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ttle of Myeongnyang was a significant historical battle fought on September 16th, 1597, between General Yi Sun-shin and a large fleet of Japanese ships. Despite the overwhelming numbers of the enemy forces, Yi Sun-shin utilized the narrow waters and strong currents of the Myeongnyang Strait to overcome the numerical disadvantage. With only 13 ships, he successfully defeated over 100 Japanese ships, as the changing tidal streams led to the Japanese forces' defeat. This victory demonstrated Yi Sun-shin's tactical genius and greatly boosted the morale of the Joseon navy.
명량대첩
1. 밀집된 방패가 견고하다
1597년 9월 16일 아침, 이순신은 일본 전선 200여 척이 어란진을 출발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전날인 9월 15일 이순신은 대규모 일본군 함대가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벽파진에 있던 조선 수군 전 함대를 해남 땅 전라우수영으로 모두 이동시켰다. 전 함대라고 해봐야 판옥선 13 척이 전부였다. 거북선도 없는 판옥선만으로 구성된 조선 함대, 이순 신은 벽파진에서 어둠을 틈타 은밀히 함대를 우수영으로 옮겼다. 우 수영은 명량해협 바로 뒤에 있는 조선 수군 주둔지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이순신은 대규모 적선이 서진(西進)해 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은 것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이순신은 즉각 전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결전을 위한 출동이었다. 회령포에서 12척의 판옥선을 인수한 이래, 이순신은 서 쪽으로 서쪽으로 천천히 진을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관 옥선 한 척을 증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이순신은 대규모 접전 보 다는 적의 척후선이나 아군을 급습해 오는 소규모 적을 맞아 싸워왔 다. 그러나 그날의 이순신 결정은 달랐다. 일본군의 예봉을 피해 아군 함대를 물리는 대신 나가 싸울 결정을 내렸다. 이순신의 이 결정에 조선 수군은 긴장했다. 첩보에 따르면 적선은 130여 척, 어떻게 그 많은 적과 맞서 싸운단 말인가? 이순신은 인근의 어선들에게도 출동 명령을 내렸다. 민간 어선들을 직접 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수군의 배후에 배치시키면서 적에게는 아군의 전선 이 많다는 것을 내보이고 조선 수군에게는 힘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배수진인지도 몰랐다. 우리가 무너지면 저 바다 위의 민간인도 모두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수군들에게 은연중 강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명량해협을 선택했다. 13척의 전선으로 대규모 적을 막을 수 있는 곳, 그곳을 명량으로 선택한 것이다. 명량은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물길, 길이 1.5킬로미터에 좁은 곳은 폭이 500여 미터가 채 안 되는 곳이었다. 십 리 밖에서도 조류 흐르는 소리와 소용돌이치는 물 울음 소리가 들린다 하여 붙은 이름이 바로 명량, 울돌목인 것이다. 드디어 조선 수군이 출정했다. 13척의 판옥선 뒤로는 민간 어선들이 뒤따랐다. 전투 소식은 인근 백성들에게도 퍼졌다. 오로지 이순신에게 의지하던 백성들이 진도와 해남의 육지에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이들은 마음 졸이며 조선과 일본군의 한판 승부를 지켜볼 참이었다. 일본 군이 몰려온다면 응당 피난을 가야 했으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움직이 지 않았다. 만약 이순신이 무너진다면 이 나라 땅 어디를 가도 안전하 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쫓기다가 끝내 죽임을 당할 바에 야 이순신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진도와 해남의 육지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백성들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믿기 어려운 장면이 울돌목에 펼쳐지고 있었다. 울돌목 격류 위에 늘어선 조선 판옥선은 고작 13척, 조류를 타고 울 돌목으로 접근하는 일본 배는 얼핏 보아도 100여 척이 넘었다. 그 뒤 로도 얼마나 많은 배가 있는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일본 함대 는 그야말로 바다를 새까맣게 메우며 울돌목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연합 함대였다.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하키, 구루지 마 미치후사 등, 이름난 수군들이 연합 함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도도 다카도라는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에 참패했고 구루 지마 미치후사는 당항포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지마 미치유키의 동생 이었으며 구키 요시하키는 안골포해전에서 이순신에 패하고 걸어서 도망간 경험이 있었다. 모두가 이순신에게 당한 패전을 설욕하겠다는 투지가 넘쳤다. 이제 그들은 조선 수군, 이순신 함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13척의 이순신과의 전투는 전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10배 나 많은 군선이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조선 함대는 저절로 무너질 것 이라 여겼다. 꼭 두 달 전 7월 16일, 자신들이 전멸시켰던 조선 수군, 그 패잔병들이 아닌가? 아무리 이순신이 신출귀몰하더라도 결코 질 수 없는 전투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명량으로 몰려들었다.
격류 위에 홀로 서다
일본군은 명량해협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어란진을 아침 일찍 출발했다. 이때는 조류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였다. 이들이 명량해협 입구에 도착할 무렵, 이순신은 지금의 진도대교 근처에서 일 자신을 형성한 채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살은 거셌다. 목포 쪽으로 흐르는 역류는 자꾸만 조선 함대를 뒤로 밀려나게 했다. 역류 위에 정 지해 있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닻을 내린 채 노를 저으며 대형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역류는 거셌다. 일부 군사들과 장 수들은 차라리 배가 뒤로 밀리는 것이 다행으로 여겼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순신은 긴장하는 빛이 역력한 군사들에게 말했다.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능히 천 명을 막아낼 수 있느니라!" 뒤이어 이순신은 청사에 남을 당부를 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것이요. 살기를 작정하고 싸우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라!“
군사들이 함성을 올리며 이순신의 명령에 호응했 지만 이순신은 느낄 수 있었다. 오직 한 줄, 등이 시렸 다. 지원군도 매복군도 없는 오로지 13척만의 일자 진, 이것으로 저 노도 같은 수백 척의 왜군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군사는 없다는 것을 이순신은 느낄 수 있 었다. ”집중, 오로지 집중만이 희망이다!“ 드디어 적선의 앞머리가 명량해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다를 가득 메운 대함대였다. 조선 수군들 사이에는 얕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것은 절망에 갇힌 자가 내쉬는 마지막 숨소리 같은 신 음이었다. "전 함대! 총통을 준비...... 방포하라!" 이순신의 대장선에서 10여 문의 함포가 발사되었다. 장군전 과 단석 등은 곧 선두의 적선에 명중했다. "불화살을 쏴라!" "조란탄을 준비하라!" 이순신은 연신 명령을 내렸고 대장선의 수군들 은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이순신이 옆을 돌아본 순간, 나머지 조선 함대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 미 적을 보는 순간 주춤주춤 물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좁은 명량해협의 격류 위에서 오로지 이순신의 대장선 한 척만이 적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적선은 한꺼번에 4, 5척씩 덤벼들었다. 이순신 대장 선은 마치 이리떼의 공격을 받는 거대한 코끼리처럼 버텨나갔다. 가까이 접근한 적선에서 조총과 화살이 비오듯 날아오기 시작했다. 수군들이 머리를 숙이는 순간을 틈타 배를 더욱 접근시킨 일본군은 이 순신의 배로 올라타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이순신의 대장선이 높아 쉽게 기어오르지는 못했다. 뱃전에 붙어 기어오르려는 일본군을 향해 조선 수군들은 장병겸을 휘둘렀다. 긴 자루 끝에 커다란 낫이 붙은 장병겸은 일본군의 목을 낙엽 베듯 베어 넘겼다.
"배를 좌현으로! 방포하라! 우현 사수 발사하라!" "정면 적선, 충파하라!" 이순신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을 보며 정신없이 싸웠다.
물살이 기적을 만들다
뿌연 포연 속에 뒤처져 있는 아군 함대가 보였다. 저들이, 저들이 합 세해야만 이길 수 있거늘. 이순신은 얘가 탔다. 육지의 언덕과 산에서 바라보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장선을 남겨두고 뒤처져 있는 조선 함대에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같은 시각, 거제 현령 안위는 자신의 배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 장선만 적선에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 나머지 조선 판옥 선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다. 특히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더 멀리 물러나 있었다. 대장선을 보호하고 호위해야 할 중군장 김응함의 배도 물러나 있었다. 순간 거제 현령 안위는 대장선에서 오른 깃발을 보 았다. 그것은 대장선 호위군인 중군장을 부르는 깃발이었다. 적선에 둘러싸인 대장선에서 중군장 초요기가 오른 것이다. "노를 저어라! 대장선에 접근한다! 장군을 구하리라!" 안위는 명령했다. 자신이 중군장은 아니지만 장군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안위 배의 격군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안위의 배 가 이순신에게 접근하자 산 위의 피난민 사이에서는 함성이 올랐다. 안위는 곧장 적선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화살과 총통을 쏘면서 이순신 에게 접근했다. 이순신 대장선에 숨통이 트인 것이다. 이순신은 안위를 노려보았다. "안위야, 네가 도망가면 어디로 갈 것이더냐? 군법으로 내 손에 죽 으려느냐? 적과 싸우다가 죽으려느냐?" “장군! 소장, 한 놈이라도 베고 죽도록 해주십시오! 돌격하라!” 안위의 배가 일본군 함대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이순신 대장선도 전투를 개시했다. 그때였다. 뒤처져 있던 조선 배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배가 적선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노를 젓지 않는 데도 배가 이순신과 안위가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명량해협의 한가운 데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적의 시작이었다. 거세게 조선 배를 뒤로 밀고 가던 조류 가 천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조류는 6시간씩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방향을 바꾼다. 달의 인력과 지구의 자전 때문인데 하루에 두 번 그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울돌목 바다가 몸을 뒤채더니 물살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군에게 순류이던 물살이 갑자기 거꾸로 바뀌면 서 역류가 되었다. 일본 함대의 선두에 섰다가 파손된 배들이 일본군 함대 진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배의 잔해와 파편들이 일본군 배 에 부딪혔다. 동시에 조선 함대 측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총통이 불을 뿜었다. 장군전이 날아가 꽂히고 단석과 비격진 천뢰가 날았다. 주먹만한 쇠공이 한꺼번에 수백 개씩 날아가 일본군 갑판을 뒤엎었다. 전황이 바뀌고 있었다. 일본군은 역류에 휩쓸려 전 함대가 주춤거리고 있었고 그 틈을 타 서 조선 판옥선이 접근, 치밀하게 포격을 해나갔다. 일본군 장수들은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바다를 가득 메운 파편과 잔해, 그리고 역류를 뚫고 전진하기란 불가능했다. 명량 바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동남쪽 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일본 함대는 등용문을 오르지 못한 채 숨을 거둔 거대한 이무기처럼 조류에 떠밀려 갔고 조선 함대는 마치 거대한 공룡의 급소에 침을 놓듯 포격을 가했다. "적장이다! 적장이 물에 빠졌다!" 조선 진영에서 함성이 올랐다. "건지거라!" 이순신은 적장의 시체를 건졌다. 그러고는 장대 끝에 높다랗게 매 달게 했다. 기록에는 '마다시'라는 적장이라 했지만 구루지마 미치후 사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해적집단인 '구루지마'가 문의 형제, 구루지마 미치유키와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당항포와 명량 에서 이순신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구루 지마의 죽음으로도 치욕스러운데 그 시체까지 빼앗긴 일본군은 급격 하게 전의를 잃어갔다. 후퇴하려 했으나 후퇴도 쉽지 않았다. 뒤를 가 득 메우고 있는 일본군 함대 때문이었다. 마침내 긴 시간이 끝나고 모든 것이 흘러갔다. 살아남은 적은 더 빨 리 남동쪽으로 흘러갔고 적의 시체와 적선의 잔해들은 천천히 명량 바다를 벗어나 흘러가고 있었다. 이순신은 아직도 몸을 뒤틀고 있는 명량의 물살을 내려다보았다. 기적이었다. 이 물살 위에서 적을 맞고 적을 물리친 것, 그것은 바로 기적이었다. 홀로 이 급류 위에 서서 몰 려오는 적을 보았을 때의 그 아득함이 다시 떠올라 이순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2. 힘을 집중하라
13척의 배로도 싸울 수 있다
이순신이 명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물길이 좁아 아무 리 적이 많이 몰려온다 해도 실제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적선은 10여 척 내외로 제한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둘째, 조류의 방향이 아군에게 유리해진다면 쉽게 적을 밀어붙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셋째, 적 에게 포위될 염려가 없었다. 좁은 물길 때문에 적은 오로지 정면에서 만 접근해 올 것이다. 배후 걱정 없이 정면의 적만 상대하면 되었던 것 이다. 넷째, 암초가 많은 지형이라 물길을 잘 아는 조선 수군이 유리하 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적 열세의 아군 전력을 가장 잘 집 중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이순신은 명량을 선택했던 것이다. 사실 이순신은 12척의 판옥선을 인수하면서 명량을 생각했다. 그래 서 그는 회령포에서 어란진 벽파진을 거쳐 천천히 서쪽으로 물러나면 서 적을 기다렸다. 특히 이순신은 명량과 지척의 거리인 벽파진에서 보름 이상을 머물렀다. 그것은 기다림이었다. 그 기간 동안 판옥선 한 척을 더 보강하기도 했지만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기다리며 적을 명량 으로 유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래 전 이순신은 명량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1591년 진도 군수로 발령 받았을 때 명량을 보았으며 이후 1596년 도체찰사 이원익이 전 라도 일대를 순시할 때 그를 수행하여 명량에 다시 와 보았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그는 명량을 떠올렸고 선택했다. 그곳이야말로 조선 수 군의 힘을 집중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고금의 전투에서 힘을 집중하는 것은 바로 승부와 연결되었다. 아무리 많은 병력을 갖고 있어도 그 힘이 분산된다면 전력을 효과적으 로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전쟁 영웅들이 적의 힘은 분산시키 고 아군의 힘은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적의 힘을 분산시키 기 위해 위계를 사용하고 거짓으로 후퇴했으며 뛰어난 기동력으로 전 선을 분산시켰다. 그런 연후에 아군의 힘을 집중시켜 적의 가장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가 승리를 움켜쥐었던 것이다. 이름난 장군들 중에도 힘의 집중 원리를 가볍게 여겨 패배한 경우 가 적지 않다.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로마 군을 짓밟던 카르타고의 한 니발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한니발은 그의 형제에게 군대를 나누어주 어 진격하도록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군의 병력이 전투 단위로 내 려오면서 절반으로 줄어들게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초반의 승승장 구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는 로마의 네로 장군에게 대패했다.
힘을 집중하는 데도 원리가 있다
반면, 이 힘의 집중 원리를 잘 이용한 장군들은 전투와 전쟁을 승리 로 이끌 수 있었다. 나폴레옹 역시 이 힘의 집중 원리를 누구보다 신봉 하던 정복자였다. 그는 적이 주둔하고 있는 두 부대 사이로 기마병을 앞세워 질풍같이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적의 부대를 분리시킨 후, 차례 로 격파해나갔다. 나폴레옹 부대는 기마병을 중심으로 힘이 집중되어 두 부대 사이의 약한 고리를 끊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적의 부 대가 연합하지 못하도록 한 후 상대를 차례로 격파했던 것이다. 뾰족한 창날처럼 적진을 깊숙이 찌른 후 공격함으로써 적의 전력을 절반 이하 로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에도 충분했다.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 역시 이 힘의 집중과 분산의 원리를 전장 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는 빠른 몽골 기마병의 기동력을 이용, 적의 전 선 여기저기를 공격하면서 상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런 다음 주력 군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마침내 적진을 돌파하는 전법을 즐겨 사용했다. 힘의 집중 원리는 이순신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방어전에서도 위력 을 발휘했다. 마라톤의 기원이 된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군은 약 1만 5,000명, 아테네 군은 1만 1,000명, 병력뿐만 아 니라 군사 개인의 전투력 면에서도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압도했다. 누가 보아도 공격하는 페르시아의 낙승으로 보였다. 바로 이 순간 아테네군은 기발한 방어 태세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자신의 방패로 자신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도 함께 보호하 도록 했던 것이다. 즉, 방패의 절반은 자신을 가리고 나머지 절반은 옆 군사를 가리게 했다. 이렇게 방패를 겹치게 하자 군사들은 더욱 밀착 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군이 공격을 해 와도 이 밀집 대형은 흩어지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은 6,000여 명이 전사했고 아테네 군 은 200명이 희생, 방패를 붙인 아테네 군의 대승이었다. 힘의 집중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이런 힘의 집중 원리를 체득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대 중국 방어 전략은 농성(籠城) 전략이었다. 견고한 성을 쌓고 대군을 맞아 굳건히 지키는 전략을 즐겨 사용했다. 성이라는 좁은 지역에 모 든 전력을 집중한 채 적을 맞았던 것이다. 이는 수·당의 대군을 효과 적으로 막아냈다.
전략이 필요할 때, 지금 바꿔라
초등학교 시절, 다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낸 사람이 있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하고 미술대회나 백일장 같은데 나가서 심심찮게 상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러한가? 여전히 팔방미인인가? 혹시 라도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건 아닌가. 틀림없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덤볐는데 번번이 결과가 시원찮은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틀림없이 힘이 분산되었을 것이다. 이것도 찔끔 저 것도 찔끔, 아니라고 부정할지 모르지만 정말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한 군데 집중하지 못한 것이 패착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바 꿔야 한다. 지금이라도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전술적으로 힘을 집중해 야 한다. 그저 그런 상품 백 가지보다 한 가지 일류 상품을 만드는 회사가 살 아남는 세상이다. 그것도 갈수록 더욱 세분화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에도 승용차 전문 회사가 있고 지프형 전문 회사가 있 다. 이것저것 문어발처럼 벌였다가 그 발이 하나씩 잘려나가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지 않았던가, 음식점도 중국형보다 일본형이 각광받고 있다. 작은 음식점의 차림표가 100개가 넘는 중국형과 서너 가지 전문 화된 메뉴로 승부하는 일본형, 어느 음식점의 미래가 밝겠는가? 분산된 힘은 더 이상 힘이 아니다. 물론 분산해야 할 시점도 있을 것 이다. 때에 따라서는 힘을 분산, 시기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 나 이것도 결국은 집중을 위한 준비 단계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을 선택한 이유, 그것은 조류를 이용하려는 이 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명량이야말로 아군의 힘을 저절로 집중시킬 수 있는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아무리 말로 조선 함대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려봐야 제대로 먹혀들었겠는가? 이순 신은 힘을 분산하려야 할 수 없는 곳을 선택했던 것이며 여기에 위대한 전략가로서 그의 진면목이 있는 것이다. 부디 집중하라! 힘과 전력을 분산시키지 마라. 나 자신의 능력도 분산시키지 마라. 방패를 붙이면 더욱 견고하다.
절이도해전
[끝까지 포용하라]
1598년 7월 18일, 이순신 함대가 완도의 고금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 전 선 100여 척이 고흥의 녹도를 침공했다. 당시 이순신은 85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10개월 전 명량대첩 때 의 12척에 비하면 엄청난 함대였다. 여기에는 이순신의 독려와 조선 수군의 노력 외에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숨어 있었다. 일본군도 100여 척의 함대 를 동원, 고금도에 주둔하고 있는 이순신 함대를 노리고 녹도를 먼저 공격해 올 정도로 전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즉각 함대를 출동, 고흥반도와 장흥 사이에 있는 금당도에 진을 쳤다. 그러고는 녹도와 금당도 사이의 절이도에 척후선을 파견, 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이 출동에는 진린의 명나라 수군도 함께 출전했다. 다음 날 새벽, 100여 척의 일본군 전선이 금당도의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 해 녹도를 출발했다. 척후장 녹도 만호 송여종이 이를 즉시 이순신에게 알렸 고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절이도 앞바다에서 일본군과 조우, 교전을 벌였 다. 이 교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50여 척을 불태웠다. 그리고 적의 수급 71 개를 냈다. 빛나는 전과였다. 이때 명나라 도독 진린은 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대신 군사들과 멀찍이서 관 망만 한 것으로 전한다. 문제는 해전이 끝난 다음 벌어졌다. 전공이 필요했던 진린은 이순신에게 일본군 수급을 요구했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수급 40개, 또 다른 명나라 장수에게 수급 5개를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26개를 베었다고 장계에 올렸다. 그런데 이 사실이 그만 문제가 되고 말았다. 명나라 안찰사가 이 사실을 알 게 된 것이다. 안찰사는 조선 조정에 사실 규명을 요구했다. 이에 이순신은 두 개의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즉 하나는 가장계(거짓 장계)로 진린이 수급 40개 자신은 26개를 수습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조선 조정이 명나라 안찰사에게 보여주어 진린이 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이었다. 또 하나는 실장계(진짜 장계)를 올려 진린에게 수급을 탈취당한 사실을 조 정에 알렸다. 이 실장계는 조선 수군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 다. 조선 장수와 수군들은 전투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명나라 도독이 수 급을 40개나 요구하는 것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순신은 실장계로 보고하는 것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를 고려했던 것이다. 절이도해전, 빛나는 전과와 함께 오만불손한 지원군 장수까지 포용한 이순신의 포용력이 빛나는 전투였다.
1차 예교해전
[행동으로 보여라]
1598년 9월 20일, 이순신과 명나라 진린의 연합 함대는 광양 앞바다의 유도 에 도착했다. 그리고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했다. 본국으 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던 일본군은 각지에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 다.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이들의 철수를 막기 위해 유도에 진을 치고 예교성 공략에 나섰 다. 다음 날 9월 21일 다시 출전, 그러나 적의 척후선 한 척을 나포하는 전과에 그쳤다. 예교성의 지형을 이용하여 굳건히 농성만 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음 날 9월 22일의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약 일주일 동안 휴식을 취하며 전황을 살핀 이순신은 10월 2일 다시 예교성 공격에 나섰다. 이날의 전투는 치열했다. 일본군은 전선을 신성포라는 포구에 정박시켜놓고 그 앞에 목책을 설치해 두고 있었다. 조선 수군들이 목책 제거에 나설 때마다 조총으로 집중 사격을 했다. 포구에 배를 감추고 그 앞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은 웅천해전 때와 양 상이 같았다. 거제 장문포 전투 때는 일본군들이 뗏목으로 장애물을 설치하여 나름대로 효과를 보기도 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오전 6시부터 정오 무렵 썰물 때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 이순신 휘하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그리고 29명의 수군이 전사 했다. 부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 휘하의 단위 지휘관과 군관이 전사한 것이다.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한산도 안골포 등의 해전에서도 지휘관이 전사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지휘할 때는 그랬다. 그만큼 이날의 전 투는 치열했고 힘들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이렇게 고전한 데에는 명나라 육군 유정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명나라 육군은 전투가 벌어졌는데도 예교성을 공격할 생각은 않고 멀찍이서 관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을 바라본 이순신의 울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직접 전투를 참관했던 이덕형은 명나라 제독 유정이 공격 명령도 내리지 않 고 후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 싸움은 강 건너 불 구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까지 전투를 수행한 이순신, 그는 어쩌면 명나라 제독 유정에게 전투를 통해 자 신의 간절함을 보여주려 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다음 날 유정은 이순신에게 서한을 보내 예교성을 함께 야습하자고 했다. 행동으로 보여준 이순신에게 감화를 받은 것일까.
예교해전
1. 승리는 굴욕의 눈물을 먹고 자란다
1598년 10월 3일, 이순신의 조선 함대는 순천 앞바다 유도에 임시 로 주둔하고 있었다. 이미 계절은 늦가을, 바닷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해질 무렵, 1만 6,000여 조선 수군이 바닷가에 정렬했다. 또다시 출전 명령이 내린 것이다. 목표는 순천에 있는 예교성. 지난 9월 20일 이후 다섯 번째, 명나라 제독 유정이 전투를 외면했던 다음 날이었다.
전열을 가다듬고
"전군 승선하라!"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조선 수군들은 각자 자신의 판옥선에 올랐다. “닻을 들어라” 85척의 판옥선에서 물기 머금은 거대한 낮이끌어 올려졌다. "돛을 올려라“ 곧이어 각 판옥선의 돛이 오르고 이내 돛은 팽팽하게 바닷바람을 안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천천히 함대를 순천을 향해 항진시켰다. 이 순신은 청사진을 펼친 채 항진하는 조선 함대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85척의 함대는 지난 일 년, 그와 조선 수군의 피담의 결실이었다. 기 적 같은 승리를 일군 명량해전 이후 일 년여, 이순신은 혼신을 다해 조 선 수군을 재건했다. 명량해전 직후 이순신은 함대를 목포 앞 보하도 로 옮겼다. 보화도에 수군 기지를 건설한 후 전선 건조에 박차를 가했 다. 보화도 주둔 약 4개월 동안 이순신은 30여 척의 판옥선을 건조했 다. 한겨울 동안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어느 정도 군세가 회복되자 이순신은 기지를 완도의 고금도로 옮겼 다. 그것이 1598년 2월의 일이었다. 이 무렵 전남 순천에는 일본군 고 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고 있었다. 사실상 적의 본거지였다. 고흥의 고금도에서 이순신은 약 5개월 동안 다시 조선 수군의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여기에서 이순신은 40여 척의 판옥선을 더 건조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조선 수군은 판옥선 85척의 당당한 함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조선 함대 옆에는 또 다른 함대가 항진하고 있었다. 대선 25척과 중선 70여 척의 대함대였다. 그들은 도독 진린이 지휘하는 명 나라 수군이었다. 명나라 수군, 그들이 조선군과 연합 작전을 펼치기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598 년 명나라 군이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중 명나라 수군은 도독 진 린을 지휘관으로 5,000여 병력이 이순신 진영에 합세했다.
또 하나의 짐, 명나라 군
그러나 명나라 수군의 합세는 이순신에게 또 하나의 짐이었다. 명 나라 도독 진란은 매우 오만 불손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조 선의 지방관을 구타하기도 했으며 벼슬아치의 목에 새끼를 매고 끌고 다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명나라 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전 초 부터 그들은 육해군을 막론하고 조선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 약탈 살인 방화 폭행이 수도 없이 자행되었다. 진린의 명나라 수군 역시 마 찬가지였다. 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은 모두 조선군의 부담이었다. 처음 진란을 맞이했을 때 이순신은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진련은 흡족해하는 듯했다.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다. 조선 수군의 군량미를 풀어 명나라 군사를 먹였다. 조선 수군은 굶주려도 명나라 군은 든든히 먹였다. 조선 수군 사이에는 불만의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묵묵히 명군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다. 만에 하 나 명나라 군사와 진린이 전투를 피하거나 이순신의 활동을 제약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이순신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었다. 스스로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시간이 갈수록 명나라 군의 약탈 행위는 도를 지나쳤다. 인근 백성 들의 원성이 높았다. 명나라 군사들이 조선군에게 가하는 행패도 날 로 심해졌다. 마침내 이순신은 결심했다. 그는 명나라 군 주변의 조선 군 막사를 모두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린이 이순신에게 연유를 물었다. "소국(조선)의 백성들은 천장(명나라 군의 대장 : 진린 도독)이 오자 부모처럼 우러렀소. 그러나 지금은 천병들의 노략질이 심해 모두 도망가려 하니 대장인 나 혼자 남을 수 없어 나 역시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것이오." 그러자 진린은 명나라 군사들 중에 약탈 행위가 심했던 군사를 처 형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이즈음 고흥의 절이도로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명량해전 이후 본격 적인 해전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적선 50여 척 을 불태우고 적의 머리 70여 개를 베었다. 대단한 전과였다. 이제 조 선 수군이 완전히 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수습한 적의 수급 중에서 40여 개를 진린에게 주었다. 이 때 진린의 함대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멀리서 참관만 한 것으 로 전한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그에게 수급을 주면서 달했던 것이다. 명목상의 조·명 연합군 작전권은 도독 진린에게 있었다. 그가 협조 하지 않는다면 이순신의 행보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기에 이순신은 장 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린을 회유하기 위해 조선 수군보다 더 많은 수급을 주었던 것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으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진린에게 바친 전공, 그것은 조선 수군 목숨의 대가였던 것 이다.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그러던 1598년 8월, 드디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일대를 풍 미하던 풍운아요 조선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흉인 그도 세월을 이기 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영화가 이슬 같다는 절명시를 남긴 채 도요토 미 히데요시는 죽었다. 그는 죽으면서 조선에 있는 모든 일본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전황은 급박하게 변했다. 이제 일본군에게는 안전철 수라는 과제가 생긴 것이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순천 의 예교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선 100여 척에 1만 5,000여 병력이었 다. 이들도 철수를 서둘렀으나 문제는 바다를 봉쇄하고 있는 이순신 이었다. 더구나 명나라 육군 유정부대까지 순천 예교성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제 고니시 유키나가의 운명은 끝장난 것처럼 보였다. 명나 라 육군과 조·명 연합 수군이 합동으로 예교성을 친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나 명나라 지휘부의 태도는 애매했다. 어쩐 일인지 명나라 육 군 제독 유정은 순천성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진린 또한 이순신 의 출전을 은근히 방해하고 있었다. 당시 진린의 수군은 병력 5,000여 명에 대선 25척, 중선 70여 척이었다. 그러나 배의 전투력은 조선 판 옥선에 비해 형편없었다. 진린은 자신의 군세로는 조선 수군을 제압 하면서 전투를 주체적으로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더구나 앞 선 전투에서 수급 40여 개를 얻었는데, 그만한 전과를 올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명나라 군은 차라리 일본군이 그냥 철수하는 것을 원했는 지도 모른다. 명나라 육군이 전투에 소극적인데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예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치기 위해 출전을 감행했다. 1598년 9월 20일, 21일, 22일, 그리고 10월 2일, 그리고 오늘 10월 3 일의 출전까지. 그러나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은 번번이 협공 약속을 어겼다. 마지막 전투에서는 아예 예교성에서 철수를 해버렸다. 육군 과의 협공이 없는 상태에서 전투는 힘겨웠다. 드디어 저 멀리 어둠 속에 솟아 있는 예교성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일본군 척후선 몇 척은 조선 함대를 보자마자 예교성으로 뱃머리를 돌려 퇴각해버린 후였다. 이순신은 새삼 예교성을 바라보았다. 예교 성은 어둠 속에서 거만하게 솟아 있었다. 예교성은 천혜의 요충지였다.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간 곳의 높 은 언덕에 예교성은 자리 잡고 있었다. 예교성은 높고 바다는 낮았다. 더구나 예교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얼핏 수군이 공격하 기 좋아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예교성을 둘러싼 바다가 문 제였다. 이 바다는 얕고 갯벌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 함대는 밀물 때만 공격하고 물이 빠지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절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원 거리 사격으로 대항했다. 전선은 예교성 옆에 호를 파고 깊숙이 감춰 두었다. 따라서 이순신 함대는 일본 전선에 직접 공격하기 위해서는 적진 깊숙이 전진해야 했다. 육지의 공격을 감수하면서 적선을 공격 해야 했던 것이다. 밀물 때를 맞춰 쳐들어갔다가 썰물이 되면 후퇴하 는 지리멸렬한 전투가 그동안 계속되었다. 과연 명나라 육군 유정 제독이 약속대로 협공을 해줄 것인가?' 10월 3일, 유정은 육지에서 공격하겠으니 조명 연합 수군도 바다 를 통해 공격하라는 연락을 해왔다. 이순신은 이 약속을 믿고 출전했 다. 한편 이즈음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과 수군 도독 진린 사이에는 보 이지 않는 알력이 있었다. 즉 누가 더 많은 전공을 세우는가를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린은 유정보다 먼저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고 싶어 했다. 이순신은 이것을 경계했다. 이순신은 진 린에게 예교성 앞바다는 갯벌이 넓으므로 지나치게 깊숙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깊숙이 들어갔다가 썰물을 맞춰 빠져나오지 못 하면 전함들이 갯벌 위에 얹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에게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고 충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진린은 어쨌든 상륙해서 유정보다 먼저 예교성으로 들어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을 생각뿐이었다.
명나라 군의 위기, 그러나 구해내야 한다
"전 함대 공격하라!" 드디어 이순신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전투는 오후 8시경부터 자정 까지, 약 네 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조선 수군은 용맹하게 싸웠다. 이 순신 함대의 포격이 예교성 곳곳을 파괴했다. 심지어 고니시 유키나가 가 머물던 천수각까지 조선군의 장군전이 파괴했다. 일본군의 저항도 필사적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싸움이었다. 이제 일본군은 살아남 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순신은 적의 철수를 막기 위해서는 적선을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가 없는 그들은 예교성에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올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적선을 파괴하라! 적선을 끌어내라!“ 조선 함대 일부가 일본군의 전선이 정박하고 있는 신성포로 접근했 다. 신성포는 예교성 옆에 있는 깊숙한 포구였다. 일본군은 포구에 진 지를 설치하고 저항했다. 조선군은 포구와 예교성의 협공을 받으면서 도 끈질기게 적선을 향해 접근했다. 그리고 포격으로 10여 척의 적선 을 파괴했다. 그때 명나라 도독 진린은 예교성을 향해 상륙을 감행하 고 있었다. 이미 물이 빠지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퇴각 신 호를 보냈으나 진린은 막무가내였다. 오로지 전공만을 생각해서 위험 하기 짝이 없는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미처 육지에 닿기도 전에 명나라 전선들 은 갯벌에 갇히고 말았다. 배가 갯벌에 갇히는 것, 그것은 맹수가 몇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두면 일본군의 근접 공격에 전멸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진린을 두고 그냥 퇴각할 것이냐, 아 니면 그들을 구할 것이냐 만약 그들을 그대로 두고 퇴각한다면 책임 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어쨌거나 진린은 조명 연합군의 수장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퇴각 신호를 무시한 진린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전공에 눈이 어두워, 그리고 자신이 주장이라는 자만심으로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 진린, 더 지체하다가는 조선 함대들도 갯벌에 갇 힐 우려가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순신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진도독을 구하라!" 이순신은 판옥선 7척을 진란에게 접근시켰다. 판옥선은 배가 높아 서 갯벌에 갇히더라도 하나의 성처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으리라 관 단했다. 명령을 받은 조선 수군은 이미 물이 빠진 갯벌 쪽으로 배를 몰 있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배에서 내린 일부 조선군은 사력을 다 해 명나라 군의 배를 밀었다. 기회를 포착한 일단의 일본군들이 성을 빠져나와 갯벌로 진격해 왔다. 그들은 조총과 활을 쏘며 진린을 구하 기에 여념이 없는 조선 수군을 공격했다. 일부는 배에 갇힌 명나라 군 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배에 갇힌 명나라 수군은 일본군의 파상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간신히 진란은 조선 판옥선으로 옮겨 타 위 기를 모면했다. 조선 수군의 헌신적인 구조 활동으로 진린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명나라 수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대선 25 척 중 19척이 파괴되었고 약 2,500여 명의 병력이 전사했다. 명나라 수군의 절반 이상이 무너진 것이다. 조선 수군도 12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임진왜란 막바지에 만난 고전이었다.
2. 굴욕을 견뎌라
오만한 명 장수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라면
이순신은 여섯 차례에 걸친 예교성 전투를 스스로 평가하면서 충분 한다고 했다. 그는 왜 동분했을까? 물론 뜻한 대로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를 섬멸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쳐들어갈 때마다 웅크리고 있는 얄미운 일본군, 그러나 이순신이 통분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을까? 그는 명나라 수군을 최선을 다 해 지원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그들은 변변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 수군의 작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진린이 무리한 상륙을 시도하다가 갯벌에 갇히게 되자 이순신은 구출을 명령한다. 이 과정 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자신의 작전대로 따라주지 않 는 명나라 군에 대한 분노가 그를 통분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순신은 최선을 다해 명나라 군의 군수품을 지원 했다. 조선 수군은 굶주리고 민간인은 먹지 못해도 명나라 군은 먹었 다. 그 과정에서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명나라 군은 전투에는 소극적이었다. 눈앞의 적은 급한데 정작 우군은 딴 짓 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이었을까? 일본군에 대한 분노와 명 나라 군에 대한 분노, 그리고 희생당한 조선 수군에 대한 아픔에 이순 신은 '통분' 했던 것이다. 또한 자신에 대한 동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약소국 장수,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장수로서 자신에 대한 올 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교성 전투 이후 이순신 함대는 일시 바다 봉쇄를 풀고 고금도로 귀환했다. 그러나 약 한 달 반이 지나, 순천의 일본군이 철수를 시도한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순신은 그들을 봉쇄하기 위해 출전을 감행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진란은 소극적이었다. 다시 해상 봉쇄작 전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진린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적을 치자는 이순신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이순신은 마지막으로 진린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그것은 조선 판옥 선을 제공하는 것. 이순신은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머뭇거리는 진련 에게 판옥선 두 척을 주겠다고 했다. 모든 휘하 장수들이 펄쩍 뛰었다. 판옥선이 어떤 배인가.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던 조선 주력 전함이 자 조선 수군의 피와 땀이 스민 배가 아닌가. 그러나 이순신은 고집을 꺾지 않고 진린을 찾아가 판옥선 두 척을 주겠다고 했다. 진련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그도 조선의 판옥선을 매우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배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고 강력한 전함, 그것을 이 순신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이순신의 이 결정을 장수와 군사들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까 차라리 명나라 수군을 먼저 치고 일본군을 치자는 사람은 없었을까. 이순신도 이런 분위기를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판옥선을 진 린에게 주었다. 이제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85척에서 83척으로 줄어 들었다. 전투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 오만하고 소극적인 연합군 장수 를 위해 제공했다. 그것도 명분만 앞세우며 사사건건 조선 수군과 이 순신 자신의 발목을 잡는 상대에게 준 것이다. 그날 밤 이순신은 남을 래 피눈물을 흘렸을지 모를 일이다.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을 이틀 앞둔 날의 상황이었다.
차라리 굴욕을 즐겨라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 해서 꼭 건너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굴욕의 강이다. 시인 박목월은 '굴욕의 강을 건너 아버지가 왔노라고 노래했다. 아 홈 켤레의 신발이 뒹구는 댓들을 올라서며 아버지는 그 아홉 컴레를 위해 아홉 걸레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밖에서 갖은 수모와 굴욕 을 견뎠던 것이다. 박목월이라면 어느 자리를 가도 '시인 대접을 받으 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리라. 그런 분도 알게 모르게 굴욕의 시간이 있었던 모양이다. 습작시를 내놓고 조마조마하게 평을 기다리 기도 했을 것이고, 이것도 시라고 썼느냐는 핀잔도 받았으리라. 쥐꼬 리만한 원고료를 위해 문예지 관계자에게 아쉬운 소리도 했으리라. 과거는 잊어라! 배경이든 학교든, 가진 것이 얼마나 되든, 일단 잊어 라 그러고 진정으로 자신이 좋은 뜻을 펼치고 싶다면 굴욕을 굴욕으 로만 받아들이지 마라, 수모 앞에 기죽지 마라, 차라리 그것을 즐겨 라. 세상이, 적이 얼마나 나를 더 비참하게 하는지 오히려 즐기며 받아 들여라! 또한 언젠가는 이 굴욕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겠다는 식의 값 한 감정에는 매몰되지 마라.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으며 굴욕도 수 모도 나를 단련시키는 훌륭한 교범일 뿐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 섞이면 그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인 보통 사람들은 어떨까? 평범한 사람이 건너야 할 굴욕의 강은 훨씬 깊고 넓 을 것이다. 그러나 건너야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활기보다는 비 장감이 감돌지 않는가, 사회라는 전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비장한 까닭, 그 전장에서 기다리는 것은 보람과 자긍심이 아니라 수 모와 굴욕과 고통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먹고 살아야 하나?' 라는 푸념을 자주 듣기도, 하 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할 것인가, 고고한 한 마리 학이 되어 늘푸른 소나무 위에 앉아 굶어죽을 것인가? 자존심을 자주 입에 올리는 사람치고 진정으로 자존심을 지키는 경 우는 오히려 드물다. 자신이 품은 뜻, 자신이 가진 꿈을 실현시켜 진정한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한 퇴짜리 그릇에는 한 되밖에 담지 못한다.
그러나 수모와 금욕은 현실적이다.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굴욕감에서 절망을 느낀다. 모든 걸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아무리 둘러봐도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듯한 느 점을 갖게 된다.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굴욕의 반대편에는 틀림없이 그 보상이 있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책상을 뒤 없는 순간, 그 순간은 통쾌할지 모르나 더 큰 절망과 무력감이 기다려 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신은 때를 기다리기 위해 불량배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다. 사 람들은 그런 한신을 보고 모두 비웃었다. 그러나 그 굴욕의 세월을 견 단 한신은 마침내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쳤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구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철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했다. 김춘추가 어떤 인물인가. 그가 바로 나중에 백제 고구려를 통합하는 태종무열왕이다. 그러나 그는 구원뱅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금욕 적인 청애 외교에 스스로 나섰던 것이다. 이순신의 숙적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젊은 시절,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내놓은 일화로 유명하다. 이 무리 주군이라지만 남의 신발을 가슴에 품은 채 온기를 간직하는 것 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가슴에 야망을 감춘 채 남의 비웃음을 견뎌냈던 것이다. 이순신은 갖은 횡포를 부리는 명나라 도독 진린을 묵묵히 받아들였 다. 명목상 그가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에 하나 진민과 갈등을 겪게 되고 그것이 조명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로 비 화한다면 왜적을 섬멸하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이순신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는 판옥선 을 바치는 수모와 굴욕까지 걸렸던 것이다. 한 되짜리 그릇에는 한 되밖에 담을 수 없다. 그 한 되에 어찌 자촌 심과 우월감만 담겠는가? 만약 내 그릇이 한 되밖에 안 된다면 그릇을 기워라, 이제는 수모와 굴욕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라, 거저 얻 어지는 것은 없다. 굴욕의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수모의 고갯길에서 주저앉고 만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 을 존경하는 진짜 이유, 그것은 그가 견몄을 모욕감과 굴욕을 평가하 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낸 진정한 승리라는 점을 인정하기에 우리는 그를 성공자로서 존경하는 것이다. 당장의 수모와 굴욕을 이 기고 견뎌낼 때 성공할 수 있다. 반드시!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