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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_112

 

The Battle of Angolpo was significant for Admiral Yi Sun-sin's efforts to prevent the Japanese forces from launching a preemptive strike. Despite the challenges, he meticulously prepared for the battle and ultimately emerged victorious. The Japanese forces attempted to resist with the use of suicide troops, but Yi Sun-sin effectively crushed their efforts. By breaking the physical and psychological intentions of the Japanese forces, Yi Sun-sin established the prestige of the Joseon navy through a fleet demonstration, preventing an all-out confrontation.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표현하라

안골포해전

1. 야생동물은 제 키보다 큰 적을 두려워한다

한산해전이 끝난 지 이틀째, 조선 수군은 나른한 승전의 피로감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피로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순신 은 척주선을 운용하였다. 비록 일본군을 대파했다고는 하나, 원래 연 합함대를 꾸리기로 했던 병력의 일부라는 것을 이순신은 잘 알고 있 었다. 그때 안골포에 40여 척의 적선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나 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안골포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은 한산해전에 서 조선 수군에 대패한 와키자카 함대와 연합 함대를 꾸리기로 했던 일본군들이었다. 조선 수군을 선제공격하려는 일본군 함대의 일부가 아직도 건재한 것이다.

 

선제공격을 결정하다

이순신은 즉각 진중회의를 소집했다. 적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그대로 두면 저들이 언젠가는 먼저 쳐들어올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주장과 기다렸다가 적이 바다로 나오면 치자는 주장이 팽팽했다. 사실상 안골포를 당장 치는 것은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안골포는 적의 본거지인 부산과가 까웠다. 만약 조선 수군이 안골포로 접근한다는 것을 부산의 적이 알 게 된다면 배후에서 조선군을 공격해 올 수도 있었다. 좁은 포구에서 앞뒤로 적을 맞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또한 안골포는 포구가 깊어 해상에서 접근하여 적을 공략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형이 었으며 거기에 조선 군사들의 피로도 덜 풀린 상태였다. 함대는 심박하고 있던 외줄포를 출발했다. 어제까지 사납던 파도도 창심해져 있었다. 저 멀리 안골포 포구로 이어지는 바다가 보였다. 이순신은 고심하였다. 이때처럼 이순신에게 육군이 아쉬운 적이 없었다. 만약 조선 육군이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을 육지에서 공격하여 바다로 내몰아주기만 한다면........ 넓은 바다에서 하는 전투는 조 선 수군들이 자신 있었다. 더구나 엊그제 적의 주력 함대 중의 하나인 와키자카 함대를 넓은 한산 앞바다에 모조리 수장시키지 않았던가. "출전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에게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아직도 신중론을 펴는 장수들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모두가 힘든 줄 알고 있소, 허나, 이번 싸움으로 내가 구상하는 바 가 있으니 우선은 안골포의 적을 철저히 소탕합시다! 최고 지휘관이 구상하는 바가 있다는데 휘하 장수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1592 7 10일 새벽 4시경, 먼동이 희뿌옇게 밝아올 시각, 이순신 함대는 정박하규 있던 외즐포를 출발했다. 어제까지 사납던 파도도 잠잠해져 있었다. 저 멀리 안골포 포구로 이어지는 바다가 보였다.

 

일본군, 자살 특공대로 지구전을 피하다.

안골포 포구 앞에는 작은 섬이 두 개 있었다. 섬 이름은 송도와 연 도. 이순신은 함대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함대를 분리했다. 전라우수 사인 이억기 부대를 후미의 송도에 남겨두었다. 이억기에게는 두 가지 역할이 주어졌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적의 구원병을 견제하는 것이 첫째였다. 이순신 함대가 안골포 깊숙 이 들어가 있는 동안 부산의 일본군들이 배후를 치는 것을 막는 임무 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이순신 함대가 일본 함대를 유인해 나오면 그 때 합생하여 적을 치는 것이었다. 이억기 함대를 송도 섬 그늘에 매복시킨 채 이순신 함대는 밀물을 타고 천천히 안골포 깊숙이 전진해 갔다. 이순신은 일부러 천천히 접 근시켰다. 적이 아군의 공격을 알고 충분히 대비한 후 역습해 나오기 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순신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가 가까이 접근해도 일본 함대는 꼼짝도 하지 않 았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산 앞바다에서 어떻게 7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참패를 당했는지 이미 들었던 것이다. 이순신 함대와 맞 붙어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일본군은 정면 대결을 피했다. 기다리면 이순신이 먼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함대가 속도를높여 접근하자 일본군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주력 함대는 그대로 포구에 묶어둔 채 단 세 척의 전선만이 달려나와 조선 함대를 막아섰 다. 그들은 방패를 높이 세우고 방패 틈 사이로 조총과 화살을 날렸다. 어느 때보다 격렬한 사격을 가해 왔다. “단석을 준비하라!" 이순신은 단석 발포를 명령했다. 단석은 둥근 포환처럼 생긴 돌덩 이였다. 단단한 돌을 마치 볼링공처럼 만든 것으로, 지름이 대장군전 이나 장군전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천자총통이나 지자총통에 넣어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커다란 단석을 날릴 수 있는 총통이 따로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완구(碗口)였다. 완구는 그 지름에 따라 대완구 중완구 등 이 있다. 천자나 지자총통에 비해 총통의 길이는 짧았으나 입구가 둥 글고 커서 커다란 단석을 장전해서 날릴 수 있었다. 조선 함대에서 발 사된 단석은 세 척의 일본 전선에 명중했다. 단석의 충격으로 일본 전 선의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일본 전선은 쉽사리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수심이 얕 아 반쯤 기울어진 채 버티고 있었고 그 위에서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보통의 일본군과 달랐다. 이전의 전투에서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거나 파손되면 그대로 바다로 뛰어내려 도망을 가던 일본군이 었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다.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 수군은 저항하는 일본군을 향해 불화살 세례를 퍼부었 다. 드디어 세 척의 일본군 저항선이 무너졌다. 그러자 또 다른 전선 세 척이 나와 조선 수군을 막아섰다. 또다시 격 전이 벌어졌다. 일본 전선에는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그들은 부상병은 이송시키고 전사자를 방패 삼아 저항했다. 앞으로 나와 있 는 세 척은 특공대이자 본대를 지키는 방어벽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자살 특공대를 운용하며 지구전을 계획하고 있는 듯했다. 세 척씩 나와 막아서는 일본군 결사대의 저항으로 전투는 생각보다 길어 졌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대부분 한나절을 넘기지 않았다. 한산대첩 도 속전속결로 끝났다. 그런데 안골포의 적은 달랐다. 소규모 자살 특 공대를 내보내면서 이순신 함대의 진격을 저지했다.

 

전력 집중으로 적의 의도를 꺾다

이순신은 이들의 속셈을 곧 알아차렸다. 첫째는 시간을 벌면서 부산 주둔 일본군의 지원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라면 이억기 부대가 잘 막아줄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군이 노리는 것은 바로 물때였다. 일본 군 지휘부는 이순신 함대를 지연시키면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썰물이 되면 안골포는 갯벌이 넓게 드러나는 지형, 물이 빠져 대형 전 선인 조선의 판옥선이 갯벌에 얹히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모른 다. 그렇게 되면 꼼짝달싹 못하게 된 조선 판옥선들은 일본군에게 완 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조선판 옥선도 어쩔 수 없이 후퇴를 하겠지만 자칫 시기를 놓치면 낭패를 당 할 수도 있었다. 일본군은 그것을 노리는 것이었다. 만약 조선 판옥선이 갯벌에 갇히기라도 하면 전세는 조선군에게 크 게 불리할 것이다. 육전에 강한 저들이 갯벌을 통해 접근하여 꼼짝 못 하는 조선 판옥선을 향해 화공과 조총 공격을 펼친다면? 그런 다음 판 옥선에 올라 단병 접전을 벌인다면 결과는 속수무책일 것이었다. 전투 지휘에 몰두하던 이순신은 곧 적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물때를 잘 살피거라! 썰물이 시작되면 즉각 퇴각할 것이니라! 한편, 안골포 바깥 바다 송도에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 부대는 부산 에서 올 일본군의 구원병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배후를 공격당할 염려는 없었다. 그렇다면 안골포로 들어가 함께 싸우는 것 이 낫지 않은가? 그럴 즈음 신기전이 올랐다. 신기전(神機箭)은 불이 붙은 화살로 공격용과 아울러 신호용으로 사용되는 대형 화살이었다. 이순신이 전라우수군 이억기 부대를 부르고 있었다. 이억기는 즉각 출동 명령을 내렸다. 이억기 부대가 나타나자 세 척의 일본군 특공대 는 순식간에 사기가 꺾였다.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상대만도 벅찬데, 그만한 규모의 조선 함대가 또 나타난 것이다. 이들만 막으면 무사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강적이 또 나타났다. 일본군의 저항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몇 번째 격침된 세 척의 특공대, 벌써 새로운 특공대를 투입해야 하는데도 일본군은 더 이상 특공대를 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순신이 노리던 바였다. 마 지막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적 에게 새로운 이억기 부대를 합 류시키면서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들의 탈출 의지마저 꺾어버렸 다. 썰물이 되어 조선 함대가 물러나는 틈을 타 한꺼번에 바다로 밀려 나오면서 퇴각을 결행할 생각이었는데 이순신은 이억기를 불러 조선 함대의 위용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탈출 의지마저 잠재웠던 것이다. "전함대, 총공격하라!" 드디어 조선군의 예봉을 꺾으려던 특공대가 더 이상 투입되지 않자 이순신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깊숙이 들어가지 마라! 각 전선은 물의 깊이를 잘 살피거라!" 장수들과 군사들은 이순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그들은 세심히 수심을 살피면서 안골포의 적선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40척의 적선 70퍼센트 가량이 격침 혹은 소실되었다. 해가 질 무렵, 물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조선 함대는 불타는 안골포를 바라보며 천천히 배를 뒤로 물렸다. 역시 완벽한 승전이었다. 그날 밤 일본군들이 배를 버려두고 육로를 통해 부산 방면으로 모 두 퇴각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조선 수군의 위세를 확실히 각인시키다. 한산해전과 안골포해전을 치른 이순신의 3차 출동도 끝나가고 있었다. 장수들과 군사들은 여수 본영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순신도 귀환 필요성을 느꼈다. 큰 해전을 두 번 치르면서 전사자 20여 명에 부상자도 100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가덕도 임시 주둔지에서 부상 병들의 상태를 살핀 이순신은 귀환을 하루 늦추도록 명령했다. 그리 고 휘하 장수들에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장수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순신이 여수 본영으로 귀환하는 것으 로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어제 해전을 치른 안골포 주변을 살펴보던 이순신은 전 함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휘하 장수들은 깜짝 놀랐다. 이순신이 이동시키라는 쪽은 부산 방면이었다. 부산이 어떤 곳인가, 적의 본거지가 아니던가. 그런데 장군은 부산으로 함대 를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여수로 귀환할 줄 알았던 장수들은 이순신의 결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몰운대까지 진출할 것이니라!" 몰운대는 적의 본거지인 부산포에서 불과 40여 리,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었다. 적의 경계가 삼엄할 뿐더러 적의 육군과 해군이 곳곳 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곳이었다. 두 번의 큰 해전을 치른 상태에서 적진 한가운데서 다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낙동강 하구와 연해 있는 이곳은 곳곳에 적의 소규모 함대들 이 매복 혹은 정박하고 있어 협공이나 기습을 당할 우려도 적지 않았 다. 언제나 신중하게 작전 계획을 세우던 이순신, 돌다리도 두들겨보 고 건너기를 주저하면 이순신의 몰운대 진출 명령은 휘하 장수들에게 는 놀라운 일이었다. "짐승은 자기보다 키가 큰 상대에게는 덤비지 않는 법일세!" 이순신은 함대를 몰운대 쪽으로 이동시켰다. 첨자진을 형성한 조선 연합 함대는 긴장 속에서 유유히 부산 쪽으로 접근했다. 몇몇 산 정상 에서는 연기가 올랐다. 조선 함대의 출현을 알리는 일본군의 봉화였 다. 동쪽으로 항진해 가는 도중 만난 몇몇 일본 척후선은 이순신 함대 를 보고는 조종 한 방 쏘지 못하고 부산 쪽으로 도주했다. "전 함대! 모든 총통을 발사하라!"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각 함대에서는 공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문의 총통에서 연신 폭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온 바다를 메우고 도 남았다. 장관이었다. 각종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유유히 적진 한가 운데 바다를 항진하며 수백 발의 총통을 발사하는 조선 함대, 그것은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이자 이순신의 기발한 함대 시위였다. 몰운대와 부산에 은거한 적에게 조선 함대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실 제로 느닷없는 이순신의 이 함대 시위에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 모두 숨을 죽이고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순신은 유유히 여수로 돌아왔다. 다시는 우리에게 대적할 생각조 차 말라는 이순신의 강력한 경고이자 조선 수군에게는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를 올려준 항진이었다.

 

2. 때로는 과시하라

함대 시위, 적의 의도를 분쇄하다

끝이 없었다. 깨뜨려도 깨뜨려도 적선은 나타났다. 남해안의 수많 은 포구를 찾아다니며 적선을 격침시키고 불 지른 지 두 달째, 전란은 길어졌다. 남해 바다를 틀어막은 채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 는 이순신, 그런 이순신에게 일본군도 서서히 적응이 되어갔다. 그러 고는 대규모 함대를 꾸려 호시탐탐 이순신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 었다. 일본군도 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순신과의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의 대규모 공격, 이순신으로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이억기 함대 가 합세하여 50여 척으로 늘어난 판옥선, 그러나 수백 척의 적선과 마 주한다면 이길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안골포처럼 적 이 지연 전술과 물량 공세로 나온다면 이순신의 조선 함대도 고전을 면하기 어려울 터였다. 수백 척의 적선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아무리 총통의 성능이 우수하고 당파 전술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해도 한 계가 있을 것이다. 총통을 쏘는 화약과 발사체들을 무한정 싣고 다닐 수도 없었고, 당파를 계속하면 판옥선의 상태도 악화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당장은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순신이 가장 고민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적이 함 부로 대회전(大會戰)을 걸어오지 못하게 할 것인가. 적의 기세를 완전 히 꺾어놓을 방법이 무엇인가. 여기서 이순신은 기상천외한 함대 시 위를 감행했다. 그래서 한산대첩과 안골포해전의 승전의 기세를 몰아 일본군들의 본거지인 부산의 지척까지 대함대를 이끌고 유유히 항해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기 세력 과시는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었다. 한산대첩과 이순신의 함대 시위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 지령을 내리고 만다. , 조선 수군을 만나면 전투를 하지 말고 피하라 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횃불과 깃발-세력을 과시하라

적을 기만하고 속이고 오도하라! 이것은 전쟁의 기본이다. 전장에 서 자신의 밑천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란 없다. 지휘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을 속이려고 한다. 군세가 약할 때는 강한 척하여 적의 예 봉을 피하고 군세가 강할 때는 약한 척하여 적이 방심하도록 한다. 그 래서 역정보를 흘리고 적이 아군을 오해하도록 하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옛 병서에도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나온다. 야간에 적과 붙을 때는 횃불을 많이 사용하라고 했다. 수없이 일렁이는 횃불은 군세가 엄청 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군사 한 명이 두 개의 횃불을 들고 행 군한다면 적은 아군의 병력을 두 배로 계산할 것이다. 낮에는 깃발을 이용하라고 한다. 바람에 펄럭이는 수많은 깃발은 실제보다 훨씬 군 사가 많아 보이게 한다. 텔레비전 사극을 제작할 때에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 유심히 보면 야간 전투 장면에는 곳곳에 횃불과 화톳불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화면 이 가득 차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또 대낮에 행군하는 군사들은 어김 없이 깃발을 들고 있다. 거의 모든 군사들이 깃발만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째서 무기는 들지 않고 깃발만 들고 행군한단 말인가. 이 역시 적은 수의 엑스트라들을 대규모 군중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남해안 곳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세력 과시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 기들이 전한다. 어느 마을에는 장군천, 혹은 뜨물천이라는 냇물이 있 는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석회를 풀어 물을 뿌옇게 했다고 전 해진다. 마치 쌀뜨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 을 본 일본군들은 이순신의 군사가 많은 것으로 알고 쳐들어오지 못 했단다. 강강술래도 이순신 장군이 군사들의 사기가 높다는 것을 과 시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 하지 않는가. 실제로 이순신은 이러한 세과 시를 위해 어선들을 전투선 뒤에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세를 과시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 려 그 반대의 작전으로 적을 물리친 경우도 있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 이 겨우 1만의 군사로 위나라 사마의의 20만 대군을 맞은 적이 있었 다. 제갈량은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병력 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촉한의 군사들이 모두들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때, 제갈량은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즉 성 위의 모든 깃발을 내리고 독전을 하는 북을 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사방의 성문을 활짝 열고 군사들에게 성문 앞에 물을 뿌리고 비질을 시켰다. 20만 대군을 눈앞에 둔 장수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시켰던 것이다. 이것을 본 사마의는 당장 공격하려던 생 각을 바꾸었다. 제갈량은 탁월한 전략가, 성문을 열고 일부러 허점을 보이는 것은 반드시 무슨 계책이 있으리라 지레 짐작하고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시간을 번 제갈량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제나라 손빈과 위나라 방연의 전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위 나라 방연 군을 유인하기 위해 손빈은 행군을 하면서 숙영지의 아궁 이 숫자를 점차 줄여나갔다. 즉 첫날은 숙영지에 10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고 다음 날은 5만 개, 그 다음 날은 3만 개를 만들었다. 뒤쫓아온 맹연이 이를 보고는 손빈 군사들이 대거 탈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 복에 걸려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전장에서 자기 세력을 과시 고는 방심한 채 급히 뒤를 쫓았다. 그러다가 마릉계곡에서 방연의 매 하거나 혹은 속이는 것은 적에게 혼란과 사기 저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표현하라

겸손은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산을 뽑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더 라도 흐르는 물과 같이 유연하라고도 한다. 자신을 낮추어야만 남들 이 알아준다고도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골목의 사나운 개에게도 먼 저 인사하고 웃어주면 나중에는 개가 나를 먼저 아는 척한다. 개 앞에 서도 겸손하면 효과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오죽하 라.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이다. 때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야 한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라. 다른 사람들이 신뢰하도 록 만들어라. 어느 기업체가 갑자기 광고를 늘리고 사무실을 큰 건물로 옮기고 느닷없이 신입사원을 더 뽑는다면 일단 그 기업을 의심하라는 증권가 의 불문율이 있다. 허풍인 것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세를 확장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이렇게 나오는 것은 뭔가 경영상 문제가 생 겼다는 것이다. 일종의 눈속임인 것이다. 회생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 이라고 봐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자기 과시가 아니다. 운동 경기 중에 선수들은 끊임없이 파이팅!을 외친다. 이 역시 팀 원들의 사기를 높이면서 상대를 주눅 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큰 소리나 과장된 몸짓이 반드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전력이 형편없이 약한 팀이 내는 소리는 공허하다. 상대가 두려울 때도 큰소 리를 치거나 과장된 몸짓을 하게 되어 있다. 두려움을 감추려는 것이 다. 그것은 큰소리가 아니라 비명이나 절규에 가깝다. 빈 깡통이 내는 소리가 공허하듯이 우리의 전력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큰소리를 치는 것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것을 어찌 적이 모르겠는가. 짖는 하룻강아지와 숨소리도 내지 않는 맹호의 대결을 생각해보라. 이순신이 안골포해전 이후 적진 한가운데서 벌인 기상천외한 함대 시위는 이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순신은 확실히 적에게 조선 함대의 위용과 위력을 각인시켜두고 싶었다. 그만큼 조선 수군의 전력은 강건했다. 가끔은 이순신 같은 과감한 몸짓을 보여야 한다. 모두가 지치고 힘 들어할 때 앞장서서 팀의 능력을 과감하게 보여주는 리더라면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갖겠는가. 또 아주 때로는 능력 이상을 과시할 수도 있어야 한다. 허황한 제스처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라! 그리고 그것이 필요할 때에는 과감하게 이용하라! 자신의 능 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 상대의 기선을 제압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때 가장 유효적절하게 써라! 그것이 안골포해전을 마친 후 보여준 이순신의 장쾌한 몸짓이었다. 능력이 있다면 그래서 더욱 겸손해야 한다. 바닥 끝까지 겸손하라. 그것은 미덕이며 훌륭한 전략이다. 그러나 겸손과 소극적인 태도는 다르다. 겸손하되 적극적이어야 한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라!

 

[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