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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_117

On August 18th, 1597, Yi Sun-shin was appointed as the commander of the three provinces' naval forces and was given 12 ships following the defeat at the Battle of Chilchonryang. Despite his dire health, he personally led the battles and managed to fend off the Japanese forces, boosting the morale of the Joseon navy. He then moved to Byokpa Island, where he successfully repelled a Japanese ambush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military discipline and morale. Yi Sun-shin's ability to rebuild the navy and gain the trust of his soldiers allowed him to continue his legacy of invincibility.

어란진해전

[어려울 때 앞장서라]

1597 8 18, 칠천량해전 한 달 후 이순신은 장흥의 회령포에서 12척의 전선을 인계받았다. 칠천량에서 도망쳤던 경상우수사 배설은 병을 핑계로 이순신 앞에 나타나 지도 않았다. 자신은 아직도 경상우수사이며 이순신은 벼슬이 없는 몸이라는 것도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이미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는 교지를 받은 터였다. 다음 날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거행했다. 곧이어 이순신은 함 대를 해남의 이진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몹시 아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곽란과 통증, 병세는 위독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전선 이 아니라 민가에서 요양을 할 정도였다. 칠천량 패전 소식 이후 무리한 강행 군이 그의 건강을 위협했을 것이다. 두 달에 걸친 옥고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 식, 그리고 합천 초계에서 장흥 회령포까지의 대장정...... 이 모든 것이 이순 신을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8 24일 이순신은 함대를 해남의 어란포로 다시 이동시켰다. 개전 이후 가 장 서쪽으로 철수한 셈이 되었다. 나흘 후 8 28일 일본군 전선 8척이 어란포 의 이순신을 공격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도망쳤고 군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심하게 동요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직접 진두지휘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이순신의 진두지휘는 조선 수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이 목격했듯이 이순신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홀로 배에 오르기도 힘들 만큼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순신은 분연히 자 리를 떨치고 일어나 자신의 위치에 우뚝 섰던 것이다. 이미 이순신의 나이 쉰 셋, 당시로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오랜 전투와 참혹한 옥고를 치른 쉰셋의 이순신, 그가 적이 나타나자 누구보다 먼저 나섰으며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던 것이다. 단박에 조선 수군의 사기는 올랐다. 이순신이 진두지휘하는 함대, 결코 지 지 않으리라. 이순신은 접근해 오는 적을 향해 정면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 다. 패잔병 조선 수군을 우습게 보고 다가오던 일본 전선 8척은 급히 배를 돌 렸다. 12척의 조선 수군의 기세가 칠천량해전 전처럼 기세등등했기 때문이 었다. 일본군은 황급히 도주했으며 이순신은 10여 킬로미터를 추격, 적을 완전히 몰아냈다. 칠천량 이후 일본군의 1차 내습이었다.

 

벽파진 1차 해전

[작은 적을 쫓으며 큰 적을 기다려라]

8 29일 이순신 함대는 벽파진으로 옮겼다. 어란진에서 다시 서쪽으로 함 대가 이동했던 것이다. 당시 이순신 함대는 최악의 상태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며칠 전 기어코 도망쳐버렸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 고향에 숨어 있다가 권율에게 잡혀 참형을 당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날씨가 매우 추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순신 자신은 비가 내리는 날 갈대로 엮은 선실 지붕 밑에 웅크린 채 추위를 견뎌야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북풍이 크게 불어 아군 함대끼리 충돌로 인한 파손을 막기 위 해서 동분서주해야 했다. 군사들 역시 여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이순신은 그들의 건강을 매우 염려했다. 그럴 즈음 벽파진 건너편 어란진에 적선 55척이 도착, 13척이 아군을 공격 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조선 수군은 아연 긴장했다. 그들은 내심 이 순신이 후퇴 명령을 내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13척의 선봉대 다음에는 40여 척의 적선이 뒤따를 것이고, 그 뒤로 또 얼마나 많은 일본 전함이 뒤쫓아 올지 모르는 상황, 차라리 서해를 따라 한강으로 올라가 거기서 도성이라도 지키는 것이 나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이미 열흘 가까이 주둔해 온 벽파진을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해질 무렵, 적이 쳐들어오자 이순신은 즉각 적을 요격했다. 조선 수군을 만만히 보고 접근하던 일본군은 조선 수군 의 기세에 쫓겨 뱃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추격하려 했으나 이순신은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 무렵의 전투는 탐색전의 성격이 짙었다. 이순신은 소규모 적을 쫓아내 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은 더 큰 적을 기다리기 위한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벽파진해전

1. 기적은 신뢰의 땅에서 생긴다

참담한 패배였다. 그것은 단지 패배로만 끝나지 않았다. 칠천량 패 전으로 조선의 운명에 검은 먹구름이 뒤덮였다. 임진왜란 6년 동안 바 다를 굳건히 지켜오던 조선 수군의 전멸, 그것은 패전, 곧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조선 조정은 당황했다. 즉시 이순신 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도원수 권율과 의견을 나눈 이순신은 직접 전황을 살피고 수군 재 건을 위해 합천 초계를 출발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이순신 의 일행은 15, 한때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삼도수군통제사의 행렬 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합천을 거쳐 진주 땅 수곡에 이르러 이 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받았다. 이후 이순신은 남해, 하동, 구 례, 보성, 순천, 낙안, 장흥을 거쳐 회령포까지 장장 천리가 넘는 길을 걸었다. 그것은 수군을 다시 재건하려는 행보였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았다

"신에서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12척의 판옥선과 1,000여 명이 될까 말까한 수군, 이순신은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할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순신은 본진 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장흥의 회령포에서 해남으로 이동시켰다. 즉각적인 적과의 대규모 전투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지금은 수세기(守 정도가 아니라 적을 만나지 않아야 했다. 《난중일기》에 보면 당 시 이순신이 몹시 아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체포 당시 혹독한 고문 의 후유증과 조선 수군을 모두 잃은 상실감이 이순신에게는 엄청난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몰려나와 술과 음식을 바쳤다. 그 리고 울었다. 바로 그때 일본군 역시 섬진강을 따라 북상 중이었다. 그 들은 남원성과 전주성을 노리고 북상 중이었다. 이순신은 이런 일본 군보다 하루 정도 앞서가고 있었다. 만약 이순신의 행보가 일본군에 게 알려졌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대목 에서 일본군은 전략상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칠천량 승전 분위 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수군을 통한 서해 진출 대신 육로로 북상하 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이순신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패전의 아픔은 컸다. 가는 곳마다 패잔병들이 이순신의 소식을 듣 고 몰려들었지만 이미 그들은 과거의 조선 수군이 아니었다. 이순신 은 대장정을 통해 군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회령포, 그 곳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끄는 12척의 판옥선을 만났다. 경상우수 사 배설은 칠천량에서 적이 나타나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12척의 전선 이라도 남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함대를 이순신에게 인계한 배설은 며칠 아프다고 하더니 탈영해버렸다. 지휘관이 탈영할 정도로 당시 조선 수군 진영에는 패배감과 절망감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조 정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다시 맡기면서 힘 들면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서 도우라고 했다. 이순신의 대답은 간 단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수군의 사기 앙양이었다. 이순신과 함께 할 때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패배를 모르는 군사들이었 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서 범 같은 장수들을 잃고 전우를 잃었다. 높 은 곳에서 떨어지면 충격이 더한 법, 지금 수군의 사기가 그러했다. 이 순신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게 하고 싶었 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이 건재함을 보여야 했다. 자신 과 함께 싸운다면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다시 한 번 수군들이 이순신을 믿어주어야 했다.

 

다시 시작된 불패 신화

이순신은 곧 함대를 정상 운용했다. 우선 소선을 이용하여 척후선을 띄웠다.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적은 소규모로 움직 이고 있었다. 1597 8, 이 무렵, 이순신은 인사불성에 빠질 정도로 몸이 극도로 쇠약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함대를 이동시켰다.  해남 땅 이진에서 어란포 등지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적의 대규모 공격 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 나 마냥 피해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8 28, 적선 8척이 어란 포로 접근해 왔다. 당시 일본군은 이순신이 함대를 재건 중이라는 것 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온 것이다. 이순신은 결정해야 했 다. 진을 옮길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을 데 리고 싸울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이순신은 이것이 기회라고 여겼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 처음 맞는 적, 여기서 물러난다면 군사들 손영에 사기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었다. “전함대 출동하라!” 이순신은 적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미 칠천량의 승리로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 역시 정면 승부를 걸어왔다. 함대의 숫자는 이 손신이 많았다. 이순신은 즉각 총통 공격을 명령했다. 일본군도 지지 않고 조종과 불화살 등으로 응사했다. 이순신 역시 정면 승부를 선택 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들의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았다. 총통은 빗나 갔고 화살을 쏘는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적의 조종 소리에 방패 아래로 숨기만 하는 군사도 있었다. 적은 아침해를 등지고 쳐들어왔다. 역광 으로 보는 적은 더욱 위압적이었다. 이순신은 직접 갑판으로 내려왔다. 강궁을 들었다. 이순신의 몸 역시 예전 같지 않았다. 활시위를 당겼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 젯밤까지만 하더라도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몸이었으나 눈앞에 적이 있었다. 이순신의 화살이 적선으로 날아갔다. 조종을 겨누던 적병 빛이 쓰러졌다. 그제서야 수군들도 제대로 활을 쏘기 시작했다. 장군전 한 발이 맨 선두에 있던 적선을 명중시켰다. 적선에 구멍이 뚫리고 선 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일제히 함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8척의 적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남은 적선이 뱃머리를 돌렸다. "추격하라! 놓치지 마라!” 이순신은 적을 꽃을 것을 명령했다. 적선이 6척뿐이라면 혹시 매복 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들은 조선 수군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인 지 모른다. 보통의 경우였다면 신중한 이순신은 추격하지 않았을 것 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추격해야 한다. 그래서 아군 앞에서 도망가는 적의 뒷모습을 단단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 것만이 이들에게 잃었던 자신감, 승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길이 다. 이순신 함대는 해남 반도 남단까지 적을 쫓았다. 다행히 더 이상의 적이나 매복은 없었다. "멈춰라!" 이순신은 충분한 추격전 후, 함대를 멈추게 했다. 판옥선에서는 함 성이 올랐다. 수군들은 도망가는 적선의 뒤꽁무니에 공포를 쏘며 환 호했다. 이들은 여전히 무적의 조선 수군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남 몰래 안도했다. 오늘 싸움으로 조선 수군은 재기할 수 있을 것인가? 군사들은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았을까? 그리고 또 하나, 아직도 나를 믿고 있는가? 나와 싸운다면, 나의 작전대로 싸운다면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이들은 갖고 있을까? 몸이 불편하여 배조차 타기 힘 든 자신을 과연 믿어줄지.......

 

탁월한 통찰력을 보이다

어란진과 벽파진에서 한 차례씩 일본군의 내습을 막아낸 이순신. 그러나 여전히 조선 수군의 사기와 전력은 미약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분위기를 반전시킬 특단의 대책! 1597 9 7, 또다시 일본군이 벽파진 앞에 나타났다. 이순신은 즉각 응전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에 쫓겨 갔다. 이번에는 멀리 추격하지 말도록 했 다. 지금껏 보인 공세적인 자세와는 다른 명령이었다. 대신 장수와 군 사들을 모아놓고 이순신은 다시 군기와 군령을 강조했다. 소규모 부 대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군기와 사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치라도 군령을 어기는 자는 지위 고하 를 막론하고 군법에 따를 것이니라!" 장수와 군사들은 긴장했다. 그들 중에는 차라리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편입되었 으면 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아 무리 이순신이라 하더라도 고작 12척의 전 선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진중에 는 그런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달이 떴다가 곧 지면서 바다는 어두워졌 다. 이순신이 적을 멀리 추격하지 않은 것은 그의 승부수였다. "오늘 밤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다. 전군은 전선 위에서 비상 대기하도록 하라!" 이순신의 말에 장수와 군사들은 반신반 의했다. 이순신이 무엇을 믿고 적의 야습을 단언하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호했다. “신기전과 불화살을 충분히 준비하라!" 장수와 군사들은 이순신의 명령대로 전 선의 뱃머리를 바다 쪽으로 돌려놓고 대기 했다. 추석이 지난 밤바다는 쌀쌀했다. 이 순신은 낮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일부러 멀 리 쫓지 않았다. 만약 적이 멀리 달아나지 않았다면 오늘 밤 야습을 해올 가능성이 있다. 그믐밤, 달이 없는 밤이라면 적들도 야습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 다. 더구나 저들은 칠천량에서 어둠을 뚫고 다가와 조선 수군을 궤멸 시킨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순신도 초조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는 장수들과 군사들의 신망을 잃을 것이다. 적을 지나치 게 두려워하여 전에 없던 비상 대기까지 시켰다는 불만이 나돌고 동 시에 불신감도 팽배해질 것이다. 이순신은 기다렸다. 적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마침내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멀리 물러가지 않았던 일본군이 한밤에 기습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미 대비하고 있던 조선 수군,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일 제히 불화살과 신기전을 쏘았다. 어두운 밤하늘로 불꽃이 날았다. 가 까이 접근하여 조선군의 배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려던 일본군은 그야 말로 혼비백산했다. 변변한 공격조차 못 해본 채 퇴각했다. 이순신 진영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이순신은 적의 야습을 예상 했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어두운 밤에 불의의 야습을 받았더라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또다시 칠천량의 비극이 되풀이될 수도 있었을 터, 그것을 우리 장군께서 미리 아시고 막아내지 않았는 가? 역시 장군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 이런 분위기가 진중에 돌았 다. 이순신은 안도했다. 이제 군사들은 나를 믿을 것이다. 예전처럼 나를 믿고 따를 것이다. 이순신은 소 다섯 마리를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이제 진중에는 자신감과 지휘관에 대한 신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참담한 패전 이 후, 이순신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군사들의 자신감과 지휘관인 자신 에 대한 신뢰감 회복이었고 그것을 그는 전투를 통해 다시 일구어냈 던 것이다.

 

2. 신뢰의 중심이 되어라

위기감에서 신뢰를 회복하라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말은 사실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위기는 전의를 상실하게 한다. 위기는 올바른 판단과 빠른 대응을 불가능하 게 한다. 그리하여 우왕좌왕하거나 자포자기하게 한다. 위기에 빠진 개인이나 조직은 공황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죽음과 삶을 함께 지고 다니는 전장의 군사들에게 위기감은 그대로 공황으로 연결 될 수 있으며 그것은 끝장을 의미한다.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그러했다. 아니 칠천량에서 패 한 조선 수군이 그러했다. 일부 병력의 상실이 아니라 최고 지휘관이 전사하고 범 같던 조선 장수들이 전사했다. 군의 조직은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요행히 살아 남은 군사들은 삼삼오오, 재집결지에 대한 정보도 없이 각 포구로 흩 어져 달아났다. 이제 남해 바다 그 어디에도 조선 수군의 깃발은 오르 지 않았다. 군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바 로 이때 겨우 15명의 수하만 거느린 이순신이 합천 땅 초계를 출발했 다. 그는 도원수 권율에게 자신이 직접 전장을 돌아보고 대책을 세우 겠노라 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대장정에 나섰던 것이다. 마침내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인솔하여 도망쳤던 판옥선 12척을 수습했다. 판옥선 12, 전선은 10분의 1로 줄었고 군사는 더 욱 부족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조선 수군을 재건할 것 인가? 첩경은 신뢰 회복이라고 이순신은 생각했다. 남아 있는 군사들 이 자신을 믿어준다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전장에서 군사의 신뢰를 받는 장수는 언제나 이기게 되어 있다.

 

강군에는 이유가 있다

촉나라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은 8만여 명의 군사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 위나라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촉을 치기 위해 제갈량 이 지키고 있는 요충지로 진격해 왔다. 하필 그때 군사 중 10분의 1의 병력을 임무 교대해야 할 시점이 있었다. 이미 요충지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병력 8,000여 명은 도착해 있었다. 그동안 제갈량 휘하에서 근 무하다가 교체해 나갈 병력들은 술렁거렸다. 자신들이 후방으로 교체 되어 가야 할 때 하필이면 적이 쳐들어온 것이다. 이미 교체는 물 건너 간 일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 병사들이 술렁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제갈량은 고민에 빠졌다. 제갈량의 참모들도 제갈량에게 지금은 적이 너무 강하니 교체하지 말고 한 달만 더 연장 근무를 시키자고 했다. 고 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국이 아닌가? 고심 끝에 제갈량은 참모들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자신 은 지금까지 군사들에게 믿음으로 대해왔다. 임무를 교대하고 돌아가 야 할 군사들은 이미 짐을 꾸린 상태, 가족들도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 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교대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것, 아무리 적이 강하다 한들 교대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그러면서 제갈량은 교대 병력들에게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다시 군사들이 술렁거렸다. 그들끼리 의견을 맞추 더니 한 사람도 돌아가지 않고 적과 싸우겠다고 자원했다. 새로운 임무를 위해 투입된 병사들도 감격했다. 이들은 용기백배, 일치단결하 여 마침내 적의 대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장수가 믿음을 주는 것이 휘 하 군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위나라 장수 오기의 일화에도 나온다. 그는 모든 것을 일반 군사들과 함께 했다. 먹는 것도 똑같이 먹었고 잠자리 도 함께 했다. 직접 자신의 식량과 짐을 꾸려 메고 다녔다. 군사들이 그를 믿고 따른 것은 당연했다. 그러다가 어느 병사 하나가 종기를 심 하게 않았다. 오기는 입으로 병사의 종기를 빨아 고름을 빼내고 치료 해주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병사의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했다. 사람들은 지체 높은 장군이 아들의 종기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주 었으니 영광스러운 일인데 왜 통곡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여 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지난해 남편이 종기가 났을 때도 장군이 입으로 빨아서 치료해주었는데 그에 감격한 남편이 앞장서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들까지 장군이 치료해주었으니 아들 역시 앞장서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 거라며 통곡했다. 군사들이 지휘관을 믿 고 따르면 그 군대는 저절로 강군이 되는 것이다.

 

믿음을 주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가. 어떻게 신뢰감을 주는가. 일 이 잘되고 나면 틀림없이 보상하겠다고 말을 먼저 앞세우는가? 이길 수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비장하게 건배를 하며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신뢰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진정 신뢰를 주고 싶다면 화려한 연 설이 아니라 우직한 행동으로 보여라. 12척의 배만 남았을 때 이순신 이 조선 수군들에게 아무 걱정 마라,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아무리 사자후를 토했어도 수군들은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그는 싸우면서 보여주었다. 적의 대규모 공습을 피하기 위해 자 주 진을 옮겼지만 적이 나타날 때면 어김없이 싸웠고 그리고 이겼다. 적의 척후선들은 이순신의 공격에 꽁무니를 빼곤 했다. 그것을 본 조 선 수군들은 정말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명량대첩 당시에도 이순신은 함대의 맨 선두에 섰 다. 선두에 서서 달려드는 적선을 홀로 막으면서 정말로 죽기를 각오 하고 싸우면 이길 수 있고 또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아무리 화려한 연설도 신뢰를 주지 못한다. 묵묵한 행동으로 보여줄 때 사람들은 믿기 시작할 것이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통찰력이다. 전체 전황을 읽고 남보다 한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필요하다. 이순신이 벽파진에서 보여준 것, 그것이 바로 통찰력이다. 쳐들어 온 적을 일단 막아낸 이순신, 멀리 쫓지 않았다. 대낮의 1차 공격에 실 패한 적이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무엇인가? 더구나 달도 없는 그믐 밤, 그들은 야습을 시도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것을 꿰뚫어본 이순신은 미리 군사들에게 적의 야습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군사들은 이순신이 점쟁이가 아닌 이상 적의 야습을 어찌 알 수 있는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적은 쳐들어왔다. 이순신의 예상대 로! 이제 군사들은 이순신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상하가 신뢰하는 군대라면 어찌 강한 군대가 되지 않겠는가? 실천과 통찰력으로도 신뢰를 주기에는 뭔가 부족한가? 그렇다면 이 제 갖추어야 할 것은 여유이다. 신뢰란 것은 입이 너무 커 여유와 배짱 까지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비록 당신이 지금 실직한 가장이거나 취업 문 을 두드리는 젊은이라 해도 사람과 세상은 당신을 믿고 기다려줄 것 이다. 신뢰의 중심이 되어라. 미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