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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술]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_108

After winning the first victory of the Imjin War at the Battle of Okpo, Yi Sun-shin received intelligence of five enemy ships and set out with his exhausted troops for the Battle of Merakpo. During the battle, he used the superior structure of the Joseon Panokseon and the Dangpa Tactics to sink the enemy ships and finished them off with fire arrows, achieving a decisive victory. Yi Sun-shin's decision to fight despite the exhaustion of his troops was important in maintaining their morale and solidifying the momentum of the war.

[성공과 승리의 경험은 무엇보다 값진 자산이며 패배감에 물든 군대는, 이기는 싸움을 해본 적이 없는 군대는 절대 승리 할 수 없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라]

 

합포해전

1. 바람이 불 때 돛을 올려라

1592 5 7일은 이순신에게 그리고 그를 따르는 조선 수군 전체 에게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다. 옥포해전의 승리, 첫 싸움에서 이겼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전사자도 없는 완벽한 승전이었다. 옥포 앞바다는 침몰하는 일본 전함과 떠다니는 시체, 불타는 잔해 들로 어수선했다. 이순신은 전장을 정리하도록 했다. 살아남은 적군 은 포승줄로 묶었고, 일부 수군들은 적의 시체에서 머리를 냈다. 장병 겸이라는 긴 낫으로 바다에 떠 있는 적의 머리를 냈다. 적의 수급은 곧 전리품이자 전공의 증거였다.

 

소규모 적도 소홀히 여기지 마라

이순신 부대가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 옥포 포구에는 조선 백성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군에게 온갖 약탈과 노략질을 당한 그 들은 처음 조선 수군이 나타났을 때 크게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 마 일본군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사이 조선군은 일본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다. 그들은 일본군을 무찌른 장수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포구로 나와 두 손 높여 '천세'를 불렀다. 우리에게도 저런 군대가 있었던가? 조선 백성들은 차오르는 감격과 피울음으로 이순신 함대의 승전을 축하했을 것이다. 네 시간여에 걸쳐 첫 전투 옥포해전을 치른 이순신은 함대를 거제 북쪽 영등포에 정박시켰다. 지친 군사와 격군들에게 휴식이 필요했다. "군사들을 쉬게 하고 척후장들은 척후선을 띄워라. 이곳은 적진과 가까운 곳이니라! 그리고 군사들과 격군들은 충분히 휴식하라." 초여름 햇살이 아직도 따가운 오후, 영등포 바닷가가 갑자기 부산 해졌다. 막 전투를 끝낸 조선 수군들이 배를 대기 시작했다. 한켠에서 는 포로를 끌고 오고 한켠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스스로도 믿기지 않 는 승리의 무용담을 나누었다. 자신이 쏜 총통에 맞아 일본 배가 부서 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수없이 화살을 쏘고 또 쏘았지만 움직이는 적병을 죽이는 것을 4,000여 조선 수군은 오늘 처음 경험했던 것이다. 그날 오후, 영등포에 오른 군사들은 승전의 기쁨 에 들뜬 한편, 오랜 항해와 숨막히는 전투로 멀미에 시달리기도 했다. 노를 저은 격군들은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터졌을 것이다. 이순신 은 장수들을 모아 치하했다. 전라좌수영 장수들은 일사불란하게 이순 신의 작전을 따랐다. 어쩌면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이 옥포 포구까지 상륙해 적을 완 전히 섬멸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터뜨렸을지 모른다. 이순신이 지장 (智將)이라면 원균은 용장(勇將)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미 북방의 여진족을 막아내는 데 숱한 공을 세운 전력이 있었다. 비록 수군은 처 음 맡았지만 그에게 전투란 적진에 쳐들어가 초전에 박살내는 것을 의미했다. 원거리에서 포나 쏘고 적선을 깨뜨리고 물에 빠진 적병을 그냥 두고 보는 것은 그의 생리나 전투 철학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적이 육지로 도망가면 육지까지 올라가 적장의 목을 베서 긴 장대 에 꽂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장수였던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이러 한 시각 차이는 나중에 매우 큰 차이로 드러난다. 영등포 바다에서 그렇게 첫 전투를 정리하고 있을 때 급보가 전해 졌다. 적선 5척이 거제 앞바다를 지나 지금의 진해 쪽으로 가고 있다 는 첩보였다. 고작 적선 5! 이순신은 잠시 고민했다. 5척의 적선을 치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군사를 움직인다면 어 느 규모로 할 것인가? 고심하던 이순신은 전군 출동을 결정했다. 휘하 의 몇몇 장수들은 이견을 달았다. 적선은 고작 5, 닭을 잡기 위해 도 끼를 들고 뛸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었다. 그것도 이제 막 힘겨운 전 투를 끝낸 군사들이 쉬려는 참이 아니냐며 출전 결정이 무리한 것이 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의 뜻을 번복하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소. 적선 5척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는 규모요. 그러 나 지금 5척을 격파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그 5척도 50척만큼 힘에 겨울 것이오. 지금 군사들의 사기는 최고조에 올라 있소. 휴식과 승전 의 달콤함도 좋지만 이 여세를 몰아 나선다면 어렵지 않게 적을 제압 할 수 있을 것이오. 바람이 불 때 돛을 올리라 했소. 군사들의 사기가 충만해 있는 지금, 적을 해치웁시다." 결국 이순신의 출전 명령이 떨어졌고 막 휴식을 취하려던 조선 수군은 즉각 전투 태세를 갖췄다. 병사들이라고 어찌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그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작 5척을 잡기 위해 전 함대가 움직여야 하는가? 게다가 어려운 전투를 치르고 난 지금, 그러나 이순신의 명령은 단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선 5척이 보였 다. 그들은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곧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조선 판옥선의 위력

일본군의 배는 속력 면에서 조선군의 판옥선을 능가했다. 좀체 거 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항해하면서 쏘는 총통은 명중률이 현저히 딸 어졌다. 그리고 28척의 전 함대가 한꺼번에 충동을 발사할 수도 없었 다. 앞선 판옥선 몇 척에서 쏘는 총봉으로는 도주하는 적을 명중시키 기가 어려웠다. 조선군은 총통을 쏘며 기세를 올렸지만 일본군의 도 주 역시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적선과의 거리는 점 차 좁혀졌다. 그 비밀은 노에 있었다.  일본군 배는 노가 조선 판옥선보다 많지만 노. 하나에 격군(노꾼) 1명 이 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판옥선은 최고 4명까지 저을 수 있 는 커다란 노였다. 노의 개수도 16개 정도였다. 따라서 판옥선 한 척 에 타는 노꾼만도 64명이었다. 노 하나에 두 사람이 2교대로 저음 때 32명은 노를 젓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비상사태가 밤 생하면 노 하나에 4명씩 64명 전원이 젓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적을 따라잡기 위해 모든 격군이 노에 매달렸다. 드디어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 다. 조선 판옥선은 대형을 넓게 벌리며 총통 사격을 가했다. 넓게 포망 이 형성되어 대장군전과 장군전들이 어지러이 낳았다. 일본군도 간간 이 조총으로 응사해 왔으나 사거리가 미치지 못했다. 이미 일본군 조 총의 단점을 파악한 조선 수군들은 이제 총소리가 울려도 놀라지 않 았다. 먹잇감을 포위한 맹수처럼 조선군은 여유를 되찾았다. 한나절 전의 옥포 승전이 가져다준 여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선의 숫자 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투에서는 철저히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아무리 용맹하고 노련한 군사가 있다 하더라도 전력에서 차이가 나면 결과는 뻔하다. 더구나 매복전도 아니고 넓은 바다에서의 전투는 전선의 숫자가 많은 쪽이 훨씬 유리하다. 승패는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된다고 하지 않는가. 조 선 수군은 추격전을 시도할 때부터 승기를 잡고 있었다. 다급해진 일본군은 육지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육지를 얼마 앞둔 지점에서 일본 전선들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수심이 얕아 지면서 배 밑바닥이 갯벌에 닿은 것이다. 그들의 배는 좌초하고 말았 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포격과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배가 움직이지 않자 일본군들은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육지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그런 일본 군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그것은 더 이상 전투가 아니었다. 등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일본군이 속출했다. 도망치는 일본군은 1,000 여 명에 이르렀다. 원래 우리나라를 자주 침범하던 왜구의 배는 정원이 약 40명인 소 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 배는 대선(안택선 : 安宅船, 아다케)의 경우 약 200여 명이 탑승한 것으로 전해진다. 더욱 이 일본의 배는 전투보다는 전투 요원을 수송하는 수송선의 개념이 강했기 때문에 탑승 인원도 많았다. 합포해전에서 맞선 일본군 배는 대선 4척에 소선 1, 그렇다면 대선 탑승 인원이 최소 800명 이상이 며 소선에도 40명 이상이 타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한꺼번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하는 상황이었다. "당파하라!" 이순신은 버려진 일본 배를 향해 그대로 돌진할 것을 명령했다. 조 선 수군들은 잠시 당황했다. 당파라면 배를 몰고 적선에 그대로 부딪 히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지 그들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본 배는 조선 배에 비해 선체가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어느 정도인지 확인된 바는 없었다. 이순신은 지금 그것을 확인해보려는 것이다. 조 선 수군들은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그대로 일본 배를 들이받았다. ", 쿠쿵! 우지끈." 조선 판옥선들이 버려진 일본 배를 들이받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했 다. 배로 배를 들이받는 것, 그것이 당파 전술이었다. 조선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 매우 견고했다. 갑판의 판자도 두더웠으며 배를 지탱하는 골격도 이미 고려 시대 이전부터 가룡목을 이용하여 마치 대들보를 짜듯 견고하게 만든 구조였다. 반면 일본 배 는 얇은 삼나무 판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 배에는 총통을 싣지 못 했다. 총통을 발사할 때의 반동을 선체가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 나 조선 판옥선 정면에는 당파용 귀두(거북 머리)가 두 개 돌출되어 있 었다. 통나무에 거북 머리를 조각한 이 돌기가 그대로 일본 배의 선체 를 들이받는 것이다.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주로 사용한 전술은 당파와 총통의 집중발 사, 그리고 거북선을 이용한 돌격전이었다. 이순신은 합포해전에서 처음으로 당파 전술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것이 매우 훌륭한 작전임 을 확인했다. 조선 판옥선에 부딪힌 일본 배는 선체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갑판이 주저앉고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다. 한번 들이받으면 일본 전선은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러한 당파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본군 배는 밑바닥이 바닥에 닿 아 좌초했다. 그렇다면 수심이 얕다는 것인데 조선 판옥선은 어째서 좌 초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배의 구조가 일본 전선과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 판옥선은 일본 배와 달리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즉 배 의 밑바닥이 대바구니처럼 평평하여 수심이 비교적 얕은 곳에서도 운 항이 가능했으며, 특히 방향을 바꾸는 데 탁월했다. 반면 일본 전선은 배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형이었다. 즉 바닷물 속으로 배가 깊이 잠기는 형태였다. 정면으로 나아갈 때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은 있으나 방향 전 환이 느렸고 수심이 얕은 곳에는 좌초될 우려도 높았다. 전선의 구조와 성능 면에서 이미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한수 위였던 것이다.

 

완벽하게 승리를 굳혀라

조선 수군의 당파 공격을 받은 일본 전선은 대부분 침몰 직전이었다. 육지로 도망간 일본군 중에는 조선 수군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나와 산발적으로 조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조총은 조선 함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서서히 침몰되는 배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해군이 배를 잃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멈춰라, 당파 중지!" 이순신은 신이 나서 적선을 들이받고 있는 조선군에게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는 모든 판옥선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더 이상 당파는 무의미했다. 아무리 판옥선이 견고하다 해도 충격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적의 머리를 베려면 나의 팔 하나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 전투이다. 당파 전술은 근접전을 펼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할 터였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적선에서 물러났다. "후퇴합니까?" 이순신의 장수 하나가 물었다. 그가 보기에 이미 끝난 전투였다. 적 은 도망쳤고 적선은 침몰하고 있으니 말이다. "불화살을 준비하라!" 이순신은 사수들을 불렀다. 사수들은 시위에 불화살을 매겼다. 크게 포물선을 그린 조선 수군의 불화살 은 침몰되는 적선 곳곳에 불을 붙 있다. 함포 앞바다가 환해졌다. 이순신은 적선 5척을 당파한 후 모조리 불살라버렸다고, 합포해전 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침몰하는 배에 화공까지 펼친 이순신, 그것은 그날 전투의 마침표였다. 이것으로 적에게 단호한 조선 수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반면 조선 수 군에게는 어떤 전술을 구사하더라도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준 전투였다. 옥포해전 직후의 합포해전, 그것은 첫 승전의 여세 를 몰아 거둔 완벽한 승전이었다. 괜찮을 전투였다. 첫 전투를 완벽한 승리로 이끈 다음 곧바로 다시 전 열을 가다듬고 함대를 출전시키는 것,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 다. 적선 5척을 쫓지 않는다 하여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출전을 결정했다. 충만해 있는 군사들의 사기를 이용하여 손쉽게 적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낮에 치른 옥포해전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리 적은 수의 적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단호함 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승리감이 남아 있을 때 여세를 몰아 적을 물 리치는 것이 얼마나 용이한지 군사들이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조선 수군은 고작 5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추격전을 펼치고 마침내 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전술학에 지속공격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프러시아의 퇴역 장군 인 칼폰 클라우제비츠는 "추격전이 없는 승리는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 했다. 일단의 공격에서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거기서 멈 추면 그동안 거둔 성공조차 반감된다는 것이다. 기선을 제압한 후 적 이 등을 보일 때 끝까지 추격하여 적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시키는 것 고지를 점령한 다음 깃발을 꽂고 만세를 부르는 대신 계곡 아래로 도 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다시는 고지를 넘볼 수 없도록 완전히 분쇄하 는 것이야말로 전투의 완결판이다. 승전의 여세를 몰아 적을 축출한 으로써 완전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2. 여세를 몰아라

승기의 고백를 조여라

함포해전은 이순신의 고심에 찬 결단의 산물이었다. 지르지 않아도 할 수 있을 때 하라 이러한 예는 가슴 아픈 우리 역사의 한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여세를 몰아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기회 가 있었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한반도 남쪽까지 밀려 내려갔던 한국 군과 유엔 연합군은 낙동강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북한군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때 역대 전쟁 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이 도쿄에서 준비되 고 있었다. 미군의 극동군 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작전 을 주장했다. 하지만 합동참모회의에서는 맥아더의 이 작전을 무모한 것으로 치부, 반대했다. 무엇보다 인천은 간만의 차가 심해 대규모 부 대가 상륙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그렇지만 맥아더는 서울과 가까운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을 장악한다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가 있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 분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전쟁이든 최전선 부대의 보급망만 끊으면 승리한다는 것은 상 식, 서울 등 한반도 서부를 장악한다면 북한군은 보급로를 한반도 동 쪽으로 이동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백두대간의 험 산준령을 넘어 낙동강 전선에 원활한 보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공권을 연합군이 장악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 다. 결국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 인천 상륙작전을 허락받았 다. 그리고 맥아더의 예상대로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인천에 상륙한 지 사흘 만에 한국군과 맥아더의 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이 전격적인 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인천과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에게 알려졌다. 이때부터 북한군은 눈에 띄게 무너졌다. 후방이 적에 게 점령당했다는 것, 그것은 자신들의 생명줄이 끊겼음을 의미했다.

 

이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그러나 전쟁학자들은 이때 맥아더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인천과 서울을 함락한 맥아더는 곧장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철원, 원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는 것이 다. 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그대로 한반도 허리를 장악했더라면 중 공군 개입 등 다른 변수가 발생하기 전에 승세를 완전히 굳힐 수 있었 다는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병력을 빼돌려 원산항 상륙작전을 위해 다시 인천항에서 배에 태우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고 한국군 육군이 도보로 먼저 원산에 도착했다. 이때 후퇴한 북 한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재편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승기를 잡아 여세를 몰 수 있을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기, 즉 타이밍을 놓치고 그것은 또다시 전황의 변수로 작용한다. 만약 맥 아더가 이순신처럼 여세를 모는 것에 집중했더라면 한국전쟁이 어떻 게 결말이 났을지 모를 일이다.

 

작은 성취의 함정을 경계하라

어떤 일이든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일단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 이만큼 내일 다시 이 만큼 서서히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 요한 것은 할 수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점심 사고 나서 커피 사지 않으면 점심 산 것도 말 짱 헛거라는 말이 있다. 이왕 접대를 하려면 끝까지 책임지라는 말일 터. 이왕 베풀고 도우려면 상대방이 감동 받을 만큼 하라.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안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만년 2위를 지키던 기업이 천신만고 끝에 시장을 장악했다. 한 번이라도 이겨보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경쟁사의 상품과 판매 전략을 분석했다. 경쟁사 제품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 고,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는지, 또 어떤 마케팅 전략을 세워야 1위 업 체를 이길 수 있을지 연구했다. 면밀히 분석하고 모든 조직의 역량을 종가동한 끝에 마침내 시장을 장악했다. 주가가 오르고 언론의 주목 을 받는다.

 

불패의 리더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