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Battle of Chilchonryang in 1597, the Joseon navy was annihilated by a surprise attack by the Japanese forces. After the arrest of Yi Sun-shin, Won Gyun was appointed as the new commander of the three provinces' naval forces. However, his tactics were inadequate, and the Japanese forces took advantage of this to lure and ambush the Joseon navy. As a result, Won Gyun was killed, and numerous Joseon soldiers and ships were lost, effectively annihilating the Joseon navy. Upon hearing the news of the defeat, Yi Sun-shin is said to have been deeply disheartened.
칠천량해전
1. 풀은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견내량을 봉쇄해온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 1593년 여름부터 1597년 초까지 약 4년을 이순신은 굳건히 남해 바다를 지켰다. 그러나 그것은 혹독한 세월이었다. 부족 한 군량미, 창궐하는 전염병, 거기다가 몰려드는 피난민, 이 모든 문 제를 해결하면서 또한 눈앞의 적과 팽팽히 대치해야 했다. 단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순신 체포되다
그동안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지루한 강화 협상이 이어졌다. 전 쟁의 당사국은 조선이었으나 전쟁을 쥐고 흔드는 것은 일본과 명나라 였다. 전투는 소강상태였다. 일본군은 남쪽 해안지방에 성을 쌓은 채 긴 싸움에 대비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은 대부분 철수한 상태였다. 그 긴장 속에서 이순신은 한산도를 굳건히 지켰다. 둔전이라 하여 직접 농사를 짓고 소금을 구워 군비를 충당해나갔다. 한산도는 하나의 나 라, '작은 조선'이었다. 이순신이 있는 곳이라면 안전하다는 생각으로 몰려든 피난민과 조선 수군들이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그 긴장 속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597년 2월,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체포되었다. 죄목은 무군지죄! 임 금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죄였다. 즉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 이다. 그 죄목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보다 앞서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을 결 심하였다. 다시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 일본군들, 그러나 그들에게 가 장 큰 위협은 이순신, 일본측은 이순신을 제거할 계략을 세웠다. 그들 은 요시라라는 승려를 이용, 정보를 흘렸다.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 앞 바다에 나타날 것이니 그때 그를 친다면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조선 조정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로 나아 가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신중했다. 적이 흘린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출전을 미루는 사 이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울산의 서생포로 상륙하였다. 이 소식을 들 은 선조는 이 나라는 끝장이라며 탄식했다. 그러고는 이순신을 잡아 들이도록 했다. 막을 수 있었던 일본 부대를 막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임금의 명을 어긴 죄가 되었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불신은 이순신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 를 갖는다. 그 불신은 이순신의 한산도 시절부터 싹튼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전란을 맞아 북으로 북으로 몽진을 갔던 임금, 반면 이순신은 왜적을 막아내고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장수가 되었다. 선조의 불신의 근원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 군왕인들 자신을 젖혀두고 민심 을 얻는 장수를 좋아하겠는가. 만약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그의 권 력 유지에 이순신이 가장 위협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수군 지휘관이 된 원균
어쨌든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그 시점, 이순신은 체포되었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백의종군을 명 받아 당시 도원수이던 권율 휘하로 들어갔다. 그 것이 1597년 4월 초의 일이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제대로 수군을 통 제하지 못한 것으로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다. 그런 원균에게 조정은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증파되는 일본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도 전황을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즉 조선 수군의 힘 만으로는 적을 막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균의 판단은 비교 적 정확했다. 130여 척의 조선 수군 함대만으로 부산 앞바다를 지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앞에서 오는 적과 부산 등지에 정박하 고 있는 적에게 협공을 당할 우려가 많았다. 그런데도 조선 조정은 피 아의 전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않은 채 오로지 출전만을 강요했던 것 이다. 급기야 도원수 권율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불러 출전하지 않는다며 곤장까지 쳤다. 1597년 7월 5일, 원균은 마침내 출전을 감행했다. 전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를 떠나 부산 앞바다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 선 수군의 운명을 결정지을 비운의 항해였음을 당시는 아무도 짐작조 차 못했다. 그때 합천 땅 초계에 머물던 이순신도 원균의 출전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때 이순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역시 이 출전 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원균의 출전 소식을 들은 일본 수뇌부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 했다. 그들은 그동안 조선 수군의 강점과 약점을 면밀히 파악해놓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한 것은 조선의 총통에 밀렸으 며, 무엇보다 그들의 주특기인 등선육박 전술, 즉 배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그들 특유의 전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데 패인이 있다는 것 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들은 야간 기습작전을 준비하였다. 비록 조선 판옥선이 크고 강하다고 하지만 작은 배 여러 척으로 판옥선을 포위 한 후 사방에서 배 위로 올라 백병전을 벌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는 계산을 해놓고 있었다. 항해는 힘들었다. 한산도를 떠나 옥포 외즐포를 거쳐 부산 앞바다 로 나가는 데 이틀이 걸렸다. 부산포 입구인 절영도를 지날 즈음 원균 함대는 풍랑을 만났다. 음력 7월은 한반도에 태풍이 닥치는 시기, 아 마 태풍이 불었을지도 모른다. 격군들은 역풍을 맞아 하루 종일 노를 저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큰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적은 조 선 함대를 보자마자 도망치기 바빴다. 원균은 마음이 급했다. "쫓아라! 놓치지 마라!" 그러나 적선은 파도 너머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단거리에서는 일본 군의 배가 훨씬 빨랐던 것이다. 한 무리의 적을 놓쳤다 싶으면 다른 곳인 한산도를 떠나 부산 앞바다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 선 수군의 운명을 결정지을 비운의 항해였음을 당시는 아무도 짐작조 차 못했다. 그때 합천 땅 초계에 머물던 이순신도 원균의 출전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때 이순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역시 이 출전 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원균의 출전 소식을 들은 일본 수뇌부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 했다. 그들은 그동안 조선 수군의 강점과 약점을 면밀히 파악해놓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한 것은 조선의 총통에 밀렸으 며, 무엇보다 그들의 주특기인 등선육박 전술, 즉 배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그들 특유의 전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데 패인이 있다는 것 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들은 야간 기습작전을 준비하였다. 비록 조선 판옥선이 크고 강하다고 하지만 작은 배 여러 척으로 판옥선을 포위 한 후 사방에서 배 위로 올라 백병전을 벌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는 계산을 해놓고 있었다. 항해는 힘들었다. 한산도를 떠나 옥포 외즐포를 거쳐 부산 앞바다 로 나가는 데 이틀이 걸렸다. 부산포 입구인 절영도를 지날 즈음 원균 함대는 풍랑을 만났다. 음력 7월은 한반도에 태풍이 닥치는 시기, 아 마 태풍이 불었을지도 모른다. 격군들은 역풍을 맞아 하루 종일 노를 저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큰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적은 조 선 함대를 보자마자 도망치기 바빴다. 원균은 마음이 급했다. "쫓아라! 놓치지 마라!" 그러나 적선은 파도 너머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단거리에서는 일본 군의 배가 훨씬 빨랐던 것이다. 한 무리의 적을 놓쳤다 싶으면 다른 곳에서 또 적이 나타났다. 다시 조선 함대가 추격하면 그들은 사라졌다. 이렇게 하루 종일 풍랑 속에서 적선을 쫓다가 놓치기를 되풀이하였 다. 그것은 일본측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일본군의 작전에 말려들다
당시 일본군 장수는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첫 해전인 옥포에서 참패했던 도도 다카도라, 안골포해전 등 에서 패했던 구키 요시하키 등이었다. 모두가 일본군에서는 내로라하 는 수군 장수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조선 수군에게 똑같은 참패를 당 할 만큼 어리석은 장수들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는 백전노장들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이들은 모두 이순신에게 참패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복수를 꿈꾸었다. 전쟁 초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조선 수군에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 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순신이 없는 조선 함대야말로 복수를 하기에 더없 이 좋은 상대였다. 그래서 그들은 원균이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자마 자 세밀한 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원균의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이길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절대로 싸우지 않는 지장(智將)이지만 원균은 적 을 보기만 하면 돌격을 감행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다. 이런 원균의 성격을 활용, 그들은 하루 종일 유인 작전을 펼쳤다. 결국 원균의 조선 함대는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하루 종일 헛힘만 빼고 말았다. 그 와중에 풍랑으로 판옥선 20여 척을 잃었다. 그날이 1597년 7월 7일이었다. "가덕도로 회군하라! 회군하는 즉시 식수를 보충하라!" 해질 무렵, 마침내 원균은 전 함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하루 종일 강풍에 시달리며 적을 쫓았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조선 함대는 가덕도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미 장수들과 군사들은 지칠 대 로 지친 상태였다. 노를 젓는 격군들의 피로는 더 말할 나위 없었다. 어둠이 내리는 가덕도에 상륙한 조선 수군들은 식수를 구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 순간이었다. 가덕도 해변 숲 속에서 난데없이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조선 수군이 우수수 쓰러졌다. 긴장을 풀고 막 배를 대던 조선 수군을 향해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이 기습 공 격을 한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군이 가덕도에 정박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은밀히 군사를 매복해두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가덕도 포구는 공포와 혼란에 빠졌다. "승선하라! 후퇴하라!” 미처 배에서 내리기 전에 상황을 파악한 원균은 전군에 다시 배에 오를 것을 명령했다. 그 아수라 틈에서 400여 명의 조선 수군이 전사 했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바다로 빠져나온 조선 함대는 가덕도를 포 기하고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로 향했다. 지친 군사들이 간신히 영등 포에 도착한 것은 7월 8일 새벽녘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적은 매복 하고 있었다. 역시 정박을 위해 배를 대던 조선 수군은 일본 육군의 매 복에 걸려 변변히 저항도 못 해본 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육지에서 적의 육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조선 수군이 선택한 것은 또다시 도주였다. 원균은 함대를 이끌고 칠천도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정찰조를 먼저 올려 보냈다. 다행히 칠천도에는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조선 함대는 칠천 도 외즐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배를 정박하자 수군들은 너나없이 잠 에 곯아 떨어졌다. 하루 종일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적을 쫓고 나서 두 번이나 기습을 당한 조선 수군, 그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 아 있지 않았다. 이후 조선 수군은 약 일주일 가량을 칠천도 외즐포에 정박했다. 원균은 더 이상 수군만의 작전은 무리라고 판단한 듯했다.
운명의 날, 쓰러지는 조선 수군
114척의 조선 판옥선이 정박하고 있는 외즐포에 드디어 운명의 날 1597년 7월 16일 새벽이 되었다. 전날 밤, 일본 척후선이 느닷없이 나 타나 조선 판옥선 4척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그런데도 조선 수군은 더 이상의 공격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그날 밤, 바람은 자고 주위는 고요했다. 수군들은 갑판이나 해변에 서 잠이 들었다. 곳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피곤한 몸을 뉘었다. 이 과정 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기록에는 척후선 한 척 띄우지 않고 보 초 경계병조차 세우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7월 16일 새벽, 소리 없이 일본군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대한 조용히 조선 함대 를 향해 접근했다. 대규모 적선이 여명을 타고 접근해 오는데도 그 누 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설령 발견했더라도 이미 늦었는지 모른다. 조선 함대에 접근한 일본 전선들은 신호와 함께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습을 받은 조선 수군은 우왕좌왕했다. 갑판에서 자던 수군들이 응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들 배의 돛대를 부러뜨려 조 선 판옥선에 대고는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조총과 활로 엄호를 하면 서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조선 판옥선으로 기어올랐다. 일단 판옥선으 로 오른 일본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일본도를 빼들고 아직도 조직적으로 응전하지 못하는 조선 수군들을 베어나갔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과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 조선 판옥선이 불타기 시작했다. 원균은 필사적으로 적과 싸우며 수군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있었다. 휘하 장수들 이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바깥 바다에는 일본군 대선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배를 버리고 도망쳐봤자 좁은 칠천도에서 갈 곳은 없었다. 그 와중에 눈치를 보던 경상 우수사 배설은 자신의 함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싸움이 한창이었지만 배설은 전장을 외면했다. 간신히 그의 배 12척은 전장을 벗어났다. 원균의 눈에도 도망가는 배설의 함대가 보였지만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날이 밝아오자 전세는 확연히 드러났다. 먼발치서 칠천도 포구를 바라보고 있는 일본군 장수들 사이에는 회심의 미소가 돌았다. 드디 어 해낸 것이다. 지난 6년 간,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하고 치욕의 패 배를 당했던 조선 수군에게 지금 통쾌한 보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 복 정도가 아니라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중이었다. "빠져나가라! 어떻게 하든 벗어나라!" 원균은 눈앞에서 쓰러져가는 조선 수군을 보며 목이 맺히게 고함을 질렀다. 철수에도 작전과 체계가 필요하지만 이번만은 그것이 아니었 다. 그것은 그냥 도주였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탈출이었다. 조선 수군은 두 방향으로 도주했다. 일부는 진해 쪽으로 달아났으나 이들은 거의 전멸당했다. 또 일부는 한산도를 바라보고 견내량을 향해 도주했다. 원균도 간신히 견내량 방향으로 배를 돌렸다. 도망치면서 잠시 돌아본 칠천량 앞바다는 불타는 조선 함대로 가득했다. 원균은 눈앞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 렀는지, 모든 게 꿈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감상도 잠시, 먼저 적의 추 격을 피해야 했다. 원균의 배도 필사적이었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일 본군의 추격은 날렵했다. 또한 견내량 북단에는 일본군 전선이 이미 봉쇄하고 있었다. 원균은 뱃머리를 고성 땅으로 돌렸다. 원균은 간신 히 춘원포에 상륙할 수 있었다. 원균이 배를 버리고 상륙 도주하자 조 선 수군들도 배를 버리기 시작했다. 상륙한 원균 곁에는 아들 원사웅이 함께 했다. 그러나 적도 따라 상륙했다. 원균은 도주를 포기했다. 마지막까지 단 하나의 적이라도 더 베고 죽겠다고 다짐했다. 살아날 길은 없었다. 기록에는 원균이 뚱뚱 한 몸 때문에 제대로 도망조차 못한 채 적의 칼날 아래 죽었다고 전해진다. 싸움은 끝났다. 6년간 조선의 바다를 굳건히 지켜오던 조선 수군을 그렇게 칠천량 앞바다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 잃은 판 옥선이 100여 척이 넘고 적게 잡아도 1만 이상의 조선 수군이 전사했 다. 전멸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것은 전멸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전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역시 전사했다. 충청수사 최호도 죽었다. 최고 사령관이 전사한 보기 드문 패전이었다. 이틀 후, 조선 함대의 전멸 소식이 합천 초계의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이순신의 낙담은 말할 수 없었다. 우리만 강한 줄 알고 적이 강한 줄 몰랐기에 당 한 비극 앞에 이순신은 망연자실했다.
2. 적은 더 빨리 강해진다
오늘의 적은 어제의 적과 다르다
만약 이순신이 울었다면 그때일 것이다. 칠천량에서의 조선 수군 전멸, 그 소식을 듣고 이순신은 비통한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몇 달 전, 백의종군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고향 앞바다에서 어머 니의 시신을 만났을 때 이순신은 울었다. 늙으신 어머니가 여수에 있 다가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듣고 아산으로 오다가 배 위에서 일생을 마 쳤던 것이다. 그때 이순신은 울었다. 그리고 나중의 일이지만 막내아 들 면이 아산에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순신은 하늘을 원망하며 울었다. 그리고 지금, 조선 함대의 전멸 소식을 들은 지금, 이순신은 통곡했 을지 모른다. 어떻게 이루어낸 조선 수군이던가? 그의 일생을 고스란 히 바친 조선 함대와 조선 수군이 단 한 번의 전투로 전멸하다니...... 이순신은 누구를 원망할 힘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맹장 용장이 전 사하고 거북선과 판옥선이 모두 불타거나 수장되었다. 주린 배를 안 고 자신과 생사를 함께했던 이름 없는 수군들, 그들이 칠천량 바다에 젊은 목숨을 묻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는가. 책임은 물론 패전 지휘관인 원균이 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객관적인 전력 분석이나 육군의 협조 없이 부산 공격을 강요한 조선 조정도 책 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원균과 조선 조정,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일까. 그것은 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적도 어제의 적과 똑같으리라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는 점이다.
승자의 자리는 비어 있다
전쟁의 역사는 물고 물리는 역사였다. 그야말로 영원한 승자도 영 원한 패자도 없다. 어제의 승자가 오늘은 패자가 되는 것이 마치 공식처럼 보일 정도였다. 청동검을 소유한 문명은 석기 문명을 간단히 제압해버렸다. 그 청동검은 철제 검에 의해 문명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처럼 보일 정도였다. 청동검을 소유한 문명은 석기 문명을 간단히 제 중세 유럽의 기마병은 천하무적이었다. 두터운 갑옷과 역시 갑옷을 입은 말, 그리고 방패와 긴 창과 얼굴까지 가린 투구, 이들을 이길 수 있는 군대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벌거벗다시피 한 몽골 군에게 유린당했다. 두렵긴 하지만 느린 속도와 둔중하고 무거운 무기가 오히려 약점이 되었다. 경무장한 몽골 군은 유럽 기마병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반월형의 예리한 몽골 군의 칼은 유럽 기마병이 무겁고 둔중한 칼과 창을 제대로 휘둘러보기도 전에 그들을 쓸고 지 나갔다. 자신이 강한 줄만 알았지 상대가 강한 줄 몰랐던 것이다. 자신 의 강점만 믿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전략전술가였다.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의 배후 에 대한 기습 공격, 선제공격을 통해 적 주력군의 발목을 붙잡은 후의 측면 공격, 그리고 적의 부대와 부대 사이를 파고들어 적의 연합을 막 으면서 차례로 적을 격파하는 전술 등을 화려하게 사용하며 연전연승 을 거두었다. 이런 전술이 적에게 간파당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싸움 도 힘들어졌다. 힘들어지는 만큼 이기기 위해 모든 국력을 전쟁에 쏟 아 부었고 그것은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다. 짧은 활을 사용했던 부대는 긴 활을 가진 부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칼과 활로 무장한 보병은 소총 부대 앞에 무기력했다. 기고만장했던 단발식 소총 부대는 기관총 앞에서 하루 만에 5만 명의 전사자를 남겼 다. 두꺼운 통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수레에 싣고 그것을 밀고 들어가 성문을 격파하던 공성 무기는 철제 성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영국에 서 탱크를 먼저 선보이자 독일군은 더 빠른 탱크를 선보였다. 그 빠르기에 대항하기 위해 더 두꺼운 장갑의 탱크가 출현했다. 그러자 이번 에는 관통력이 우수한 포를 탑재한 탱크가 등장했다. 새로운 성능의 탱크가 출현할 때마다 전장의 양상은 달라졌다. 드디어 폭격기가 전 쟁에 등장했다. 곧이어 누가 더 멀리 비행하여 더 많은 폭탄을 투하하 는 폭격기를 소유하느냐가 경쟁이 되었다. 나중에는 누가 더 정밀한 폭격을 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렸다. 매복을 즐겨 사용하던 장수는 역매복에 걸려 참패했으며 기습 공격 을 즐기던 장수는 역기습에 말려 패했다. 적을 기만하는 데 능숙하던 장수는 제 꾀에 제가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전쟁은 냉정하여 항상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정에서 패배를 당한 쪽은 공통 점이 있었다. 그것은 적은 자신보다 빨리 강해진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누가 더 작고 용량이 큰 반도체를 만드느냐 하는 것은 일반인들에 게는 그저 용량을 나타내는 숫자 싸움으로 보이지만 당사자들은 사활 을 건 전쟁이다. 전통적인 탄산음료 시장이 다양한 소재의 음료 시장 으로 확대되었다. 이제 누가 소비자의 구미를 당기고 경쟁사를 제압 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느냐에 회사의 사활이 걸리는 것이다. 면발이 쫄깃한 라면에 부드러운 면발의 라면이 맞섰고 매운 맛 라면에 녹차 라면이 맞서고 있다. 삼계탕에 매콤한 닭찜이 도전장을 내밀더니 어 느새 불닭이 전면에 등장했다. 적은 결코 나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 나 보다 한발 앞서 길목을 봉쇄해버린다. 세상에 절대 강자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영원한 강자도 없다고 한 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포기할 일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만큼,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룰 만큼은 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변화보다 앞서서 변화를 주도하라
조선 수군 최대의 비극이자 이순신의 절망이 된 칠천량 패전, 이 해 전을 보면 강하고 약하다는 것의 역동성을 절감하게 된다. 조선 수군 은 확실히 강한 군대였다. 잘 훈련된 군사, 성능이 월등한 무기, 그리 고 견고하고 튼튼한 함선에 이순신이라는 리더까지, 강해지기 위해 갖출 수 있는 것은 다 갖추었다. 그러던 중에 리더가 원균으로 바뀌었 다. 이것은 조선 조정의 명백한 오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오판을 했다. 조선 수군이 예전처럼 일본군을 만나기만 하면 이길 수 있으리 라 생각했던 것이다. 전체 전황을 분석하는 힘이 부족했다. 적의 전력 을 면밀히 살피고 우리의 전력과 비교 분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 조차 소홀히 한 채 전장으로 내몰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철저히 준비했다.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에게 연전연패를 당한 원인을 철저히 분석했다. 승리는 패인 분석에서 비 롯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원균이라는 적장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그는 돌격장, 그래서 유인 작전에 쉽게 빠질 것이 다. 그리고 상대를 지치게 한 후, 대규모 전선을 동원한 야간 기습 작 전으로 적의 배에 올라 섬멸한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이 기기 위해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 을 선택했던 것이다. 예전 같으면 선제공격을 꿈이라도 꾸었겠는가. 우리가 강한 만큼 적도 따라 강해졌던 것이다. 아니 아군보다 훨씬 빠 른 속도로 강해져 마침내 아군을 능가하고 만것이다. 정유재란 당시 대마도는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한다. 모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무기와 선박 성능의 열세를 숫자로 채우려 했던 것이다. 원균은 이런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 대비책을 세웠어야 했다. 그동안 조선 수군 이 이긴 원인을 분석하고 적이 들고 나올 전술을 예상하여 한발 먼저 길목을 장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원균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강자의 큰 고통은 고독하다는 것 외에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는 것이다. 상대는 우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변화구에 약하던 타자라고 해서 다음 시즌에도 변화구가 통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약한 상대일수록 변화의 여지는 더 많다. 그 여지를 제대로 활용 하는 상대라면 그 변화는 상상을 넘을 수 있다. 괄목상대라는 말은 어 쩌면 순진한 단어인지 모른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틈도 없이 상대 는 변하고 강해진다. 바늘귀 같은 방심의 순간, 조직 전체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상대는 그 틈새를 예리하게 파고들 것이다. 필요한 만큼 강자의 자리에 머물고 싶다면 언제나 상대를 예의주시 해야 한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상대는 나를 능가하기 위 해 애를 쓰는데 언제까지나 지난날 승리의 달콤한 기억에만 빠져 있 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보다 빨리 강해지는 상대, 그보다 강하려면 언 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추월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추월당하는 것은 순간이다.
[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