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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문학 소설에 대해]멋진 신세계-318

John is shocked by the emotionless Delta twins lining up for soma at the hospital. Their mockery of Linda’s death and their identical appearances fill him with horror and disgust. He realizes that beneath the "brave new world" lies a deeply dehumanized society. Soma is a numbing poison, and John cries out for people to reject it. Yet the people remain indifferent, accepting the system without question. John grows increasingly aware that he’s trapped in a living nightmare. He declares he came to give them freedom, but they stay silent or confused. The regime quickly restores order, and soma distribution resumes. This scene powerfully illustrates how humanity and freedom are suppressed in a controlled society.

 

19세기 진화론의 거성 토머스 헉슬리의 손자인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와 같은 비관적인 소설을 쓴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9세기를 지 배한 주요 사상은 진보주의였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사관들, 사회주의 자 울주의, 진화론 등의 공통분모는 역사적이고 상승적인 진보주의에 있었 고, 인류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는 낙관주의로 채색되어 있었다. 올더스 헉슬리 역시 유년 시절에는 이러한 낙관론적 진보주의를 호흡 하며 과학기술의 경이적인 발달을 목격하는 가운데 지상낙원의 도래를 믿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헉슬리가 20세 되던 해에 발발한 제일차세계대 전은 서구 정신세계의 흐름을 역회전시키고 말았다. 이성의 힘을 신뢰할 수 없는 새로운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이며, 사상적이고 논리적인 무정부 상태가 개막된 것이다. 더욱이 1929년 경제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고 파쇼 정권, 나치정권, 군국주의, 스탈린주의 등 비인도적인 전체주의가 횡행하 면서 서구의 시대정신은 더욱 비관적이 되어갔다. 종말론적 비관론이 시대정신을 지배하면서 헉슬리의 세계관도 차츰 동 요되었다. 또한 모든 진보는 반드시 그 대가를 수반한다는 깨달음이 그의 역사관과 문명관의 중요한 핵심으로 형성된다. 가령, 19세기에는 모든 사 람들이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초석이 되리라 굳게 믿 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에는 교육의 보급이 정보와 지식의 전달을 용이 하게 해서 전체주의자의 주요 선전도구로 활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노예화되고 모든 인간적인 가치를 상실해 가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대가, 즉 인간이 진보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엄 청난 대가를 희화한 것이 멋진 신세계이고, 그러한 풍자를 통해 헉슬리 는 진보주의에 대한 맹신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문명의 발달이 무엇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을 존중는 선량한 의지와는 맺어지지 않고, 인간이 노예화되는 것을 용인하는 전체주의적인 지배자하고만 맺어지는 것일까. 현대 과학의 지상과제가 초기에는 효능의 극대화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능률은 높 을수록 좋으며, 비능률은 죄가 되었다. 그러므로 능률을 최고로 고양시키 기 위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맡은 일을 사랑하고 하는 일에 기름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가 조직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 에 만족하려면 경제적 안정, 간장 해소, 근심을 잊게 하는 방법 등이 손쉽 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들을 인간의 자율적인 타협에 의 해 이루다 보면 이상적인 삶은 까마득한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 서 국가권력과 같은 강력한 조직력과 통제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문제가 된다. 국가의 생산력이 효율적으로 될 수는 있지만, 그 통제 의 범위가 경제활동을 넘어서 인간의 교육과 심지어 사생활에까지 침투 하다 보면 불합리한 생활이 된다. 그리하여 과학문명이 지향하는 효을 사 회는 결코 살기 좋은 유토피아가 되지 못하고 인간성이 말살되는 디스토 피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설 위에 씌어진 것이 바로 "멋진 신세계다. 멋진 신세계 라는 말은 세익스피어의 작품 '폭풍우-Tempest의 제5막 제1장 중에 오랜만에 사람을 보자 반가워하는 미란다의 독백에서 따온 것 으로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멋진 신세계는 포드 자동차 회사가 일괄작업을 통해 T형 자동차를 생산해낸 해를 기원 1년으로 정하 고 있으며, 포드 기원 632년을 기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수그리스 도의 탄생을 중심으로 연대를 제정하던 BC 혹은 AD 등은 기억조차 없는 25세기, 소설이 씌어진 때로부터 약 6백 년 후의 이야기다. 따라서 그때의 구세주는 예수님이 아니라 헨리 포드인 것이다. 포드는 자동차를 개발한 숨은 아니라 일감작업과장을 착안하여 대량생산을 가능게 한 사람이다. 즉 생산의 능품화를 피한 현대 과학문명의 아버지인 것이다. 이 미래사회에서는 첫째의 목적이 사회 안정이며 이 사회적 안상을 확 보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이 채택된다. 여기서 인간은 출생부터 통제를 받 게된다. 인간은 대내생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딘의 중앙 안공부화 및 조 정국의 배양에서 인공적으로 수정되고 습성을 행성받는다. 이로 인해 미래세계는 계획적·경제적으로 인구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사회 의 필요에 부합하는 유형의 인구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배양행 속의 신 생아들에게는 제각기 정해진 계급이 있어서 그 계급에 만족하고 작용할 수 있도록 심리학적 기술과 생물학적 기술에 의해 교육받는다. 따라서 멋진 신세계의 인간들은 누구나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항상 명랑하 게살아간다. 게다가 '소마'라는 묘약을 먹으면 부작용 없이 슬과 종교의 효과를 즐길 수 있다. 이 약으로 사람들은 도원경의 생활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태생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관 계는 미개하고 저속한 것이라 여겨진다. 부부라는 관세 역시 마찬가지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로 부정되며 극단적인 자유연 애와 완전한 난혼이 장려된다. 모든 욕망은 곧바로 채워지며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은 처음부터 느낄 수 없도록 조절되었으므로 모든 인간은 객 정을 체험하는 일이 없다. 이렇듯 완전한 안정을 유지하는 인간들로 상업 된 사회이므로 사회가 불안한 세력으로부터 위험을 받는 일도 없다. 모든 것이 지배자의 계획하에 완벽하게 통제되는 이상적인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완벽한 미래국에도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려는 반역자가 나타난다. 첫 번째 반역자는 배양행 속에서 태아로 있던 시기에 담당관의 실수로 지나치게 알코올을 주입받아 상류계급에 속하면서도 하층계급의 열등한 육체를 부여받은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청년이다. 마르크스는 상 류계급의 인간으로서 지적인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환경에 순응하지 못 하고 계속 고독과 열등감에 빠지 고민하며 몰래 반사회적인 사상을 품는 다. 두 번째 반역자는 육체적으로도 지능적으로도 너무나 우수한 소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주의 정책에 예민한 회의를 품고 있는 헬름홀츠 왓슨이라는 청년이다. 그렇지만 이들 반역자들보다 좀 더 통렬 하게 좀 더 정면에서 이 전주의 국가에 반한 사람은 이단인 지역에서 살다가 우연히 별세계를 방문하게 된 존이라는 청년이다. 손은 미래국 편에서 보면 아직도 문맹화되지 않은 원시적인 구세계에 서 자라났다. 그는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에서 대 되고 어머니의 고통 속에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구세계의 주민인 존은 고난이 없는 욕망의 성취를 믿지 않는다. 또 종교적인 정서의 존재를 긍정 하며, 걱정에 의한 영혼의 동요 속에서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 특히 그 가 우연히 입수해서 탐독한 세익스피어의 세계, 인간의 정서가 큰 진복음 가지며, 영혼이 살아 있는 세계를 예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1년 내내 영혼의 휴식을 즐기는 문명국의 행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그는 이 바보들의 낙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독을 찾아 전원으로 도피 하지만 문맹국의 주민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서의 가치와 존엄성의 신봉자인이 미만인 청년 존은 문명사회와 단절 하기 위해 자살을 하고 만다. 도피하기 전 이 미개인 청년은 문명국의 현명한 통치자인 무스타파 온드와 이야기를 나눈다.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편안한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와 현실적인 위험과 자유를 원하고, 성과 파악을 신합니다." 그렇다면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라는 통치자의 말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날 그래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기계문명의 발전과 인간적인 가치 중에서 어느 하나를 좋아야만 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들이 인간적인 가치를 보존하 하면 원시적인 사회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현대문 방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앞에서 말했듯이 낙천적인 진보주의에 대한 경고에 한에서는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원시사회 역시 그 자체로는 추악 함과 열성인자를 가졌을 것이므로 어느 쪽을 택한다 하더라도 행복한 마 래를 보장해줄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작가의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문맹관 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의도는 그러한 논리적인 귀결을 이끌어내 는 데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학습하는 과학기술의 진보와 기계문명의 발 당이 전체주의 사상과 결합될 때 어떤 형태로 인간의 노예화가 이루어지 는가, 또 기계문명의 발달이 자유냐 안정이나 하는 이음매반적인 모순의 해결책으로써 전체주의 체제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풍자하려 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의만으로 충분치 못했던 사람은 오히려 작가 자신의 었던 것 같다. 학습라는 멋진 신세계를 탈고한 지 10여 년이 지난 제2 차세계대전 후, 이 이상국가 이야기의 전후판을 위한 서문에서 이 작품에 대한 수정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멋진 신세계를 집필할 당시에 헉슬 리는 이 소설의 중요 인물인 야만인 청년에게 두 가지의 가능성만을 인정 했다. 하나는 문명국에 살면서 그 바보스러운 행복에 도취해버리고 말든 지, 혹은 또다시 본래의 야만인 지역으로 돌아가서 역시 우매함과 추악함 을 감수하든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쪽을 택하든지 구제될 수 없는 딜레마이므로 좀 더 색다른 견해를 채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즉 야만인 지역 주변에 문명국으로부터 도망간 자들과 그들에 의해 성립되는 제3사 회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를 집필한 지 10여 년이 지 나서 이러한 생각으로 바뀐 까닭은 파괴적인 풍자가인 헉슬리가 1930년 대 후반쯤 동서양의 신비사상을 받아들여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도덕가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헉슬리는 미래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도 근본적으로 1930년대의 과학화라는 미명하에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서구문명을 비판하려고 한 것 이지, 미래의 예견을 주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헉슬리의 시대 통찰력은 많은 미래적 예언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 시험관 속의 인공수정 이라든가, 테이프 레코드에 의한 수면학습 따위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보 다 중요한 것은 헉슬리가 분석한 현대문명의 질병이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통해 진단한 현대문명의 질병은 크게 네 가지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는 독재주의 및 권위주의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충동이며, 둘째는 동질성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한 개성의 상실이다. 셋 째는 과학에 대한 선호도의 증가로 야기되는 예술과 인간성의 경시이며, 넷째는 물질주의의 팽배로 인한 신, 구원, 영생에 대한 불신의 확산이다. 결국 헉슬리는 과학의 성과를 믿는 만큼 과학의 진보에 대해 공포를 느꼈 던 듯하다. 그리하여 상당히 일찍, 인류의 개선을 위한 모든 발명과 진보 가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 지, 비록 관념적이라는 아쉬움을 주지만, 인류의 비극을 막는 작은 희망은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 청년 존이 보여준 것과 같은 너무나 인간적인 '야 만과 '건강한 생명감' 이라는 것도 훨씬 앞서 깨닫고 있었다.

 

This scene sharply criticizes passive conformity and escapism through drugs or technology, which remain relevant today. When comfort and control intertwine, human resistance weakens, and true freedom demands pain and awareness. John’s outcry reminds us of the essential human value to perceive reality, think independently, and resist oppression.

 

[멋진 신세계- 진보적 낙관주의에 대한 경고]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정승섭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