. 이것을 찾는 일이야말로 유능한 장수의 몫이다. 탁월한 승부감각, 전황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통찰력,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전력을 철저히 분석하는 판단력이 절 대 필요하다. 전면전은 유리한 상황에서도 단행해야 하고 불리한 상 황에서도 단행해야 할지 모른다. 불리한 상황에서는 기습 전면전이 되어야 할 것이고, 유리한 상황에서는 지공을 펼쳐 공포에 질린 적이 스스로 싸울 의사를 잃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ㅛ그러나 무엇보다 전면전에서 지켜야 할 원칙, 그것은 반드시 이겨 야 한다는 것이다. 전면전에서 패배란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 한판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 그래서 전면전을 펼치는 장군에게 가 장 필요한 것은 전략 전술을 넘어 대담성'이다. 대담성이란 무엇인 가. 져도 좋다는 식의 저돌성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되든 한판 해보겠 다는 무모함도 아닐 것이다. 자신의 판단과 선택이 옳다는 신념, 그리 고 그 신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지혜와 과감한 결단, 이것이 바로 대담성이다.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대담성을 상실한다고 한다. 장군도 전투에서 이길수록 대담성을 잃어간다. 지금까지 쌓아온 승전을 하루 아침에 다 날릴 수도 있기 때문에 '대담' 보다는 '신중' 쪽으로 흐르는 것이다. 성과를 거둔 기업의 경영자일수록 모험을 피하고 싶어 하지 않는가, 가능하면 새로운 경쟁을 피하고 싶어 하지 않는가, 현상 유지에 더 연연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가. 대담성을 상실한 장군은 전 면전을 펼칠 수 없다.

 

모든 싸움은 전면전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전면전이란 무엇일까. 혹 전 재산을 떨어 복권을 사 면서 전면전이라 외치는가,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전면전이라면서 분주해하고 있는가, 전면전은 함부로 펼치는 것이 아니다. 전면전이 란 그 한판으로 운명이 판가름 나는 것, 따라서 일생 일대에 한 번이거 나, 몇 번에 지나지 않는다. 전면전은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걸기 때문에 전면전은 신 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전면전에 실패하면 미래 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결코 전면전을 피해 갈 수는 없다. 만약 전면전을 두려워하 고 피하기만 한다면 그는 인생에서 실패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사 람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자신의 인생을 거머쥐고 싶다면, 결코 포 기할 생각이 없다면 항상 전면전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기가 왔을 때는 불리한 여건에 있다 하더라도 과감하게 승부수 를 띄워야 한다. "전면전을 먼저 준비하라! 상대가 걸어오는 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먼저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타이밍을 놓치는 것은 주도권을 놓치는 것이다. 또한 전면전을 위한 웅대한 전략 전술도 먼저 마련하라! 자신 이 그린 밑그림을 믿고 그 그림대로 전면전을 수행해야 한다. 철저한 준비와 피아 분석, 그리고 적확한 전략 전술,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 세워라!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일, 작은 전투를 하면서도 언제나 전면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최후의 승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전면전을 머릿속 으로 그려보라! 그리고 남모르게 준비하고 또 준비하라! 모든 전투는 전면전의 승리를 위한 것이다. 전면전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피하 지 마라, 전면전 없이는 이길 수 없다!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