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principalities face challenges when merging with existing states, known as mixed principalities. These challenges arise from unmet expectations of the inhabitants, leading to unrest. Overcoming this requires strong military power and the goodwill of local residents, with careful policies as shown in the example of Mi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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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의 인물들]
나비스(Nabis, 240?-192 기원전) 스파르타의 통치자. 그는 기원전 2007년에 정권을 잡았으며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와 로마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스파르타의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원전 205년에 로마 와 마케도니아가 포이니케 평화협정을 맺은 뒤에는 아카이아 동맹을 주도한 로마 군과 필로포이멘 장군에게 몇 차례 패배를 당했다. 스파르타에서 일어난 아이톨리아인들의 반란 때 암살당했다.
다리우스 3세(Darius III 3802-330 기원전) 페르시아의 왕. 기원전 337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 스 2세가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고 있던 그리스도 사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코린트 동맹을 결성하고 소아시아에 선발대를 보냈 을 때, 다리우스 3세는 필리포스 2세를 암살하여 그 시도를 좌절시켰다. 기원 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침략해왔을 때 패배했다. 기 원전 330년 7월, 그는 페르시아의 동쪽 지역인 박트리아로 도망가던 중에 그 의 사촌인 베수스에게 살해되었다.
레미로 오르코
레오 10세(Leo X, 1475-1521) 본명은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이며, 대인 로렌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494년 피렌체 공화국을 배반 했다는 이유로 메디치 가문이 몰락한 이후, 그는 해외에 나가서 살다가 1500 년에 로마로 돌아왔다. 1512년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를 장악하는 데 일 조했다. 1513년 3월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피렌체 대주교직에 사촌이 자 장차 클레멘스 7세가 될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임명하는 등 족벌주의 정책을 폈다 그는 이탈리아를 자신의 지배권 아래에 두려고 했으나, 스페인과 프랑스가 반발했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 예술에 대한 후원 성 베드로 성당의 을 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자신의 지배권 아래 두려고 했으나, 스페인과 프랑 건축,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 계획 등으로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즉위 초부터 면죄부 판매를 승인하고 사제직을 매매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교회의 다양한 부패상을 비판했다. 그는 루터의 비판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는 데 1520년 6월에는 루터를 정죄(定罪)하는 교서를 내렸다. 루터는 같은 해 12 월에 그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며, 레오 10세는 1521년 1월에 루터를 파 문했다. 1521년 9월에 그는 헨리 8세가 루터를 공박하는 책을 발간했다는 점 을 치하하여 그에게 '신앙의 수호자'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다. 인문주의와 예술가들에게 매우 관대한 후원자였으며, 특히 라파엘로에게 많은 작품을 의 뢰했다.
루이 11세(Louis XI, 1423-83) 1465년 그에게 불만을 품은 제후들에게 프 랑스 북부 전역을 양보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교묘한 공작과 과단성 있는 조치로 적대세력들을 제압했다. 1477년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들이 사망하자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해체시켜 부르고뉴, 프랑슈 콩테, 피카르디 및 아르투아를 프랑스 왕국의 영토로 재통합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1474 년부터 프랑스 기병대를 해산시키고 스위스 용병부대를 고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비판했다.
루이 12세(Louis XII, 1462-1515) 오를레앙 공작이었으며, 1498년 프랑스 왕이 되었다. 1494년에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략했을 때, 그는 제노바를 점 령했다. 샤를 8세의 사망 후 왕위에 오른 그는 브르타뉴 공국과 자신의 왕국 을 통합할 목적으로 1499년에 알렉산데르 6세의 승인을 얻어 잔(Jeanne)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샤를 8세의 미망인인 브르타뉴의 안(Anne)과 결혼했다. 1500년에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나폴리 왕국의 분함을 내용으로 하는 비밀 조약을 맺었으나, 1502년 나폴리 분할 문제를 둘러싸고 아라곤과 전쟁을 벌인 끝에 패하고 말았다. 사법기구의 정비와 개혁, 농민 보호, 상비군 제도 의 정비 등의 국내정책은 큰 인기를 얻어 1506년 삼부회에서 '국민의 아버지'라 는 칭호를 받았다.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 네덜란드, 스페인 등과는 혼인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헝가리, 보헤미아 등과는 조약과 군사적 압력을 통해 서 영토와 권위를 확보함으로써 합스부르크 왕가를 유럽의 중심적인 왕가로 만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에 침입하 자 막시밀리안 1세는 교황, 스페인, 베네치아 등과 신성동맹을 결성하고 유럽 의 세력균형을 꾀했다. 1496년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군을 격파했으나 큰 소 득은 없었다. 1508년에는 베네치아에 대항하여 프랑스, 스페인, 교황과 캉브레 동맹을 맺었다. 그는 한때 교황을 꿈꾸기도 했다. 그는 1511년 교황, 스페인, 영국 등과 제2차 신성동맹을 맺어 영국의 지원하에서 프랑스를 격파했다. 그 러나 밀라노는 프랑스에, 베로나는 베네치아에 귀속되어 그의 이탈리아에 대한 야망은 좌절되었다.
[대인] 로렌초 데) 메디치(Medici, Lorenzo de', 1449-92) '대인(il Magnifico)' 으로 불렸다. 피에로 데 메디치의 아들이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이다. 1469년에 아버지인 피에로가 사망한 이후, 로렌초와 그의 동생인 줄리아노가 피렌체를 주도했다. 1478년 파치 가문의 음모자들은 교황 식스투스 4세 등의 지원하에서 로렌초와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려고 했다. 줄리아노만이 살해 되었는데, 피렌체 군중들은 메디치 가문의 편을 들어 음모자들을 죽였다. 식 스투스 4세는 고위 사제 2인이 연루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고위 성직자인 주 교가 죽은 일만을 문제 삼아 로렌초를 넘겨주지 않으면 피렌체에 성사 금지령 을 내리겠다고 협박했다. 피렌체는 교황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나폴리 왕 페 르난도 1세도 교황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렌초는 혼자 나폴리 에 가서 당대 가장 잔혹한 통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페르난도 1세와 담판을 벌였고, 평화조약까지 맺었다. 식스투스 4세 역시 이 평화조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로렌초의 우월한 위상은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그 는 가문 대대로 내려온 은행업을 제쳐두고, 예술과 문학에 대한 후원 및 정치 에 힘을 쏟았다. 그 자신 역시 시와 다른 문학 작품들을 남긴 저명한 문인이기 도 했다.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Medici, Lorenzo di Piero de', 1492-1519) 우 르비노 공작이다. 1492년에서 1494년까지 피렌체를 통치했던 피에로 데 메디 치의 아들이자 대인 로렌초의 손자. 1512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 복귀한 이 후 대인 로렌초의 아들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1년간 피렌체를 통치했으며, 그는 1513년 8월 로렌초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은 그에게 헌정되었다. 1516년 5월에 메디치 가문의 권세를 강화하려고 했던 레오 10세의 교사를 받아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공작을 우르비노 (Urbino)에서 몰아냈다. 레오 10세는 그를 우르비노 공작이자 페사로의 통치 자로 임명했으며, 최고의 명예와 실권을 상징하는 교회의 기수(gonfaloniere)라 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Medici, Giuliano de', 1479-1516) 대인 로렌초의 아들. 피렌체의 공화파들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서 메디치 가문을 축출했지만, 곧 이어 공화파 내에 내분이 벌어졌고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신성동맹을 결성해 서 프랑스에 대항하자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피렌체도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피렌체에게 신성동맹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면서 공화파의 지도자들을 해임하고 메디치 가문이 복귀하도록 했다. 줄리아노는 1512년 메디치 일족과 함께 피렌체에 돌아와서 이듬해까지 피렌체를 다스렸 다. 율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1513년 3월에 그의 형이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 되자, 신성 로마 제국 교회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어 로마로 갔다. 그는 1515년 느무르 공작(Duc du Nemours)이라는 프랑스의 작위를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원래 「군주론』을 그에게 헌정할 생각이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Medici, Cosimo de', 1389-1464) 별칭은 Vecchio (어른). 또는 Pater Patriae(국부), 메디치 가문의 세 가계 중에서 중심적인 가계를 일으 킨 인물, 코시모는 교황 피우스 2세에게서 백반 광산 독점권을 얻음으로써 축 적한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하여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지배(1434-1537)를 위 한 토대를 다졌다. 그에 관해서는 "제3판 개역본 해제"에 잘 기술되어 있다.
(피에로 데) 메디치(Medici, Piero de', 1471-1503) 대인 로렌초의 장남이다. 1492년에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는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어 1494년 11월까지 피렌체를 다스렸다. 1494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략했을 때,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그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용하면서 항복하여 피렌체 시민들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그의 굴욕적인 항복에 분노한 피렌 체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에서 추방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피 에로도 국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503년 12월에 프랑스 편에 가담 하여 스페인과 맞서 싸우다가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베토리(Vettori, Francesco, 1474-1539) 피렌체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마키아벨리의 가까운 친구이다. 하지만 1512년에 마키아벨리가 어려움을 겪 고 있을 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황 제의 궁정에 피렌체 사절로 파견되었으며, 교황 레오 10세 궁정에도 사절로 파 견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역사 개요, 1511-27년(Sommario della istoria d'Italia, 1511-27)」 등 여러 저작을 남겼다.
벤티볼리오, 안니발레 1세(Bentivoglio, Annibale I, 1413-45) 볼로냐의 통 치자. 1441년에 그는 필리포 공작의 딸인 도니나 비스콘티와 결혼해서 아들 조반니 2세를 낳았다. 수년 간 용병대장으로 활약한 이후, 그는 1443년에 사실상의 볼로냐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집권은 다른 가문의 원성을 샀 다. 1445년 6월 24일 그는 그가 대부로 초대된 세례성사를 마친 후에 암살되 있다.
벤티볼리오, 안니발레 2세(Bentivoglio, Annibale II, 1469-1540) 조반니 2 세의 아들, 용병대장으로서 대부분 피렌체를 위해서 싸웠다. 그는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1511년 볼로냐에 입성했다. 하지만 1512년 4월에 벌어진 라벤나 전투 이후 페라라로 추방당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보르자(Borgia, Cesare, 1475-1507) 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된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와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로드리고 보르자는 둘째 아들이 성직자가 되는 관례에 따라서 체사레가 성직 경력을 쌓 아나가기를 원했다. 체사레는 어린 나이에 이미 다양한 성직을 거쳤는데, 1492 년에 교황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서 발렌시아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1493년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1488년에 이복 형인 간디아 공작 페드로 루이즈가 사망한 이후 공작 작위 는 체사레의 동생인 후안이 물려받았다. 하지만 1497년 6월에 후안이 수상쩍 은 상황에서 살해당한 이후, 체사레는 추기경의 지위를 포기했다. 이는 호전 적이고 정치적인 체사레의 성향과 믿을 만한 속세의 참모를 필요로 하는 아 버지의 요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를 유력한 왕족의 딸과 혼인시키 려는 계획이 마련되어, 체사레는 나바라 왕의 질녀인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 하기 위해서 1498년 10월에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에서 그는 루이 12세-그 는 교황이 자신의 결혼을 취소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로부터 발렌티누아 (Valentinois)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래서 체사레는 발렌티노 공작으로 불리 게 되었다. 1499년 5월, 그는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했다. 체사레는 1499년 9월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그 때 임신한 그의 아내는 같이 돌아오지 않았으 며 이후로도 그는 아내를 다시 보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왕과 그의 아버지인 교황의 호의와 도움을 받아서 통치자가 되고자 했다. 그는 로마냐에서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1499년에 알렉산데르 6세는 체사레를 교황군의 총사령관으 로 임명했다. 이제 형식적으로 그의 군사행동은 교황의 대리인으로서, 과거 교 황들의 나약함을 틈타 교황령에서 군림했던 다양한 세력들을 몰아내는 임무 를 수행한다는 명분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목표이자 알렉산데르 6세 의 목표는 체사레 자신이 강력하고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는 것이었다(마키아 벨리는 때때로 실제로는 체사레가 행동한 것에 대해서 알렉산데르 6세가 행동 한 것처럼 말하기도 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의심할 여지없이 체사레와 알렉산데르 6세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사레는 1500-01년의 원정으로 리 미니, 페사로, 파엔차를 수중에 넣었으며, 1502년에는 우르비노, 시니갈리아를 점령했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대표로 보르자 진영에 가담하여 그의 행동 방식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 마지막 원정 때였다.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자, 체사레는 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을 때, 그 자신도 병에 걸리는 바람에 생사의 기로에 서 있 었다. 게다가 새로 선출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오랫동안 보르자 가문에 강 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호의를 얻으 려 애썼지만, 율리우스 2세는 체사레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율리우스 2 세는 로마냐의 반환을 요구했고, 1504년 5월에 체포된 체사레는 그 요구에 동의함으로써 형 집행을 유예받은 뒤 나폴리로 달아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부왕(副王)인 코르도바에게 다시 잡혀서 같은 해 8월 20일 스페인 으로 압송되었다. 1506년 10월에 그는 스페인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나바라의 왕에게 몸을 의탁했다. 지모뿐만 아니라 용모로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났 던 남자”였던 그는 1507년 3월 12일에 나바라 반군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비텔리(Vitelli, Paulo, 14657-99) 그는 용병대장으로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피렌체는 1498년 6월에 그를 피렌체 군의 지휘관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피렌 체인들은 비텔리가 피사와의 전쟁에서 펼친 작전수행에 불만을 품고 그의 행 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비텔리를 체포했으며, 간단한 재판을 거친 후, 1499년 처형했다.
사보나놀라(Savonarola, Girolamo, 1452-98) 도미니크 수도회 신부. 1482 년 페라라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피렌체로 파견되었고 그의 예언적 인 설교는 상당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 인노첸티우스 8세 및 나폴리 국왕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언했으며, 또한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를 침략해서 쉽사리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그는 피렌체의 도 덕적 해이와 속물적 근성 및 교황청의 악폐들을 비판했다. 1494년 11월 피에로 데 메디치가 피렌체를 떠난 이후에 피렌체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일 부 사람들은 그의 엄격주의를 싫어했으며, 메디치 가문의 잔당들 역시 그에게 는 장애물로 남아 있었다. 또한 밀라노 공작과 교황은 프랑스 왕에 맞서 신 성동맹을 만들었는데, 피렌체가 이 동맹에 가담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 물이 사보나롤라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몰락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알렉산데르 6세가 교회의 폐단에 대한 사보나롤라의 준엄한 비판에 대해서 적 개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를 파문시켰으며, 피 렌체에 성사(聖事) 금지령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그의 인기는 수그러들었고, 1498년 5월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교수형을 당했으며, 시신은 불태워졌다. 그는 공화주의적 자유를 높게 평가했으며, 몇몇 종교 저작들뿐만 아니라 짧 은 정치 논문들도 남겼다.
샤를 7세(Charles VII, 1403-61) 프랑스 왕. 그의 아버지인 샤를 6세는 1422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안정적인 권력기반을 확립하지 못하고, 재정 난에 시달렸으며, 그의 군대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게 연일 패배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잔다르크가 나타나 오를레앙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샤를 7세는 내란을 끝냈으며, 1436년에 파리에 입성하고 잉글랜드가 점령한 지역을 회복했다. 1453년에 백년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프랑스 영토 내에 칼레 만이 유일한 잉글랜드 소유지로 남았다. 마키아벨리는 샤를 7세를 프랑스 군 대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칭송했다.
샤를 8세(Charles VIII, 1470-98) 그는 루이 11세의 독자로서 1483년 왕위 를 계승했지만, 1492년이 되어서야 친정할 수 있었다. 그는 1494년 9월에 앙주 왕가에서 물려받은 나폴리 왕국의 왕위계승권을 내세워 이탈리아를 침략했으 며, 이때 베네치아 영토의 일정 부분을 장악하려 했던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군대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1495년 5월에 그는 잠시 나폴리 왕관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밀라노를 포함한 이탈 리아 동맹이 결성되자 그는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샤를 8세는 귀국 할 무렵 정복지를 거의 모두 상실했으며, 다시 원정을 준비하다가 사망했다.
세베루스(Severus, Lucius Septimius Pertinax, 146-211) 제위 계승을 둘러 싼 혼란 속에서 세베루스는 재빨리 로마로 진군했으며, 원로원은 즉시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황실 근위대를 자신의 도나우 군단에서 뽑은 15,000 명의 정예 병력으로 교체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 197년에서 202년까지 메소 포타미아에 침공한 파르티아와 싸웠으며, 그 전쟁을 틈타서 메소포타미아를 로마에 합병했다. 세베루스는 원로원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 기반인 군대 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소데리니(Soderini, Piero, 1452-1522) 피에로 데 메디치와 대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측근 고문이었던 토마소 소데리니의 아들. 그는 대인 로렌초의 아들 이자 1492년부터 1494년까지 피렌체를 다스린 피에로 데 메디치의 각별한 신 임을 받았다. 1501년에 그는 피렌체 최고 행정회의인 시노리아(signoria)의 최 고위원과 시민정부의 공식 대표인 정의(正義)의 기수(gonfaloniere)가 되었으며, 1502년에는 종신 곤팔로니에레에 임명되었다. 그가 취임한 종신 곤팔로니에레 는 메디치 가문의 몰락과 사보나롤라의 순교 이후 어수선한 피렌체 공화국을 좀더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1502년 8월에 새로 마련한 직위로서, 사실상 국가의 수장에 해당했다. 그는 정직하고, 인내심이 많으며, 친절한 성품을 가 진 유능한 행정관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를 좋아했음에도 불 구하고 그가 메디치 가문의 잔당에 대해서 준엄한 조치를 내리지 못하는 유약 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소데리니는 새로운 체제 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의 정권은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판단했다. 소데리니는 항상 친(親)프랑스 정책을 선호했는데, 1512년 9월에 당시 프랑스와 갈등을 빚고 있던 스페인 군대의 힘을 빌어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 복귀하자 그는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13년 초부터 소데리니의 로마 체 재를 허용했고, 그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스키피오(Scipio, 2367-183 기원전) 정식 이름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이며, 로마의 장군 이다. 기원전 210년에 그는 스페인 파견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기원전 207 년에는 스페인에서 카르타고 군을 몰아냈다. 기원전 205년에 집정관으로 선출 된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의 군대를 무시하고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 기로 결정하고, 기원전 204년에 로마 군을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진격했다. 기 원전 202년 10월에 카르타고로 귀환하는 한니발과 싸웠는데, 자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201년 카르타고의 항복 이후, 스키피오는 로마로 개선했으 며 아프리카누스(Africanus)라는 명예 칭호가 수여되었다. 이후 제2차 마케도 니아 전쟁(200-197 기원전)이 벌어지자 원로원 수석으로 로마 정계를 지배하 면서 동생과 함께 군을 지휘하여 소아시아에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싸 웠다. 귀국 후 정적인 대(大)카토(Marcus Porcius Cato) 일파에 의해서 사실상 조국에서 추방되어 실의에 빠진 채 죽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Sforza, Ludovico, 1451-1508) 밀라노 공작. 그는 프 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차남으로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형인 갈레아초 마리아 (Galeazzo Maria)를 섬겼다. 갈레아초 마리아는 1476년 12월에 암살당했으며, 1480년이 채 되기 전에 스포르차는 음모를 통해 섭정의 지위에 오르는 데성 공했다. 그는 계몽 군주로서 뛰어난 안목을 가진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1482년부터 1499년까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에서 일할 수 있도 록 후원했다. 그러나 강력한 군주라기보다는 교활하고 파렴치한 통치자였다. 형식적인 정통 군주인 잔 갈레아초가 할아버지인 나폴리 왕 페르난도 1세에게 스포르차의 찬탈 행위를 알리자, 페르난도 1세는 공작령 통치권을 잔 갈레아 초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스포르차는 이를 거부하고 나폴리와의 전쟁에 대비 해서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및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동맹을 맺었다. 막시밀리안은 1494년에 막대한 돈을 받는 대가로 스포르차에게 밀라노 공작 의 작위를 주어 그의 찬탈을 합법화해주었다. 스포르차는 같은 해인 1494년 에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을 침략하도록 유도했는데, 이는 그 침략으로 베 네치아 영토의 일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 를 8세의 침공이 이탈리아 전역을 혼란에 빠뜨리자 위협을 느끼고 결국 반(反) 프랑스 신성동맹에 가담하여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야기된 재난에 상당한 책임 을 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루이 12세가 밀라노 공작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1499년 9월에 롬바르디아로 진격했을 때, 루도비코는 즉시 권력을 잃고 말았 다. 그는 1500년 2월에 다시 집권했지만, 그해 4월에 전투에서 사로잡혔으며, 남은 여생을 프랑스의 한 성에 수감된 채 보내야 했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Sforza, Francesco, 1401-66) 밀라노 공작. 용병 대 장이었던 무초 아텐돌로 스포르차(Muzio Attendolo Sforza)의 서자이며, 1424 년에 아버지가 죽은 후 스포르차 용병부대를 이끌었다. 그는 밀라노 공작인 필리포 비스콘티(Filippo Visconti)에게 고용되었으며 그의 서녀(庶女)인 비앙카
마리아(Bianca Maria)와 결혼했다. 밀라노 사람들은 필리포 공작이 죽은 후 반란을 일으켜 공화국을 선포하고 스포르차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밀라노를 위해서 베네치아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밀라노 공화국은 스포르 차를 따돌리고 베네치아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그는 편을 바꾸어서 이번 에는 베네치아 군대를 이끌고 밀라노 공화국과 맞서 싸웠다. 1450년에 그는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이듬해 베네치아, 나폴리 등이 연합하여 스포르차에 맞 섰는데, 스포르차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도움을 받았다.
식스투스 4세(Sixtus IV, 1414-84)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여 1464년 에는 수도회 총장이 되었다. 몇몇 이탈리아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여러 편의 신 학 및 철학 저작을 저술했다. 그는 명망 있는 설교자이기도 했다. 1471년 교 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즉위 후에 적극적으로 십자군 원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극심한 족벌주의로 얼룩진 그의 통치는 메디치 가문과의 분쟁을 야기했다. 결 국 1478년 파치 가문의 음모를 방조했는데, 이 사건이 추문과 반발을 일으키 자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로렌초 데 메디치를 파문했고, 피렌체에 성사 금 지령을 내린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교황청의 동맹자인 나폴리 왕 페르난도 1 세를 설득해서 피렌체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했다. 이후 1478년에서 1480년 사 이에 피렌체와의 전쟁이 이어졌다. 이 전쟁은 로렌초가 식스투스 4세를 제쳐두 고 페르난도 1세와 담판을 지음으로써 종결되었고 그도 로렌초를 사면하고 피렌체에 대한 성사 금지령을 해제했다. 뿐만 아니라 1482년에는 베네치아를 부추겨서 페라라 왕국과 전쟁을 벌이게 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인문주의와 예술에 대해서 아낌없는 후원을 베풀었다. 1481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시스티 나 성당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이런 업적을 뒷받침한 것은 무거운 세금과 성직 매매였다.
아가토클레스(Agathocles, 361-289 기원전) 시라쿠사의 참주. 시칠리아에 서 도공(陶工)의 아들로 태어나 군인이 되기 전까지 한동안 도공 일을 했다. 기원전 325년 이후 시라쿠사에서 민주파의 지도자가 되어 과두파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시도하다가 두 차례 추방당했다. 기원전 317년에는 용병을 거느리 고 다시 시라쿠사로 귀환하여 약 1만 명의 시민[과두정권의 지도자를 포함 하여]을 추방하거나 죽이고 스스로 참주가 되었다. 그는 빈민구제책을 실 시했고 육, 해군을 증강했으며, 기원전 316년에서 기원전 313년경까지 벌인 전 쟁으로 메시나(Messina)를 비롯한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하지만 카 르타고가 시칠리아에 가지고 있던 자국의 영토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대군을 보내자 대규모 전쟁이 다시 벌어졌다. 기원전 311년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 에서 카르타고 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 봉쇄망을 뚫고 탈출했다. 이어서 그는 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의 본국을 공격하여 몇 차례 의 승리를 거두는 등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기원전 307년에 패배하고 말 았다. 그러나 기원전 306년 카르타고와 맺은 평화조약을 통해 시칠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상당부분 유지했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Aurelius Antoninus, Marcus, 121-180)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에 등극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동등한 법률상의 지위와 권력을 가진 공동 황제가 처음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중요한 국정은 철저히 마르쿠스가 수행 했다. 베루스 사후에도 마르쿠스는 도나우 강 국경선을 되찾기 위해서 온힘 을 기울여 3년간 더 싸워야 했으며, 또다시 3년간 보헤미아 지방에서 싸운 끝 에 잠시나마 도나우 강 건너 부족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는 스토아 학파의 주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명상록(Meditations)」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을 집약한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저술되었다. 자신 의 통치 기간을 거의 국경에서 외적을 방비하는 데 보냈던 마르쿠스는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하려고 전쟁을 벌이다가 180년 전선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 아폴로의 아들이며 카이론 밑에서 자란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다. 그는 카이론에게서 사냥과 의술을 배웠다고 하는데, 카 이론에게서 배운 의술로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제우스가 인간 이 그를 통해 불사의 능력을 얻을까 두려워하여 번개를 쳐서 그를 죽였다. 하 지만 아폴로의 요청으로 제우스는 그를 별로 바꾸어 뱀주인 자리(Ophiuchus) 가 생겼다고 한다.
안티오코스 3세(Antiochos III, 242?-187 기원전)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 코스 왕조의 왕으로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도전했지 만 실패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안정시킨 뒤 일찍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진 (東進)한 길을 따라 진군하여 인도까지 침입했다. 이런 확장 정책의 성공에 대 해서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유하여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지중해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했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결국 좌절되 고 말았다. 그는 그리스를 침략했지만 기원전 191년에 테르모필레에서, 그리고 기원전 190년에는 마그네시아(Magnesia)에서 로마군에게 격파당했다. 기원전 188년에 아페메이아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셀루우코스 왕국은 더는 로마 제국 을 위협할 수 없을 만큼 축소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Alexandros III Magnus, 356-23 기원전) 마케도니 아의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까지 진출하여 헬레니즘 세계의 토대를 쌓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불렸다. 그는 13-16세 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기원전 336년에 필리포스 2세가 암 살되자 군대의 지지를 받아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기원전 334 년에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시리아, 페니키아를 공략해서 페르시아를 고립 시켰으며, 기원전 332년 7월에는 테베를 함락시키고 같은 해 11월에는 이집트 까지 진격해서 지중해 동부해안 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이후 기원전 331년부터 페르시아 본토를 공략해서 기원전 330년에 당시 페르 시아의 수도를 점령했다. 이 해에 새겨진 로도스의 명문(銘文)에는 그를 “아시아의 군주"라고 칭하고 있다. 연이어 그는 중앙아시아, 인도로 진격했으며, 기 원전 326년에는 인더스 강을 건넜다. 회군 이후 그는 제국의 정비 및 강화에 박차를 가했는데, 바빌론에서 유프라테스 강의 관개시설을 개량하고 페르시 아만 해안지방의 정착촌 건설 사업을 추진하던 중에 갑자기 병에 걸려 기원전 323년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명명된 도시를 70개나 건 설했는데,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 시킨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은 마케도니 아. 시리아 및 이집트로 갈라졌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208-235) 그는 222년 3월 황실 근위대가 양아버지인 헬리오가발 루스 황제를 암살하자 제위에 올랐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실권은 그의 즉위 를 위해서 암약한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쥐고 있었다. 그는 공정하고 성실하며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지만, (의심할 나위 없이 그의 나이가 너무 어 린 탓에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치하에서 법은 제대로 유 지되지 못했고, 종종 반란이 일어났다. 235년 3월에 그는 게르만 계통의 알레 만니 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출정했는데,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게르만 족을 돈으로 매수하여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다가 군대의 분노를 샀다. 갈리아 지 방에서 반란군들은 그를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해하고 막시미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의 죽음으로 세베루스 왕조는 종지부를 찍게 되고, 군인 황제 시 대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 Rodrigo Borgia, 1431-1503) 그는 당시 세 도를 떨치던 보르자 가문의 스페인 분가의 일원으로 아라곤의 발렌시아 인근 에서 태어났으며, 볼로냐 대학을 졸업했다. 1455년 4월에 그의 삼촌인 추기경 알폰소 데 보르자(Alfonso de Borja)가 교황 칼릭스투스 3세(Calixtus III)로 즉 위했다. 칼릭스투스 3세는 1456년에 조카인 로드리고를 추기경에 임명했으며, 1457년에는 교황청 고위 관리로 임명했는데, 로드리고는 상당한 행정능력을 보인 듯하다. 1460년대에 그는 알려지지 않은 정부(혹은 정부들)와의 사이에 시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1473년경에는 로마 귀족 출신의 카타네이와 오래 불륜관계를 시작했는데, 그녀에게서는 체사레와 루크레치아를 포함한 4명의 아이를 얻었다. 그는 교황 선거인들에게 성직을 매매하는 등 편법을 동원하 여 1492년 8월 알렉산데르 6세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한편 샤를 8세는 1494년 나폴리 왕국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교황의 폐위 및 개혁 공의회 소집안으로 알렉산데르 6세를 몰아붙였다. 그는 1495년 초 밀라노와 베네치아, 신성 로마 제국 등과 손을 잡고 제1차 신성동맹을 결성함으로써 나 폴리 통치에 대한 샤를의 요구를 거부하고 프랑스 군대를 이탈리아에서 철수 시키는 데 성공했다. 1493년에는 아직 십대인 아들 체사레를 추기경에 임명했 다. 1494년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가 교황청의 폐단을 강력히 비판하며 교황 의 폐위를 주장했는데, 그는 표면적으로는 극도의 자제를 보이면서도 이면에 서 온갖 정치 공작을 벌여서 결국 2년 후에 사보나롤라를 파멸시키는 데 성공 했다.
알베리코 다 바르비아노(Alberico da Barbiano, 1348-1409) 코니오(Conio) 의 백작이며 용병대장이었다. 1376년에는 교황측에 가담하여 호크우드 경과 함께 로마냐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외국 용병들이 자행하는 약탈로 인한 참상을 보면서, 그는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용병부대를 편성했다. 200명 남 짓한 규모로 출발한 이 부대는 급속히 성장하여 4,000명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이후 약 20년 내에 이탈리아의 용병부대 대부분은 이탈리아인으 로 구성되었다.
알폰소 5세(Alfonso V, 1395-1458) 1416년에 아라곤의 왕이 되었다. 1420 년에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를 평정했다. 나폴리를 점령하여 나폴리의 왕(1442- 58)이 되기까지 그는 기나긴 전쟁을 벌여야 했다. 알폰소는 강력하고 계명된 통치자였으며, 그의 나폴리 궁정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와 스페인의 고 딕 문화 영향이 어우러져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알폰소는 동방 교 역을 보호하고 투르크에 맞서 기독교의 교권을 지키기 위해서 아프리카, 발칸 반도, 지중해 동부에서 많은 군사적, 외교적 활동을 했다. 그는 제노바를 공 격하던 중 1458년 6월 나폴리에서 급사했다.
앙부아즈(Amboise, Georges d', 1460-1510) 루앙의 대주교이며, 추기경이자 정치가이다. 불과 14세에 몽토방의 주교가 되었고 1492년 나르본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루앙의 대주교가 되었다. 1498년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오를레앙 공작이 루이 12세로 즉위하자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루이 12세 의 밀라노 원정을 도맡아 준비했는데, 1499년 9월에는 루이 12세를 따라서 이 탈리아로 갔으며, 1503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죽자 두 차례의 교황 선거 에서 교황 후보자로 지목되었다. 1508년에는 베네치아를 견제하는 캉브레 동 맹의 결성에 참여했으며, 루이 12세와 함께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오 는 길에 죽었다.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418?-362 기원전) 테베의 장군이자 정치가, 기 원전 379년 이후 그는 스파르타의 군사적 우위에 쐐기를 박고 그리스 도시국 가들의 세력균형을 유지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는데, 특히 스파르타의 공세로 부터 테베를 방어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여러 차례 펠레폰네 소스 원정을 성공시켰는데, 아테네-스파르타 동맹군과 맞선 만티네이아 전투 에서 테베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 으로 테베도 패권을 잃었다.
오르시니(Orsini, Paulo, 1460?-1503) 추기경 라티노 오르시니(Latino Orsini)의 서자이다. 그는 1483년에 페라라 전투에서 교황군을 이끌어서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여러 차례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위해서 싸웠으며, 이후에는 교황과 체사레 보르자를 위해서 싸웠다. 1502년에는 체사레 보르자에 대항한 마조네(Magione) 음모를 주도했다. 그러나 보르자 휘하의 장군인 미켈레토 (Micheletto)에게 격파당했고, 1502년 12월에 마조네 음모의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세니갈리아에서 보르자의 책략에 빠져 처형당했다.
오르코(Orco, Remirro de, ?-1502) 스페인 출신으로 레미로 데 로쿠아 (Ramiro de Lorqua)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1498년에 프랑스 궁정으로 가는 체사레 보르자를 수행했다. 1501년에 보르자에 의해서 로마냐의 통치자로 임 명되었으나, 1502년 12월에 그의 손에 처형되었다.
올리베로토 → 유프레두치
유프레두치(Euffreducci, Oliverotto, 1475?-1502) 그는 파울로 비텔리 휘 하에서 군인으로 훈련받았으며, 비텔리와 함께 피사와 나폴리 왕국에서 프 랑스 진영에 가담하여 싸웠다. 1499년 10월에 피렌체인들이 비텔리가 피사와 의 전쟁에서 피렌체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그를 처형했을 때, 올리베로토는 여 러 전투에서 체사레 보르자에게 고용되어 활약했던 비텔로초 비텔리의 군대에 서 복무하고 있었다. 1501년 올리베로토는 간악한 술책을 써서 페르모의 정권 을 장악했다. 1502년 10월 그는 커져가는 보르자의 세력을 억제하려는 마조네 (Magione)의 음모에 가담했다. 위장 화해 전술을 펼친 끝에, 보르자는 올리베 르토와 다른 오르시니 가문의 지도자들을 시니갈리아에서 함정에 빠뜨려 체포 했다. 1502년 12월 31일, 그는 그곳에서 비텔로초 비텔리와 함께 처형당했다.
율리아누스(Julianus: Marcus Didius Salvius Julianus, ?~193) 콤무두스의 뒤를 이은 페르티낙스는 짧은 제위 기간 후에 황실 근위대에 의해서 암살되었 는데, 근위대는 즉위 하사금을 많이 내놓는 최고 금액의 입찰자에게 황위를 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결국 입찰에서 이겨 황제가 되었다. 얼마 후 도나우 강 주둔 군단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와 그를 살해했다. 그는 고작 두 달 동안 로마를 다스렸다.
율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 세속명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Giuliano Della Rovere)이며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조카로서 프란체스코회 수 사가 되었다. 1471년에 그의 삼촌이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추기경으로 임명 되었다. 교황 선거 회의에서 로드리고 보르자의 교황 선출에 반대했다. 결국 교황이 된 보르자, 즉 알렉산데르 6세의 임기 동안 그의 눈밖에 났다. 알렉산 데르 6세를 뒤이은 교황 피우스 3세의 짧은 재위 기간 후, 그는 1503년 교황 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급한 언동과 활력 및 결단력으로 매우 강력한 인물 로 보였다. 그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교황령의 질서를 회복하고, 그 영토 내 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세속 통치자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1509년에 그는 막시밀리안 1세 및 루이 12세와 연합해서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이후 프랑스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베네치아 및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다. 율리우스는 예 술의 유명한 후원자로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그리고 브라만테가 설계한 새로운 성 베드로 성당은 그의 재위 기간에 착공되었다.
인노켄티우스 8세(Innocentius VIII, 1432-92)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치 보(Giovanni Battista Cibo)이며,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1484년 식스투스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두 명의 서자를 가졌다. 전 임 교황인 식스투스 4세의 족벌주의적 관행을 그대로 이어나갔으며,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 특히 나폴리와 치른 전쟁으로 교황청 재정이 바닥나자 새로운 성직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데르 6세가 교황이 되었다.
카라칼라(Caracalla: Marcus Aurelius Antoninus, 188-217) 카라칼라 혹은 카라칼루스(Caracallus)로 불려진 로마의 황제이다.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년에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198년에는 명목상 아버지 세베루스와 동격의 지위인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부여 받았다. 그와 그의 동생 게타(Geta)-209년에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부여받 은는 209년에 아버지를 따라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가했다. 211년 브리타니 아 원정 중에 요크에서 세베루스가 죽은 이후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는 로마 에 돌아와서 공동 황제가 되어 통치했다. 하지만 형제 사이의 경쟁은 점점 심 해지, 212년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살해했다. 같은 해 그는 안토니우스 시 민법을 제정하여 제국의 모든 자유 거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하 지만 그가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상속세에서 얻어지는 세입을 증가시키기 위 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그의 통치 기간 중 대부분을 군사작전에 보낸 잔혹 하고 호전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217년 4월에 파르티아인을 상대로 한 두번 째 원정 중 카레 근처에서 근위대장인 마크리누스-그는 이후 황제가 되었 다-에게 살해당했다.
카이사르(Caesar, Julius, 100-44 기원전)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경제개 혁으로 재산을 일부 몰수당한 농민계급은 지배계급을 증오하게 되었으며, 이 에 따라 농민계급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유력한 대안으로 인식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두드러진 관대함으로 장군으로서 명성을 떨치기 전에 이미 매우 유명한 대중적인 인사가 되었다. 폼페이우스, 크 라수스와 함께 삼두체제를 구축하고 집정관이 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며, 갈리 아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기원전 49년에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복 귀하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갈리아 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폼페이우스의 거점 인 스페인을 제압하고 패주하는 그를 쫓아 이집트로 향했다. 폼페이우스는 이 미 암살당했지만, 이집트의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린 끝에 클레오파트라 7세 를 왕위에 오르게 했고 그와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 스 15세)을 두었다. 기원전 47년에는 소아시아를 공략해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는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다. 그는 공화정을 이끌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무력화하고 로마의 지배자가 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에 브루투스 등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콤모두스(Commodus, Lucius Aelius Aurelius, 161-192) 황제 마르쿠스 아 우렐리우스의 장남으로서 177년에 연로한 아버지와 공동 통치하는 형태로 제 위에 올랐다가, 180년에 아버지가 죽자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원형 경기장 에서 벌어지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을 좋아했고, 스스로 경기장에 내려가서 검투사들을 살해하곤 했다. 192년 12월 콤모두스는 일단의 고문관들이 고용 한 레슬링 선수들에게 목이 졸려 암살되었다. 콤모두스 사후에 군대가 국가의 실권을 잡아서 제국은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불리는 정체기에 들어서게 된다.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Giulio de' Medici, 1478-1534) 대인 로렌초 의 동생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 대성 당에서 파치 가문의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 1513년에 그의 사촌인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피렌체의 대주교 및 추기 경에 임명되었다. 1519년 5월에 우르비노 공작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한 이후, 그는 피렌체를 다스렸다. 1523년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 들과 마찬가지로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정치에 관여하고 르네상스 문화 를 후원하며 가문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과소 평가하고 메디치 가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책을 펴서 교회를 위험에 빠뜨 렸다. 1527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에 대항하여 신 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1527년 5월에 로마를 침입했다. 클레멘스 7세 는 포로가 되어 로마의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석방된 이 후에는 독일 황제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자 신의 형수였던 왕비 캐서린 공주와의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 녀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숙모라는 점을 감안하여 결혼 무효를 허가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도리어 영국의 종교개혁을 촉발하는 단서가 되었다. 또 독일 내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의 확산을 보고도 모른 체하여 로마 교회의 위신을 떨어뜨렸다. 클레멘스 7세와 마키아벨리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건은 피렌체 사(Istorie fiorentine)」의 집필이다. 그는 1520년 11월에 마키아벨리에게 그 집필 을 의뢰했다. 1525년에 마키아벨리는 로마에 가서 피렌체사」를 그에게 바쳤다.
키로스 대왕(Kyros, 590?-529 기원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을 창건 한 정복자이다. 그는 기원전 약 559년부터 기원전 약 529년까지 아케메네스 제 국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의 생애의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 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는 백성의 아버지로 불렸던 인자하고 이상적인 군주로 기억되었고, 성서에서는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의 해방자로 기록되 어 있다.
테세우스(Theseus) 아티카의 전설적인 영웅. 크레타의 미궁에서 반인반우 (半人半牛)의 괴물인 미노타우루스를 죽인 일과 여인족의 나라인 아마존을 정 복한 일이 유명하다. 그는 아티카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다.
티투스 퀸투스(Titus Quintus: Titus Quinctius Flaminius, 227?-174 기원전) 기원전 198년에 그는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로마 군을 이 끌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격파했다. 기원전 183년에는 비티니아의 왕인 프뤼지아스의 궁정에 도피해 있던 한니발을 양도하도록 압박했는데, 한 니발은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Fernando el Católico, 1452-1516) 아라곤 왕이 자 카스티야 왕(페르난도 5세)과 레온 왕을 겸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페르디 난도 2세라고 불렸다. 알렉산데르 6세가 그에게 내린 별칭은 '가톨릭 왕'이었 다. 그는 1469년에 사촌인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결혼했으며, 그뒤 부부는 카 스티야를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이사벨은 1504년에 죽는다). 페르난도는 1479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 왕이 되었다. 즉위 후에 그는 그라나다 의 이슬람 왕국 공격에 착수했으며, 1492년 정복에 성공했다. 그라나다 정복 으로,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항해를 지원할 수 있었다. 교황 알렉 산데르 6세는 특히 페르난도의 이탈리아 전쟁에 대한 개입을 치하하면서 1496 년에 '카톨릭 왕'이라는 명예칭호를 내렸다. 1500년 11월에 그는 프랑스의 루 이 12세와 비밀 조약을 맺었는데, 그들은 페르난도의 사촌인 프레데리코 1세 가 통치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여 분할하는 데 합의했다. 이후 페르 난도와 루이 12세는 분쟁에 휩싸였는데, 1504년 무렵에 프랑스 군을 몰아냄 으로써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에 병합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카스티야와 아라 곤의 왕위가 모두 카를로스 1세에게 넘어감으로써 스페인의 진정한 통일이 실 현되었다.
페르티낙스(Pertinax, Publius Helvius, 126-193) 로마의 황제. 그는 해방 노 예인 숯가마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반 공직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공 직 그는 169년 게르만 족이 침입했을 때 큰 명성을 얻었으며, 라이티아와 브 리타니아의 장군이었다-에서도 매우 중요한 직위들을 거쳤다. 콤모두스가 암살된 이후, 193년 1월 1일에 그는 근위대에 의해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하지 만 그의 개혁 정책은 군인들의 미움을 받았고, 급기야 제위에 오른 지 3개월도 못 되어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프레데리코 1세(Frederico I, 1452-1504) 아라곤의 왕이자 나폴리 왕국의 왕. 그는 신민으로부터 존경받는 군주였지만, 그의 사촌인 가톨릭 왕 페르난 도 2세와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여 분할한 비밀 조약 의 희생자가 되었다. 루이 12세의 군대는 1501년 여름에 나폴리 왕국을 북쪽 에서 공격해왔으며, 페르난도의 스페인 군대는 나폴리 왕국의 남부 지역 대부 분을 점령했다. 프레데리코는 공격에 맞설 수가 없었다. 1501년 그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프랑스로 호송되었으며, 1504년 프랑스에서 죽었다.
피로스(Pyrrhos, 3187-272 기원전) 그리스의 북서쪽 지역에 위치한 이피로 스의 왕이다. 그는 매우 훌륭한 장군이었는데, 기원전 280년 이후 이탈리아에 서는 로마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고, 시칠리아에서는 카르타고와 맞서 싸웠 다. 그는 몇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지만, 너무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희생을 많이 치른 승리라는 의미를 가진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은 여 기에서 유래한다.
피우스 3세(Pius III, 1439-1503) 피우스 2세의 조카이며, 1460년에 피우스 2세는 그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족벌주의를 비판 하는 등의 면모를 통해 흠잡을 데 없는 평판을 얻었다. 알렉산데르 6세가 죽 자 교황 선거 회의를 장악하기 위해서 자신의 군대로 바티칸을 포위했다. 교 황에 선출되었을 무렵 그의 건강은 상당히 악화된 상태였다. 즉위식을 가진 직후에 사망했고, 율리우스 2세가 교황에 올랐다.
필로포이멘(Philopoemen, 253-184 기원전) 그리스의 장군으로서 메가폴리 스에서 태어났다. 크레타에서 용병대장으로 활약한 이후에, 기원전 208년에는 아카이아 동맹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통치자인 나비스를 번이나 격파했다. 그는 아카이아 동맹의 정치적 맹주가 되었으나, 메시니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사로잡혀서 처형되었다.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382-336 기원전) 그는 젊은 시절에 3년간 볼트 로 테베에 있으면서 그리스의 문화를 접했다. 기원전 359년에 마케도니아의 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기초를 구축했다. 기원전 338년에 아테네와 테베 연합군을 격파했으며 이듬해 코린트 동맹을 결성하여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잡았다. 그는 기원전 336년 페르시아 원정을 추진하던 와중에 마케도니아 왕가의 내분에 휩싸여 암살당했다.
필리포스 5세(Philippos V, 238-179 기원전)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킨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10여 년 동안 로마를 상대로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다. 그는 유리한 조건으로 로마와의 전쟁을 끝냈으나, 이집트 왕 프롤레 마이오스 5세와의 전쟁을 계기로 로마는 다시 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그는 로마에 패했고 그의 세력권은 마케도니아에 국한되었 다. 그러나 왕국의 내실을 강화한 그는 발칸 지역으로까지 그의 세력권을 넓 히기도 했다. 그는 인기있는 뛰어난 군인이자 통치자였으나, 그의 팽창정책은 일관되지 못했고, 일시적으로 승리했을 뿐이었다.
한니발(Hannibal, 247-183? 기원전) 카르타고의 위대한 장군인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기원전 221년에 26세의 나이로 카르타고 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3년 동안 스페인에서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기원전 219 년에는 로마와 친선 관계를 맺고 있던 사군툼을 함락시켰다. 로마가 이에 대 해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피레네 산 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기원전 218년에는 눈 덮인 알프스를 넘 어 이탈리아로 진격해서 로마 군을 상대로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 선은 점점 교착상태에 빠져들었고,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함으로 써 한니발은 아프리카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기원전 202 넌 자마에서 스키피오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그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는 국내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카르카고의 행정 장관에 임명되어 카르타고 의 부활을 꿈꾸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한니발을 넘겨줄 것을 집요하게 요 구했다. 그는 티레, 에페소스, 크레타를 거쳐 마지막에는 비티니아로 달아났고, 끝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호크우드 경(Hawkwood, Sir John, 1320?-1394) 잉글랜드의 용병 대장이며,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조반니 아쿠토(Giovanni Acuto) 혹은 아우쿠트(Aucut)로 알려졌다. 에섹스 지방에서 피혁업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군인의 길을 걸었는데, 에드워드 3세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용병대장이 되었는데 그는 약 1360년경 백군(軍)으로 알려진 그의 군대를 이끌고 이탈 리아에 가서 1364년에 피사의 장군으로서 피렌체와 싸웠다. 이후 그는 교황과 플라노 공작을 위해서도 싸웠다. 1380년에는 피렌체가 그를 고용했는데, 그 는 은퇴할 때까지 피렌체를 위하여 성실하게 복무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장 군으로 알려졌다.
히에론 2세(Hieron[또는 Hiero] II, 308-216? 기원전) 시라쿠사인들은 하에 론을 시라쿠사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기원전 270년에는 시라쿠사의 왕으 로 선출했다. 기원전 264년에 그의 군대는 마메르티니를 공격했으며, 마메르티 나인들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군사작전을 벌 이고 있던 카르타고의 장군 한노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했지만, 패배하 고 시라쿠사로 철수했다. 기원전 263년에 그는 로마와의 동맹에 동의했으며, 그 대가로 시칠리아의 동남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가 죽을 때까지 이 동맹은 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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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 군주국]
그러나 신생 군주국이야말로 정말로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합니다. 첫째, 군주국이 전적으로 새롭게 생긴 것 은 아니지만, 종래에 있던 군주국에 수족처럼 병합된 경 우(이렇게 병합된 국가를 복합 군주국(principato misto, mixed principality]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국가의 변화 가능성은 모든 신생 군주국이 겪기 마련 인 자연발생적인 난관에서 연유합니다. 즉 사람들이란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으면 기꺼이 지배 자를 갈아치우려고 하며, 이런 믿음으로 인해서 지배자 에게 무기를 들고 봉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착 각에 빠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뒤늦게 자신들 의 상황이 악화된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 황은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또 다른 필연성에서 비롯되 기도 하는데, 신생 군주는 그의 군대를 통해서 또 국가 를 정복하는 데에 따르는 무수히 많은 가혹행위를 통 해서, 항상 새롭게 편입된 신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그 결과 당신은 군주 국을 확장, 병합하면서 피해를 준 모든 사람들을 적으 로 만들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당신이 통치자가 되도 록 지원한 사람들을 애초에 그들이 기대한 만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우애도 유지할 수 없는 상황 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지 원자들에게 강력한 대응책을 쓸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신생 군주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더라 도,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주민들의 호의(favore, goodwill)가 항상 필수적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단숨에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통치하던/역자) 밀라노를 병합할 수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잃고 말았 습니다. 처음으로 루도비코의 군대는 스스로의 힘만으 로도 일거에 루이 12세를 몰아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루이 왕에게 문을 열어주 었던 인민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만큼의 이득을 누리지 못하게 되자, 새로운 군주가 초래한 불편함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나라를 다시 정복한 경우, 좀 처럼 잃지 않게 된다는 것은 상당히 맞는 말입니다. 왜 냐하면 새 지배자는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전 의 반란을 기화로 반역자를 처벌하며, 혐의자를 찾아내 고, 자신의 통치상의 결함을 고치는 데에 더욱 무자비 하고 단호하게 처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루 도비코 공작이라는 자는 처음에는 단순히 국경 부근을 교란하는 것만으로도 프랑스 왕을 밀라노에서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밀라노를 프랑스에게 빼앗기고 난 다음에 재탈환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가들이 연 합하여 프랑스 왕에게 대항함으로써 그의 군대를 패주 시켜 이탈리아로부터 몰아내야만 했습니다. 앞에서 말 한 이유 때문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하튼 프랑스인들은 두 번씩이나 밀라노를 잃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밀라노를 잃게 된 일반적인 이유들에 관해서 는 앞에서 이미 논의하였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로 밀라 노를 잃게 된 이유를 논의하고, 프랑스 왕에게 어떤 해 결책이 있었으며, 그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지배자의 경 우 어떻게 하면 병합된 영토를 프랑스 왕보다도 더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복자가 새로 얻어 본국에 병합한 영토가 (본국과/역자)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동일한 지역(provincia)'에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서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러한 지역이라면 그 영 토를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며, 게다가 그 영 토가 자치(自治)에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면, 특히 쉬울 것입니다. 그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곳을 지배하던 군주의 가문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그밖의 다른 일들에 관한 한, 주민들은 예전 의 생활양식을 유지할 수 있고, 관습상의 차이가 없는 한, 평온한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프랑스에 오랫동안 병합된 부르고뉴, 브르타뉴, 가스코뉴 및 노르망디를 들 수 있습니다. 비록 언어상의 차 이가 약간 있었지만, 그 지역들의 관습은 유사했기 때 문에 여태껏 별다른 어려움이 야기되지 않았습니다. 따 라서 그러한 영토를 병합하여 유지하고자 결심한 사람 은 누구나 다음의 두 가지 정책을 따라야 합니다. 첫째, 예전에 통치하던 군주의 가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둘 째, 그들의 법을 바꾸지 않고 새로운 조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영토와 기존의 군 주국은 가장 빠른 시일 내에 통합되어 한 몸처럼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언어, 관습 및 제도가 다른 지역을 정복하 여 영토로 병합하게 되면 상당한 문제가 야기되며, 이 를 유지하는 데에는 대단히 커다란 행운(fortuna)과 엄 청난 노력이 요구됩니다. 최선의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정복자가 그 지역에 가서 친히 정주하는 것입 니다. 이런 조치를 취하면, 병합된 지역은 더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확보될 것입니다. 그리스에 대한 투르크의 정책이 바로 이러한 정책의 표본입니다. 만약 투르크가 직접 통치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를 확보하기 위해서 취한 그밖의 다른 어떤 정책도 충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지에 가서 직접 살게 되면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알 수 있어 효과적인 조치를 신속하게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고가 일어나서 이 미 해결이 불가능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 성을 알게 됩니다. 더욱이 직접 그 지역에 살게 되면 당 신의 관리들은 신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못할 것 입니다. 또 신민들은 통치자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기 때문 에 만족해할 것입니다. 그 결과, 순순히 행동하는 신민 들은 당신에게 헌신하며, 그렇지 않고 다른 뜻을 품은 자들은 당신을 두렵게 여길 만한 이유를 가지게 될 것 입니다. 그러한 국가를 공격하고자 하는 외국세력은 누 구라도 매우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점을 고려 할 때, 새로운 영토에 정주하여 직접 통치하게 되면, 그 영토를 결코 쉽게 잃지 않을 것입니다. 차선의 다른 해결책은 이른바 정복한 영토의 거점이 될 수 있는 한두 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만 약 그렇지 못하면, 대규모의 무장병력을 주둔시키는 것 이 필요합니다. 식민지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혀 비용이 들지 않거나 아주 적은 비용으로 식 민지를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피해를 보는 사 람들은 새로 온 이주민들에게 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경 지와 집을 잃게 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피해를 보는 자들은 소수의 주민들에 불과합 니다. 더욱이 그로 인해서 피해를 본 자들은 궁핍해지 고 뿔뿔이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군주에게 보복할 엄두 를 내지 못합니다. 그밖의 모든 다른 주민들은 한편으 로는 피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안심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자들처럼 소유물을 빼앗길까 두려워 말썽을 피울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 는 이러한 식민지들은 많은 비용이 들지 않고, 보다 충 성스러우며, 단지 소수의 사람에게만 피해를 주는 데 불 과하다고 결론짓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이로 인해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궁핍해지고 뿔뿔이 흩어져서 군주에게 피해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 들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 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 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 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의 복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식민지 건설 대신에 군대를 파견한다면, 이는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의 모든 수입은 그 지역의 안보에 쓰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 니다. 그 결과, 취득된 영토는 군주에게 피해를 주게 됩 니다. 게다가 그의 군대가 그 영토에 주둔하게 됨으로 써 전체 지역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더 많은 피해를 주 게 됩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이로 인해서 그 지역의 모든 주민들은 군주에게 적대적이 됩니다. 그리고 주민 들은 패배했지만, 자신들의 고향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 기 때문에 위험한 적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모 든 점에서 볼 때, 식민지 건설 정책은 고도로 효과적인 반면, 군사 주둔책은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가 이미 말한 것처럼 자신의 본국과 (풍습이 나 언어가/역자) 다른 지역의 국가를 정복한 군주는 인 접한 약소 국가들의 맹주가 되어 보호자의 역할을 담 당하고, 그 지역의 강력한 국가를 약화시키도록 노력하 며, 어떠한 돌발적인 사태로 인해서 자신과 같은 강력한 외부의 국가가 개입하지 않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야 합니다. 지나친 야심이나 두려움으로 인해서 불만 을 품은 자들은, 역사상 그리스에서 아이톨리아인들이 로마인들의 침입을 유인했을 때처럼, 언제나 강력한 외 세를 끌어들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로마가 침략한 모 든 나라에서는 원주민들의 일부가 로마인들의 침입을 지원했습니다. 통상 강력한 침략자가 어느 나라를 공격 하기만 하면, 모든 약소 세력들이 그에게 모여드는데, 그 이유가 그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던 통치자에게 불만 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사물의 당연한 이치입 니다. 침략자는 별 어려움 없이 이러한 약소 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미 그가 획득한 새로운 권력과 함께 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 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그들이 너무 많은 군사력이나 영향력을 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군대를 그들의 지원하에서 사용함으로써 강력 한 세력을 쉽게 진압할 수 있고 그 나라를 완전히 장악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자는 그 가 정복한 것을 쉽게 잃을 것이며, 그것을 유지하는 동 안에도 무수히 많은 환란과 분규를 겪게 될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이러한 정책들 을 아주 훌륭하게 시행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를 세우 고, 약소 세력과의 우호관계를 (그들의 영향력을 증대시 키지 않으면서도 유지했으며, 강력한 세력을 진압하고, 점령지에서 강력한 외세가 영향력을 얻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적절한 사례로써 저는 단지 그리스의 경우만을 인용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인들은 아 카이아인들 및 아이톨리아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했 습니다. 마케도니아 왕국을 굴복시켰고, 안티오코스 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아카이아인들 이나 아이톨리아인들이 비록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들 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필리포스는 동맹국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간곡히 설 득했지만, 로마인들은 그가 굴복하기 전에는 이를 허용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안티오코스가 강력한 세력으 로 버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어떠한 영토도 그에게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인들은 현명한 군 주라면 누구나 취해야만 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현재의 분규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 날지도 모르는 분규에 대한 배려를 필요로 하며, 특히 미래의 분규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 다. 왜냐하면 분규를 그 최초의 징후부터 감지하면, 처방 을 구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만약 분규를 방치하여 대 책이 너무 늦어지면, 병폐를 치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소모성 열병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이 경우 에 해당됩니다. 그 병은 초기에는 치료하기는 쉬우나 진 단하기가 어려운 데에 반해서, 초기에 발견하여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진단하기는 쉬 우나 치료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일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문제를 일찍이 인지하면(이는 현명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만 이 가능합니다)." 문제가 신속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되어 모든 사람이 알아차릴 정도가 되면 어떤 해결책도 더 이상 소 용이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재난을 미리부터 예견했기 때문에 항상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화 근이 자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이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에게 유리하도록 지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 의 본거지인/역자) 이탈리아에서 필리포스와 안티오코 스를 맞아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선수를 쳐서 그리스에서 그들과 전쟁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로 마인들은 그리스에서 그 두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것을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피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더욱이 로마인들은 우리 시대의 현인들이 늘상 말하는 "시간을 끌면서 이익을 취하라"는 격언을 결코 받아들 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virtú)과 현명함(prudenzia, prudence)에서 비롯되는 이익을 취하 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모든 것을 몰 고 오며, 해악은 물론 이익을, 이익은 물론 해악을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프랑스 왕의 사례로 돌아가서, 우리가 주장했던 것들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왕이 행했는지 검 토해보겠습니다. 저는 샤를 왕이 아니라 루이 왕의 경 우를 논하겠습니다. 루이 왕은 이탈리아에서 영토를 훨씬 더 오랫동안 유지했고, 따라서 그의 행적을 더욱 상세하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다른 영토(앞에서 말한 풍습과 언어가 다른 지역/역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행해야 하는 정책과 정반대 의 정책을 시행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이 왕의 이탈리아 침입은 베네치아인들의 야망에 의 해서 추동되었는데, 그들은 그 침입을 틈타서 롬바르디 아 영토의 반을 획득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루이 왕이 택한 이 결정을 비난할 의도는 없습니다. 왕은 이탈리아에서 발판을 구축하고 싶어했지만, 그곳에서 어떠한 동맹도 맺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오히려 그는 샤를 왕의 처신 때문에 모든 문이 그에게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 습니다)" 맺을 수 있는 동맹이라면 어떤 동맹이든지 받 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른 일에서 실수 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 좋은 결정은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가 롬바르디아를 정복했을 때, 그는 샤를 왕 때문에 실추되었던 명성을 즉각 되찾을 수 있었습니 다. 제노바는 항복했고, 피렌체는 그의 동맹국이 되었 습니다. 만토바 후작, 페라라 공작, 벤티볼리오 공작, 푸를리 백작 부인, 파엔차, 페사로, 리미니, 카메리노, 피옴비노의 영주들 그리고 루카, 피사 및 시에나의 인민 들이 그에게 접근하여 동맹국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제 서야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경솔했음을 깨달 았습니다. 롬바르디아에서 불과 몇 군데의 영지를 욕 심내다가 그들은 프랑스 왕이 전체 이탈리아 반도의 3 분의 2를 차지하도록 만든 꼴이 되었습니다. 만약 루이 왕이 앞에서 제시한 규칙을 따르고 이 모든 동맹국들을 유지하고 보호했더라면, 이탈리아에서의 명 성을 별 어려움 없이 확보했을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많은 동맹국들이 있었 고 동시에 그 동맹국들은 허약하고 일부는 교회 세력 을, 일부는 베네치아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그 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 다가 그는 그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나머지 강대국들로 부터 쉽게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이 왕은 밀라노에 입성하자마자, 교황 알렉 산데르의 로마냐 지방 정복을 도와줌으로써 제가 제 안한 것과 반대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게 다가 그는 이러한 결정이 한편으로 (그의 동맹국들과 그의 품에 자신을 내맡긴 세력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자신을 약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막강한 권위의 근 원인 교회의 영적인 권력에다 많은 속권(俗權)을 보태줌 으로써 교회를 강성하게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습니 다. 그는 첫 번째 실수를 저지른 후 이를 만회하려다가 다른 실수를 거듭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알렉산데르의 야심을 견제하고 알렉산데르가 토스카나 지방의 지배 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자신이 이탈리아로 쳐 들어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27 교회 세력을 강 화시키고 자신의 동맹국들을 상실하는 것으로도 그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폴리 왕국을 탐냈기 때문에, 그 왕국을 스페인 왕과 분할했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는 루이 왕이 거의 단독으로 이탈리아를 지배 했으나, 이제 그는 이탈리아의 야심가들이나 그에게 불 만을 품은 불평분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지배자를 끌어들인 셈이 되었습니다. 루이 왕은 자신에 게 충성스럽게 진상할 수 있는 왕을 나폴리 왕국에서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자신을 몰아낼 수 있는 자를 앉혀놓고 말았 습니다. 영토 확장의 욕구는 매우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욕구 이며, 유능한 자들이 이를 수행할 때 그들은 항상 칭송 받으며, 칭송받지 못하는 경우에도 적어도 비난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취할 역량이 없는 자들이 경우를 가 리지 않고 이를 추구하려고 할 경우, 그것은 비난을 받 을 수 있는 실책이 됩니다. 따라서 프랑스 왕이 자신의 군대만으로 나폴리 왕국을 공격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럴 수 없었다면, 그는 그 왕국을 분할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비록 그가 롬바르디아를 베네 치아인들과 분할함으로써 이탈리아에서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용서받을 수 있었다고 하더 라도, 나폴리 왕국을 분할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 었기 때문에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300 그렇다면 루이 왕은 다음의 다섯 가지 실수를 범한 셈입니다. 곧 약소 국가들을 섬멸한 것. 이탈리아에서 이미 강력했던 군주의 세력을 강화시킨 것, 이탈리아 에 매우 강력한 외세를 끌어들인 것, 직접 통치하지 않 은 것(본인이 거주하지 않는 것/역자), 그리고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 도 그가 여섯 번째의 실수, 곧 베네치아인들을 격파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생애에서 이러한 실책들로 인해서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교회 세력을 강화하지 않았거나 스페인 왕을 이탈 리아에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베네치아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합리적이고 필수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두 가지 결과가 초래된 이상, 그는 결코 베네치아의 몰락을 용인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베네치 아인들은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에 항상 다른 세력들이 롬바르디아에 개입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 다. 그들은 자신들이 롬바르디아의 패자(覇者)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결코 개입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세력들도 롬바르디아를 단지 베네치아에 넘겨주기 위해서 프랑스 왕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했을 리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프랑스와 베네치아 양국을 상 대로 싸울 만한 용기도 없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루이 왕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냐 지방을 알렉산데 르에게, 나폴리 왕국을 스페인에게 양보했다고 대꾸한 다면, 저는 앞에서 제시했던 주장으로 응수하겠습니다. 즉 사실상 전쟁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 에게 불리하게 지연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화근이 자라는 것을 허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왕이 교황과 맺 은 약속(그의 결혼 취소를 허용하고 루앙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것에 대한 대가로 로마냐 지방에서 의 전쟁에서 교황에게 협력하기로 한 약속)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저는 나중에 "군주는 어 디까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에 관해서 논의할 때 그 주장에 대해서 답변하겠습니다. 루이 왕은 영토를 점령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들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롬바르디 아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전혀 놀 랄 일이 아니며 의당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데르 교황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를 통칭했 덴) 발렌티노 공작이 로마냐 지방을 점령하려고 전투 를 수행하고 있을 때, 저는 낭트에서 루앙의 추기경과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루앙의 추기경이 제 게 이탈리아인들은 전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저는 프랑스인들은 국가 통치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대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국가 통치술을 이해 했더라면, 교회가 그렇게 큰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결 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험에 비추어보더라도 여기 이탈리아에서 교회와 스페인 왕 의 강대한 권력은 프랑스 왕에 의해서 초래되었으며 그들이 프랑스 왕을 몰락시킨 것은 명백하기 때문 입니다. 이로부터 항상 또는 거의 항상 유효한 일반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즉 타인이 강력해지도록 도움을 준 자는 자멸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세력은 도움을 주는 자의 술책이나 힘을 통해서 커지는데, 이 두 가지는 도움을 받아 강력해진 자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군주론 지은이 : 니콜로 마키아밸리
옮김이 : 강정인,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