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정치철학]군주론-210

Alexander’s successors easily maintained their territories, as centralized states like the Darius dynasty naturally accepted new rulers. A conquered state can be governed through complete destruction, direct rule, or the establishment of a loyal oligarchic government, while citizens accustomed to freedom constantly seek rebellion, requiring absolute control or destruction. Great leaders build new states by leveraging strong leadership and historical opportunities, but changing existing orders is difficult due to resistance from elites and the passivity of reform beneficiaries, making strong force and strategy essential.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했던 다리우 스 왕국에서는 대왕이 죽은 후 왜 백성 들이 그의 후계자들에게 반란을 일으키 지 않았는가]

새로 정복하게 된 국가(stato)를 유지할 때 직면하는 어려움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은 사실에 우리는 놀라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불과 수년 만에 아시아(지금의 서아시아 지역/역자)의 패자가 되었 고, 그 뒤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전 지역이 반란을 일으켰으리라고 기대할 법합니다. 하지만 알렉 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은 영토를 유지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 자신의 야심 때문에 그 들 사이에서 어려움이 생겼을 뿐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사상 알려진 모든 군주국은 두 가지 방법 중 하나의 방법으로 통치되어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한 명의 군주 가 그의 가신들, 곧 그의 은덕과 선임에 의해서 국정을 보좌하는 자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주가 제후들과 더불어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 런데 그 제후들은 군주의 은덕이 아니라 오랜 귀족 가 문의 세습적인 권리를 통해서 그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한 제후는 자신의 영토와 신민들을 영유하고 있으 며, 신민들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그에 게 충성합니다. 군주와 가신에 의해서 통치되는 국가에 서 군주는 보다 큰 권위를 누리는데, 이는 전체 영토에 걸쳐서 군주 이외에는 주인으로 인정되는 자가 없기 때 문입니다. 비록 신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들이 단지 군주의 신하이거나 관리이 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군주에게만 특별한 충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두 가지 통치 유형의 사례는 투 르크의 술탄과 프랑스의 왕입니다. 투르크 왕국 전체 는 한 사람의 군주에 의해서 지배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가신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왕국은 산자크 (sangiak)라는 행정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술탄은 각 지역에 다양한 행정관들을 파견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그들을 교체하거나 이동시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수많은 세습 제후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제후들은 각 지역에서 자신들을 인정하고 자신들에 게 충성을 바치는 신민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제후들 은 각각의 고유한 세습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 특권은 왕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한, 건드릴 수 없습 니다. 이 두 유형의 국가를 비교, 고찰하면, 투르크 유형의 국가는 정복하기가 어렵지만, 일단 정복하면 유지 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와 같은 국가는 몇 가지 점에서 정복하기가 더 쉽지만,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투르크 왕국을 정복하기 어려운 이유는, 첫째, 그 왕국의 신하들이 외국에 도움을 청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 이고, 둘째, 지배자 주위의 신하들이, 이미 언급한 이유 로, 반란을 일으켜 외세의 침입을 용이하게 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귀족들이 모두 지배자의 종복들이고 그의 은혜를 입어 그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들을 타락시키기란 여간 어렵지 않으며,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주민들이 이미 언급한 이유들로 귀족들을 추종하지 않 기 때문에 별 이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투르크의 술탄을 공격하려고 하는 자는 누구 나 의당 적이 일치단결하여 대항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 에 두어야 하며, 자신의 군대를 신뢰해야지 적의 분열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약 전장(戰場)에서 결정 적 승리를 거두어 적에게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 인 패배를 안겨주었다면, 이제는 군주의 가문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두려워할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 입니다. 군주의 가문을 단절시켜버리면 두려워할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군주 이외의/역자) 어느 누구도 인민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복자가 자신의 승리 이전에 그들(군주 이외의 귀족 따 위/역자)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승리 후에는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 니다. 프랑스처럼 지배되는 왕국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현 상이 나타납니다. 즉 그곳에는 항상 불만을 품은 세력 과 정권을 전복하려고 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당신 은 그 왕국의 일부 제후들과 결탁함으로써 쉽게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미 제시한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그나 라로 향하는 길을 당신에게 열어줄 것이며, 승리를 얻도 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에 당신이 획득한 것 을 지키려고 할 때, 당신은 당신을 도운 무리들과 당신 의 침략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 자들로부터 무수히 많 은 시련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반란의 주모자 가 되려고 하는 귀족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군주 가문 의 혈통을 단절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로 당신은 그들을 만족시킬 수도 파멸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상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나 그 나라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다리우스 왕국의 정부 형태를 살펴보면, 투르 크 왕국과 닮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 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정면돌파를 통해서 결정적 인 승리를 거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승리 후에 다 리우스(3/역자)가 죽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앞 에서 말한 이유에 따라서 확실하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이 일 치단결했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순조롭게 유 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왕국에서 일어난 분규란 단지 그들 자신의 소행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같이 조직된 국가를 그와 같이 순탄하게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 점이 스페인, 프랑스와 그리스 지역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빈발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냐하면 이러한 나라들에는 많은 군주국들이 있었기 때 문입니다. 이 군주국들에 대한 기억이 지속되는 한, 로 마인들은 이 영토들의 확보를 결코 확신할 수 없었습니 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지배가 오래 지속되어 그 기억이 퇴색되었을 때, 이들 지역에 대한 로마인들의 지배는 확 고해졌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나중에 자중지란에 빠졌을 때, 파벌의 각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 역들에서 획득한 권위에 따라서 그 지역들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들에서 과거 지배자들의 혈 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들은 로마인들의 권위 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위의 모든 사실들을 감안한다면,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지배를 용이하게 유지했 던 사실과, 다른 한편 피로스나 기타 여러 지배자들이 정복지를 매우 어렵게 통치했다는 사실에 관해서 의아 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상반된 결 과는 정복자의 역량 여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복된 지 역들의 특성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 문입니다.

 

[점령되기 이전에 자신들의 법에 따라서 살아온 도시나 군주국을 다스리는 방법]

앞 장에서 언급한 것 처럼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법 (legge, law)²에 따라서 자유롭게 사는 데에 익숙한 국 가를 병합했을 경우,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세 가 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그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고, 둘째, 그 나라에 가서 직접 사는 것이며, 셋째, 그들 자 신의 법에 따라서 계속해서 예전처럼 살게 내버려두면서 공물을 바치게 하고 당신과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 를 유지하는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과두정부(stato di pochi, oligarchical government)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과두정부는 새로운 군주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 존속이 군주의 선의와 권력에 의존한다는 점을 알 것이 고 따라서 현상(現狀)을 유지하려고 매우 노력할 것입 니다. 만약 정복자가 독립을 누리면서 자유로운 제도 를 운용하는 데에 익숙한 도시를 파괴하지 않은 채 다 스리려고 한다면, 그 시민들을 이용하여 다스리는 방 법보다 더 쉽게 그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스파르타인들과 로마인들이 그 좋은 예를 보여줍니 다.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와 테베'에 과두정부를 세 워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국가들에 대한 통치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카푸아, 카르타고 및 누만 티아를 지키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그 국가들을 멸망시 켰고, 그 결과 그 국가들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로 마인들은 그리스 지역에 대해서 자치를 허용하고 자신 들의 법에 따라서 살도록 함으로써 스파르타인들이 했 던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리스를 다스리려고 했습니 다. 이 정책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그리스의 많은 도 시들을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기실, 도시를 멸망시키는 것이야말로 지배를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 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생활양식에 익숙해온 도시국가의 지배자가 된 자는 그 도시를 파멸시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도시에 의해서 도리어 자신이 파멸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도시는 반란을 일으킬 때, 시간 의 흐름과 새로운 지배자가 부여한 이익에도 불구하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 자유의 이름과 고래의 제도를 항 상 명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배자가 무엇을 하든지, 어떠한 조치를 취하든지 간에, 지배자 스스 로 내분을 조장하거나 주민들을 분산시켜놓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자유라는 이름과 고래의 제도를 망각하지 않을 것이며, 피사가 100년 동안이나 피렌체 지배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리한 기회를 포착하면 즉시 이를 회 복하기 위해서 반란을 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군주의 지배에 익숙해왔던 도시나 국가는 그 군주의 혈통이 끊기면, 예전의 지배자는 없어졌더라 도, 주민들에게 복종의 습성은 여전히 남아 있게 마련입 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 중에서 누구를 군주로 추 대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쉽사리 합의를 하지 못하는 법 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어떻게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무기를 들기에는 너무 시간이 걸리고, 지배자는 쉽게 그들의 지 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공화국에는 더 큰 활력, 더 많은 증오, 복수에 대한 더 강렬한 집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잃어버 린 자유를 잊지도 않았고 결코 잊을 수도 없습니다. 따 라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국가들을 파멸시켜버리거 나 아니면 직접 그곳에 거주하면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력과 역량에 의해서 얻게 된 신 생 군주국]

군주와 정부 유형에 관한 경우, 전적으로 새로운 군 주국을 논의하면서 제가 위대한 인물들의 사례를 인용 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거의 항상 선인(先人)들의 행적을 따르며, 모방 을 통해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인들의 행적 을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나 모방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역량에 필적하는 일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 렇다고 하더라도 현명한 사람은 항상 탁월한 인물들의 방법을 따르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모방하 려고 애쓰는데,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의 역량에 필적하지 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느 정도의 명성은 얻을 수 있 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련한 궁수가 목표물이 아주 멀 리 떨어져 있을 때 활을 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행동 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활의 위력(virtú)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좀더 높은 지점을 겨냥하게 되는데, 이는 그 높은 지점을 화살로 맞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표물을 맞히기 위해서는 그 지점을 겨냥해야 하기 때문입 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군주가 전적으로 신생 군주국을 다 스릴 때 부딪치는 어려움의 정도는 그의 역량이 어떤지 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저는 주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일 개 시민에서 군주가 된다는 것은 그가 역량이 있거나 행 운을 누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둘 중의 어 느 한 요소가 어느 정도까지 어려움을 더는 데에 상당 한 도움이 되었을 법합니다. 그러나 그가 행운에 의존 하는 정도가 더 낮다면, 자신의 지위를 더욱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른 국가를 가지고 있 지 않기 때문에, 직접 그 국가에 거주하면서 다스릴 수 밖에 없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행운 또는 타인의 호의가 아니라 자신의 역량에 의해 서 군주가 된 인물들을 살펴볼 때, 저는 모세, 키로스, 로물루스, 테세우스 등과 같은 인물들이 가장 뛰어나다 고 생각합니다. 그중 모세는 단지 신의 명령을 행한 집 행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 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과 대화할 만한 가 치가 있는 인물로 선택되었다는 신의 은총 자체만으로 도 칭송받을 만합니다. 그렇다면 왕국을 획득하거나 건 국한 키로스 등과 같은 인물들을 검토해보겠습니다. 그 들 역시 탁월한 인물들임을 알 수 있고, 그들의 특별한 행동들과 조치들 역시, 검토해보면, 위대한 신을 섬기고 있던 모세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행적과 생애를 검토해보면, 질료(materia, material)를 자신들이 생각한 최선의 형태로 빚어낼 기회 를 가진 것 이외에는 그들이 행운에 의존한 바가 없었 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했 더라면, 그들의 위대한 정신력(virtú dello animo)은 탕진 되어버렸을 것이고, 그들에게 역량이 없었더라면, 그러 한 기회는 무산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출현을 위해서 유대인들은 이집 트인들에 의해서 노예상태에서 탄압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종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 그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로물루스가 로 마의 건국자이자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알바(Alba) 에서 태어나자마자 거기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내버려지 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키로스 왕 역시 메디 아인들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페르시아인들과 오랜 평 화로 인해서 유약해진 메디아인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테세우스도 아테네인들이 분열되어 있지 않았더 라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회들이 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운좋 게 다가온 것이라면, 그들이 지닌 비범한 역량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기회를 포착, 활용하게 한 것이 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나라는 영광을 누리며 크게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처럼 자신의 역량으로 군주 가 된 인물들은 권력을 얻는 데에 시련을 겪지만, 일단 권력을 쥐면 쉽게 유지합니다. 국가를 얻기 위해서 겪는 시련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국가를 세우고,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도입해야만 하는 새로운 제도와 통치양식에서 비롯됩니다. 새로운 형태의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며 성공 하기 힘든 일은 없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개혁자에게 적대적이 되는 반면, 새로운 질서로부터 이 익을 누리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온적인 지지만 받는 이 유는 잠재적 수혜자들이 한편으로 과거에 법을 일방적 으로 전횡하던 적들을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 간의 회의적인 속성상 자신들의 눈으로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새로운 제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 니다. 그 결과,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혁신자를 공 격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전력을 다하여 공격하는 데 에 반해서, 그 지지자들은 오직 반신반의하며 행동할 뿐입니다. 따라서 개혁적인 군주와 미온적인 지지자들 은 큰 위험에 처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철저하게 검토하기 위해서, 우리 는 개혁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만 행동하는지 아니면 타인에게 의존하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성 공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간청할 필요가 있는지 아니 면 능히 자신의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은 거의 항 상 성공하지 못하며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개혁을 주도할 만한 충분한 힘이 있으면, 그들은 거의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 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장한 예언자는 모두 성공한 반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언급한 이유 말고도 인민이 변덕스럽기 때 문에 일어납니다. 즉 그들을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설득 하기는 쉬우나. 그 설득된 상태를 유지하기란 어렵기 때 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당신과 당신의 계획을 더 이상 믿지 않을 경우, 힘으로라도 그들이 믿게끔 강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모세, 키로스, 테세우스 그리고 로물루스가 무 력이 없었더라면, 각자 자신이 만든 새로운 정치질서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 문에 이 시대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신부는 그에 대한 다중(moltitudine, mass)의 믿음을 상실하자마자 그가 세운 새로운 질서와 더불어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를 믿지 않았던 자들에게 믿게끔 할 뿐만 아니라 그 를 믿었던 자들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 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언급한 그처럼 유능한 개혁자들은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모든 위험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계획 을 시작한 후에 다가오며, 그 위험들은 자신들의 역량 을 통해서만 극복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자들을 섬멸함으로써 존 경을 받게 되면, 그들은 강력하고 확고하며 존중받는 성공한 지도자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미 논의한 유명한 사례에 그보다 조금 덜 중요한 사례를 추가해보도록 합시다. 그러나 그 사례 역시 분 명히 이와 같은 맥락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으며, 다른 모든 사례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됩니다. 그러한 사례로 서 저는 시라쿠사의 히에론 왕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일개 시민에서 시라쿠사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 주 좋은 기회를 활용했는데, 그 기회를 제외한다면 그 의 성공은 전혀 행운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시라쿠사 인들은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몰렸을 때, 그를 장군으 로 뽑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 여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적인 생활에서 도 그는 대단한 역량을 발휘했으며, 그에 관해서는군 주가 되기 위해서 그가 가지지 못했던 것은 왕국이었다" 라는 기록이 전해 내려올 정도입니다." 그는 옛 군대를 해체하고12)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으며 예전의 동맹을 폐기하고 새로운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자신의 군대와 믿을 만한 동맹을 가지자마자 그는 이를 토대로 그가 원하던 국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어 려운 일이란 권력을 얻는 것이었지, 유지하는 것이 아니 었습니다.

 

[타인의 무력과 호의로 얻게 된 신생 군주국]

일개 평민에서 다만 운(fortuna)이 좋아서 군주가 된 이는 그 지위에 쉽게 오른 셈이지만, 그 지위를 유지하 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날아오른 것처럼 쉽 게 군주의 지위에 올라갔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런 문 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련은 그가 군주가 된 이후에 닥쳐옵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나 영토를 돈으 로 사거나 또는 타인의 호의(fortuna)로 얻게 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이와 같은 예는 그리스에서 많이 볼 수 있 는데, 다리우스 왕은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하고 영광 을 드높이기 위해서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에 지배자를 임명했습니다.” 다른 사례로는 일개 시민이 군대를 매수하여 황제의 지위에 오른 경우 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군주들의 지위는 그를 군주 로 만든 자들의 의지와 호의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데, 이 두 요소야말로 지극히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입니 다. 이런 인물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알지도 못하며, 유지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합니다. 이 들은 지식을 결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대단한 지능과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평민으로만 살아온 사람 이 명령하고 통치하는 법을 알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어 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권력을 유지할 능력도 결 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세력 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태어나서 급 속하게 성장한 모든 자연물들처럼, 빠르게 성장한 국 가는 충분히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가지를 뻗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최초로 맞이한 악천후와 같은 역경에 의 해서 파괴되고 맙니다. 별안간 군주가 된 자들이 타인 의 호의에 의해서 그들의 품에 안겨진 것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즉각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군주가 되기 전에 쌓았 던 토대를 나중에라도 구축하지 않으면, 그러한 사태는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군주가 되는 두 가지 방법, 즉 자신의 역량에 의한 것과 타인의 호의에 의한 것을 예시 하기 위해서 저는 최근의 두 가지 사례를 들고 싶습니 다. 곧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체사레 보르자의 사례 를 들겠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상황에 어울리는 적절한 방법과 자신 의 대단한 역량을 이용하여 일개 시민에서 밀라노 공작 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시련 끝에 얻은 지위를 별 곤란 없이 유지했습니다. 반면에 흔히 발렌티노 공작이라고 부르는 체사레 보 르자는 그 지위를 부친의 호의를 통해서 얻었으나, 그 것이 다하자 그 지위를 잃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가 타 인의 힘과 호의로 얻은 영토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기 위 해서 신중하고 유능한 사람이 의당 해야 하는 일들을 다했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말입니다. 왜 냐하면 제가 말한 것처럼 처음에 자신의 토대를 구축하 지 않은 자라도 위대한 역량을 가지고 있으면 아마 나 중에라도 그 일을 할 수 있겠지만, 이 작업은 그에게 수 많은 시련을 안겨주며, 그나마 구축된 구조물도 매우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발렌티노 공작의 전체적인 행적을 보면, 그가 미래의 권력을 위해서 강력한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신생 군주에게 제공할 만한 모범적 인 지침으로 그의 활동을 예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은 없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의 노력이 종국에 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의 실패는 전적으로 예외적이 고 악의적인 운명의 일격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나무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인 발렌티노 공작을 위대한 인 물로 키우려고 시도하면서, 당시에는 물론 장래에도 많 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첫째, 그는 아들을 교황 령(stato di Chiesa, state of the Church)의 일부가 아닌 지 역의 군주로 만들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만약 그가 교황령의 일부를 취해서 아들 에게 주려고 한다면, 밀라노 공작과 베네치아인들이 이를 용납하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이 는 파엔차와 리미니가 이미 베네치아인들의 보호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이외에도 알렉산데르는 이 탈리아의 군사력(특히 그가 가장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군사력)을 교황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가장 두려 워하는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모 든 군사력을 오르시니 파와 콜론나 파 및 그 추종자 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군사력을 마음대 로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존 국가들의 영토의 일부라도 안전하게 차 지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에 혼란의 씨를 뿌려서, 이탈 리아 국가들 사이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할 필요가 있었 습니다. 이 일은 간단했는데, 베네치아인들이 다른 이 유로 프랑스 세력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는 것을 알 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황은 이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루이 왕의 첫 번째 결혼을 취소시켜 줌으로써 이를 오히려 촉진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은 베네치아인들의 지원과 알렉산데르의 동의하에 이 탈리아에 침입했습니다. 루이 왕이 밀라노를 점령하자 마자 교황은 로마냐를 정복하기 위해서 프랑스 군대를 인계받았으며, 루이 왕은 이를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허락했습니다. 로마냐 지방을 점령하고 콜론나 파를 패배시킨 다음, 발렌티노 공작은 점령 지역을 확보하고 영토를 확장하 려고 했으나, 두 가지 걸림돌에 의해서 방해를 받게 되 었습니다. 그 하나는 그가 자기 군대의 충성심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왕의 진의 를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사용했 던 오르시니 파의 군대는 그에게는 의심스러웠고, 그가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획득한 영토마저 빼앗지나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 는 또한 프랑스 왕 역시 비슷하게 행동할까 두려워했습 니다. 공작은 오르시니 파 군대의 충성심에 대한 심증을, 파엔차를 점령한 후 볼로냐로 진격했을 때 군대가 마 지못해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굳혔습니다. 그리고 프 랑스 왕의 진의는, 그가 우르비노 공국을 점령하고 15) 토스카나로 진격했을 때 왕이 그에게 그 공격을 단념하 도록 하는 것을 보면서,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공작은 더 이상 타인의 군대와 호의에 의존하 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로마의 오르 시니 파와 콜론나 파에 속하는 많은 귀족 신분의 추종자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고 후한 봉급을 줌으로써 두 파벌의 세력을 위축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 을 각자의 자질에 따라서 대우하고, 군사적인 지위와 관직을 부여했습니다. 그 결과 불과 수개월 만에 그들 은 대대로 내려오던 예전의 파벌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 고 전적으로 공작에게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발렌티노 공작은 콜론나 파의 지도자들을 진작 분열시킨 후에 오르시니 파의 지도자들을 섬멸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러한 기회가 왔고 그는 이를 충분히 활용했습니다. 오르시니 파의 지도자 들은 뒤늦게나마 공작과 교회의 강력한 세력이 자신들 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하여 페 루자 지방의 마조네에서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 회합 이후 우르비노 지역에서의 반란, 로마냐 지방에서의 소 요 등 무수히 많은 위험이 공작에게 들이닥치지만, 공 작은 이 모든 위험을 프랑스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 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자신의 위신을 되찾았지만, 그는 프랑스 왕과 모든 다른 외부세력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외부세력에게 의존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이제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주 교묘하게 자신 의 진심을 숨기고 파올로 영주를 통해서 오르시니 파 의 지도자들과 화해했습니다. 공작은 파올로를 안심시 키려고 매우 정중하고 관대하게 대접하면서 돈, 화려한 옷, 말을 주는 등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순진하게 이를 믿고 그들은 시니갈리아에 와서 공작의 수중에 들어 왔습니다. 18) 그 지도자들을 죽이고 그 추종자들을 포섭 함으로써 공작은 매우 확고한 권력기반을 마련하게 되 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르비노 공국과 더불어 로마 냐의 전 지역을 장악했고, 특히 로마냐 주민들이 그의 지배하에서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자 민심이 그를 지지하 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지역에서 시행한 정책은 알릴 만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방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저는 이에 대한 논의를 생략할 수 없습니다. 로마냐 지방을 점령한 후, 공작은 무능한 영주들이 그곳을 다스렸다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예전의 영주들은 신민들을 올바르게 다스리 기는커녕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때문에 영주 들 스스로가 질서보다는 무질서의 근원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지역은 도둑질, 싸움 그리고 온갖 불법적인 행 위가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을 평정하고 주 민들을 그의 군주적 권위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선정(善 政)을 베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레미로 데 오르코라는 잔인하지만 정력적인 인물을 그 곳에 파견하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레미로는 단기간에 질서와 평화를 회복했으며, 가공 할 만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공작은 레미로의 너무 큰 권력이 반감을 살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바람직 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작은 그 지역의 중심부에 저명한 재판장이 관장하는 시민재판 소를 설치하고 22 각 도시로 하여금 법률가를 파견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취해온 엄격한 조치로 인해서 공작 자신이 인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감을 무마시키고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 이제껏 행해진 잔인한 조치는 모두 그가 시킨 일이 아니라 그의 대리인의 잔인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절한 기회 를 포착하여 어느 날 아침 공작은 두 토막이 난24) 레 미로의 시체를, 형을 집행한 나무토막 및 피 묻은 칼과 함께 체세나 광장에 전시했습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본 인민들은 한편 만족을 느끼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 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봅시다. 이리하여 공작은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고,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주 변세력을 대부분 격파했기 때문에 대단히 강력해졌으며, 기존의 위험에 대해서 상당한 안정을 확보하게 되었습 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영토를 병합하려고 했기 때 문에 프랑스 왕에 대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공작은 프랑스 왕이 자신의 실책을 뒤늦게 깨닫 고, 이 계획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작은 새로운 동맹을 찾기 시작했고, 가에타를 포위 중인 스페인 군대를 향해서 프 랑스인들이 나폴리 왕국에서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을 때,27 프랑스 왕에 대해서 미봉책을 쓰기 시작했습니 다. 그의 의도는 프랑스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기 때 문입니다. 만약 교황 알렉산데르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 는 조만간 성공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이 그가 당면 상황에 대해서 취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보르자의 주된 두려움은 새 교황 이 즉위하면 그에게 적대적이어서 교황 알렉산데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의 구심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네 가지 조치를 취함으로 써 이러한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습니 다. 첫째, 그가 빼앗은 영토의 지배자들의 혈통을 단절 시켜 새로운 교황이 그들에게 권력을 되돌려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미연에 방지했습니다. 둘째, 이전에 이미 말 한 것처럼 로마의 귀족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교황을 견제하는 것이었 습니다. 셋째, 가능한 한, 추기경 회의단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교황이 죽기 전에 자신의 권력을 크게 확장하여 공격을 받더라 도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목표들 가운데에서 세 가지를 그는 알렉 산데르가 죽을 무렵에 성취했으며, 넷째 목표도 거의 달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토를 빼앗 긴 지배자들의 많은 가족들을 가능한 한 살해했고, 단 지 소수만이 화를 모면하는 데에 불과했으며, 30) 로마 귀족과 대부분의 추기경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 때 문입니다.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는 일에 관해서 그는 토 스카나 지방의 패자(覇者)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 미 페루자와 피옴비노를 장악했으며, 피사는 그의 보 호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 세력에 대해서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실로 프 랑스가 스페인에게 나폴리 왕국을 빼앗기게 되자, 적대 관계에 놓인 두 강대국은 서로 공작과 동맹을 맺으려 고 추파를 던져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피사를 급 습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한편으로 피렌체에 대 한 시기심이 섞인 증오와, 다른 한편으로 공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루카와 시에나가 곧 항복했을 것이고, 피렌체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 모든 계획 에서 성공했더라면(이 모든 계획은 알렉산데르가 죽은 바로 그 해에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막대한 군 사력과 막강한 명성을 얻었을 것이고, 따라서 견고한 권력을 구축했을 것이며, 더 이상 타인의 호의나 군대 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역량으로 자립할 수 있 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작이 칼을 든 지 5년 만에 알렉산데르 교황 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단지 로마냐 지 방만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고, 나머지 영토는 강력한 두 적대세력 사이에서 허공에 뜨고 말았습니 다. 그는 심지어 크게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 작은 불굴의 정신과 탁월한 역량이 있었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파멸시켜야 한 다는 것을 확고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단기간이지 만 권력의 견고한 토대를 성공적으로 구축했기 때문에, 강력한 군사력과 맞서지 않았더라면 또는 건강이 양호 했더라면,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권력의 토대가 견고했다는 점은 다음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로마냐의 인민들은 한 달 이상이나 그 를 기다렸습니다. 로마에서는 그가 거의 반죽음의 상 태였는데도 안전했습니다. 게다가 발리오니(Baglioni) , 비텔리(Vitelli) , 오르시니(Orsini) 파의 지도자들 이 로마에 왔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반란도 선동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비록 자신이 원하는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반 대하는 사람이 선출되는 일만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교 황 알렉산데르가 죽었을 때, 그가 건강하기만 했더라도, 만사는 잘 풀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던 바로 그 날, 그는 저에게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 니다. 즉 그는 자신의 부친이 죽을 때 일어날 법한 모 든 일을 미리 생각해두었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놓았는데, 단지 그의 부친이 죽었을 때, 그 자신도 생사 의 기로에 있을 줄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공작의 모든 활동을 검토해볼 때, 나는 그를 비 작판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위에서 쓴 바와 같이, 타인의 호의와 무력에 의해서 권력을 차지한 모든 사람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는 듯합 니다. 왜냐하면 그가 큰 뜻과 야망을 품고 있었다는 점 을 고려할 때, 그밖에 달리 행동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 입니다. 단지 두 가지 사태가 그의 기도를 좌절시켰는 데, 곧 부친의 단명과 자신의 병환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생 군주국에서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 다고 생각하는 군주는 다른 누구보다도 공작의 행적 에서 그 생생한 모범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적에 게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 동맹을 맺는 것, (무력이나 기만으로) 정복하는 것, 인민들로부터 충성과 공포심을 확보하는 것, 군대로부터 복종과 존경을 확보하는 것, 당신에게 해를 가하거나 가할 수 있는 자들을 무력화 시키거나 말살하는 것, 낡은 제도를 새로운 제도로 개 혁하는 것, 엄격하면서도 친절하고 고결하면서도 관대 하게 처세하는 것, 불충한 군대를 해체하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는 것 그리고 왕이나 다른 지배자들과 동맹 을 맺어 그들이 기꺼이 전하에게 호의를 베풀게 하거나 피해를 입히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재주를 공작으로 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공작의 실수를 비판할 수 있다면, 오직 교황 율 리우스의 선출에 관한 일인데, 그는 정말로 잘못된 선 택을 했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가 비록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을 교황으로 옹립할 수는 없었다고 할지 라도, 자신이 반대하는 인물이 선출되는 것을 막을 수 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자신이 피해 를 준 적이 있거나, 일단 교황이 되면 자신을 두려워할 만한 추기경이 선출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되었습니 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자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들 중에서 그 가 과거에 피해를 입힌 적이 있는 인물은 산 피에로 아 드 빈쿨라, 콜론나, 산 조르조 그리고 아스카니오였습 니다. 그밖의 다른 추기경들도 교황이 되면 그를 두 려워했을 인물입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루앙의 추기 경과 스페인 출신의 추기경만이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 을 것입니다(루앙의 추기경이라면 프랑스 왕국의 지지 를 등에 업어 힘이 강했기 때문이며, 스페인 출신이라면 그와 같은 나라 사람이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공작은 무엇보다도 스페인 출신 추기경을 교황으로 만들어야 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 으면 산 피에로 아드 빈쿨라가 아니라 루앙의 추기경이 선출되도록 했어야 했습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에 게 새로운 은혜를 베풀으로써 과거에 입은 피해를 잊도 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입 니다 따라서 공작은 이 선거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 한 셈이었으며, 이로 인해서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군주론 지은이 : 니콜로 마키아밸리

옮김이 : 강정인,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