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_110

The Battle of Dangpo was significant for Admiral Yi Sun-sin's strategy of focusing on the enemy's main force, the flagship, to secure a decisive victory. The Japanese forces were initially underestimating the situation, but Yi Sun-sin targeted their core unit, the flagship, and executed a preemptive strike with the Geobukseon. The Geobukseon's powerful broadside attack sunk the flagship with two strong cannon volleys, resulting in the disintegration of the Japanese army's morale. Yi Sun-sin's victory was achieved by finding the enemy's weak point amidst their strength.

[위험한 만큼 효과도 크다, 핵심부를 공략하고 최대의 승부처를 장악하라]

 

당포해전

1. 가장 견고한 곳이 가장 약하다

처음으로 거북선을 띄운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부상을 입었다. 왼 쪽 어깨에 총탄을 맞은 것이다. 기록을 보면 "발꿈치까지 피가 흥건했 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천해전을 승리로 이끈 그날 밤, 이순신 함대 는 사천만 입구에 있는 모자랑포에 정박했다. 그리고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라고 해야 독주를 한잔 마시고는 어깨의 총탄을 빼내는 것이었 다. 이순신은 그 고통을 고스란히 참아냈다. 수술 후 이순신은 앞으로 다시 활을 쏘지 못할까 싶어 걱정된다고 했다.

 

적의 약점을 찾아라

사천해전 사흘 후, 이순신 함대는 사천을 기점으로 부산 쪽으로 수색을 하며 함대를 이동시켰다.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며 각 포구의 적 선들을 격멸하려는 계획이었다. 끊임없이 서해 바다를 넘보는 적을 서해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막으려 했던 것이다. 최일선에서 준동하 는 적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각 포구에 산재해 있는 적이 연합하여 단 일 함대를 꾸리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최소 700여 척이 넘는 적선이 무장을 하고 단일 함대를 형성, 서해로 진격해 온다면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규모 적을 끊임없이 격퇴하는 것, 그것이 28척의 판옥선을 거느린 이순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 었다. 1592 6 2일 아침, 적선이 당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 되었다. 당포는 지금의 경남 통영시 미륵도에 있는 포구였다. 이순신 은 즉각 함대를 이끌고 출동했다. 당포를 얼마 앞둔 곳에서 이순신은 척후선을 띄워 적의 동태를 살피도록 했다. 일본군은 전선 21척 규모 로,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일부는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고 일부 는 전선에 대기 중인 상태였다. 이제 일본군도 조선 수군을 의식했다. 지난 한 달여, 일본 해군은 조선 수군에 연전연패했다. 적선 21, 그 렇다면 정면 승부도 가능했다. 더구나 거북선까지 참전한 상태, 이순 신 함대의 전력은 최고조였다. 이순신은 천천히 당포를 향해 진격했다. 모든 포구가 그러하듯 당 포 역시 육지 깊숙한 곳이었다. 사천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은 육 지와 배 위에서 조선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육지에 진지를 구축한 적 은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화살은 번번이 엄폐물에 걸렸고 총통으 로 공격해도 효율이 낮았다. 바다에서는 대장군전 한 발의 명중으로 적선 한 척을 격침할 수 있었으나 육지에 숨어 있는 적병은 한 명도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순신은 당포 앞바다에서 적진을 살펴보았다. 싸움이 길어지면 불 리할 것이 뻔했다. 높은 지형에서 조총과 화살로 공격할 채비를 갖추 고 있는 적! 비록 적선을 모두 격침하더라도 조선 수군이 입을 피해 또 한 적지 않을 것이다. 싸움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적이 우리를 모를 때는 쉬웠으나 이제 몇 번의 패전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적! 고 작 20여 척의 적선을 격파하기 위해 조선 수군이 입을지도 모를 피해 가 걱정이었다. 그렇다면? 적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일본군의 가장 약한 고리는 무엇인가?

 

위험한 만큼 효과도 크다

일본 배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함대의 한가운데에 정박하고 있는 대형 아다케였다. 일본 전선 중 가장 큰 것이 아다케, 즉 안택선이었다. 넓은 갑판 위에 집을 올려놓은 형태로 승선 인원만 해도 200명이 넘는 아다케는 3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갑판 위의 층 루는 마치 일본 성곽의 천수각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장했다. 갑판에 는 조총과 활로 무장한 일본군이 빙 둘러서 있었고 갑판 한가운데는 붉은 양산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일본군 장수는 바로 그 양산 아래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꼼짝않고 조선 함대를 노려보는 적장은 이순신과의 결전을 직접 지휘할 듯했다. 만만찮은 상대였다. 저토록 침착하고 태산 같은 자세로 보아 그 아래 장수와 군사들의 군기 역시 엄정할 터였다. 지금껏 만난 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지금까지의 일본군들은 조선 함대가 나타나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산 발적으로 먼저 사격을 가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포의 일본군은 달랐다. 조선 함대가 접근하 는데도 침착했다. 그들은 결코 만만 한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일본 전 선은 대장선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 다. 전력을 집중 배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대장선을 호위라도 하듯 버티고 있었다. 저들은 대장선이 침몰하지 않는 한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그렇다면 속전속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침내 이순신은 결심했다. '핵심부를 공략하겠다.' 그것은 바로 대장선을 집중 공격하는 것이었다. 겹겹의 호위를 받고 있는 적의 대장선, 그래서 약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방심이다. 저들은 조선 수군이 대장선을 둘러싼 전선들을 차례차례 깨뜨린 다음 대장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바로 거기에 허점이 있다고 이순신은 생각했다. 초전에 적의 대장선을 잡을 수만 있다면, 저들이 결사적으로 보호하는 대장선만 침몰된다면 적은 저절로 무너 잘 것이다. 이순신은 즉각 거북선 돌격장과 장수들을 불러모아 작전 사항을 지 시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초전에 거북선이 적의 대장선을 선제공 격할 것 작전의 핵심이었다. 서너 척의 판옥선은 거북선을 뒤따르고, 나머지 판옥선은 대장선을 호위하고 있는 일본군 전선에 최대한 포격을 가해 거북선과 돌격선들을 엄호할 것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다. 적 선으로 이중삼중의 호위를 받고 있는 대장선을 공격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 부담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거북선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면 군사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끼칠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위험한 만큼, 성공할 때 효과도 클 것이오." 이순신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고는 거북선을 불렀다. "귀선은 곧장 적의 대장선을 공격하라! 적의 대장선은 높이가 높아 하부에 약점이 있을 것이다. 최대한 신속히 접근하여 총통으로 선체 하부를 공격한다면 승산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돌격선은 거북선을 엄호하라

 

거북선, 적의 대장선을 격파하다

드디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당포 앞바다의 정적이 깨어졌다. 이순신의 돌격 명령과 함께 거북선이 함대를 제치고 선두로 나섰다. 그러고는 곧장 적진 한가운데를 향해 돌진했다. "전 함대 방포하라! 나머지 판옥선들은 일본군 전선을 향해 다양한 포격을 시작했다. 한꺼번에 200여 발의 포격이 이루어졌다. 육지의 일본군도 응사했으 나 조선 함대에는 사거리가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조선 함대의 엄호 포격을 받으며 거북선은 일직선으로 대장선을 향해 돌격했다. 일본군은 돌진해 오는 거북선을 향해 조총과 화살을 날렸다. 거북선 내부에서는 모든 격군들이 노에 붙어 노를 저었다. 포혈과 창문은 모두 닫아걸었다. 요란한 조총 소리가 나더니 거북선 선체 이곳저곳 에 총탄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화살 박히는 소리도 들렸다. 그 러나 조총과 화살은 견고한 거북선을 뚫지 못했다. 거북선 격군들은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에 비해 선체가 무거워 특 히 격군들이 애를 먹었다. 그러나 일단 추진만 하면 그 무게로 인해 점 차 가속도를 낼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쿠쿵!" 거북선을 막아서던 일본의 작은 전함들이 거북선 용두 아래 설치된 당파용 귀두에 부서져 나갔다. 일부는 거북선에 오르려고 했으나 가마니 아래의 뾰족한 송곳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다. 마침내 거북선은 적의 대장선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적진 사이로 파고들기에 성공한 것 이다. 대장선 위의 일본군들이 미 친 듯이 내려다보며 조총을 쏘아댔으나 총탄은 철갑에 튕겨 나갔다. 조총 소리와 철갑에 총탄 튀는 소리가 당포 앞바다를 가득 메웠다. 거북선이 대장선 가슴께로 파고들자 다른 일본군 함대의 공격이 오히 려 뜸해졌다. 섣불리 공격하다가는 자신들의 대장선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먼발치에서 적의 대장선에 바짝 접근한 거북선을 바라보았다. 일본군 대장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완전히 허를 찔렸던 것이 다. 거북선이 조선 함대의 선두로 나설 때만 하더라도 곧장 대장선을 향해 오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일본군 전선들과 격전을 치르고 잔뜩 지친 다음에나 도달하리라 여겼다. 그때 대장선이 천천히 나서서 거 북선을 해치우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거북선은 곧장 파죽지세로 달려 와 대장선 앞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양산 아래 꼼짝 않고 앉아 있던 적장이 벌떡 일어 나 군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적의 대장선 가슴께에 밀착한 거북 선이 우선 당파용 귀두로 대장선을 '' 하고 들이받았다. 그 바람에 높다란 아다케가 크게 흔들렸고 일본군 몇몇이 중심을 잃고 갑판 아 래로 떨어졌다. 거북선이 천천히 물러서더니 일본군 대장선을 정면으 로 마주했다. 용머리에서는 현자총통이 나왔고 곧이어 대장선의 가슴께를 향해 차대전을 발사했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뱃머리 아래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러자 이제 거북선은 90도로 회전하여 측면 이 일본군 대장선을 향하도록 했다. 다음 순간, 포혈이 일제히 열리더 니 각종 총통이 머리를 내놓는 것과 동시에 일제히 불을 뿜었다. 10여 문의 총통이 대장선 선체 하부를 공격했다. 장군전과 단석들이 순식 간에 대장선 아다케의 아랫부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냈다. 방금 발사한 총통이 들어가고 새로운 총통이 준비되는가 싶은 순 간, 다시 벼락 같은 소리와 함께 거북선이 2차 포격을 감행했다. 2차 포격은 더욱 타격이 컸다. 이미 충격을 받은 대장선 선체 곳곳이 무너 져 내렸다. 단 두 번의 포격으로 대장선은 앞머리부터 바닷속으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는 광경 앞에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했 다. 철석같이 믿었던 대장선이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괴물 같은 배에게 단 두 번의 공격으로 격침당하는 모습을 그들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전 함대 공격하라!" 거북선의 공격을 지켜보던 이순신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미 일본군은 더 이상 대항할 힘도 의지도 상실하고 말았다. 아다케 위의 왜장은 끝까지 자신의 함선 지휘소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날 아온 조선 수군의 화살에 가슴을 맞았다. 화살을 맞고도 불타는 눈으 로 조선 수군을 노려보던 왜장은, 그러나 몇 발의 화살을 더 맞고 마침 내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조선 수군들이 함성을 올렸다. "왜장이 죽었다. 왜놈 대장선을 잡았다. 쏴라!" 조선 군관들은 바다에 빠진 일본군 대장의 머리를 수습했다. 함께 수습된 금부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이 부채를 준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당포에서 전사한 일본군 장수의 이름은 '귀정자 구(龜井矩'로 알려져 있다. 대장선이 침몰하고 대장의 목까지 내걸리자 싸움은 다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대부분 육지로 도망쳤고 조선 수군은 남은 왜선을 남김없이 불질렀다. 자칫 어려울 수 있었던 싸움, 그것을 이순신은 과감한 핵심부 공격 작전으로 돌파했다. 가장 강력 한 요새처럼 보이는 적의 대장선을 향한 과감한 공략, 이순신에게 당 포해전 승전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겨준 순간이었다.

 

2. 핵심부를 공략하라

최대의 승부처를 장악하라

싸움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전쟁 초기 조선 수군은 한 사람의 부상 자도 없이 승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갈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적도 이제 충분히 대비를 했고, 투입되는 전투병들도 정예병으로 바뀌었 다. 당포의 일본군은 최고 지휘관이 타는 아다케를 동원했다. 군기가 엄정한 적은 쉽게 무너뜨리기 어렵다. 이순신은 언제나 공격하는 입 장이었고, 일본군은 함대와 육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조선 함대를 기다렸다. 넓은 바다에서 싸워서는 조선 총통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 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이순신 함대에 발각되지 않고 작전을 수행하려 했다. 당시 일본 해군의 역할은 서해 바다로 진출하 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 어느 편이 더 어려울까. 역시 공격하는 쪽이다. 지금껏 보지 못한 대형 적선인 아다케를 보는 순간, 이순신은 거기가 승부처라는 것을 직감했다. 적의 대장선이 건재하는 한, 적장 이 살아 있는 한 일본군은 최후의 한 명까지 옥쇄를 각오하고 싸울 터 였다. 군사들이 지휘관을 믿고 그를 중심으로 혼연일체가 된다는 것, 그만큼 강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해법이 있었다. 적의 핵심부를 공략하는 것, 그것만이 전투를 빨리 끝내고 아군의 피 해도 줄이는 길이었다. 상대의 핵심부를 공격하려는 시도는 전쟁의 역사와 함께 계속되었 다. 고대 로마 시대의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9~202)에서 두 전쟁 영웅이 맞붙었다.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 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로마의 스키피오 가 맞붙었다.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지중해를 우회하여 피레네 산 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해 왔다. 로마는 공포에 빠졌다. 한니발은 연전연승,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까지 진격했다. 이때 로마 에는 스키피오가 등장했다. 그는 한니발에게 타격을 입힐 대작전을 구사했다. 그는 한니발 군대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는 스페인의 뉴 카 르타고를 공격하기로 했다. 누구도 로마 군이 스페인까지 와서 그곳 을 공격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한 차례의 강습으 로 뉴 카르타고를 장악했다. 이제 한니발 부대는 주요 기지를 잃었고, 전쟁의 주도권은 단숨에 로마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전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먼저 전폭기와 미사일을 동원하여 상대국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면서 전쟁이 시작된 다. 정교한 미사일로 적의 군수기지, 연료 및 식량 보급창 등 핵심 시설을 파괴한 다음 육상 병력을 진격시킨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주 력하는 것은 적의 지휘본부를 찾는 것이다. 개전 초기, 상대의 작전 사 령부를 찾아내 타격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렇듯 단 한 번의 핵심부 공략은 전쟁 전체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 친다. 그래서 수많은 지휘관들은 적의 핵심부 공략을 최우선으로 추 진한다. 그러나 적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핵심부 를 지키기 위해 충분히 대비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순신은 해법을 찾았다. 충분하게 대비했기에 오히려 방심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적중, 거북선이라는 출중한 신무기가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강점 속에서 약점을 찾아라

언제나 업계 1위를 놓치지 않는 기업, 그래서 도저히 넘볼 수 없을 것 같은 업체를 이기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강점에서 약점을 찾는 것이다. 크기가 큰 피자를 상대로 할 때 는 음식물 쓰레기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 크기로 승부하던 그곳에 약 점이 있었던 것이다. 만년 2위이던 어느 렌터카 회사는 이렇게 광고했 다. '우리 회사는 기다리는 줄이 짧습니다. , 잘나가는 렌터카 회사 의 차를 빌리기 위해 오랫동안 고객이 기다려야 하는 점, 그것이 약점 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상대의 강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약점으로 만 들고 자신의 약점은 강점으로 만든 사례이다. 적의 핵심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공략하 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상대도 자신의 핵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역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 로 거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믿는 그 자리 어딘가에 허점이 숨어 있다. 가장 강한 곳에 약점이 있다. 중앙 수비가 두터운 축구 팀이 있다. 당연히 상대 감독이나 선수는 측면 공격에 치중할 것이다. 측면으로, 측면으로!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골을 넣기가 쉽지 않다. 뛰어난 공격 수는 상대가 자랑하는 중앙 수비 돌파를 감행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 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중앙 수비가 견고하기 때문에 상대는 측면을 파고들려고 할 것이다. 측면 수비만 보강한다면 철벽 이 될 수 있다고! 바로 그 허점을 파고들어야 뛰어난 공격수가 될 수 있다. 견고한 중앙 수비수, 스스로 견고하다고 믿는 거기에 바로 약점 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과감하게 돌진하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상대의 강한 곳을 피하기만 해서는 결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때 로는 과감한 핵심부 공략이 필요하다. 공략해야 할 곳은 그대로 두고 주변부에 변죽만 울리는 경우, 그것은 이미 자신감을 잃은 상태거나 적을 공략하려는 의지가 없다고밖에 볼 수 없다. 목표 지점은 내게서 너무 멀고 적은 너무나 강해서 아무리 해도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가.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면 세계의 핵심부를 공략해야 하고 어느 분야 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그 분야의 핵심을 파악하고 전력을 투입해야 한다. 단계를 밟아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강력한 부분을 강 타하는 핵심부 타격으로 목표한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반면 자신의 핵심부를 지키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바로 그곳에 나의 약점이 있다. 핵심부를 노리고 들어오는 적 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비하라! 그리고 상대의 핵심부는 과감하게 공략하라!

 

진해 앞바다 해전

백성의 정보를 신뢰하라

당포해전이 끝나갈 즈음, 후방을 맡고 있던 척후전이 이순신에게 다가왔다. 일본군 대신 20여 척이 거제에서 당포로 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미 당포의 전투는 끝이 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들을 당포 바깥 바다에서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당포 선창 은 좁아서 근접전이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 함대에게 항로 플들려 당포 바깥 바다로 나가도록 명령했다. 당황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그들은 당포를 공격하는 이순신의 배후를 질 요량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미 속전속결로 당포해전을 끝내고 오히려 뱃머리를 돌려 자신들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지 않은가? 조선 함대가 당포의 아군을 간단히 제압했다면? 일본군의 판단은 빨랐다. 그들은 즉시배 를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추격을 멈추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어제 도망간 일본군을 찾아 나섰다. 하루를 수색했으 나 그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한산도 옆 추도 앞바다에서 밤을 새운 이순신은 다시 수색에 나섰다. 이때 산으로 피했던 당포의 군사 한 사람이 내려와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보고했다. , 당포해전 이후 일본군은 전사자들을 한곳에 모아 화장한 후 육 로를 따라 어디론가 이동했으며 당포로 진격하다가 도망친 왜선은 거제로 갔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즉각 거제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전라우수군 이억기 함대와 조우, 그들과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 날인 6 5, 거제의 백성 7.8명이 이순신에게 와서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다시 제공했다. 당포에서 우리함대에 쫓긴 일본군이 거제에 정박한 후 지금은 고성 땅 당항포로 이동했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아들의 정보를 신뢰했다. 그들의 설명과 정황으로 보아 일본군의 역공작일 가능성은 적었다. 이순신은 즉각 함대를 당항포 쪽으로 이동시켰다. 당항포 입구에 다다를 즈음 진해 선창에서 급히 나오는 일본군 대선 4척과 소선 2척을 발견했다. 진 에는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포구였다. 이들을 녹도 만호 정운이 추격 하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조선 수군은 적이 버린 전선 6척을 불태운 후 일본군에 잡혀 있던 조선 백 성들을 구출했다. 당시 일본군은 진해성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다가 함안 군수 유숭인의 기병대에 쫓겨 바다로 나오던 중 이순신 함대를 만나 전멸했 던 것이다. 자신을 믿고 찾아온 백성들이 제공한 정보, 이순신은 그것을 믿었고 그 정 보를 바탕으로 승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당항포해전

1. 봄바람에도 꽃은 진다

이순신 함대의 승승장구! 이 소식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 이제 연안의 백성들은 먼발치서 조선 수군이 나타나면 앞장서 식수를 공급해주거나 함성으로 격려했다. 일본군의 만행을 피 해 외진 바닷가나 산속에 숨어 지내던 백성들에게 이순신의 존재는 희망 그 자체였다. 드디어 전라우수군 합류하다 이순신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자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는 수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가 면 안전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당포해전 이틀 후, 이순신 함대는 거제에 적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 하고 당포를 출발하려고 했다. 막 출항을 서두르는 순간, 앞바다에 거 대한 함대가 나타났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긴장했다. 즉시 비상이 걸리고 전군이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전 함대가 급히 뱃머리를 돌려 접근하는 함대를 향해 나갔다. 일본군의 기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다에는 환호성이 울렸다. 접근해 오는 함대는 일 본군이 아니라 그토록 기다리던 전라우수군이었다. “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펄쩍펄쩍 뛰지 않는 군사가 없었다." 이순신은 이억기 함대와의 조우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억기의 전 라우수군은 판옥선 25척의 당당한 함대였다. 이제 조선 수군은 판옥 선이 50척이 넘는 대함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조선 수군의 사기는 단번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목숨을 건 전장터에서 구원병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경상우수영 원균의 함대가 판옥선 4척 규모인데 비해 25척의 거대한 함대가 합류한다는 것은 대 단한 일이었다. 조선 수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마주 잡았 을 것이다. 전라우수군은 그동안 싸워온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들 을 위로하고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은 전라우수군을 진심으로 반 겼을 것이다. 이렇게 수군들의 사기가 충천해 있을 때 정작 문제는 지휘부에서 생겼다. 이제 장수가 세 사람이 된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과 이억기, 이들은 모두 정3품 수군절도사, 즉 같은 계급의 수사(水使)였다. 한 부 대에 사단장이 세 명이 되었으니 연합 함대의 지휘권을 누가 가질 것 인가 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회의를 했다. 그리고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순신이 지휘권을 가 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다. 원균의 함대는 규모가 너무 작았고 이억기는 전투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작전회의 관계로 출 전하지 못했다.

 

바다로 적을 유인하다

다음 날, 1592 6 5일 아침, 고성 땅 당항포에 적이 있다는 소식 이 전해졌다. 안개가 짙게 낀 날씨였다. 이순신은 의아했다. 당항포는 만이 좁고 깊은데다 앞이 막힌 곳이다.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격할 요 량이면 고성과 통영 앞바다를 지나야 할 터인데 어째서 앞이 막힌 깊 숙한 만으로 들어갔을까? 그렇다고 당항포가 사천이나 당포 같은 전 략적 요충지도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자 이순신은 이 첩보의 진의가 의심되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여기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 년 전, 고성 땅 어느 주막에 승려로 가장한 일본 첩자가 하룻밤 묵었다. 그 첩자는 일 년 전에도 이 주막에 머물다 갔다. 주막의 월이라는 기생은 스 님이 다시 찾아온 것이 반갑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 승려는 술을 청했다. 월이는 그에게 자꾸 술을 권했다. 승려는 곧 술에 취해 곯아떨 어졌다. 승려의 봇짐을 풀어본 월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속에서 짧은 환도와 조선의 지도가 나왔는데, 지도에는 성과 주둔하고 있는 군사의 수, 지형 등이 자세히 표기되어 있었다. 놀란 월이는 그 지도에 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고성 땅의 일부를 바다처럼 파랗게 칠해버렸다. 그리하여 첩자의 지도는 당항포에서 지금의 고성읍까지의 육지가 바다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다음 날 승려는 기생 월이가 위조한 지도를 가지고 떠났다. 당항포해전 당시, 일본군이 이곳으로 온 것은 기생 원이의 가짜 지 도 때문이라고 지금도 현지인들은 믿고 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남해에도 전해오는데 관음포 일대를 '가청도(가짜로 푸른색으로 칠한 곳'라 칭하는 것도 임진왜란 때 육지를 바다 색깔로 칠한 데서 유래한 다고 한다. 바로 이 가짜 지도 때문에 노량해전 당시 일본군은 이순신 함대에 몰리자 관음포로 도망쳤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연합 함대를 이끌고 당항포로 항진했다. 항진하는 도중 진해에서 함안 군수 유승인에게 쫓겨 나오는 일본 전선 6척을 불태웠 다. 진해 앞바다 해전을 간단히 치른 것이다. 그런 다음 당항포 공격을 준비했다. 당항포로 들어가는 입구는 바다의 폭이 300미터가 될까 말 까한 좁은 곳이다. 오죽하면 당목(닭목)이라 이름 붙였을까? 입구에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당항포까지는 약 30여 리, 이순신은 당항포 입구 당목 근처에 4척의 판옥선을 매복시켰다. 혹시라도 당항포에서 빠져나갈지도 모를 적선을 지키면서 동시에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일본군 구원병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이순신은 장사진을 펼치게 했다. 당항포로 이르는 바닷길 역시 좁아 장사진을 펼쳤던 것 이다. 당항포에는 26척의 적선이 정박 중이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일본군은 곧바로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조총을 쏘고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이순신은 가벼이 움직이는 적을 보고는 내심 안도했다. 적진은 어딘지 모르게 성급해 보였다. 적선 중 에는 대형 아다게도 보였다. 아다케의 누각은 단청을 칠해놓아 마치 불전처럼 보였다. 이순신은 아다케를 포함하여 적선을 포위하도록 했다. 삼면을 포위한 채 점차 포구를 압박해 들어갔다. 당항포를 디귿 ()자 모양으로 에워싼 후 서서히 접근하자 일본군은 맹렬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들은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어쩐 일인지 이순신은 방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벌써 방포 명 병이 내리고 엄청난 포격이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이 순신은 적선에게 접근만 명령할 뿐 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미 일본군 조종 사거리까지 들어갔다. 조선 판옥선 뱃전에 총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방패를 높여라! 갑판 위의 수군들은 방패를 높였다. 수군들조차 의아했다. 도대체 장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총통 한 방 쏘지 않고 접근하여 당파 나 백병전으로 끝내려는 것일까. "사부들은 화살을 쏘아라!" 마침내 이순신이 내린 명령은 엉뚱하게도 화살을 쏘라는 것이었다. 월등히 우세한 화력인 총통을 놔두고 화살을 쏘라는 이순신의 명령에 수군 사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이제 당항포 앞바다는 일본군 의 조총과 조선 수군의 화살 대결로 압축되었다. 접전이 이어지자 드 디어 이순신이 바라던 반응이 일본군 진영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조 선 수군을 향해 진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군은 조총과 불화살 을 맹렬히 쏘면서 다가왔다. 조선 판옥선 곳곳에 불화살이 꽂혔다. 수 군들은 젖은 가마니로 뱃전에 붙은 불을 껐다. 곳곳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후퇴하라!" 이순신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조선 판옥선들이 일제히 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것은 일본군이었다. 그들은 더 빨리 노 를 저으며 이순신 함대를 쫓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군의 패착이 었다. 이순신의 유인 작전에 걸려든 것이다. 이순신은 당항포에 정박 한 일본군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일본 전선을 모조리 격침시킬 수는 있으나 만약 그러할 경우 육지로 올라간 일본군들이 조선 민간 인에게 보복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바다로 유인하여 적 을 모조리 수장시킬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퇴로를 열어 백성들을 보호하다

바다로 나온 일본 전선 26척은 뒤늦은 후회를 해야 했다. 물러나던 조선 함대가 일제히 총통을 쏘며 진격해 왔다. 이미 바다는 어두워지 기 시작했다. "총공격하라! 전 함대 총통 발사하라!" 드디어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인 각종 총통이 발사를 시작했다. 장군전과 단석들이 날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란탄들이 저물어가는 바 다 위를 날아 일본군 함대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당황한 일본군들이 조총으로 응사했지만 두텁고 높은 판옥선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역시 이번에도 일본군 대장선은 거북선이 맡았다. 이미 전열이 흐 트러진 일본군 함대 사이를 거북선이 헤집고 들어가 적의 대장선 턱 밑에 접근했다. 그러고는 포격과 당파로 간단하게 제압해버렸다. 순 식간에 전세가 뒤바뀌었고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전선의 숫 자 면에서도 일본군은 조선군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 전선은 완파되거나 반파된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물에 빠진 일본군들 중 살아 남은 자들은 필사적으로 육지를 향해 헤엄쳤다. 이순신은 어수선한 전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공격 중지!" 느닷없이 이순신이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장수들과 군사들은 의아했다. 이제 남은 적선은 고작 한 척, 까짓 한 척 정도는 판옥선이 총통 두어 번만 발사하면 끝장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적선의 완전 격 침, 완벽한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공격 중지 명령이라니! 곧이어 이순신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조선 수군과 장수들은 의아했지만 명 령은 추상 같은 것! 조선 수군은 한 척의 적선을 남기고 어두워져가는 당항포를 떠나갔다. 혼비백산한 일본군은 조선군이 완전히 물러가자 남은 한 척의 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방답 첨사 이순신을 불러라!" 방담 청사는 이순신과 이름이 같은 이순신이었다. 막 당항포 입구 당목을 빠져나올 즈음 이순신은 휘하 장수를 불렀다. 방답첨사가 즉시 달려왔다. "적은 반드시 나머지 한 척의 배를 타고 당항포를 빠져나올 것이다.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잔적을 모조리 소탕하라! 그제서야 장수들은 이순신의 의중을 읽었다. 이순신은 적이 철수할 수 있도록 배를 일부러 남겨준 것이다. 그것은 배를 모두 잃은 일본군 이 육로로 후퇴하면서 조선 백성들에게 저지를 만행을 막기 위해서였 다. 도망갈 수 있는 배를 한 척 남겨둠으로써 일본군이 육지로 상륙하 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을 심산이었다. 과연 일본군은 이순신이 예상한 대로 움직였다. 그날 밤, 한 척의 배에 탑승 인원이 훨씬 넘는 일본군 패잔병들이 타고 몰래 당항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곧 방답 첨사 이순신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려는 일본 배를 조선 수군은 갈고리를 던져 고정 시긴 채 네 적의 판옥선이 포위 공격했다. 젊은 왜장을 중심으로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전멸을 면할 수 없었다. 조선 수군은 홈뻑젖은 채 적장의 목을 베어 귀환했다. 단 한 명의 적도 상륙시키지 않고 거둔 대승이었다. 일부러 적선 한 책을 남긴 당항포해전,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까지 고려하여 거둔 승전이었다.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이순신 의 마음이 담긴 아름다운 승리였다.

 

2. 자신의 행위가 끼칠 영향을 생각하라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비무장 민간인 전부를 떠나 이순신이 안고 있던 큰 부담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이었다.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몰려드는 피난민을 보살피는 것도 그 렇지만 전투로 인해 백성들이 당하는 피해 역시 마음의 짐이 되었다. 옥포에서 합포에서 적진포에서 사천에서 일본군들은 조선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노략질은 예사였고 사천에서는 백성들을 중노 동에 동원하고 심지어는 조선 수군의 총알받이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육지로 올라가 후퇴하면서 저질렀을 만행, 그것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짐작하고 남았다. 패전의 분풀이를 백성들에게 했을 것이다. 보급을 위해 마음을 약탈하고 살 인 방화는 예사로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런 패잔병들의 만 행을 저지할 만한 조선 육군은 없었다. 산발적인 의병 활동이 있었으 나 민간인들을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전투가 계속되면서 이순신도 이런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죄 없는 백성들을 유린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당항포해전에서는 적을 바다에 모조리 수장시키려 한 것이다. 이순신은 유인 작전을 택했고 그것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졌다. 일부 러 적선 한 척을 남겨 퇴로를 열어주었고 그 퇴로를 막고 있다가 적을 전멸시켰다. 적어도 당항포에서는 일본군 패잔병에 의한 피해는 없었 을 것이다. 눈앞의 전투가 당장 급한데도 이순신의 생각은 여기까지 미쳤던 것이다. 인류 역사에 전쟁이 기록되기 시작한 지 3,000여 년, 어떤 형태의 전쟁이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적의 노략 질에, 혹은 아군의 작전에 힘없는 민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전쟁의 광풍에 휘말렸다. 아무리 세계 전쟁사를 들추어보아도 민간인을 보호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지휘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휘관과 장교 들은 오로지 승리만을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에서 의 인도주의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무조건 승리하는 것이 아니던 가. 이기는 것 외에 전쟁을 종식시키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요, 승리 야말로 최고의 가치가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라

중국 고사에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말이 있다. 명분에만 집착하 여 일을 그르칠 때 이 고사를 인용한다. 옛날 송나라 양공()이 초나 라가 쳐들어오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서 싸웠다. 초나라 군이 강을 건너오기 시작하자 양공의 참모가 건의를 했다. 상대는 군사가 많으 므로 강을 건너기 위해 대열이 흩어졌을 때 기습을 해야 한다는 내용 이었다. 그러자 양공이 이를 일축해버렸다. "너는 인과 의를 모르느냐? 어찌 적이 대열을 갖추기도 전에 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옳은 일이 아 니다!" 양공이 기습을 거부하는 동안 초나라 군은 이미 강을 다 건너 고 있었다. 강을 건넌 초나라 군은 전열을 가다듬었다. 또다시 양공의 참모가 건의했다. 적이 전열을 갖추기 전에 공격하면 능히 이길 수 있 다고, 이번에도 양공은 그 건의를 묵살했다. 어찌 소인배처럼 적이 전 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공격할 수 있겠냐며 그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 니라고 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양공은 참패하고 말았다. 물론 이런 경우는 실제 전장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지휘관들 은 이기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이 입는 피해를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장수들은 그에 대해 크게 고민 하지 않는다. 적에게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군이 민간인들의 농 작물과 가옥을 모두 불태우는 청야 작전이라는 것도 그 피해는 고스 란히 민간인에게 돌아가지만 지휘관은 개의치 않는다. 현대전에서도 민간인 보호를 위한 수많은 협약과 교전 수칙 등이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베트남전 등 현 대전에서 게릴라, 혹은 게릴라 우호세력이라 하여 숱한 민간인들이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들은 증거도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군인들에 의해 즉결 처분당하기도 했다. 모든 전쟁에서 민간인 피해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든 치를 수 있다는 것 이 전쟁의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이다. 그 어떤 지휘관도 민간인을 보 호하기 위해 패전의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는다. 다만 희생을 감수하 면서도 승전을 위해 움직일 뿐이다. 우리 주위에 이와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희귀 야생화를 촬영 하는 현장,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이 꽃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청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애를 쓴다. 야생화의 아름다움 을 찍기 위해 조명을 사용하고 카메라 각도를 이리저리 바꾸며 한나 절 이상을 촬영에 매달렸다. 촬영이 끝난 자리, 주변에는 제작진의 등 산화에 짓밟힌 야생화가 즐비했다. 오로지 촬영에만 몰두하여 정말로 이 귀한 꽃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최소한의 배려조차 않은 무신경이 빚은 결과였다. 다음 해 그 자리에 꽃은 다시 피지 않았다. 더 큰 햄버거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쇠고기가 필요하다. 쇠고 기를 더 많이 공급하기 위해서는 비육우를 더 많이 길러야 한다. 그러 기 위해서는 숲을 베어내고 목초지를 넓혀야 한다. 숲이 사라지면 지 구의 산소 공급량에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사육소의 배설물이 많아 져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증가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도시에서 먹는 더 큰 햄버거가 지구 전체의 환경 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러나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 중에 이 러한 순환 과정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산을 오르되 발밑의 꽃도 보라

잠시 생각해보라. 눈앞에 보이는 목표만을 위해 뛰고 있지는 않은 가. 그것을 성취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조 금 멀리 생각하고 앞서가라. 결과를 예측하고 주변을 살펴라,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생각하라. 나의 성과에 급급하여 그것이 타인에게 혹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 인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승자라고 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다. 그 들을 지배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현대 사회는 경쟁 사회이며 경쟁에 서는 무조건 이기고 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의 목적을 위해서는 오로지 앞만 보고 일로매진하 는 것, 그것이 전부인가? 들꽃 메꽃이야 다치든 말든 오로지 산 정상 만 향해 뛰어오르는 사람들, 그들에게 당항포의 이순신이 웅변하는 바는 의미 없는 옛이야기일 뿐일까. 산길을 오를 때는 오르는 데만 연연하여 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순신 역시 이기기 위해 다른 것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 러나 백성들의 피해 소식을 듣자 아차 했을 것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내려오면서 보라! 이제는 오르기 전부터 혹시 내 발길에 다칠지도 모를 꽃을 먼저 생각해보라, 그러면 훨씬 넓 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진정으로 성공하는 삶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것이다.

율포해전

 

1. 싸움은 나의 것, 전공은 그대의 것

이순신이 2차 출전을 했을 때는 음력 6월 초순, 양력으로 대략 7월 경이었을 것이다. 7월은 남해 바다에 태풍이 오는 때이기도 하다. 당 항포해전을 마친 다음 날 이순신 함대는 당항포 입구의 작은 포구에 정박했다. 구름이 많고 비가 오는 날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이 날에는 이순신과 장수와 군사들이 모처럼 휴식을 취했으리라. 날이 개자 이순신은 척후선을 띄웠다. 이번에는 멀리 가덕도까지 다녀오라는 명을 내렸다. 척후에는 정찰척후와 전투척후 두 종류가 있었다. 정찰척후는 몰래 적의 주요 이동로와 병력 등 적정을 탐지하 고 돌아오는 것이 주임무였다. 그러나 전투척후는 달랐다. 적을 만나 면 교전을 치르도록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적의 전력, 전술 등을 파 악해 오는 것이 임무인 것이다.

 

작은 갈등에 연연해 마라

이날 이순신이 가덕도까지 보낸 척후가 정찰척후인지 전투척후인 지는 정확치 않다. 하지만 먼 거리 가덕도까지 전투척후를 보내는 것 은 위험 부담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기에 아마도 소형 선박을 이용한 정찰후를 내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다음 날 오전, 이 정찰적후가 돌아오면서 이순신 진영에는 묘한 기류가 홀렀다. 정찰을 나갔던 척후병들은 가덕도 근처에서 적의 척후 병과 맞닥뜨려 교전을 벌인 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그들의 수급을 세 개 벴다. 정찰 임무를 떠고 나가 적의 목까지 베어 온 것은 대단한 전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적과 전투를 치르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순신 휘하의 전리라좌수군 척후병들이 적의 목을 싣고 오다가 빼앗겼다는 것이다. 빼앗은 이는 경상우수사 원균 휘하의 군관들이었다. 원균의 군사들이 이순신 군사들의 전공을 가로채버린 것이다. 당시 이순신과 원균과 이억기는 모두 수군절도사로서 같 직급이었다. 이순신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는 군사들은 매우 흥분해 있었다. 일반군사의 전공을 군관, 즉 요즘으로 치자면 부사관 계급이 가로챈 것 이다. 중대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남의 전공을 가로챈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이 미칠 파장이 더욱 걱정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 사이의 감정싸음으로 확대 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어쨌거나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은 연합 함대를 꾸리고 있지 않은가. 이순신이 연합 함대를 꾸린 까닭이 무엇이 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체 전합의 숫자는 물론 일본군이 입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은 15만 대군을 동원했다. 15만 대 군이 짧은 기간에 바다를 건너오기 위해서는 대규모 수송 선단이 필 요했다. 대선 한 척에 200명이 탄다면 1만 군사를 일시에 수송하기 위 레서는 대선만도 최소 500척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 전선은 최소 700여 척이 넘는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들 수솟서 에 전투 병력이 타면 그대로 전선이 되 었다. 반면 조선 함대는 전라 경상 연합 수군의 판옥선이 50여 척, 1 10 1는 바율이다. 이런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순신은 연한 한 대를 꾸렸고 그렇게 집중된 전력은 소규모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 결 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이렇게 연합 함대를 구성했 지만 이동이나 정박 등은 상당 부분 독자적으로 했던 것으로 보위다 이단 전부를 마치고 본영으로 돌아갈 때는 이순신은 전라라수구만 거 느리고 여수로 돌아가고 다시 출전할 때는 미리 정한 약속 장소에서 원균 부대와 합류했던 것이다. 그래서 연합 수군의 팀워크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있다. 이린 때, 은 사건으로 연합 함대 전체가 푸너지게 할수는 없었다.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직접 정찰병들에게 술을 따랐다. 군사들이 슬을 마시자 이순신이 명령했다. “지금 당장 저후를 나가도록 하라“, 장군” “장군 저희는 왜적의 목을 베어 왔습니다.” “너희는 적정을 탐지하라는 명을 받고 갔으나 적과 교전을 벌였다. 너희는 입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내 당장 너희를 군율로 다스릴 것이니라 당장 급한 것은 왜병의 목이 아니라 적함의 위치와 규모와 동향이니라! 가서 임무를 완수하라!" 이순신의 명령은 지엄했다. 수급을 원균 휘하 군관에게 빼앗긴 군사들은 내심 이순신이 수급을 찾아주거나 그 군관을 불러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적병의 목을 베어 온 전공을 높이 사기는 커녕 정찰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다시 바다로 내몰다니. 군사들은 서운한 마음으로 정찰에 나섰다. 이순신은 눈앞의 전공을 다투는 것을 가장 경계하였다. 전장에서 적병의 목을 베거나 적장을 사살하거나 사로잡는 것은 장수나 군사 모두 바라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눈앞의 전공에 급급하여 적의 목만 취하려 한다면 전체 작전 수행에 차질이 생길 것 이 뻔했다. 해전이 한창일 때 적병의 목을 건지기 위해 물에 빠진 적에 게 칼을 대는 것은 당장의 싸움은 뒷전인 채 시체에 칼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이순신은 적의 수급을 거두는 일에 대해 엄격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반면 기록에 따르면 원균은 약간 달랐던 듯하다. 북방에서 육전 경 험이 있는 원균은 적의 목을 자르고 그것을 장대 높이 세워 아군의 사 기를 높이고 적을 위협하는 일에 익숙했다. 해전에서도 원균은 일본 군의 수급을 취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전투가 끝나면 부하들에게 적병 의 목을 수습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원균의 성향 탓에 그 휘하 군관 이 이순신 군사들이 거둔 일본군 수급을 빼앗는 사태까지 초래되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이순신의 호령을 듣고 다시 정찰에 나선 군사들이 곧 급보를 알려 왔다. 일단의 적선이 거제도 북단에서 부산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첩 보였다. 이순신은 즉각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역풍이었다. 조선 수군이 쫓아도 쫓아도 적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총통을 발사했지만 역풍에 밀려 사거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적선을 놓칠 것만 같았다. 더구나 적선은 배에 실었던 노획품과 약탈품들을 모두 바다에 내던지며 달아났다. 배의 무게를 줄여 속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공포탄을 발사하라!" 이순신은 총통에 대장군전이나 단석 등을 넣는 대신 빈 총통에 화약을 넣어 계속 발사하게 했다. 적은 이미 조선 수군의 총통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빈 총통을 쏘아대면서 적을 초조하게 만들 참 이었다. 총통 소리에 놀란 일본군은 더욱더 속력을 냈다. 그것이 바로 이순신이 노리던 바였다. 총통 소리를 내며 쫓으면 적은 필요 이상으로 속도를 내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를 젓는 격군들은 지치게 마련이었다. 공포는 곧 효과를 나타냈다. 곧장 부산 방향으로 달리던 적선들이 오른쪽으로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접근하는 곳은 거제 북단의 율포라는 작은 해안이었다. 일본군은 가까운 육지에 배를 대고 상륙하여 도주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일본군이 뱃머리를 돌리는 순간 속도가 늦춰졌다. 일본 전선은 배 밑바닥이 첨저형, 즉 뾰족하여 물속 에 깊이 잠기는 형태였다. 따라서 방향을 바꿀 때 회전 반경이 컸다. 반면 조선 배는 배 밑바닥이 평저형, 즉 대바구니처럼 평평하여 회전 반경이 좁아 상대적으로 회전이 빨랐다. 같은 방향으로 회전할 때 일 본 배는 바깥 레인, 조선 배는 안쪽 레인을 도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조선 수군이 일본 함대의 옆구리 방향에서 일본 전선을 따라잡았다. "전 함대 공격하라! 방포하라!"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조선 함대에서 일제히 발포가 시작되었다. 10여 척의 적선은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조선 판옥선의 총통 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변변히 응사도 못한 일본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순식간에 서너 척의 전선이 포격에 침몰하기 시작했다. 용케 포격을 피한 일본 전선들은 육지 쪽으로 달아났다. 육지가 저만치 보이자. 일본군 일부가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흡사 고래 떼에 쫓긴 물고기들처럼 일본군은 육지로 육지로 헤엄쳐 갔다. 이후는 빈 배와 의 전투였다. 간혹 용감한 일본군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조총으로 응사했지만 조선 수군의 총통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수급보다는 적선을, 큰 성과에 상을 내린다 “적선을 나포하라! 적선을 나포하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니라!" 그때 전장을 바라보던 이순신은 포격과 화살 날리기에 여념이 없는 수군들에게 명령했다. 전에 없던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언제나 개인 전공보다 전체 전황을 중요시했다. 한두 사람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전체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이순신은 상보다 벌에 엄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승리는 모두의 것! 그러나 군기를 흩트리는 행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가차 없이 처벌했다. 실제로 많은 탈영병들이 참수되기도 했다. 전체 군기를 엄정하게 세우는 것이 개인의 전공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적선을 나포하면 큰 상을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은 곧 효과를 발휘했다. 조선 수군들은 포격을 멈추고 적선에 접근했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과의 근접전을 극도로 꺼렸다. 이순신 역시 접근 전을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그때는 이미 일본군 대열이 눈에 띄 게 무너진 이후였다. 상을 내리겠다는 명령을 들은 조선 수군들은 조심스럽게 일본 전선을 향해 접근했다. 궁지에 몰린 동물이 더 위험하 듯 일본군의 마지막 저항은 격렬했다. 자칫 조선 수군들이 다칠 우려도 있었다. 판옥선이 다가가자 많은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몇몇은 옥쇄를 각오한 채 저항했다. 조총으로 응사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일본도를 빼드는 군사들도 있었다. 조선 수군들은 뱃전 에서 방패를 밀집 대형으로 세워 적탄을 막아냈다. 그러고는 방패 뒤에서 사조구를 던졌다. 사조구는 마치 닻처럼 네 개의 갈고리가 나 있 는 철물이다. 이것을 던져 적의 돛대나 갑판을 옭아매는 것이었다. 일 본 배 세 척이 판옥선에 둘러싸인 채 사조 구에 묶이고 있었다. 일본군들은 필사적 으로 사조구 밧줄을 끊으려 했다. 그 러나 노련한 조선 수군 사수들은 움직이는 일본군을 향해 정확히 조준한 화살을 날렸다. 저항은 이 내 수그러들었다. 마지막까지 배에 서 버티던 일본군들은 조선 수군의 화살 세례에 최후를 맞았다. 이렇게 해서 율포해전에서 나포한 적선만도 3척이나 되었다. 이순 신이 적선 나포 명령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수급이 라는 작은 전공보다 더 큰 전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수급에 연연하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인지 자신의 군사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휘하인 전라좌수군 정찰병들이 수급을 빼앗겼다고 했을 때, 이순신도 내심 분개했을 것이다. 원균 휘하의 군관이 자신의 부하가 거둔 전공을 빼앗았다는데 이순신인들 심기가 편했겠는가. 그러나 이순신은 전공을 두고 다투는 대신, 정찰병들에게 정확한 임무 수행을 요구함으로써 적을 발견했고 율포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또한 포상을 통해 적병의 목이 아니라 적선 나포라는 더 큰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원균 휘하의 군관에게 적병의 목을 빼앗겼던 척후병도 적선 나포에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어떤 상을 받았는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일본 전선 6척 분멸에 적병 1,000여 명 궤멸이 라는 전과를 올렸다. 지금까지와 비교해보면 작은 전과지만 율포해전 이야말로 작은 전공을 다투는 대신 큰 틀에서 작전을 수행한 이순신 의 원칙의 승리였다.

 

2. 전공을 내세우지 마라

부하의 공을 확실히 인정하라

당근과 채찍, 이것이야말로 전장의 지휘관들이 전통적으로 군사들 의 사기를 다루어온 두 가지 수단이었다. 이순신도 마찬가지였다. 이 순신은 일벌백계주의자였다. 첫 출전을 앞두고 황옥천이라는 군관 하나가 탈영을 했다. 군관의 탈영은 전체 군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군관은 체포되어 여수 본영으로 끌려왔다. 이순신은 살려달라는 군관의 애원을 묵살한 채 그를 참수했다.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 이후에도 이순신은 명령을 어기거나 군문을 벗어난 군사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군율을 적용했다. 작은 아픔을 극복해야만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이순신의 일벌백계는 효력이 있었던 듯하다. 그가 명령한 것은 어 떤 경우에도 수행되었다. 율포해전을 치른 2차 출동 당시, 조선 수군 정박지에서 때 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한밤중에 적이 나타났다는 소 문이 돌면서 진중이 순식간에 공포에 빠져든 것이다. 실제 일본군이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수군들은 풍문만으로도 소동을 일으켰다. 그만 큼 전장에서 공포심은 큰 스트레스였다. 이런 소동을 이순신은 방을 을 흔들어 간단히 제압했다. 그만큼 이순신의 명령과 움직임 하나 하 나는 수군들에게 태산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엄정한 군기를 세우는 데는 이순신의 원칙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 다. 이순신은 야박하리만치 휘하 장수들이 세운 전공을 칭찬하는 데 인색했다. 그러나 전투 결과를 조정에 보고할 때는 부하들의 전공을 매우 상세히 보고했다. 누가 적선을 어떻게 격파했는지 세세히 기록했다. 율포해전의 결과만 보더라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우후 이몽귀가 대선 1척 나포, 참수 7, 대선 1척 분멸, 녹도 만호 정운이 왜 대선 1척 나포, 참수 20, 여도 권관 김인영 참수 1급 등등………………. 이렇게 세세히 올라간 보고에 따라 조정에서는 상을 내리기도 했다. 시일이 지나자 휘하 장수와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직접 칭찬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전공을 임금과 조정에 세세히 보고하 는 장군을 어찌 믿고 따르지 않겠는가? 전장에서 전리품은 군사들에게 더욱 사기를 북돋는 힘이 된다. 정복 전쟁에 나섰던 칭기즈칸은 개인 전리품은 개인이 챙기도록 허용했다. 군사들은 더 많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남보다 먼저 적진에 뛰어 들었다. 최근의 전쟁에서도 민간인에 대한 일정한 약탈과 학대를 군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문제 삼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나친 전공 다툼은 악영향을 부른다

요즈음에는 이른바 인센티브, 능력급이라는 것이 유행이다. 전리품 챙기기, 개인 전공 세우기와 비슷하다. 남보다 실적이 많은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보장한다. 이를 위해 영업사원들은 밤을 낮 삼아 띈다. 확실히 개인 전공을 추켜세우는 것은 효과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위험성은 없을까. 지나친 전공 다툼이 결국은 전쟁을 망친 경우가 있다. 춘추 전국 시대, 중국의 초나라가 교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교나라는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농성에 들어갔다. 교나라가 지키는 성은 천연의 철옹성이 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농성이 길어질수록 성 안에 땔감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에 초나라에서는 군사들 일부를 뽑아 나무꾼으로 위장, 산으로 나무를 하러 보냈다. 교나라 군사들이 성곽 위에서 보니 비무장의 초나라 군사 수십 명이 땔감을 지고 가는 것이 보였다. 이에 교나라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가 나무꾼으로 위장한 초나라 군사들을 사로잡고 그들이 마련한 땔감까지 빼앗았다. 교나라 성 안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아마 초나라 군사를 사로잡고 땔감을 확보한 교나라 군사들은 큰 상을 받았을 것이다. 다음 날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시 초나라 군사를 잡고 땔감을 확보한 교나라 군사들, 의기가 양양해졌다. 이제 초나라 나무꾼을 잡는 일은 교나라 군사들에게 일과처럼 되었다. 손쉽게 적군을 사로잡고 현안인 땔감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데 누가 그걸 마다하겠는가. 어느 지휘관도 이런 행위의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제 교나라 군사들은 기를 쓰고 초나라 나무꾼을 잡으려 했고 지휘부는 그런 군사 들을 칭찬했다. 이런 일이 며칠에 걸쳐 일어났다. 그런데도 초나라 진영에서는 끊임없이 나무꾼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교나라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초나라 나무꾼을 잡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성문 옆에 매복하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밀물처럼 성 안으로 쳐들어갔다. 이후 교나라는 초나라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적군 몇 명과 땔감 몇 개의 전공에 연연하다가 결국 성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전장에서의 개인 전공 다툼은 전체 사기에 악영향을 끼치거 나 전략에 커다란 위험을 가져온다. 더구나 해전처럼 조직적으로 전 투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는 개인의 전공 다툼은 위험성이 더 클 수 도 있다.

 

인정받고 싶다면 큰 원칙을 따르라

사람은 누구나 욕망이 있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픈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리하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겠 는가. 무조건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찌 세 상 일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다 된단 말인가? 하다못해 밥상에서 밥 한 공기 먹는 데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다. 골을 넣은 사람만 승자이고 그 팀의 나머지 선수들은 아무것도 아 닌가. 홈런을 친 선수는 물론 갈채를 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팀 워크가 이루어낸다는 것을 명심하라. 무슨 일을 하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꼭 필요하다. 자기를 긍정하 는 사람은 다른 일에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매사에 나 아니면 안 된다 는 생각, 오로지 내가 잘해서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업적을 자랑하려는 생각만으로 팀워크를 깨서는 곤란하고 다른 사람의 공을 가로채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전공을 세워라! 결과를 창출하라!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라는 진심 어린 겸손이 필요하다. 개인기와 조직력의 조화, 이것은 누구나가 추구하는 것이다. 뛰어 난 개인기를 가진 선수를 기용할 것이냐, 조직력에 도움이 되는 선수 를 기용할 것이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의 역할이다. 리더라 면 최상의 팀워크를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기업의 사원이 상사에게 인정받고, 선수가 감독에게 인정받고 싶 은 것처럼 군사들도 장수에게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 다. 또한 장수가 임금에게 이렇게 싸워 이겼노라고 내보이고 싶은 것 은 당연하다. 그래서 전투를 마치면 증거물로 수급을 취하는 게 아닌 가. 이순신도 수급 세 개를 베었다가 한 개를 빼앗기고 돌아온 정찰 병을 충분히 칭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장의 전공을 칭찬하고 평가하다가는 모두가 내세울 만한 것만 찾 을 것이다. 이순신은 칭찬 대신, 혹은 수급을 찾아주는 대신 그들에게 술 한잔 을 내린 후 임무 완수를 독촉하며 차갑게 다시 바다로 내보냈다. 이것 이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리더가 아랫사람들이 내세우는 전공 에 휘둘리다 보면 큰 원칙을 잃을 우려가 있다. 전공을 지나치게 내세 우는 자, 자신만이 모든 것을 다 했노라 목소리 높이는 사람을 경계하 라. 그것이 묵묵히 일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다. 작은 결과를 내세우며 남에게 평가받기를 원하는가. 좀 더 큰 그림 을 그려라. 큰 목표와 원칙을 위해 땀을 흘려라. 그래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라. 그러면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도 충분히 인정받는다. 쓸데 없는 곳에 힘을 낭비하지 마라!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