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hiavelli's life is divided into three key periods, each shaped by Florence's shifting political landscape. In the first phase, he admired Cosimo de' Medici’s balanced and strategic approach to power. The second phase, under Savonarola’s rule, exposed him to the limits of religious idealism in politics. The final phase marked his active political career, where he observed Cesare Borgia's cunning and decisive leadership and contrasted it with Soderini's weak and indecisive governance. These experiences deeply influenced The Prince, where Machiavelli emphasizes realism, power dynamics, and the necessity for a ruler to be both shrewd and bold to secure and maintain authority.
「군주론」에 대하여
군주론을 저술하기 전까지의 마키아벨리의 삶을 조망하면, 크게 3시기로 나 눌 수 있다. 그 첫째 시기는 1469년에서 1494년까지이다. 곧 그의 출생에서 프 랑스의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 때까지이다. 둘째 시기는 사보나롤라의 집권 시기로서 1494년에서 1498년까지이다. 그리고 셋째 시기는 사보나롤라가 몰락 한 1498년부터 피렌체 공화정이 몰락한 1512년까지이다. 각 시기마다 피렌체의 국내외 정치상황은 마키아벨리의 사고형성에 큰 영향 을 미쳤다. 나는 각 시기마다의 핵심 인물들과 그들이 마키아벨리의 사고에 미 친 영향을 중심으로 해제를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 시기는 마키아벨리가 아직 공직에 진출하기 전이었으며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한 시기이다. 마키아벨리의 저작들 속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인물 은 국부(國父, Pater Patriae)라고 불린 코시모 데 메디치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 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하는 데에 결정적 공헌을 하고 그 기반을 닦 은 인물들이다. 1434년 반대파의 추방에서 돌아온 코시모는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했고, 마키아벨리는 그의 지혜와 깊은 사려가 정치적으로 큰 중요성을 가 진다는 것을 파악했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코시모의 사례를 통해서 다양한 권 력이 상호 각축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상황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급한 다. 코시모는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주제를 무리 하게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과 경쟁하는 귀족들의 권력이 여전히 강했던 것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코시모 자신이 당시 피렌 체 정치상황에는 군주제가 적당하지 않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가 시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을 지지하는 경거망동하는 자기편의 귀족들 을 제어할 줄 아는 “시민적 중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지혜는 잘못된 상황에 따른 섣부른 시도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상황을 악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둘째 시기는 친프랑스 정책을 취함으로써 시민들의 원한을 산 메디치 가문 이 추방되고 나서 사보나롤라가 집권한 1494년에서 그가 화형에 처해진 1498 년에 이르는 시기로서,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정치와 종교의 적절한 관계에 대 해서 성찰하도록 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였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는 피렌체의 타락상을 비판했다. 공화제의 전통이 강한 피렌체를 장악하게 된 코시모 데 메디치 이후의 메디치 가문은 형식적인 공화제를 유지하면서 시민 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축제와 향연을 자주 베풀었다. 사치와 오락이 만연 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현실에 안 주하고, 나태한 삶을 누리려고 했다. 이러한 피렌체의 타락상을 비판한 사제 가 사보나롤라이다. 설교와 예언 등을 통해서 존경과 권위를 얻게 된 사보나 롤라는 메디치 가문이 추방된 후 권력의 공백상태가 된 피렌체의 권력자로 등 장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정치가가 아니라 성직자로 남아 있으려고 했다. 피렌체 시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설교와 기도로 피렌체를 수렴청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견제와 피렌체의 반대파의 공격으 로 사보나롤라는 1498년 화형장의 재로 사라지게 된다. 이를 두고 마키아벨 리는 「군주론」 제6장에서 '말뿐인 예언자'와 '무기를 든 예언자'의 대비를 통해 서 종교와 정치의 논리가 엄연히 다름을 암시하고 있다. 셋째 시기는 1498년 마키아벨리의 공직 진출과 더불어 시작된다. 외교와 군사 부문에서 일했던 마 키아벨리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공화정의 주요 업무를 맡았다. 특히 1502년 에 신설된 종신직(終身職) 정의의 기수(Gonfaloniere a vita)로 선임된 피에로 소 데리니의 신임은 제2서기관 직을 수행중인 마키아벨리의 공직 활동에 힘을 실 어주게 된다. 1498년부터 메디치 가문의 복귀로 공직을 잃게 되는 1512년까지 의 이 기간 동안 마키아벨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체사레 보르자와 피 에로 소데리니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서 교황국의 군대를 지휘하 면서 로마냐 지방을 평정하고 피렌체를 위협했는데, 마키아벨리는 그를 만나 관찰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보르자는 처음에는 프랑스 군대와 용병을 이용하 여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그것이 진정한 자기 힘에 기반하고 있지 못함을 깨닫자 여러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자기 군대를 육성하게 된다. 「군주론」제 18장에서 '여우의 간계와 사자의 용맹으로 묘사되는 위기타파 능력을 통해서 보르자는 자기 군대를 확보하게 되는데, 마키아벨리에게 인상 깊었던 사건은 시니갈리아(Sinigaglia) 사건과 레미로 데 오르코를 이용한 로마냐 지방의 평정 이라고 할 수 있다. 시니갈리아 사건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 용병대 장들을 속임수로 꾀어낸 다음 미리 매복시켜둔 부하들을 시켜 제거한 사건이 다. 여기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의 자기 군대 육성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목 적을 달성한 방법에 주목하고 있다. 자기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보르자는 용 병을 이끄는 군벌세력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 결과 그는 전면전보다는 속임수를 택했던 것이다. 한편 레미로 데 오르코는 보르자의 충 복으로 잔인하고 비정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보르자는 귀족의 전횡으로 피폐 해진 로마냐의 질서회복을 위해서 레미로를 투입한다. 그의 잔인함은 단시간 에 귀족들을 제압하고 질서를 회복시켰지만, 문제는 인민들의 두려움과 그로 인해서 터져 나온 불만이었다. 이에 보르자는 레미로를 참수함으로써 인민들 의 마음을 단번에 얻게 된다. 음모와 단호함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던 보르 자는 힘이 미비하여 원군과 용병을 사용해야만 했던 한계 상황에서 벗어나서 인민의 지지와 자기 군대를 통하여 이탈리아 도시들을 위협하는 인물로 성장 하게 되었다. 반면 피렌체 공화정내의 귀족파와 인민파 간의 대립 속에서 종신직 정의의 기 수 자리에 오른 피에로 소데리니는 유약한 성격과 선의에 대한 믿음 속에서 공 화정을 몰락으로 이끈 인물로 묘사된다. 종신직이라는 강력한 권한이 자신에 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자신에 대한 '적대적 행위에 호의와 신의 로써 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순진함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끌 었던 그의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틈새를 이용하여 힘을 비 축한 귀족들은 스페인 군의 비호를 받았던 메디치 가문과 협력하여 공화정을 몰락시킨다. 메디치 가문은 다시 부활했으며,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물러나서 영원한 야인 생활을 보내야 했다.
In The Prince, Machiavelli highlights the political wisdom and virtù needed to navigate Italy’s crisis and fragmentation, arguing that rulers must prioritize order and national strength by relying on popular support rather than self-serving elites, stressing that effective timing and clear situational awareness are essential, while rejecting traditional morality in favor of results-driven politics; he critiques the mercenary system and aristocratic dominance as the roots of Italy’s downfall, concluding that the true task of a ruler is to restore public order and defend communal liberty against private greed.
「군주론」과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한 것은 '위기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에서 항상 잠복해 있는 위기는 언제든지 밖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위기가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문제는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진행중인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행중인 위 기를 잘 극복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 공히 필요한 것이 바로 사태에 대한 파악 역량이다. ‘시중(時 中)'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정치적 지혜를 마키아벨리는 질병(소모성 열병)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 “그 병은 초기에는 치료하기는 쉬우나 진단하기 가 어려운 데에 반해서, 초기에 발견하여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일 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문제를 일찍이 인지하면(이는 현명 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문제가 신속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되어 모든 사람이 알아 차릴 정도가 되면 어떤 해결책도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무 조건적인 개입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시의적 절한 '개입'과 '지연'이 필요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속전속결을 단행했던 로마 인들이나 행동이 단호했던 체사레 보르자를 칭송하면서도 신중한 정책을 펼 친 코시모 데 메디치를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반대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상관이었던 소데리니를 비판했던 이유는 필요한 경우에 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행동해야 할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복잡한 힘의 관계들 속에서 행동을 취해야 할 정확한 시기와 지점을 잡아내 는 것이 정치적 지혜의 핵심이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역량이 비르투 (virtú)이다. 문제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상황 속에서 그러한 지혜와 비르투 가 거의 부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재를 지속시킨 이들은 자신들의 사 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는 귀족들이었다. 이탈리아는 끊임없는 분열상태에 있 었다.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교황국 그리고 나폴리 왕국은 그러한 분열의 결과물이자 그것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었다. 코시 모 데 메디치는 이러한 분열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 로디(Lodi) 평화조약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1454년에서 1494년까지 이어지는 40년 동안의 평화는 이탈리아 내부의 평화를 유지시켰을지는 몰라도 강력한 통일국가 의 출현을 방해함으로써 국경 너머의 강대국들에게 이탈리아가 먹잇감이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1454년에는 최선의 정책이었던 힘의 균형정책이 1494년에는 최악의 결과를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예측 불가능한 상황 변화 속에서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것은 바로 '제방'을 튼튼하게 쌓는 것이었다. 국제정치적 으로는 이탈리아의 단합과 통일을 달성하여 외세의 침입에 대처하는 것이었으 며, 국내정치적으로는 정치세력들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자국군을 만들어 질 서와 규율이 서는 강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왜 이탈리아는 여러 국가들로 분열되게 되었고, 그 분열이 극복되지 못했을 까? 마키아벨리는 그 이유를 용병 문제에서 찾았다. 당시 이탈리아 국가들은 자국민들의 군대 대신에 용병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전쟁을 직업으로 하기 때문에 전쟁을 끝내려고 하지 않았다. 속전속결을 통해서 승리 를 쟁취하려고 했던 고용국과 전쟁으로 먹고 사는 용병들은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정적 승리 없이 지속되는 전투와 전쟁의 반복은 용 병제하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 모순이 바로 이탈리아 국가들의 통일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병제는 단순한 군사제도가 아니었다. 그것 은 정치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인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공동체 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들지 않고 군대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돈 많은 상 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과두제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탈리아를 노예 화시키고 수모를 겪게 만든 것은 용병제이지만, 그 용병제를 낳은 것은 사실 상 자국 군대의 육성을 가로막고 있었던 정치체제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 리는 「군주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귀족과 인민 간의 대립과 긴장관계 를 이해할 수 있다. 강력한 '제방'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을 제어하고
인민들의 지지에 의지해야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귀족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귀족은 지배욕이 충만한 자들로서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하는 인 민들과는 달리 인민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해 관계를 위해서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모반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 갈등을 끊임 없이 일으키는 주모자들은 주로 귀족들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야심 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마키아벨리는 귀족들의 전횡을 막고 인민들을 보호하 는 것이 군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귀족들은 인민들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두려워했다. 외세가 아니라 자신들을 향해서 그 무기가 사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용병을 쓰게 되었고, 그 결과로 조국이 외세에 유린당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지키기 위 해서 공동체의 몰락이라는 정치적 비용을 기꺼이 지불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군주는 귀족이 아니라 인민에 의지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인민들을 귀족들 의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고, 인민들의 환심을 사며 지지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는 인민들로 자국군을 구성하고, 자유에 대한 인민 들의 사랑에 의지할 때에만 국가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피렌체 및 이탈리아의 급변하는 정치상황 속에서 정치를 사고하고 삶을 영위했다. 안정된 법이나 규칙이 지배하는 평온한 시기가 아니 라 폭력과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시기를 살았던 것이다. 행위자들 간의 혹은 국가들 간의 관계를 정형화시켜주고 제도화시켜주는 격률로서 법이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정치영역에 내재하는 적나라한 '관계'의 중요성을 보았다. 그 속에서 '그래야만 한다'는 윤리와 도덕은 현실 세계를 설명할 수 없 었다. 나아가서 윤리와 도덕이라는 안경을 벗고 바라본 세계는 인간들 간의 '관계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군주론」 제16장에서 제17장까 지 이어지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에 대한 부정은 바로 그러한 세계상을 담고 있 다. 관용, 사랑보다 인색함, 두려움, 잔인함이 더 나을 수 있음은 의도의 선함 이 결과의 선함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르침을 보여준다. 사적인 세계가 아니라 공적인 정치세계에서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고, 일대일 관계가 아닌 다수간의 복잡한 관계에서는 의도보다는 결과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가든 정치인이든 행위자들 간의 관계에 대한 면밀한 성찰 속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악명 높은' 저서 「군주론』에 등장하는 군주들에게 한번 도 폭군(暴君)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사익만을 추구하는 군주를 그리 지 않았던 것이다. 「군주론」은 폭군을 위한 저서도, 권모술수를 전파하려는 '악마'의 저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귀족들의 전횡 속에서 질서가 무너진 취약한 한 국가가 타국의 침략 속에서 나아갈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집필된 것이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그러한 상황을 배태시킨 기존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비판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보 기에 이탈리아에는 두터운 성벽도, 함선도, 금은보화도 부족하지 않았다. 문 제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관계에 있었다. 귀족들이 자원을 독점하고 인민들 이 정치에서 배제된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그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응집시 켜 외세에 대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는 귀족들의 사리사 욕을 채우는 수단이 되었고, 인민들은 귀족들이 나누어주는 떡고물에 취해 배 가 불러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공(公)은 사라지고 사(私)만 풍미하게 된 것 이다. 부패와 무질서의 상황을 극복하고 질서를 세우는 것, 공동체의 영역에서 사(私)의 전횡을 물리치고 공(公)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군주의 임무였던 것 이다.
군주론 지은이 : 니콜로 마키아밸리
옮김이 : 강정인,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