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p Am embraced the principles of the Emperor and Laozi, governing with the philosophy of wuwei (non-action) and valuing a quiet and pure approach in managing officials and the populace. He avoided being bound by rigid laws, instead focusing on addressing core issues. With an upright character, he did not hesitate to speak frankly before the emperor.
In contrast, Zhang Tang leveraged the legal system to expand his political influence and secure the emperor's trust. However, his strict enforcement of laws and calculated humility alienated the public. While Jup Am's straightforward nature often led to conflicts with those in power, diminishing his political standing, his honesty and moral integrity were widely recognized. Zhang Tang, on the other hand, faced criticism for exacerbating the people's suffering through the abuse of law.
황제와 노자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를 한 사람
급암 : 무위無爲의 학문으로 정치를 했던 급암
급암이 동해군의 태수로 있을 때였다. 급암은 황제黃帝와 노자의 도 를 배웠기 때문에 평소 관청과 백성을 다스릴 때 조용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속관과 서기만 자신이 직접 임명하고 그들의 큰 허물만 질책할 뿐 자질구레한 일까지 감독하거나 가혹하게 부리려 들 지 않았다. 이렇게 1년이 지나자 급암이 다스리는 동해군에 대한 평판 이 자자했다. 효무제는 이 소문을 듣고 급암을 불러 주작도위에 임명하 고, 구경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는 업무를 처리할 때 대략의 핵심만 찔러 해결할 뿐 법률의 구애를 받으면서 처리하진 않았다. 급암의 사람됨은 거만하여 인사치레가 적었고,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면전에서 매정하게 힐난했다. 자신의 뜻에 합당한 자는 잘 대해 주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선비들 역시 이런 까닭으로 급암을 잘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급암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협객의 정신을 본받아 지조와 절개에 맞게 행동했다. 평소의 행실이 깨 끗하고 직간을 좋아하여 수시로 천자의 안색을 무안케 했다. 천자가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초빙하여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성군 요와 순 같은 정치를 하고 싶소." 급암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겉으로 인의를 베푸시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욕심이 많 습니다. 그러할진대 어떻게 요와 순의 정치를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효무제는 이 말을 듣자마자 격노하여 당장 조회를 파했다. 공경들은 모두 급암의 신변을 걱정하였다. 효무제는 측근 신하를 따로 불러 말했다. “너무 심하도다, 급암의 우직함이여." 여러 신하들 중에 급암을 나무라는 사람도 있었다. 급암이 이렇게 말했다. “삼공과 구경이란 벼슬은 천자를 보필하는 데에 존재 의의가 있소. 공경의 신하된 몸으로 어찌 그 뜻을 저버리고 아첨으로 천자를 불의에 빠뜨리게 하겠는가! 지위에 연연하여 보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조정을 욕되게 할 순 없소.” 급암은 원래 고질병이 많았다. 효무제가 여러 번 휴가를 주었으나 병 은 끝내 낫지 않았다. 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장조莊助라 는 신하가 급암의 휴가를 대신 청하였다. 효무제가 장조에게 물었다. "급암은 어떤 인물인가?" “급암에게 일을 맡긴다 해도 그의 업적이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게 돋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젊은 군주를 보필하고 기존의 업적 을 견고하게 지키는 데는 적격의 인물입니다. 그는 유혹해도 오지 않고 손짓해도 가지 않는 뜻이 굳은 사람입니다. 옛날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 育 같은 힘있는 자라도 결코 그의 뜻을 굽히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제가 동감했다. “그렇소. 급암은 종묘 사직과 존망을 같이하는 신하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무제는 급암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무제는 아무리 공이 많은 신 하라 해도 약간 무례하게 대했지만 급암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대장군 위청이 궁중에서 효무제를 모실 때도 무제는 침상에 걸터앉아 그를 대 했고, 승상 공손홍이 주청을 드릴 때도 무제는 관을 쓰지 않는 채 맞이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급암이 배알할 때는 무제는 관을 쓰지 않고는 만날 엄두를 못 냈다. 한 번은 무제가 무장武帳(천자가 머무는 곳으로,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무기 를 장막으로 가려 놓았다) 안에 있을 때 급암이 주청을 드리러 온 적이 있었 다. 이때도 무제는 평상시처럼 관을 쓰지 않고 있다가 멀리서 급암을 보 고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런 후 측근 신하를 시켜 그의 보고를 듣게 했다. 이처럼 급암은 천자도 그 앞에서는 예를 갖추게 했던 인물이다. 이 무렵 한나라의 대외 관계는 정벌 정책이었다. 그러나 급암은 화친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청했다. 효무제는 공손홍, 장탕 등의 주장에 귀 를 기울여 정벌 정책을 계속 추진하니 천하가 소란하고 조정에 일이 많아졌다. 무제는 공손홍과 장탕을 총애하고 급암을 멀리했다. 그러나 급 암의 강직함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는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태 후의 동생인 전분과 황제의 처남인 위청 장군 앞에서도 굽실거리지 않 고 꼿꼿하게 대했다. 이러한 강직함 때문에 그의 벼슬은 날로 깎이고, 그가 구경에 있을 때 낮은 관리에 지나지 않았던 공손홍이나 장탕 등의 지위는 날로 높아 져 급암보다 위에 있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급암은 사소한 일에도 원망을 자주 품었으며, 마음이 날로 편협해져갔다. 급암이 천자를 배알하고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땔나무 단을 쌓는 일처럼 신하들을 등용시킵니다. 뒤에 온 자가 먼저 온 자보다 위에 있으니 말입니다.” 효무제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급암이 물러가자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배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 급암의 말을 살펴보면 날이 갈수록 편협해지니 말이다." 이후 급암은 선비들뿐만 아니라 천자와도 조정 일에 대해 사사건건 대립하니 그의 지위와 권세가 날로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급암은 대수롭지 않은 법에 저촉되어 벌을 받아야 했으나 천자의 특사 령으로 석방되는 대신 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이후, 급암은 전원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천하를 위한 정당한 발언을 비로소 깨우쳤도다
급암이 은거한 지 몇 해 지나서였다. 오주전(한나라의 화폐)을 초나라 에서 가장 많이 위조하자, 이를 다스리려고 효무제는 급암을 회양의 태 수로 임명했다. 급암은 수차례 벼슬을 사양하다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급암은 부임지로 떠나는 길에 대행 이식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 몸은 지방으로 좌천되니 조정의 논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소. 그런데 어사대부 장탕의 간사한 지혜는 직간을 막고 자신의 비리를 변 호하는 데 능숙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 교묘한 말만 입 밖 에 내고 천하를 위한 정당한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전적으로 그는 군주의 뜻에 맞는 아첨만 입 밖에 내고 있습니 다. 군주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으면 이것을 눈치채어 군주와 반대 되는 의견을 가진 신하를 헐뜯고, 군주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이것 을 눈치채어 군주를 찬양하는 말로 아첨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 는 소란을 일으키는 정책을 즐겨 쓰고 법률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안으 로는 사욕을 충심으로 가장하여 군주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 고, 밖으로는 금품을 탐하는 벼슬아치를 수하에 두고서 사욕을 채웁니 다. 공은 구경의 지위에 있으니 빨리 이를 말하여 바로잡지 않는다면, 공도 그들과 함께 같은 욕을 받게 될 것이오.” 그러나 이식은 장탕을 두려워하여 급암의 말을 천자께 보고하지 않 았다. 급암은 회양군을, 이전의 동해군 태수로 있을 때처럼 다스렸다. 그러다보니 회양군의 정치는 올바로 서고 투명해졌다. 뒤에 과연 장탕은 몰락했다. 비로소 효무제는 급암이 말하는 바를 깨우쳐 급암을 재상으로 대우하며 회양군에 있게 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 급암은 죽었다. 급암이 세도가 있을 때엔 빈객이 금방 넘쳤다가 세도가 없어지면 그 렇지가 못했다. 슬기로운 급암도 이것을 막지 못했으니 다른 무리들은 일러 무엇하랴. 적공이란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정위가 되자 빈객들로 문이 미어졌으나, 관직에서 물러나자 문 밖에 가히 참새 그물을 칠 정도였다. 일사일생一死一生으로 교제하는 정 을 알게 되고, 일빈일부─貧富로 교제하는 태도를 알며, 일귀일천一貴 一賤으로 교제하는 정을 깨우쳤도다.” 이는 바로 급암을 두고 한 말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법을 가혹하게 적용해 정치를 퇴보시킨 관리들
장탕·왕온서ㆍ두주 : 법을 너무 엄격히 적용하면 백성은 오히려 시달린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려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백성 들은 법망을 뚫고 형벌을 면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려 바로잡으려 한다면, 백성은 잘못을 수치로 알 아 바르게 된다." 노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덕이 높은 사람은 스스로 덕이 없다고 여기므로 덕을 지니게 되는 것이요, 덕이 낮은 사람은 덕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므로 덕을 갖지 못 한다. 법령이 늘어날수록 도적은 많아진다." 사마천은 말한다. “참으로 진리로다! 성현의 이러한 말들은, 법령이란 것은 통치의 도 구일 뿐 맑고 흐림을 조절하고 다스리는 근원은 아니다. 일찍이 천하의 법망은 엄밀했다. 그런데도 간악함과 거짓 술수가 우후죽순처럼 일어 나 절정에 다다르자, 관리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백성들은 법망을 빠져 나가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당시 관리들의 정치는 마치 불을 끄고 끓는 물을 퍼내는 것처럼 조급해보였다. 꼿꼿하고 엄격한 자 가 아니라면 어찌 그 소임을 견디어 내며, 유쾌하게 감당해낼 수 있었 겠는가? 그래서 도덕을 논하는 자는 법의 집행자로서 소임을 감당해내 지 못했던 것이다. 한나라가 초기에는 모난 것을 깨뜨려 둥글게 만들고, 조각한 장식을 깎아 소박하게 만들었으며, 법망은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관대했다. 그렇게 하였더니 관리들의 정치는 순수하고 단순하여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았고, 백성들은 태평하고 안락함을 느 꼈다. 이를 바탕으로 관찰하면,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은 가혹한 법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있는 것이다." 혜제의 시대부터 경제의 시대까지 가혹한 관리로는 후봉(侯封, 조조, 질도, 영성寧成, 주양유周陽由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법을 엄격하게 집 행하였으므로 적이 많아 대부분 말로가 좋지 않았다. 그들이 법을 엄격 하게 적용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백성들이 법망을 피하려 할수록 이를 막기 위해 다른 법률이 추가되어 조정에 일이 많아 졌다.
이중인격자의 계산된 겸손
장탕張湯은 두현천동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는 장안의 현승縣조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외출하면서 어린 장탕에게 집을 잘 보라고 했다. 그런 데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보니 쥐가 고기를 훔쳐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장탕을 심하게 매질하였다. 화가 난 장탕은 쥐구멍에서 쥐를 잡아 심하 게 매질한 뒤, 영장을 발부하여 진술서를 만들었다. 그런 후 쥐를 판결 대로 신체를 찢어 죽이는 형벌인 책형에 처했다. 아버지가 아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작성한 문서를 살펴보니 노련한 재판 관이 작성한 글과 같았으므로 몹시 놀랐다. 그래서 아들에게 재판에 관 한 공부를 하도록 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장탕은 재판에 대한 일로 관 리와 사귀면서 조정에 등용되었다. 장탕은 무안후 전분의 추천으로 어 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장탕은 황실 내분 사건을 철저하게 규명한 공으 로 태중대부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장탕은 벼슬이 올라 정위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법 지식을 동원해 애꿎은 사람을 법망에 빠뜨렸으며, 천 하의 이름난 사대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마음속으로 이들을 좋아하지 않아도 겉으로는 따르는 척했다. 이 무렵 효무제는 유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장탕은 중 대한 사건을 판결할 때면 박사의 제자들 가운데 유학에 정통한 자를 가 려 정위의 사史로 임명하고 법령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해결하게 하였 다. 장탕이 효무제에게 말을 아릴 때는 먼저 박사 출신들의 자문을 받 아 아뢰었다. 만약 주상이 장탕의 말을 듣고서 옳지 않다고 하면 이렇 게 말했다. "그들이 제시한 건의는 주상의 의향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니, 이는 전적으로 신의 과실입니다." 그리고 주상이 옳다고 하면 이렇게 말했다. "이 같은 일은 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신의 박사들이 자문 한 대로 아뢴 것뿐입니다.” 그는 이처럼 관리를 천거하고 사람의 장점을 들어 칭찬하며 과실은 덮어주었다. 황상은 이런 장탕을 깊이 신임했다. 그런데 그는 같은 범법자라도 주상의 눈 밖에 난 사람이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법관에게 넘겼고, 주상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면 법을 관 대하게 적용하는 법관에게 넘겼다. 만일 재판에 회부된 자가 세력이 있 는 호족이면 법조문을 교묘하고 가혹하게 적용하여 죄를 다스렸고, 가 난하고 벼슬이 없는 평민일 경우에는 황상께 이렇게 아뢰었다. “비록 법조문에 저촉되긴 하오나 주상께서 참작하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마다 황상은 장탕의 말대로 죄인을 풀어주었다. 장탕은 벼슬이 높아지자 품행을 스스로 조심하여 빈객과는 교제하고 옛 친구와는 음식을 나누었으며, 친구의 자제로 관리가 된 사람이나 가 난한 형제는 후하게 돌봐주었다. 그리고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여 러 공경들을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이러한 까닭에 장탕은 비록 법률의 적용이 혹독하고 시기심이 강하고 공평하지 않았으나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법이 많을수록 민심은 흉흉해진다
장탕은 황상의 신망이 높아져 어사대부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황상 의 뜻을 받들어 나라에 청원해서 오주전을 만들어 국가의 재정을 채웠고, 소금과 철을 국가 전매사업으로 하여 이익을 국고로 거두어들였다. 장탕의 신임은 대단하여 그가 주청을 드릴 때에 황제는 식사마저 잊은 채 귀를 기울였다. 승상은 그저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고 조정의 중대한 대사는 모두 장탕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흉노 정벌 정책으로 생업을 잃은 백성들이 소요를 일 으켜 민심이 흉흉했다. 조정에서는 민심을 잡기 위해 법률을 제정했는 데, 간악한 관리들이 법률을 시행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착 취했다. 이 또한 엄격한 법률로 다스렸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위로는 공경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탕을 손가락 질했다. 그럼에도 장탕에 대한 황상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조정 회의에서 모든 중신들이 입을 모아 아뢴 내용이라도 장탕이 홀로 반대하는 내용을 올리면 황상은 장탕의 의견을 채택했다. 흉노가 화친을 요청해오자 정벌이냐, 화친이냐를 놓고 조정에서 회 의가 벌어졌다. 먼저 박사 적산狄山이 화친 정책을 주장하자 효무제가 장탕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탕이 말했다. "화친은 정세에 어두운 선비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이에 적산이 장탕을 거짓 충언만 일삼는 신하라고 비난하자 황제의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직접 적산에게 물었다. “정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군의 태수로 임명하겠다. 그러면 그대가 오랑캐의 약탈을 원천 봉쇄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습니다." “현의 현령으로 임명한다면?"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적산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요새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한다면?" 계속되는 황제의 질문에 적산은 여기서 곰곰이 생각지 않을 수 없었 다. 이 같은 질문이 계속되다간 답변이 궁지에 몰릴 것이고, 또한 그 결 과로 형리에게 넘겨져 죄를 받게 될 것이 뻔했으므로 마지못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황제는 적산을 요새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했다. 적산은 부임 한 지 한 달이 지나자 흉노에 의해 머리가 베어졌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로 군신들은 몸을 떨며 장탕을 두려워했다. 장탕은 자신과 원수진 사람이 있으면 음모를 꾸며 법망에 빠뜨리게 한 뒤 가혹한 법을 적용해 제거하기도 했다. 또한 현재의 지위만 믿고 옛날 상관들을 푸대접하고 무시해서 사방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 자 결국 조정 중신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그의 권세도 기울기 시작 했다. 장탕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가족이 장탕의 비리를 폭로하자, 그동안 장탕과 원수졌던 사람들이 작당하여 일제히 장탕을 공격하니, 효무제도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효무제는 장탕의 옛 동료인 조우 에게 장탕을 문책하게 했다. 조우가 장탕에게 말했다. "그대의 혹독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는 증거가 여럿 확보되어 있다. 그대를 옥에 가두지 않는 것은 그대가 스스로 알아서 결단을 내리도록 하라는 천자의 뜻이 있어서이다. 어찌 여러 말로 심문에 답변할 필요가 있겠는가?" 장탕은 최후가 왔음을 알고 다음과 같은 사죄의 글을 써 내려갔다. "신은 아무런 공도 없으면서 하찮은 신분으로 폐하의 총애를 받아 삼공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만, 평소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해 송구스러웠 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죄는 사람들이 날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적은 뒤 자살하고 말았다.장탕이 죽자, 그의 집에 남은 재산이라곤 500금밖에 없는 것이 밝혀 졌다. 그것도 모두 녹봉이나 하사물일 뿐 다른 재산은 일절 없었다. 그 형제와 여러 아우들이 장탕을 후하게 장사지내려고 하자, 장탕의 어머 니가 말했다. "장탕은 천자의 대신으로 있다가 더러운 악평을 듣고 죽었다. 성대한 장사라니, 당치 않은 말이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땅 속에 묻혔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효무제는 감탄했다. "어미의 품행으로 봐 그 아들은 무죄임이 틀림없도다!" 그리고는 다시 조사를 하게 하니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 장탕을 모략했던 사람들은 죄의 대가를 받고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범법자 출신들을 끄나풀로 이용했던 왕온서
왕온서는 양릉현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살인을 저지른 범법 자였는데, 장탕을 만나 정위의 부관이 되었다. 그후 승진하여 광평군廣 平郡의 도위가 되었다. 그는 범법자 출신들을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어 도적을 잡는 끄나풀로 이용했다. 그래서 그가 잡고 싶은 도적이 있으면 그들을 통해 잡았다. 하지만 끄나풀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범법자들에게는 죄를 물어 그 일가족까지도 죽였다. 이 때문에 제나라와 조나라의 근교에 있는 도적 들은 감히 광평군 부근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광평군에서는 길 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황제는 이 보고를 듣고 왕온서를 하내군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는 태수로 임명되자마자 지방 호족들을 법망에 빠뜨려 처형시켰는 데, 죽은 자의 피가 마을 10여 리의 땅을 적셨다. 그러자 3개월도 안 되 어 하내군에서는 감히 불평하는 자가 없고, 밤에 나다니는 자가 없었으 며, 들에는 개를 짓게 하는 도둑도 없어졌다. 왕온서는 용케 법망을 피 해서 도망간 도둑일지라도 인근 나라까지 쫓아가서 이들을 잡아왔다. 12월이 다 가고 입춘이 되자, 왕온서는 발을 구르며 탄식했다. "아아, 겨울이 한 달만 더 길었어도 내 방식대로 일을 해치울 수 있었 을 텐데!" 왕온서는 이처럼 살상殺傷하며 위세 부리기를 즐겨했으며 사람을 사 랑할 줄 몰랐다. 천자는 이 보고를 받고 왕온서를 유능한 인물로 여겨 중위로 임명했다. 그는 여전히 하내군에서 하던 방식대로 교활한 관리 들을 불러 모아 함께 일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세력 있는 자에게는 아첨하여 법 적용을 관대하게 했고, 세력이 없는 자에게는 법 적용을 가혹하게 했다. 그후 한 차례 해임되었으나 다시 복직되어 중위의 임무 를 수행했는데, 역시 법 적용을 하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게다 가 투서함을 설치하여 범법 조짐이 있으면 고발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왕온서 자신도 법에 걸려들게 되었다. 오랑캐 정벌을 위 한 병사 징집 때 친분이 있는 부호의 자제를 징집에서 면제시켜 준 일과 그로 인한 수뢰 혐의로 고발된 것이다. 이 죄는 한 가족을 멸하는 죄 에 해당하므로 왕온서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두 아우와 두 인 척 집도 역시 각기 다른 죄에 걸려들어 다섯 가족이 멸족되었다. 대궐 출입을 감독하는 벼슬자리에 있던 서자위徐自爲가 이렇게 말했다. "슬픈 일이로다. 왕온서의 죄는 삼족을 멸하는 형벌도 부족해 오족까 지 멸하는 결과를 낳았구나." 왕온서가 죽었을 때 그의 집에서 수천 금의 재산이 발견되었다. 그로 부터 몇 년 뒤 윤제라는 가혹한 관리도 재직 중에 병들어 죽었다. 그런 데 그의 집 재산은 50금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윤제에 의해 희생 된 자들의 가족들이 그의 시체를 태우려고 했으므로, 윤제의 가족들은 그의 시체를 가지고 몰래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를 지내야 했다. 이렇듯 가혹한 관리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대단했다. 왕온서 등이 악랄한 방법으로 정치를 한 이래로 군수, 도위, 제후, 2,000석 녹봉을 받는 관리들이 정치를 하는 데 모두 왕온서의 방법을 모방했다. 그리하여 관리와 백성은 법을 범하는 것을 더욱 가볍게 여겼 고 도적은 갈수록 많아졌다. 천자는 천하의 도적들을 잡으려고 관리를 임명하고 법을 만들고 또 한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고, 도적을 소탕하지 못한 관리들에게 책임 을 물었으나, 결과적으로 더욱더 많은 도적들이 양산되어 도적떼까지 생겨났다. 이에 관리들은 도둑들을 체포하지 못하면 처벌될 것이 두려 워서 서류를 위조하여 도적이 없다고 보고하는 등 그 책임을 회피했다.
법이란 바로 천자의 말씀
두주 역시 선배 혹리(가혹한 정치를 편 관리)들에 의해 추천된 인물인데, 상탕이 그를 섬겼다. 장탕이 두주를 황제께 천거하니, 황제가 그를 어 사로 임명했다. 그후 두주는 중승中永을 지냈는데, 정사에 대한 보고가 황제의 뜻에 잘 맞았으므로 10여 년 동안 벼슬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는 법 적용을 조급하게 하지 않고 무겁고도 빈틈없이 했다. 표면적 으로는 관대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법을 운용하는 것이 날카로워 사람의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 대체적으로 그는 장탕을 모방하여 정치를 했다. 두주는 법 적용에 앞서 황제의 마음속을 잘 살폈다. 그래서 황제가 실각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황제의 뜻대로 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 고, 황제가 용서하고자 하는 자는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옥에 가두 어 놓았다가 자주 그의 억울함을 내비쳤다. 한 빈객이 이런 그를 꾸짖 어 말했다. "당신은 천자의 법관으로 있으면서 법에 따라 운용하지 않고 자의적 으로 판결을 하는데, 사법관이란 것이 본디 이와 같은 것인가? 두주가 반박했다. "법이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오? 이전의 군주가 옳다고 하여 제 정한 것을 법률이라 하고, 후대의 군주가 옳다고 하여 기록한 것을 법 령이라 하오. 즉, 그 시대의 상황에 맞는 것이 옳은 것이오. 어찌 옛날 의 법에만 의존할 수 있겠소?" 두주는 벼슬이 정위에 이르렀다. 두주 또한 장탕과 왕온서처럼 법 적 용을 가혹하게 하여 수많은 범법자들을 양산해냈다. 그가 정위로 있을때 칙명에 의해 다스린 죄수는 6~7만 명에 이르고 연루자로 옥에 가둔 숫자만 해도 10여 만 명이나 되었다. 두주는 한 차례 면직되었다가 뒤에 집금오(근위대신)를 맡게 되어 도둑 을 추격하여 체포하는 일을 했다. 이때 황제의 외척들을 체포하여 다스 렸는데, 이들에게도 예외없이 가혹한 법을 적용하여 죄값을 물게 했다. 천자는 오히려 이런 두주를 사심 없는 인물이라 여기고 어사대부로 삼 았다. 두주의 두 아들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하남군과 하내군의 태수로 있 었다. 그들은 포악하고 혹독한 정치를 펼쳤는데 왕온서를 능가할 정도 였다. 두주가 처음 정위의 부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재산이라곤 말 한 필뿐이었다. 그것도 온전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옥사를 집행하여 삼공의 지위에 오르고, 자손 또한 높은 관직에 있게 되자 재 산이 수만 금으로 불어났다. 혹리 중 장탕은 자신의 지혜를 동원하여 갖은 방법으로 황제의 비위 를 맞추긴 했으나, 때로는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여 국가에 도움을 주었다. 두주는 아첨은 했으나 말수가 적고 믿음직해 보여 중용 되었다. 장탕이 죽은 후 법망이 조밀해지면서 대부분 많은 관리들은 사람의 죄를 다스릴 때 엄격할 수 있었으나, 정치는 도리어 쇠퇴하고 백성은 피폐해졌다. 구경九卿들 거의 대부분이 구차하게 자신들의 직책을 받들 뿐, 천자의 과실을 구할 힘이 없었으니 법령 이외의 일을 논할 여지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여러 혹리 중에서 청렴한 자는 모범으로 삼을 만하고, 탐욕스러운 자는 경계로 삼을 만하다. 법으로 가르치고 금지한 것이 빛을 발 했던 것은 그 바탕에 문무文武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혹한 관리들이 비 록 참혹하기는 했으나 그 지위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유협은 영예로운 명성으로 얼굴을 삼는다
곽해 : 군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덕을 지닌다
한비자는 말했다. “선비는 문文으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고, 유협遊俠은 무武로써 금기된 법을 범한다." 이것은 선비와 유협 둘 다 비난한 말이다. 그러나 학문하는 선비는 흔히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다. 학술로써 재상이나 경대부의 지위를 얻 어 군주를 보필하여 공적과 명성을 역사 위에 빛낸 선비는 말할 수 없 이 많다. 그런데 공자의 제자인 계차季나 원헌原憲 같은 촌구석 출신 의 선비인 경우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군자의 덕을 지녔지만, 그들 의 뜻은 진실로 시대에 맞지 않았으며, 시대 또한 이들을 비웃었다. 그래서 계차, 원헌은 일생을 마칠 때까지 가재 도구 하나 없는 집에서 거 친 베옷과 나물밥을 먹으며 살았지만 불만이라곤 없었다. 그들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났건만, 제자들은 그 뜻을 기리며 본받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런 반면 유협들은 행동이 비록 정의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말에는 믿음이 있고 행동은 과감하다. 한 번 허락한 일은 반드시 성실하게 이 행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급한 상황에 처한 남부터 해결해주 고, 생사 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어도 자신의 능력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런 점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사람에게는 위험한 상황은 항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옛날 순임금은 우물을 파다가 매장될 뻔했고, 은나라의 재상 이윤은 솥과 도마를 짊어지고 다니며 요리를 했다. 또한 부열은 부험이라 는 동굴에 몸을 숨겨야 했고, 여상은 극진이라는 나루터에서 곤궁 하게 살았다. 제나라의 관중은 족쇄와 수갑을 찬 적이 있고, 진나라의 재상 백리해는 노예의 몸이 되어 소를 먹이기도 했다. 공자는 광톤이라 는 땅에서 난을 당하여 진陳·채蔡 사이에서 굶주려 기력이 쇠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선비들로서 이른바 도가 있는 어진 사람들이다. 그럼에 도 이 같은 재난을 만났으니, 하물며 평범한 인간들이야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건너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들이 만나는 재앙에 대해 어 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백성이 이런 말을 했다. "어찌 인의를 알 필요가 있으라? 이익을 챙길 수 있게 해준다면 그가 바로 덕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나라를 추악하게 여긴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 지만 이 때문에 문왕이나 무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진 않았으며, 도척과 장교는 포악했지만 그들 스스로 의리 있다고 서로 칭송했다. 이것으로 보건대, 띠의 장식을 훔친 자는 사형을 당해도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되고, 제후의 문하에는 인의仁義가 존재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지금 학문에 얽매이거나 작은 의리를 간직하며 오랜 세월 세상과 고 립되어 살아가는 것이 어찌 논조를 더럽게 하고 세속에 맞추어 행동하 고 세상에 빌붙어 영예로운 이름을 취하는 것만 못하겠는가? 그러나 평민의 무리로서 은혜와 의리에는 반드시 보답하고, 허락한 일은 반드시 이행하며, 천리 먼 곳에서도 신의를 지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세상의 평판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 또한 유협 무리의 장 점이며 구차한 삶보다 낫다. 그래서 행세께나 하는 선비들도 위험한 지 경에 몰렸을 때는 그들에게 의탁해 목숨을 구한다. 그들이야말로 어찌 사람들이 말하는 '어질고도 뛰어난 인물'이 아니겠는가? 만일 민간의 유협들과 계차·원헌의 역량과 권세와 재능을 비교하여 우열을 논하여 공적을 평가한다면, 그 당시 공로의 측면에서는 이들과 같이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와 믿음의 측면으로 평가한다면 유협의 신의가 어찌 적은 것이겠는가! 옛날의 서민 협객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근대의 연릉·맹상군·춘신군·평원군·신릉군 등은 모두 왕족들로 땅을 가지고 경상 相에서 부유함을 누렸다. 그들은 천하의 현자들을 초청하여 제후들 사 이에 그 이름을 드러냈다. 이 어찌 어질지 않은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 가. 그러나 명성이 높았던 것은 비유컨대, 명성이 바람에 실려간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그들의 명성은 큰 권세에 힘입은 것뿐이다. 이에 반해 민간의 협객과 같은 경우에는 행실을 닦고 이름을 닦아서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것이니, 어질다고 일컫지 않는 자가 없다. 이렇게 행실과 이름을 닦아서 천하에 명성을 날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유가나 묵가에서는 이를 배척하여 기록에 올리지 않 았다. 진나라 이전의 서민 협객에 대한 기록은 사라지고 알 길이 없으 니, 나는 이를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내가 들은 바로는 한나라 건립 이후에 주가朱家·전중田中 왕공王 公·극맹劇孟·곽해 등의 협객이 있었다. 비록 당시의 법에 저촉되 는 일을 범했으나 그들의 의리와 청렴, 겸손은 칭찬할 만하다. 이름이란 헛되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며, 선비들을 까닭 없이 추종했 을 리 없다. 유협의 무리들은 큰 세력을 이루고 부를 형성하여 가난한 자를 부리고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욕심을 마음껏 채우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속뜻을 살피지 못하고 주가·곽해 의 무리를 포악한 무리와 같은 부류로 여기고 비웃는 것을 슬퍼한다.
유협은 조정을 위협하는 존재다
곽해는 지현 사람이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관상을 잘 보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협객이라는 이유로 효문제 때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키가 작 았지만 용감했으며 술은 마시지 않았다. 젊었을 때에는 사람을 해코지 하고 강도질하고 죽이는 등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곽해는 나이를 먹 으면서 이전의 성질을 죽이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덕으로써 원한에 보답하며, 은혜를 베풀면서도 보답을 별로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의협심을 실천하는 것만은 즐겨 행하여,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잔혹한 심성은 마음속에 남 아 있어, 화가 폭발하면 예전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소년들 에게 그는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곽해의 누이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곽해의 힘을 믿고 술좌석에서 까불다가 상대방의 칼에 찔려 죽었다. 곽해의 누이가 아들을 죽인 사람 이 도망친 걸 알고 노여워하며 말했다. "가족 중에 유협이 있는데도 내 아들을 죽인 도적을 못 잡다니!" 그리고는 아들의 시체를 길 위에 버려둔 채 장사를 지내지 않았다. 곽해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는 의도였다. 곽해는 심복을 시켜 은밀히 살 인자의 행방을 알아냈다. 살인자는 숨을 곳이 없음을 알고 제 발로 걸 어와 곽해에게 자초지종을 고했다. 그러자 곽해가 말했다. "당신이 그 아이를 죽인 것은 마땅한 일이오. 잘못은 내 조카에게 있소“ 그는 살인자를 돌려보냈다. 곽해의 누이가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니, 사람들은 곽해의 의협심을 칭찬하며 더욱 더 따랐다. 이후에도 곽해는 자신의 일이건 타인의 일이건 몰래 일을 성사시켜 놓고, 항상 타인에게 그 공을 돌렸다. 이러한 일로 해서 곽해의 명성은 이웃 고을까지 널리 퍼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곽해의 세력 안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한나라 무제가 왕권 강화 차원에서 지방 부호들을 무릉茂陵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의 일이었다. 곽해는 당시 부호는 아니었지만, 세력이 너무 커 이주 대상에 속해 있었다. 이때 장군 위청이 곽해를 위해 황제에게 진언했다. "곽해는 집이 가난하므로 이주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합니다." 무제가 말했다. "미천한 자의 이름이 장군의 입에 오르내린다면, 그것은 이미 가난한 자가 아니오." 마침내 곽해의 집도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곽해를 전송하는 수 많은 인사들이 전별금을 냈는데, 천여 만 전이나 되었다. 이 무렵 지 땅 에 사는 사람인 양계주楊季主의 아들이 현의 속관으로 있었는데, 곽해 를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곽해의 형의 아들이 양가楊哥의 목을 베었다. 이때부터 양씨와 곽씨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곽해가 함곡관 안으로 들어서자, 관중關中의 어진 이와 호걸들이 그 를 본 적이 없음에도 그 명성만 듣고 다투어 교제하려고 하였다. 그 후 지 땅에서 양계주마저 살해되었다. 이에 양씨 집안 사람 중에서 황제께 상서上書를 바치려고 했던 자가 있는데, 그 사람마저 살해되 고 말았다. 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제는 곽해를 체포하라고 명했다. 곽해는 그 어미와 처자와 함께 도망쳤는데, 얼마 후 잡히고 말았다. 곽해의 문제를 두고 조정에서 내려온 관리와 지 땅의 선비가 마주앉 아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곽해를 따르던 식객이 그를 칭찬하자, 선비가 꾸짖어 말했다. “곽해는 나라의 법을 어긴 죄인일 뿐이오. 어찌 그를 어진 사람이라 고할 수 있소?" 이 말에 곽해의 식객이 선비를 죽이고 그의 혀를 잘라버렸다. 관리가 그 일로 곽해를 추궁했으나, 곽해 역시 죽인 사람에 대해 아 는 바가 없었으며, 죽은 자 또한 말이 없어 자백을 받아낼 수 없었다. 관 리는 하는 수 없이 곽해에겐 죄가 없다고 황제께 아뢰었다. 그러자 어 사대부 공손홍이 이렇게 따졌다. “곽해는 서민의 신분으로 협객 노릇을 하며 권력을 휘둘렀으며, 사소 한 감정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곽해가 비록 죽인 자를 알지 못한다 하나, 그 죄는 직접 살인한 것보다도 큽니다. 대역무도의 죄에 해당합 니다." 이렇게 하여 곽해 일족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이 뒤로 협객 노릇 을 하는 자가 많았으나 진정으로 손꼽을 만한 자는 없었다. 곽해는 용모와 허우대가 보통 사람보다 볼품없었고, 말도 변변치 않 았다. 그러나 천하에서 현명한 자나 현명하지 않은 자, 아는 자나 모르 는 자의 구별 없이 모두 곽해의 명성을 사모했으며, 협객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내세웠다. 속담에 이르기를, '사람이 영예로운 명성으로 얼굴을 삼는다면, 어찌 스러지는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설보다 재미 있는 사기열전
지은이 : 사마천
편역자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