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 삶은 감사]One's whole life in appreciation-356

 

The most beautiful words in the world are "Thank you." Gratitude transforms blessi ngs into true gifts, fostering happiness and enriching life. In cultures like Brazil and the U.S., people frequently express gratitude, making it a central part of their daily l ives. Even the Bible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gratitude, teaching that our wor ds carry power and shape our lives. Gratitude is not just a polite formality but a hea rtfelt recognition of life's blessings. Experiments show that even water responds po sitively to words of gratitude, forming beautiful molecular structures, while negativ e words cause damage. Gratitude enhances physical health, emotional well-being, and relationships, serving as the foundation of a joyful life. Stories of individuals ov ercoming adversity with gratitude, such as the "beggar pastor" who gave all he had to God or Jacqueline Saburido, who survived a tragic accident and embraced her s cars as symbols of God's love, remind us of the transformative power of thankfulne ss. Even in suffering, gratitude teaches humility, resilience, and peace. The Bible's t eachings and examples, like Habakkuk's praise during hardship, reveal that true gr atitude transcends circumstances. However, gratitude is often hindered by complai nts, comparisons, and worries. By choosing gratitude, we align ourselves with Go d's will and invite blessings into our lives. Gratitude is not merely a reaction to goo d times but a deliberate practice, even in the face of trials, which turns ordinary life into extraordinary joy. Ultimately, living with gratitude is not just a choice-it is the key to a fulfilled and meaningful life.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좋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나에게 축복이 되는 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해서 축복을 축복으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그래서 매사에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사는 사람의 삶이 행복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브라질 사람들은 "오브리가도(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틈만 나면 "오브리가도."를 외친다. 그래서인 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오브리가도이다. 아무 리 말수가 적은 사람도 하루 평균 열 번 이상은 오브리가도란 말을 한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 역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땡큐(Thank You)." 이다.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생활 속에서 작은 일에도 "땡큐.” 하고 말한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50개를 선별했는데, 그 가 운데서도 "땡큐.” 28%를 차지하여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선정되었다고 하니, 감사가 몸에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성인이 되면 평균 26천 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고 하는데, 그 가 운데 다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은 "감사합니다.” 이다. 물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인간의 언어도 "감사합니다.” 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 중에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혀에 붙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도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감사에 인색한 경우가 많다. 형식적인 감사는 있지만 진정한 감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은행이나 주유소, 백화점, 공공기관 등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자주 사용하지만 과연 그렇게 감사를 외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의 부모나 자녀, 형제자매, 배우 자에게는 얼마나 자주 감사를 표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요즈음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버스 안에서 상스러운 말을 쉽게 내 뱉는 것을 듣게 되면 민망함을 넘어 당혹스러움 까지 느낀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이런 악한 말들을 사용하지 말고 감사의 말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4.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나는 가 하면,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방을 찔러 상처를 준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는 쉽게 화를 내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정작 자 신이 하는 말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내뱉은 말로 인해 상대방이 깊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언젠가 남을 아프게 한 가시와 같은 말은 자신에게로 돌아 오게 마련이다. 누에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실로 집을 짓고 살 듯, 사람도 마찬가지 로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는 것이다. 플로랑 스스코벨 쉰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남에게 준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 삶은 부메랑이 다. 우리의 생각, , 행동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되돌려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희한하게도 우리 자신을 명중시킨다." 불평의 말이든 감사의 말이든 언젠가는 메아리가 되어 나의 삶을 향해 돌아온다. 이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인생은 자신의 말대 로 된다고 하였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 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14:28.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그 사람 의 인생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악평한 10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말한 대로, 가나안 땅에 들 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방황하다 가 인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고,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한 대로, 가나안 땅을 차 지하는 축복을 누렸다. 말은 씨가 되고, 인격이 되며, 그 사람의 삶이 된다. 말대로 되는 것이 인생이다. 한마디의 말이 삶에 희망을 주고 인생의 목적을 변화시 키기도 하며, 때로는 절망케 하고, 인생을 포기하게도 만드는 것이다. 말의 힘은 정말 놀랍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은 말의 중요성과 그 엄청난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말 한마디가 사람에게는 물론 물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였는데, 물 한 잔을 앞에 놓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 하면 물은 가장 아름다운 결정, 즉 완전한 육각수를 만든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게 되면 우리 몸에 무한한 면역력이 생겨 더 욱 건강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물 한 잔을 놓고 짜증을 부리고 욕설을 퍼부으면 물의 결정 은 산산이 부서져 버려 인체에 해를 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사탄이라는 말을 각 나라 말로 물 컵 위에 붙여 놓 았더니 물의 육각 수가 다 깨지고 물의 결정에 구멍이 나 버린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한다', '감사한다'라는 말을 붙여 놓았더니 물은 완전한 육각 수로 바뀌어졌다. 사랑과 감사를 표현했을 때 물은 고상한 품위를 더했고,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한 빛을 발했다. 흥미로운 것은 감사와 사랑 중에 어떤 것이 물의 결정을 더 완전한 육각 수로 만드는지 실험을 했는데, 감사의 결정이 사랑의 결정보다 힘과 영향력 면에서 두 배나 강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랑보다도 강 한 힘을 보여 준 '감사' 의 에너지는 우리 몸과 마음을 아름다운 육각수의 결정체로 만든다. 결국 감사의 말은 우리 인체를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행 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준다. "감사합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메마른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한다. "감사합니다."라고 입술로 날마다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며, 여유로운 삶으로 더욱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감사의 언어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게 하라. 하나님이 당 신의 감사를 듣고, 하나님 귀에 들리시는 대로 감사가 넘치는 인 생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선물을 포장만 하고 주지 않는 것과 같다.

 

여름

감사는 뜨거운 태양빛 가운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같은 것

 

고통의 선물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지만, 내가 한참 어릴 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 지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 방학 때면 옆집 친구와 아침 일찍 시골 개천으로 나가서 어항에 떡밥을 붙인 다 음 자갈이나 모래가 있는 물속에 어항을 놓은 후 민물고기인 피라미를 잡곤 했다. 기다리는 동안 친구와 감자와 옥수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 시절에는 최고의 행복 이자 즐거움이었다. 고기를 잡은 후에는 초고추장에 찍어 싱싱한 회를 즉석요리로 해 먹거나 얼큰한 매운탕을 끓여 맛나게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입안에 서 군침이 살살 도는 추억의 맛이다. 아무튼 시골 생활에서만 가능한 낭만이었다. 고기를 많이 잡은 날은 햇빛에 말린 후에 소금에 절여 밀가루 반죽을 입히고 튀김을 만들어 별미처럼 맛있게 먹기도 했다. 누구나 가난 하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유달리 가난했던 청소년 시절 세 끼 식사 외 에 간식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던 때라 생선 튀김은 별미 중에 별미였다. 그렇게 신나게 방학을 즐기고 개학을 하면, 얼마 있지 않아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상대로 기생충 검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나와 옆집 친구가 똑같이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었다는 검사 결과를 통보 받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눈앞이 캄캄했다. 간디스토마에 걸리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치료할 병원도 마땅치 않았고, 설령 병원이 있다 하더라도 치료비 때문에 수술은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 었다. 학교에 갈 때면 학용품 하나 사 가지고 가는 것도 힘들어 그냥 가는 날이 더 많았고, 소풍 때도 김밥을 못 싸맨 밥을 먹어야 했던 시절, 병원 치료비를 기대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우리 집 형편을 뻔히 알고 있던 나는 부모님께 민물고기를 먹고 간 디스토마에 걸렸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불안과 초조, 염려와 근심의 나날을 보냈다. 캄캄한 밤이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옆집 친구는 이미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 병원을 찾아갔고,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았 다. 다행히 나에게는 심한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똑같이 민물고기를 먹고, 똑같은 병에 감염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으니 심리 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그렇게 혼자 끙끙 앓고 며칠이 지났을까, 옆 집 친구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 해졌고 몸 도 점점 말라갔다. 수업을 빠지는 횟수도 점점 늘어났다. 나는 친구보다 건강한 편이니까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증상이 나타 나려나 싶어 날마다 마음을 졸였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친구는 치료를 위 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올라갔고, 결국 학교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나에게는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늦은 밤, 나의 신세를 한탄하며, 밤길을 걷다 교회 앞을 지나가 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신앙을 가져 볼까? 혹시 신앙을 갖게 되면 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 문을 살며시 열었다. 아무도 없 는 교회 안은 고요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죽더라도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하나님, 살려 주세요!"였다. 하나님이 누구 신지도 모르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 했다. 그때부터 방과 후에는 교회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예배당 안에 들 어가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 나를 살려 주시면 이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나의 삶을 드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간디스토마에 걸린 옆집 친구는 병약한 몸으로 10년을 넘게 고생하다가 결국 꽃도 제대로 피워 보지 못한 채 젊 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살아서 이렇게 주님의 일을 하게 되었다.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감사할 일이 참 많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 인생에 대해 감사하지 못했고, 죽음의 공포 앞에 벌벌 떨기만 했다. 그래도 감사한 점은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서운 병마와 싸우면서도 감사의 생활을 했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돌이켜보며, 고통 중에 있을 때 더욱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거지 목사 이 중표목사님의 삶 역시 나에게 많은 도전과 깨달음을 주었다. 이 목사님은 "예수를 제대로 따르려면 먼저 자신이 철저하게 죽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별세 신앙'을 주창하셨던 분이다. 세상을 뜨기 전이 목사님은 별세신앙대로 살기 위해 '거지(巨智) 선언'을 하셨다. 이는 한문으로는 크게 깨달았다는 의미이지만, 말 그대로 거지처럼 살라는 뜻도 담겨져 있다. 거지처럼 살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비워야 했다. 그는 아들의 유학 비를 교회 도움 없이 자신이 직접 대기 위해 평생 푼돈을 모아왔다. 그런데 그 귀한 통장까지 나중에 감사헌금으로 내놓으셨다. 그는 통 장을 몽땅 헌금하고 나서 너무 감사해서 손뼉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평생 목사로 살면서 이렇듯 한 해에 1억 원 이상을 바칠 수 있는 날이 와서 감사합니다." 그의 자기 비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병마와 싸우던 목사님은 장롱 문을 열고 주께서 두 벌 옷을 갖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옷을 모두 정리하였다. "병들고 나서야 이런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래도 감사해야 지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병이 주는 고통마저도 '감사를 깨닫게 해 준 선물'이라며 감사의 제목으로 삼았던 거지 목사님의 감사 고백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는 삶에서 겪게 되는 많은 아픔을 불평의 도구쯤으로 생각하 기 일쑤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기간은 짜증을 부리고 불평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런 고통의 세월이 자신을 성숙하게 만드는 기회라며 감사하는 일은 오직 지혜로운 사람들만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의 선배들 의 인생을 보면서 육체적인 질병이나 인생의 실패가 결코 불행이나 절망만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오히려 고통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왔을 때 그들의 고통은 연단을, 연 단은 인내를, 인내는 사랑과 감사를 만들어 내어 후세에 모범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아픔과 고통의 세월은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도록 해 주었다. 젊은 나이에 기독교강요를 저술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칼빈도 걸어 다니는 종합 병원이었다. 무려 25가지 질병을 몸에 달고 살았던 그는 몸이 너무 아파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을 못 자니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기도하다 보니 영감을 얻어 깊은 영성의 책들을 저술 하게 된 것이다. 질병은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겸손과 감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더해 준다. 고통 속에 몸부림쳐 본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 히 깨닫게 되고, 더욱 감사에 민감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깨 닫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뉴욕의 부룩클린 교회를 담임했던 에반스 목사님은 24개월 동안 결장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남긴 투병신조 4개 항목 은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어떤 자세로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1. 나는 결코 불평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나는 집안의 분위기를 밝게 유지할 것이다.

3. 내가 받은 축복을 헤아려 감사할 것이다.

4. 나는 질병을 유익한 것으로 바꿀 것이다.

불치의 병에서 회복된다면 그보다 감사한 일도 없겠지만, 큰 병에 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 또한 매우 감사한 일일 것이다. 질병의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늘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현재의 건강한 삶이 기적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 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어차피 우리 인생길은 탄탄한 평지만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오르 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불편한 길을 여행하는 것이다. 질 병의 고통을 안고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을 때 주님과 함께 감사함으 로 그 길을 즐길 수 있다면, 주님은 오르막길의 기쁨도 맛보게 해주실 것이다.

 

[덧없이 흐르는 세월 가운데 원망할 일이 늘어가고 상황이 풀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내 마음을 밝히는 등불 하나 여리라. 감사의 등불! –미상]

 

두 마을 이야기

오래전에 두 마을이 이웃해서 살고 있었다. 한 마을은 감사 촌이고, 다른 마을은 불평 촌이었다. 불평 촌 사람들은 봄부터 겨울까지 무엇에든지 불평과 불만을 쉬지 않았다. 봄에는 황사 때문에 먼지가 많다고 불평했고, 여름에는 너무 덥고 모기가 많다고 불평했고, 가을에는 나무 잎사귀가 많이 떨어진다고 불평했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고 춥다고 불평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겨도 혹시 잘못 되지나 않을까 의심과 염려로 감 사하지 못했고, 언제나 불평 속에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감사 촌에 사는 사람들은 정반대로 어떠한 일에도 감사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시련을 만나도 감사했다. 봄에는 꽃 향기를 감사했고,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탐스 런 열매를 감사했고, 겨울에는 나무 가지에 하얗게 쌓인 눈꽃을 감사 했다. 하루는 불평촌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 가서 사람들이 말끝마다 감사하는 소리를 듣고 몹시 놀랐다. 그곳에서 약간의 감사를 배워 감사를 살짝 흉내만 내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집안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잇,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괜히 감사만 실컷 하 고 왔네." 불평도 습관이다.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한다. 부정적인 사람의 눈에는 장미꽃의 가시만 보인다. 불평하는 사람 은 불평이 인격 그 자체다. 그는 불평의 눈을 가지고 있어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불평의 조건으로 보이고, 불평의 입을 가지고 있어 입을 열면 불평이 쏟아져 나온 다. 문제는 본인만 불평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불평 인생으로 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감사를 습관화하면서 살게 되면, 감사가 인격 그 자 체가 되며, 저절로 감사의 눈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보는 것마다 감사의 조건이 되며, 입을 열면 감사가 샘솟듯 터져 나온다. 그래서 그는 한평생을 감사로 살아가게 된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감사가 있을 뿐이다. 감사가 행복해지는 연습이라면, 불평은 불행해지는 연습이다. 어느 날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은 계속해서 이것저것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좌석이 불편하다, 시 트가 지저분하다. 청소도 제대로 안 돼 냄새가 지독하다, 심지어 승무 원도 불친절하다고 갖은 불평을 쏟아냈다. 이때 부인의 불평을 듣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 들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자입니다." 필 박사가 물었다. "부인께서는 어떤 종류의 제조업에 종사 하시는지요?" 그러자 남편은 웃으며 대답했다. "제 아내는 항상 불평을 만드는 제조업자입니다." '나는 매일 갖가지 불평을 계속 찍어내는 제조업자는 아닌가!' 생각해 보자. 불평을 다량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조금 힘들다고, 조금 어렵다고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감사하는 자세는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지만, 불평하는 자세는 만사를 그르치게 한다. 우리는 감사가 아닌 불평으로 일관한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의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 노예 생활은 짐승처럼 취급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을 하나 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해방시켜 주셨다. 이는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일인가? 그러나 그들은 홍해를 건널 때만 감사했을 뿐 가나안 땅을 향하는 동안 내내 광야에서 불평 거리를 늘어놓았다. 처음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받아먹었을 때는 그 맛이 "꿀 섞은 과자 같다" 16:31고 감사했는데, 나중에는 힘든 광야 생활 에 금방 지쳐 똑같은 만나를 받아먹으면서 "기름 섞은 과자 맛 같다"  11:8며 투덜거렸다. 그들은 길이 평탄하지 못하다고 불평했고,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 했고, 고기가 없다고 불평했고, 지도자가 못마땅하다고 불평했으며, 심지어 몸에 좋은 음식들을 먹지 못해 정력이 떨어진다고 불평했다. 한마디로 그들의 삶은 불평 제조업자의 삶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행해지는 연습을 하다 결국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을 한 발자국도 밟아 보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결국 불평 인생을 살 것인가, 감사 인생을 살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 에 달렸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만, 불 평은 사탄을 기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탄은 매일 우리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항상 낙심하라! 쉬지 말고 원망하라! 범사에 불평하라! 이는 너희를 향한 사탄의 뜻 이니라."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고 불평은 사탄의 뜻이다. 그리고 감사를 택하든 불평을 택하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같은 환경이지만 감사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삶은 풍요롭고 행복하다. 반대로 불평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인생은 피곤하고 불행 하다. 감사는 우리의 얼굴빛을 평온하게 만들지만, 불평은 우리의 얼굴 빛을 어둡게 만든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하지 않은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면 불평 제조업자가 아닌 감사 제조업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 공장이 불평이 아닌 감사를 찍어내다 보면 늘 기쁨과 축복이 넘쳐날 것이다.

 

살아 있음을 감사하라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하루는 전도사님으로부터 40대 정 도 되는 남자 교인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꼭 심방을 와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심각한 사고를 당해 큰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데 아직 의식 불명이라고 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의 상태는 보기에도 심각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대부분이 붕대로 감겨 있어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원래 흑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잡화점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괴 한들의 습격을 받아 목과 복부에 총을 맞고 실려 온 것이었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산소 호흡기를 의지한 채 사경을 헤매며 누워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 드렸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이분을 꼭 살려 주십시오!" 그저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열흘 정도 지났을까. 환자의 상태가 궁금해진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의식이 돌아와 있는 것이 아닌가. 산소 호흡기도 떼고 병실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 병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 그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은 머리에 얹고 기 도를 했다. 기도하는 동안 그는 나의 기도에 반응이라도 하듯 점점 나 의 손을 꽉 움켜쥐더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자 감사합니다."를 계속 되뇌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살 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하고 행복한 것인 줄 몰랐습니다.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악몽 같은 순간을 떠올리며 생사의 기로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총기를 든 흑인 둘이 가게 안으로 들이 닥쳤고, 돈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는데,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탕! ! 하 는 총소리가 들렸고, 저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깨어 보니 병원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았 는 데, 의식이 희미 했습니다. 의사들이 긴박하게 움직이고, 수술용 칼과 가위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저에게 마취주사를 놓는 것 같았고, 저는 서서히 다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밝은 형광 불빛 속에 내 주위를 맴도는 한 의사가 제 상태를 보며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습니다. ', 아무래도 이 사람 힘들겠는데....' 의사가 던진 말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저의 귓가에 저승사자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이 한마디에 저는 이미 죽음의 세계로 끌려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 세상 사람이 되는구나.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그러고는 마취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얼마 후 무슨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막 마취에서 깨어 나기 시작한 듯했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 사람 살겠는데... 의식이 돌아오네....' 그때 그 의사의 소리는 마치 천사의 소리 같았습니다." 그는 숨을 쉴 수 있고, 눈을 떠 이 세상을 볼 수 있고, 살아서 가족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을 난생 처음으로 감사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꼭 두 달 뒤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해서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나왔는데, 감사헌금 봉투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한번이라도 내가 숨 쉬고 있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말할 수 있음 에 감사해 본 적이 있는가? 평소에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지만, 큰 사고나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면 일상의 건강함에 감사가 절로 나 온다. 미국 텍사스의 재클린 사브리도라 양의 이야기는 생사를 뛰어넘으며 기적같이 살아나 감사의 인생을 살고 있는 자의 표본이 된다. 이 이야기는 원래 미국 텍사스 주의 '음주 운전 방지 운동본부'에서 동영상으로 제작한 것인데, 음주 운전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넘어 재클린의 놀라운 감사 인생이 많은 네티즌들을 울리고 감동시켰다. 재클린은 20, 미모의 대학생으로 생일파티를 마치고 친구들과 승용차로 귀가하던 도중, 술에 만취한 청년 운전자의 실수로 끔찍한 대형사고를 당했다. 친구 2명은 사고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재클린은 전신 60%의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 1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의 치명적인 화상 앞에 의사들마저 살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40여 차례가 넘는 수술을 받은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 었다. 다행히 살아나기는 했지만 양쪽 손의 손가락을 모두 절단했고, 머리카락, , , 눈썹 등 얼굴의 대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예전의 곱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감사했다. "사고 후 한 달 이상을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 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다가와 답답한 산소호흡기를 빼 주셨어요. 그때 얼마나 홀가분 했는지 몰라요. 저는 마음껏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큰 감사'를 느꼈답니다." 치료의 과정은 어둡고 긴 터널처럼 끝이 보이질 않았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치료를 수년 동안 받으며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다른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도, 아니 본인 스스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손가락 없는 손은 글을 쓸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얼굴을 씻을 수도 없었다. 머리카락 없는 머리는 괴 물처럼 보였으며, 비가 오면 눈썹 없는 눈에는 빗물이 그대로 흘러 들 어갔고, 조금밖에 남지 않은 귓바퀴는 머리를 감겨 줄 때마1다 귓속으로 들어오는 물을 전혀 막지 못했다. 수년간에 걸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 내며 그녀는 자신의 외모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과거의 아름답던 재클린 얼굴도 사랑하지만 현재의 괴물같이 일그러진 재클린 얼 굴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자신의 흉측한 몰골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신뢰하는 마음가짐 때문에 가능했다. 재클린은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돌이키며 우리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나는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삐딱한 시선으로 불 만거리가 없나, 뚱한 채로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왜 내 머릿결은 더 곱지 못할까?

왜 내 피부는 좀 더 깨끗하지 못할까?

왜 내 눈은 좀 더 크지 못할까?

왜 내 코는 좀 더 오뚝하지 못할까?

왜 내 키는 좀 더 크지 못할까?

왜 내 몸매는 좀 더 날씬하지 못할까?

내가 좀 더 예쁘고 잘났다면, 난 친구들에게 좀 더 인기가 있었을 테고 더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사귈 수도 있었을 텐데. 친구들이 멋있고 잘 생겨야만 좋아하는 것이 아님에도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생각으로 나를 학대하고 못살게 구는 데 1 1초가 아까운 나의 삶을 낭비했다. 왜 몰랐을까?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김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을. 더 늦지 않고 이제라도 깨달 을 수 있게 되어 나는 진정으로 감사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로 살아지는 나의 삶을 사랑한다." 재클린은 자신의 흉터를 보고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외모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펼쳐진 절벽과 같은 암담한 상황을 감사로 받아 들이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를 진심으로 용서 하였으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가해자 대신 그의 어머니가 방송에 나와 재클린에게 정말 죽을 죄를 지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사죄했을 때, 재클린은 아무런 원망도 없이 그 어머니를 포옹하며 오히려 이렇게 위로하였다. "저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이제부터는 어머니도 편안한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감사하며 사세요."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자족할 줄 안다면 행복은 분명 내 것이다.]

 

One's whole life in appreciation

전광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