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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_109

The Battle of Myeongnyang is noteworthy for Admiral Yi Sun-sin's strategy of emphasizing caution and the importance of being thorough after a series of victories. Upon receiving information that the enemy was present through intelligence, Yi Sun-sin carefully searched and then launched an attack, thoroughly defeating the Japanese forces. The Joseon Navy displayed its powerful firepower with the Long-line Battle Formation and explosive bombs, and secured the third victory with a careful operation. Yi Sun-shin continued his success by looking after his rear and not being careless.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작은 성취에 만족하는 순간 위기는 찾아온다.

마지막까지 밀어붙이는 강력한 추진력, 그것만이 완전한 승리를 보장한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라]

 

적진포해전

그러나 그 순간, 위기는 바로 찾아온다. 작은 성취감과 방심이라는 함정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긴 바둑을 지키기가 더 어렵고, 축구 경기 에서는 골을 넣은 직후에 조심해야 한다. 산을 오를 때에도 정상을 앞 두고 숨을 돌리는 순간, 금방일 것 같던 정상이 다시 까마득해지는 경 힘을 우리는 술하게 하지 않는가. 이 모두가 여세를 모는 대신 긴장을 풀었기 때문이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면 그 여세를 몰아라, 절대 로 혼자서 먼저 만족하지 마라. 남들이 그만하면 됐다고 하더라도 멈추지 마라, 할 수 있을 때 하라! 관성의 법칙은 여기서도 작용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신의 역량을 120퍼센트 투입하라, 앞으로도 넘어야 할 봉우리 는 너무나 많다. 겨우 한두 봉우리 넘은 상태에서 다 왔다고 할 수 있 겠는가, 작은 성과나 성공에 만족할 때 그곳이 바로 깊은 함정이 된다. 성공하고 싶다면, 진정으로 이기고 싶다면 여세를 몰아가라!

 

1. 적은 언제나 뒤에서 접근한다.

하루 동안 옥포와 합포해전을 치른 이순신 한대는 당시 창원 땅남 포에서 밤을 보냈다. 길고 긴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새벽, 척후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진해 고리량에 적선이 있다는 것이었다. 주먹밥으로 군사들의 아침을 해결한 후 이순신은 즉각 출동을 명령 했다. 병사들은 어제의 승리감에 들떠 있었다. 이제부터 보이는 대로 적을 쳐부수리라! 어쩌면 오늘 싸움은 더 쉬울지 모른다. 서전을 치른 군사들은 자신감과 함께 전투 요령도 생겼다. 군사와 적군들의 사기 도 높다. 비록 두 번의 해전이었지만 완벽한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 그동안 연마했던 개인 전술과 함대 전술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 으리라! 이순신은 함대를 몰고 한달음에 고리량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 적은 없었다. 첩보가 잘못된 것이었는가.

 

언제나 첫싸움처럼 하라

아차, 순간 이순신의 뇌리에 번개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어제의 싸움에서 적은 우리의 존재를 몰랐다. 개전 초기, 경상 수군을 간단하 게 제압한 일본 수군은 적어도 경상 앞바다에는 더 이상 대규모 조선 함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라도의 수군은 천천히 진격하면 서 치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안심하고 옥포에 서 노략질을 했던 것이다. 합포에서 모조리 격침당한 5척의 일본군도 그들 입장에서 보면 불의의 기습을 당한 것이 아니던가. 이순신은 즉각 휘하 장수들을 모았다. 장수들은 영문 몰라하며 이 에 소선들이 따라 붙었다. 이들은 식량이나 식수 등 보급물자를 싣거 순신 대장선으로 건너왔다. 함대가 이동할 때는 전투선인 판옥선 뒤 나 정찰, 연락 등의 임무에 투입되었다. 장수들은 대장선의 초요기를 보고 모두 소선을 타고 건너왔다. 그들도 적이 보이지 않아 어리둥절 했다. 그러나 어제의 전투 소식이 밤새 일본군 사이에 널리 퍼졌다면? 엄청난 위력의 총통을 가진 30여 척의 조선 함대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면? 오늘은 우리의 존재가 적들에게 알려질 수도 있지 않은가. 방 심한 적을 치는 것과 준비한 적을 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만약 적 이 우리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면? 그들이 정찰병과 척후선을 운용하면서 우리의 동태를 낱낱이 감시했다면 일본군도 틀림없이 대 비책을 세웠을 것이다. 방어전이든 매복전이든 말이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일단 적이 있다는 곳으로 무작정 진격해 갔던 것이다. 만약 그 첨보가 아군을 유인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리하여 견 고한 방어벽을 설치한 채 조선 수군을 기다리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 가. 유능한 장수는 적이 견고하게 지키는 곳은 결코 쉽사리 공격하지 않는 법, 방비를 갖춘 적을 공격하려면 통상 세 배 이상의 병력이 있어 야 한다지 않던가. "속도를 늦춰라! 이순신의 명령에 그나마 숨을 돌린 것은 갑판 아래에서 노를 젓는 격군들이었다. 격군장은 즉시 교대로 노를 젓게 했다.

 

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솔함을 털어놓았다. 적도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깜빡 잊었던 것이다. 조선 수군이 정찰선을 띄우면 적 도 띄울 것이다. 조선 수군이 육지의 높은 산에 관측병을 투입했다면 그들도 그러할 것이다. 일본군은 어제 하루에만 30척이 넘는 전선을 잃었다. 당연히 전황을 보고하였을 테고 전군에 비상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노략질을 당장 중지하고 조선 수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 우라는 명령이 왜 내려지지 않았겠는가. 이순신의 설명에 장수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감돌았다. "섬과 해안을 철저히 수색하라!" 이순신은 즉시 함대를 분산, 인근 해역을 철저히 수색했다. 불만의 소리도 나왔다. 적이 없으면 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수색 이라니, 차라리 화끈하게 한번 붙는 것이 낫지 수색은 할 짓이 못 되었 다. 전투도 아니면서 전투 이상의 긴장을 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색 이다. 수색을 하다 보니 항로도 길어졌다. 지금의 마산에서 고성 방면 으로 이어지는 바다. 남해안에는 수많은 섬과 포구가 있다. 조선 수군은 섬과 포구를 천천히 수색해나갔다. 언제 적의 기습 공격이 있을지 몰라 모든 판옥선의 돛을 내린 채 항진했다. 오로지 적군들의 힘으로 항진하며 살살이 수색했다. 그러기를 몇 시간째, 산 너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목격되 었다. 고성 땅으로 짐작되었다. 산 너머로 피어오르는 몇 가닥 검은 연 기가 바다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일본군 주둔 흔적이 틀림없 었다. 일본군들이 민가에 불을 질렀을 터였다. 민간인이 더 피해를 입 기 전에 쳐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나 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다시 망설였다. 만약 저들이 우리의 존재를 안다면 이는 아군을 유인하기 위한 술책인지도 모른다. 적이 아군의 항로 양안에 병력을 매복해놓고 기다린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이순신은 척후선을 띄웠다. 장수들과 군사들은 다시 바다에 서 기다렸다. 원균이나 돌격장 출신의 녹도 만호 정운 등의 불만도 쏟아져 나왔 으리라. 이순신의 신중함 일부 장수들은 때로는 그 신중함이 지나치 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전란이 발발하고도 20여 입이나 출전을 미 투던 이순신이 아니던가, 마침내 어선으로 가장하여 척추를 나갔던 배가 돌아왔다. 최후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안도했다. 적들은 적진 포에 상륙하여 민가에 불을 지르며 약탈과 살육에 급급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전 함대 전투 준비!" 마침내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적진포는 포구가 좁으니 전 함대가 일시에 차들어갈 수 없다. 모는 함대는 장사진을 펼쳐라!"

장사진()이란 글자 그대로 긴 뱀처럼 판옥선을 일렬로 정렬시 키는 것이다. 그리고 차례로 지나가면서 목격물을 포격하고 다시 돌 아나오고 그 다음 배가 포격을 가하는 방법이었다. 그 사이 포격을 마 친 배는 다시 장전하여 앞 배의 꼬리에 붙는 진법, 이것은 적선을 향해 끊임없이 반복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전법이었다.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전 함대가 일렬 종대로 늘어섰다. 28척의 판옥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적진포로 진격해 들어갔다. 옥포에서와 마찬가지로 적선은 뱃머리를 육지 쪽으로 대놓은 채 완전 방심 상태 였다. 적진포의 민가들이 불타는 것을 보는 이순신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전 함대 공격하라! 한 척의 적선도 남기지 마라!"

 

조선 총통, 조란탄의 위력

이순신 함대는 차례대로 포구의 오른쪽으로 들어와 적선에 포격을 했다. 앞선 판옥선이 포격을 하고 지나가면 다음 배가, 또 그 다음 배가 포격을 했다. 그리고 맨 선두는 다시 장사진의 후미에 붙어 차례로 또 한 번 포격을 했다. 포구에 정박한 일본 전선을 향해 엄청난 포격이 가 해졌다. 무방비 상태의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포격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대장군전과 차대장군전, 그리고 둥근 돌로 된 단석들이 날아가 여지 없이 일본 전선을 파괴했다. 조선 판옥선에 비해 선체가 얇은 일본 배 는 단석과 장군전을 맞기만 하면 갑판이 부서져 나가거나 돛대가 부러졌다. 그리고 부서진 틈새로 바닷물이 올라와 서서히 침몰했다. 게 다가 불화살 공격까지 이어지자 그나마 배에 남아 있던 일본군들은 모조리 육지로 도망을 갔다. 그러나 일본군들도 정예군이었다. 잠시 육지로 피해 전열을 가다듬더니 응사를 해 왔다. 그들은 언덕 위 소나무 숲에서 조총과 활로 대적했다. 이는 조선 수군에게 치명타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포격을 뜸하게 하 는 효과는 있었다. 한동안 요란한 조총 소리와 조선 수군의 엄청난 포격 소리가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켰다. 조선 수군은 언덕 위의 적을 향 해 불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녹음 짙은 숲 속에 숨은 일본군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방포 중지! 조란탄을 준비하라!" 이순신은 일단 적선에 대한 발포를 중지시켰다. 그러고는 조란탄을 준비시켰다. 조란탄은 총통 안에 골프공만 한 쇠구슬을 최대 400여 개까지 넣어 발사 하는 가공할 무기였다. 이 역시 천자·지 자·현자 총통 어디에나 넣고 발사할 수 있었 다. 포수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역시 총통의 맨 아래쪽 약실에는 화약을 재어 넣었다. 그러고는 격목이나 토격으로 약실을 다졌다. 격목이나 토격이 허술하면 화약이 폭발할 때 그 힘이 새어 나가고 만다. 그래서 총통은 아래쪽으 로 갈수록 약간 좁아지고 격목도 약간 원뿔형으로 만 들어져 있다. 그래야만 총통 입구에서 격목을 넣 고 긴 작대기로 다지면 총통의 벽면과 격목 사이 에 공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다음 천자총통의 경우 조란탄을 100여 개 넣었다. 그 위에 다 시 흙을 넣고 다졌다. 아직도 총통에는 공간이 남아 있다. 다진 흙 위 에 또 조란탄을 넣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마치 쓰레기를 매립할 때 일정량의 쓰레기를 넣고 그 위를 흙으로 한 벌 덮고 다시 쓰레기를 매 립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서너 차례 반복하면 총통 입 구까지 조란탄이 가득 찬다. 조란탄 사이를 흙으로 채우는 것 역시 폭발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가능하면 조란탄 사이에도 틈이 없도 록 하는 것이다. 천자총통 하나에 조란만 약 400여 발, 지자총통이라도 300여 받은 가능할 것이다. 이런 총통이 10문이라면 조란탄, 즉 쇠로 만든 새알만 한 공이 동시에 삼사천 개가 날아가는 것이다. 주먹만한 쇠공이 400~500여 미터를 날아와 사람에 맞는다면? 아무리 두터운 갑옷과 투구를 입고 있더라도 치명적일 것이다. 게다가 크기가 작아 날아오 는 것이 보이지도 않으니 피할 수도 없다. 더구나 곡사포 형태로 날아 가기 때문에 엄폐물 뒤에 숨은 적에게도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이처럼 조란탄은 인마 살상용으로는 가공할 위력이 있다. 마침내 수십 문의 총동에 조란탄이 장전되었다. "방포하라!" 화포장들이 심지에 일제히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정체 모를 소음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소나기 소리 같 기도 하고 파도 소리 같기도 했다. 혹은 수천 마리 철새에의 날갯짓 소 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어서 무수한 쇠공이 넓은 포방을 형성하며 적진에 떨어졌다. 이순신 함대에서 발사된 조란탄은 숲 속에 숨어 있 는 적진을 유린했다. 일본군들이 부지기수로 쓰러져갔다. 일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포구에는 13척의 배가 불타거나 침몰되었고 육지에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최소 2,000여 명의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의해 붕괴되었다. 살아남은 일본군도 돌아갈 배를 모두 잃고 말았다. 다행히 이순신이 우려하던 매복도 없었고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 치른 해전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두 번의 연승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신중하게 적진포해전을 치렀고 승전했 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등 뒤의 적을 견제하여 올린 세 번째 승전고였다.

 

2. 그래도 신중하라

배후를 살펴라

출동을 나간 조선 수군들, 그들의 전투 외의 일상에 대해 알려진 바 는 많지 않다.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수군들과 적군들의 차이는 어 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루 두 끼, 주먹밥으로 때웠다 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보급은 충분치 않고 수군과 적군 사이에는 차별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노를 젓던 격군들 중에는 노비 출신이 적 지 않았다. 수군은 대부분 양인이었다. 어쨌거나 그날은 꿈 같은 밤이 었으리라, 연이어 옥포와 합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그들의 숙영 지는 사기충천했을 것이다. 더구나 계절은 양력으로 유월, 밤바다의 바람은 알맞게 부드러웠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단잠에서 깨어난 그들 앞에 또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이순신은 서둘러 군사들을 먹이고 출동 명령을 내렸다. 적이 있다는 칩보였다. 사기 충천한 이들을 이끌고 가면 역시 승전을 거둘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니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이순신은 자 신의 경솔함을 돌이켜본다. 어찌하여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적의 매 복을 염려하지 않은 채 함부로 함대를 움직였던가? 적이 있다는 첩보만 믿고 덜컥 대군을 출동시키는 장수가 어떻게 긴 싸움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이순신은 철저한 수색을 명령했고 수색 끝에 애초의 첩보와는 달리 적진포에서 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킬레스건-패장과 명장의 차이

위대한 장군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상대의 약 점을 간파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투는 궁극적으로 패리스 와 아킬레스의 신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3,000년 전 트로이 전쟁에서 패리스는 그리스의 전사 아킬레스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 치를 쏘아서 그를 물리쳤다. 그렇다면 군대의 약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배 후이며 그 다음이 측면이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전투에서 장군들은 적의 배후를 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기 위해 적을 속이고 기만하고 과장하기까지 했다. 적의 의표를 찌르려 했던 것이다. 적에게 약점을 노출시킨 장군은 필연적으로 패장이 되었으며 적의 배후를 친 장군은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중앙아시아 정벌에 나섰던 칭기즈칸은 상대의 배후를 치기 위해 약 500킬로미터의 키질쿰 사막을 횡단했다. 도저히 사람이 건널 수 없다 는 죽음의 사막을 칭기즈칸이 대군을 이끌고 건넌 이유가 무엇이겠는 가. 바로 배후를 치기 위함이었다. 걸프전에서 미군도 비슷한 작전을 썼다. 미군은 걸프 만으로 상륙 할 것처럼 위협하면서 쿠웨이트로 두 개 사단을 진격시켰다. 이들을 막기 위해 이라크 주력군은 쿠웨이트 전선에 묶여 있어야 했다. 이때 미군은 아라비아 사막에 또 다른 군단을 투입했다. 이로써 이라크 주 력군은 배후에 적을 두게 되었고 변변한 저항조차 못 해보고 무너졌 다. 이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적의 배후를 차지하는 것은 모든 장군들 의 숙원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장군은 적의 배후를 차지하고 어떤 장군은 배후를 허용하는가. 첫째는 전체 전황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적의 전 력과 병력,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전략 전술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를 냉정히 살피지 않았을 경우, 배후를 허용하고 만다. 또 하나는 지휘관 이 작은 승리에 도취해 냉정을 잃는 순간이다. 적진포해전이 있던 그날 아침, 이순신조차 이런 함정에 빠졌다. 그 러나 그는 곧 냉정을 되찾았고 함대 운용의 기본으로 돌아갔다. 척후 를 내세우고 정찰선을 운용하며 내가 지난 자리에 적이 있는지 없는 지 살폈다. 오랜 전란에서 그를 승전으로 이끈 것은 탁월한 리더십과 더불어 이러한 신중함인지 모른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 안에 있다

'잘나갈 때 조심하라'는 말을 자주 한다. 결코 가볍게 넘길 우스갯 소리가 아니다. 확장일로를 걷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물론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승승장구의 분위 기에 도취된 결과일 것이다. 마케팅 시장에는 '결코 리더처럼 행동하 지 말라'는 말이 있다. 비록 업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더라도 방 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로지 손맛과 푸짐한 인심으로 손님을 모으던 허름한 식당, 어느 날 그 식당이 근처에 새 건물을 지어 신장개업을 했다. 더 쾌적한 공간 에서 더 나은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겠노라고 요란하게 홍보까지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허름한 가게에서보다 더 장사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한 순간의 방심 때문은 아닐까. 허름했던 시 절의 절실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재료 선택부터 조리, 서비스까지 신 중하게 했던 예전과 달리 대량생산을 위한 시스템으로 바꾸면서 고객 들의 마음을 놓쳐버린 탓이 아닐까? 성공이 눈앞에 있는가? 그동안 노력한 결과에 흐뭇해하고 있는가? 이젠 자신 있는가? 그러나 자신감을 바탕으로 더욱 신중해야 한다. 무 엇이든 할 수 있다고 소리치기 전에 냉정하게 주위를 둘러보라. 자신 의 역량을 다시 점검하고 누군가 나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 나보다 더 나은 전략 전술을 들고 나올 가능성은 없는지, 그런 움직임은 없는지 예의주시하라는 것이다. 눈앞의 작은 성과에 스스로 도취되는 순간, 그래서 나의 경험과 성 과가 하늘 아래 최고라고 여기는 그 순간, 경솔해지고 냉정함을 잃고 만다. 신중해야 한다. 토종 감나무 중에 '해걸이'를 하는 나무가 있다. 해걸이란 한해감 이 많이 열리면 그 다음 해는 틀림없이 적게 열리는 현상을 말한다. 왜 그럴까? 지난해 많이 달았으므로 올해도 아무 생각 없이 열매를 많이 달 경우 나무의 양분이 부족해질까 봐 그런 건 아닐까? 지난해 많은 열매를 지탱하느라 가지가 약해져 있을 때 또다시 주렁주렁 열매를 달면 나무가 상하지는 않을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붙박이 나무 조차 신중함을 생존 전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적은 등 뒤에 있고 그보다 더 무서운 적은 내 안의 방심에 있다. 등 뒤의 적을 허용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까불지 말라는 것이다. 탑은 높을수록 위태롭고 자만은 클수록 위험하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승승장구하는 느낌이 들 때, 잠시 걸음을 멈 추고 주변을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함정과 덫이 주위에 널려 있는지. 신중함이 지나치면 추진력이 떨어진다고도 한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신중한 전진인가? 강 력한 추진력인가? 강력한 추진력과 신중함을 동시에 갖추는 것은 과 연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인가. 복병은 항상 의외의 장소에서 나타난다. <삼국지>나 각종 병법서를 보면 복병은 언제나 험한 계곡에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항상 복병에 당하는 쪽은 그곳에서 당하는가. 청산리의 김좌진 부대를 쫓 아 들어왔던 일본군 지휘관이 이런 상식을 모를 리 없잖은가. 그런데 도 마치 독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함인 냥 그들은 청산리 계곡에서 독 립군의 매복에 걸려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지형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매복에 걸려든 가장 큰 요인, 그것은 신중함의 결여, 승전에 도취한 지휘관의 방심이 가장 컸을 것이다. 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한 발은 덫에 올려놓은 것과 같 다. 의외의 복병은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까.

 

사천해전

1. 긴 활이 짧은 활을 이긴다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을 치른 이순신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조정 에서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이었다. 즉 그것은 일 본군이 한양을 함락했다는 뜻이었다. 이순신과 장수들과 조선 수군은 크게 낙심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200년 조선 왕조가 문을 닫고 야 마는 것인가. 그러나 정작 당황한 것은 일본이었다. 봉건영주들의 성을 뺏고 빼 앗기는 전쟁에 익숙한 일본군들, 그들은 조선의 도성인 한양만 차지 하면 전쟁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조선 왕과 조정은 피난을 해버렸 고 도성을 빼앗겼는데도 조선군은 산발적으로 저항했다. 더구나 각지 에서 의병이라는 무리들이 일어나 일본군의 배후를 괴롭히기 시작했 다. 알고 보니 의병이란 작자들은 무인도 아니었다. 지방의 선비들이 자신이 집에서 부리던 노비와 소작인들을 모아서 몇백 명, 혹은 몇천 명 단위로 저항했던 것이다.

 

적의 교두보를 격파하라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은 무사 계급이 하 는 것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든 난리가 터지든 농사꾼들은 죽은 체하 고 농사만 짓는 그들의 문화에서 오합지졸들이 무명 띠 두르고 죽창 을 들고 일어선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적진포해전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중 전라도 도사로부 터 급보를 받았다. 군왕의 몽진! 이순신은 일단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 영으로 귀환했다. 세 번의 해전으로 수군들도 지쳤지만 조정의 피난 이라는 사태에 어찌 대처할 것인지 시간이 필요했다. 여수로 돌아온 이순신은 피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첫 출전에서 거둔 승전보였다.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옵니다.' 이순신 승전보의 첫 문장이다. 이순신은 장계와 함께 식량도 보냈 다. 아직 서해 뱃길은 조선군의 수중에 있어 평양의 피난 조정에 연락 선을 띄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순신의 장계를 받은 조정은 놀라 움을 금치 못했다. 개전 이후 처음 받는 승전보였던 것이다. 전란 초기, 조선 조정은 사태 파악에 실패했다. 조총이라는 신무기 로 무장한 일본군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다. 몇몇 장수와 군사들이 오로지 우국충정만으로 일본군에 맞섰으나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 다. 조정은 건국 이래 최초로 몽진이라는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 도성 을 버리고 떠나는 임금과 벼슬아치들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컸다.그들은 임금의 행차를 막다가 마침내는 궁궐에 불을 질렀다. 피난길 곳곳에서도 임금과 대신들은 수모를 당했다. 난생처음 굶주리기까지 했다. 피난 행렬에서 이탈하는 호위병들도 늘어났다. 이제 종묘사직 은 백척간두, 서울을 차지한 왜적이 언제 임진강을 건너 북상해 올지 모르는 상황,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올라온 이순신의 승전보는 그 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 선조는 즉각 이순신에게 가선대부라는 벼슬 까지 내렸다. 전선의 이순신은 마음이 바빴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이순신은 다 시 한 번 자신의 위치가 막중함을 느꼈다. 왜적은 계속 북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더더욱 남해와 서해 바다를 지켜야 했다. 일차적으 로는 적의 원활한 해상 보급과 증원군 파견을 막고 이차적으로는 혹 시라도 있을지 모를 조정의 피난지를 마련해야 했다. 다행히 아직은 전라도 바다와 전라도 육지까지 적은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서 전라지역은 더 중요해졌다. 잠시 숨을 고른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하루빨리 전투에 참여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해남의 우수영에 있는 이억기 부대는 자 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오지 않는 적을 기다리기보 다는 좌수영과 연합해 적을 일선에서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억기 함대는 즉각 출동하지 못했다. 함대가 자 신의 관할지역을 벗어나는 데는 절차가 필요했다. 임금의 명령 없이 함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경상도에 남아 있던 원균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졌다. 일 본군이 경남 사천까지 진출하여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이었 다. 사천이라면 경상 바다의 가장 서쪽, 여수에서 너댓 시간 거리에 있는 곳, 만약 이곳에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한다면 여수 또한 위태롭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더욱 손쉽게 전라도 바다로 진출할 것이었다. 이순신은 즉각 출동을 명령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부대가 합류한 다면 좋겠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대신 이순신은 믿는 바가 있었 다. 그것은 세계 해전사에 가장 극적인 신무기, 바로 거북선이었다.

 

만만치 않은 적을 만나다

1592 6 1, 원균과 합류한 이순신은 곧장 사천만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함대가 진격하는 동안 적의 척후선 한 척을 만나 곧바로 격파해버렸다. 그러나 살아남은 적의 척후병들은 육지를 통해 달아났 다. 이제 사천 선진 포구의 적들은 이순신 함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알 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옥포나 다른 해전처럼 기습전은 이미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전면전을 결정했다. 사천 선진 포구는 내륙으로 깊숙이 만이 형성된 곳에 있었다. 따라서 양 옆으로 높은 언덕이 있어 선진 포구는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였다. 그곳에 일본군은 전선 20여 척을 포 구 깊숙이 정박해두었다. 그러고는 잡아온 조선 백성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할 무렵, 일본군은 웅전 태세를 갖추 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병력을 선진 포구로 들어가는 입구의 산 언덕에 배치했다. 직접적인 해전 대신 육지에서 조선 수군을 맞겠다. 는 전략이었다. 이순신은 유인 작전을 펴기로 했다. 적이 포구 깊숙이, 더구나 육지 에서 응전해 온다면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이순신은 천천히 함대를 접근시켰다. 그러나 하필이면 썰물 때였다. 전선 앞바다는 넓은 갯 벌이 펼쳐져 있었다. 일본 전선은 갯벌에 얹혀져 있는 형국이었다. 대 신 병력을 언덕 위에 배치해놓고 조선 함대가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 가운데 흰옷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일본군은 조선 백 성을 총알받이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들 때문에라도 유인 작전이 더 욱 절실했다. 이순신 함대가 다가가자 적은 언덕에서 조종과 활로 응 사해 왔다. 조선 수군 역시 화살을 날렸지만 나무와 바위 등의 엄폐물 뒤에 숨은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 어려웠다. "방포하라" 조선 함대에서 일제히 총통을 발사했다. 그러나 총통 역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썰물 때라 함대가 선진 포구로 근접하기 어려운데다 원거리에서 발사를 하자니 포격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적은 조선 수군의 총통 공격을 비웃었다. 몇몇 일본군이 언덕 위로 몸을 드 러낸 채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조선군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이미 심리전에서도 적에게 밀리는 느낌이었다. "후퇴하라!" 이순신은 일단 함대를 후진시켰다. 함대가 물러나면 적이 쫓아 나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군은 좀체 포구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난감했다. 적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장기전이 될 것이고 그러면 배 위에서 싸우는 조선 수군이 불리해질 것은 뻔했다.

 

신무기 거북선, 불을 뿜다

그때까지 이순신은 거북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거북선은 적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적이 거북선의 외양을 보고 두려워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만약 적이 거북선을 본다면 결코 넓은 바다로 쫓아 나오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거북선을 감춘 이 순신 함대가 물러나는데도 적은 유인당하지 않았다. 적을 눈앞에 두 고도 썰물이라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는 이순신 함대! 이순신은 기다 리기로 했다. 밀려나간 물은 언젠가는 밀려들어 올 것이다. 한여름 해 가 금오산 너머로 넘어갈 즈음 드디어 밀물이 되었다. 조선 판옥선이 선진 포구까지 진격할 수 있는 충분한 수심이 확보되었다. "전 함대, 돌격하라!" 이순신의 명령으로 공격 북과 신호기가 일제히 올랐다. 전열을 가 다듬은 조선 함대는 선진 포구를 향해 진격해 갔다. 적선이 조선 수군의 총통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방포하라!" 순식간에 선진 포구의 적선이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그동안 언덕에 서 야유를 보내던 일본군들이 발을 굴렀다. 수군에게 배는 생명과 같 은 것! 선진에서 배를 잃는다면 부산까지 육로로 후퇴해야 하는데 안 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판사판이라는 분위기가 적진에 팽배한 모양 이었다. 일본군들이 포격당하고 있는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순신의 바람대로 배를 저어 포구를 벗어나오기 시작했다. 적들은 맹 렬히 조총 사격을 하며 조선 함대를 향해 돌격해 왔다. "거북선을 불러라!" 곧바로 대장선에서 거북 귀()가 선명한 기가 올랐다. 뒤처져 있던 거북선이 조선 함대를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노을을 배경으로 불쑥 나타난 거북선, 뱃머리는 흉측한 용의 형상이었고 배 위는 아예 밀폐되어 그 모양이 배인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조선 함대를 향해 진격해 오던 일본군들은 놀랐다. 흉측한 괴물 하나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들 함대 한가운데까지 헤치고 들어오다니! 거 북선은 스스로 일본 함대에 완전히 포위 된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북선 양측 옆구리에 서 일제히 포문이 열리더니 포신이 불쑥불쑥 나왔다. 그러고는 앞머리에서 총통이 한 발 발사되는 것을 신호로 거북선 양 옆구리에서 일제히 총통이 발사되었다. 곧 선진 포구 앞바 다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거북선을 구경만 하면 일본 전선 중 서너 책이 순식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제서야 일본 군들은 거북선을 향해 조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조총탄은 거북선의 선체를 뚫지 못했다. 용감한 적장 하나가 자신의 배를 거북선에 붙였다. 그러고는 일본 도를 빼든 군사들에게 거북선에 오르라고 명령했다. 둥근 거북선 지 붕에는 젖은 가마니가 덮여 있었다. 일제히 거북선 지붕으로 뛰어내린 일본군,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젖은 가마니 안에 숨어 있던 뾰족한 철제 송곳에 찔려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 후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거북선의 둥근 지붕에서 그들은 오래 버 티지 못했다. 대부분은 송곳에 찔리거나 바다로 굴러 떨어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조선 함대에서는 함성이 올랐다. 조선 수군들조 차 의심했던 거북선의 위력이 여지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반면 거 북선 내부는 매우 분주했다. 거북선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다. 3층이 라는 설도 있지만 현재 복원되어 있는 거북선들은 모두 2층 구조이다. 아래층은 군사들이 쉴 수 있는 이른바 내무반이며 2층이 전투 공간이다. 2층에는 전투 요원뿐만 아니라 노를 젓는 격군들도 함께 있었다. 따라서 총통을 발사할 때는 격군들이 포수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일단 총통 발사가 끝나면 포수들은 총통을 끌어들여 다시 장전 을 했고 그 틈에 격군들은 노를 잡아 거북선을 움직였다. 그러나 후미 의 노네 개는 항상 움직일 수 있었다. 즉 후미 양 옆에는 포혈을 만들 지 않고 항상 노를 저을 수 있도록 했다. 네 개의 노만으로도 전투에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은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북선 내부는 밀폐되다시피 했다. 포혈과 포혈 위의 작은 창이 환 기구 역할을 했다. 10여 문의 총통이 한꺼번에 발사를 하고 나면 거북 선 내부는 짙은 유황 냄새로 가득 찼다. 그러나 수군과 격군들은 무명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영웅적으로 전투를 치러냈다. 돌격장의 명 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거북선은 양 옆구리에서 연신 총통을 발사하면서 그대로 선체를 적선에 부딪히는 당파 전술도 함께 사용했다. 용머리 아래의 돌출부는 일본 전선을 들이받을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이때다! 전 함대 돌격하라!" 이순신은 나머지 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사천해전은 오래가지 않았 다. 거북선의 맹활약과 사기가 오른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일본 함대는 모조리 격침되었다. 일부 남은 일본군은 상륙해 도망하기에 급급했다. 어두운 바다에서 불타오르는 적선을 바라보는 이순신은 감개무량 했다. 주위의 불신과 비웃음 속에서 만들었던 거북선, 그것이 위력을 발휘하는 현장을 보며 이순신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 했다. 적이 물러간 자리, 이순신의 비장의 무기 거북선이 위풍당당하 게 떠 있었다.

 

2. 비책을 준비하라

비책은 정보에서 나온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신무기 거북선!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면서 일본군의 전력에 대해 최대한 정보 를 모았다. 그 결과 일본군은 백병전에 강하며 특히 일본 수군은 해적 출신이 많아 상대의 배에 올라 칼로 승부를 낸다는 점을 알아냈다. 이 른바 등선접전 전술이었다. 상대의 배에 올라 백병전으로 승부를 가 르는 것은 고대부터 전해지는 가장 일반적인 해전 전술이었다. 막강 한 전력을 자랑하던 고대 로마 해군도 이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그들 은 아예 전선에 상대 배로 건너갈 수 있는 긴 사다리를 싣고 다녔다. 중세 해적 영화를 떠올려보라, 상대 배에 접근하여 갈고리가 걸린 밧 줄을 던져 적의 배를 고정한 다음 마치 타잔처럼 줄을 타고 건너가 화 려한 칼싸움으로 승부를 결정짓던 장면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전법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다. 일본군도 마찬가지 였다. 적의 배 위로 누가 먼저 오르는가. 그리하여 근접 백병전에서 누 가 강한가로 해전이 판가름 났던 것이다. 이런 일본군의 강점을 파악 했던 이순신은 고민에 빠졌다. 저들과 근접전으로는 승산이 없다. 100 년 이상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을 이길 수 있는 비책, 적이 아군의 배 위로 오르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방법! 비책은 있는가? 이순신은 오래된 군사 서적에서 조선 초 이미 조선 수군에 거북선 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배를 만드는 데 특히 재주가 뛰어 난 나대용을 영입하여 거북선을 복원하도록 했다. 그것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조선 초기 거북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척의 거북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여수 본영의 선소에 서 만든 거북선이 먼저 완성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이순신은 새로 만든 거북선에 총통을 싣고 발사 시험까지 거쳤다. 15만 일본군이 대마도를 출발하여 대한해협을 건너오던 바로 그 시각, 이순신은 거북선 총통 시험 발사 를 성공리에 마쳤던 것이다.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첫 출전에는 거북선을 출전시키지 않았다. 아마도 마지막 성능 시험에서 문제가 있었거나 아니면 첫 출전을 통해 비장의 무기인 거북선이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분석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순신은 적이 전라도를 공격해올 거점을 마련하고 있 던 사천해전에 거북선을 투입했고 그것은 예상 밖의 위력을 발휘했다. 전쟁터만큼 힘의 논리가 정확하게 지배하는 곳도 없다. 상대보다 우수 한 무기, 상대보다 많은 병력을 갖고 있다면 이길 수 있다. 이를 간파했 던 이순신은 거북선이라는 비장의 신무기, 비책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세계사를 바꾼 신무기

비장의 신무기가 세계 전쟁사에 등장하는 것은 드물지 않다. 비책은 단순히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넘어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까지도 바꾸어놓았다. 백년전쟁을 일으킨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프랑스를 침공 했다. 노르망디로 상륙한 에드워드는 프랑스 군과 크레시 전투를 치 른다. 당시 영국군의 병력은 약 1, 이에 비해 프랑스 군은 4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또한 프랑스 군은 갑옷과 투구, 긴 창으로 중무장한 전 형적인 중세 기사병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에 비해 영국군은 배를 타고 건너온 보병이 주력군이었다. 프랑스 군은 에드워드 3세의 영국 군을 우습게 보았다. 지금까지 보병이 기병을 이긴 예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병력이 훨씬 많은 터라 프랑스 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친 영국군 을 향해 과감한 돌격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프랑스 군의 참담 한 패배였다. 어째서 막강 전력의 프랑스 기병대가 영국군 보병에게 패했는가? 바로 이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장궁대, 즉 긴 활을 가진 보병부대를 운용했던 것이다. 영국군 장궁대의 긴 활은 기존 활 의 위력과 판이하게 달랐다. 사정거리도 훨씬 멀었으며 그 위력도 대단하여 프랑스 기마병의 갑옷과 투구를 간단히 뚫어버렸다. 이 긴 활 은 크레시 전투의 승리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더 이상 전통적인 기마 병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했다. 훨씬 소박한 신무기도 있다. 칭기즈칸이 아직 몽골을 통일하기 전, 몽골 초원에는 부족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칭기즈칸 역시 적대 부족에게 아내를 납치당하고 복수를 위해 쳐들어갔으나 패배했다. 지금껏 해오던 대로 말을 타고 괴성을 지르며 창을 들고 덤볐던 것. 그러나 상대 부족은 목책을 설치하고 궁수를 배치하여 활로써 간단하게 칭기즈칸 군을 물리쳐버렸다. 이후 1년 동안 칭기즈칸은 절치부심, 새로운 무기를 들고 다시 상대 부족을 공격, 간단히 적을 제압해버렸다. 이때 칭기즈칸은 무엇으로 적을 이겼는가? 바로 둥근 모양의 철제 방패였다. 기마병들이 새로운 방패로 적의 화살을 막으며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1916 7 1,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독일군과 일대 회전을 준 비했다. 이미 숱한 포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고 믿은 연합군은 독일군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소총을 든 보병이 주력군이었다. 그러 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기관총이었다. 세계 최초로 기관총이 전장에 선을 보였다. 단발식 소총에 비해 기관총의 위력은 엄청났다. 하루 전투로 연합군은 5만의 병력을 잃었다. 신무기의 위력이었다. 영국군 탱 크가 처음 전선에 선을 보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관총탄은 탱크의 철판을 뚫지 못했다. 이처럼 신무기, 비장의 무기는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놓는다. 이순 신의 거북선도 해전의 판도를 바꿀 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닌 신무기 였던 것이다.

 

비책, 그것을 가진 자가 이긴다

신무기의 중요성은 이제 신상품으로 대체되고 있다. 전쟁 못지않게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도 신상품이라는 신무기는 가공할 위력을 갖고 있다. 경쟁업체보다 더 작은 컴퓨터, 더 견고하고 싼 자동차, 더 신선 하게 보관하는 김치냉장고, 더 얇은 텔레비전 등 숱한 신상품들이 쏟 아져 나오지 않는가. 신제품, 즉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 비책이 없는 기업은 살아남기 어렵다. 자신만의 비책이 있어야 한다. 나의 비장의 카드는 무엇인가? 마지 막 순간 던지는 승부수, 비장의 카드가 빛을 발하는 경우를 우리는 숱 하게 보아왔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순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비책! 이것이야말로 꼭 갖추어야 할 마지막 무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원래 비장의 카드란 처음부터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자신조차 그것이 비 장의 카드가 되리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비책을 갖기 위해 가장 중요 한 것은 자신의 비책에 대한 믿음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된다 는 믿음이 첫걸음이다. 이순신이 철갑선을 만든다고 할 때 주변 인물들은 불가능한 일이라 고 했을 것이다. 쇠가 물 위에 뜰 수 없다거나 너무 무거워 움직이기조 차 어려우리라고 했을 것이다. 또한 뚜껑을 덮어 군사들과 노 젓는 격 군들이 한 공간에 있게 되니 함선을 운용하기 어려울 거라고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모든 우려를 극복하고 거북선을 만들어 냈다.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북선이 완벽한 것은 아 니다. 약점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비책이 되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비책에 대한 믿음이 생긴 다음에는 철저히 상대를 분석해야 한다. 입사 시험에서 면접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가 목표로 하는 곳을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기업에서 원하는 능 력이 무엇인지, 그 기업에 필요한 부분을 내가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한다면 문은 훨씬 쉽게 열릴 것이다. 상대의 약 점이나 상대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찾아내고 대비한다면 충분히 승산 이 있는 것이다. 비책이야말로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나만의 무기요 생존 수단이 다. 자신만의 비책을 가져라! 누구나 거북선을 만든다면 그것은 이미 비책이 아니다. 상대의 약점을 예리하게 찌르면서 동시에 자신의 장 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비책, 그것을 가진 자가 이기는 것이다.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