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i Qing was a servant who worked in the household of the emperor's sister. His rise began when his sister, Wei Zifu, gained the emperor's favor and was elevated to the position of empress. Appointed as a Grand General, Wei Qing achieved great success in campaigns against the Xiongnu and was known for his modesty, often attributing his achievements to his subordinates.
Huo Qubing, the nephew of Wei Qing’s sister, received significant favor from a young age. As a general, he achieved remarkable victories against enemies but was criticized for his inability to manage his subordinates effectively.
Gongsun Hong rose to an official position later in life. His flexible demeanor earned him the emperor's favor, and his magnanimity and frugal lifestyle garnered the trust of the Son of Heaven. However, he was also known to change his opinions according to circumstances.
Each of these figures gained power through the emperor’s favor in their own way, with their political standing firmly rooted in their relationship with the emperor.

총애를 받을수록 천자의 그늘에 숨는다.
위청·곽거병 : 어머니 성을 따라 출세한 위청
대장군 위청衛靑은 원래 정씨다. 그의 아버지 정계鄭季가 황상(무제)의 여동생인 평양공주平陽公主(원래는 양신장공주陽信長公主라고 불렸으나, 평양후 에게 시집갔으므로 평양공주로 불리게 되었다)의 집안일을 하며 신임을 받던 중, 평양후平陽侯의 첩 위온과 정을 통하여 청靑을 낳고 이 사실을 숨기 려고 청의 성을 위씨로 바꾼 것이다. 위온의 소생 자식으로는 청의 형 인 위장자衛長子와 맏누이인 위자부衛子夫가 있었는데, 그들은 황상(무 제)과 평양공주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위청은 평양후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소년이 되어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아버지가 위청에게 양을 치게 했는데, 아버지의 소생인 형들이 청을 종으로 부리고 형제로 대하지 않았다. 위청이 일찍이 감천궁 안의 감옥을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한 죄수가 위청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귀인의 상이로다. 벼슬이 봉후에 이를 것이다.” 위청이 웃으며 말했다. “종 팔자로 태어났으니 매맞고 구박이나 당하지 않으면 원이 없겠소. 봉후라니, 가당치도 않소." 그후 어머니 소생인 맏누이가 황상의 총애를 받게 되자, 이 덕에 위 청의 어머니의 소생 자식뿐만 아니라 위청도 자연히 황상의 총애를 받 아 시중侍中(황제의 측근 고문)이 되었다. 그후 위청의 지위가 날로 높아져 귀한 몸이 되었다. 원삭 원년 봄, 위부인(위자부)이 아들을 낳아 황후가 되었다. 그 해 가 을에 위청은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어 안문군에서 기병 3만 명을 이끌 고 나가서 흉노와 싸웠다. 이광 등 다른 장수들은 군사를 거의 잃고 공 이 없었던 반면, 그는 적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적수만 해도 수천 명 이었다. 그 다음해에는 서쪽으로 고궐까지 이르러 드디어 하남 땅을 점령하고 농서군으로 진격했다. 이때도 위청이 목을 베고 포획한 흉노가 수천 명 이었다. 위청의 공격에 백양의 왕과 누번의 왕은 사막 깊숙이 달아났다. 위청은 드디어 하남 땅에 삭방군을 두었다. 황상은 위청에게 식읍 3,800 호를 주고 장평후長平侯로 봉했다. 그리고 위청이 고궐에서 흉노의 우현 왕 군대를 물리치고 만여 명의 흉노병과 수만의 가축을 노획하고 돌아 왔을 때는 천자가 위청을 대장군으로 승진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위청이 출정하여 대승을 거둬 흉노의 왕 10여 명을 포획했다. 위청 에게 6,000호를 더 봉하노라. 그리고 위청의 아들 강을 의춘후宜春候에 봉하고, 불의不疑를 음안후陰安侯에, 등登을 발간후發干侯에 봉한다.” 그러나 위청은 사양하며 공로를 휘하 장수들에게 돌렸다. 황상은 위 청의 주청대로 휘하 장수들의 벼슬과 녹봉도 올려주었다. 대장군 위청은 모두 7회 출정해서 5만 흉노의 머리를 베고 포획했다. 또한 하남 일대의 땅을 손에 넣은 뒤 삭방군을 설치하였다. 이 공으로 두 차례 봉읍을 더하니 모두 1만 1,800호였으며, 위청의 세 아들 또한 후에 봉해져 각 후마다 1,300호를 받았으니, 이들 부자의 식읍지를 합 하면 모두 1만 5,700호였다.
완곡하고 부드럽게 아첨하는 방법
대 땅에 침입한 흉노를 정벌할 때의 일이었다. 대장군 휘하의 흉노 출신 전장군前將軍 조신이 배반하고 우장군右將軍 소건마저 군사를 모두 잃고 본대로 돌아왔다. 본영 안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본보기로 소건을 처형해야 한다 는 의견과 관대하게 용서해 다시 싸울 기회를 주자는 의견으로 대립되었다. 위청이 그들의 논쟁을 중지시키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행히도 ‘폐부지친(황제의 외척)'의 연분으로 대장군의 인태을 차게 되었소. 그러나 나는 위엄 때문에 한 장수를 베고 싶지는 않소. 또 황상의 총애를 받아 장군을 벨 수 있는 높은 권한을 내게 주었다고 하나, 황상이 계시지 않는 이곳에서 내 맘대로 처단할 수는 없소. 우선 이 상황을 황상께 자세히 보고하여 하명을 내리실 때까지 기다릴 것이오. 천자의 신하로서 감히 권력을 농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이 옳지 않겠소?" 군관들은 이에 찬성했다. 그래서 소건을 행재소行在所(천자가 거동할 때 에 임시로 머무는 곳)로 보냈다. 대장군 위청은 어질고 착하고 겸손하여 완곡하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천자에게 아첨했다. 그러니 천하에는 그를 칭찬하는 이가 없었다. 훗 날, 대장군 위청은 표기장군驃騎將君 곽거병이 죽은 지 10여 년 뒤에 죽 었는데 시호를 열후烈烈侯라고 했다.
여인이 은총을 입으면 그 가족은 귀하게 된다
위청의 맏누이의 아들 곽거병은 나이 18세로 천자의 총애를 입어 시 중이 되었다. 그는 활쏘기를 잘하여 대장군 위청의 휘하에 들어와 종군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싸움에 나가서 적을 베고 생포한 것이 수천 명이 었다. 이에 천자는 곽거병에게 1,600호를 주어 관군후冠軍侯로 봉했다. 흉노가 농서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천자는 곽거병을 표기장군으로 임 명하여 나가서 싸우게 하였다. 곽거병은 흉노 8,000여 명의 머리를 베 고 포획해서 돌아왔다. 이에 천자는 2,000호를 봉했다. 그 해 여름에 표 기장군 곽거병은 비장裨將(대장군 휘하에서 대장군을 돕는 장군)으로 소속된 장건·이광과 함께 출정했다. 낭중령 이광은 4,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흉노와 맞섰으나 길을 잃고 말아 중과부적으로 공을 세우지 못했으나, 곽거병은 국경의 요새 밖까 지 깊숙이 침투하여 추도왕을 생포하고 3만여 명의 흉노병들을 포획해 돌아왔다. 그리하여 황상은 곽거병에게 5,000호를 더 봉했다. 표기장군 곽거병이 홀로 공을 세운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표 기장군이 거느린 군사가 정예병들인데다 그 자신이 항상 선봉에 서서 과감히 적진 깊숙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했기에 그의 군대는 하늘 의 도움을 받아 곤궁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에 반해 노련한 장 수들은 항상 용기 부족으로 머뭇거리다 일을 그르쳤으며, 나중에는 죄 를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표기장군은 날로 신분이 상승하여 대장군 위청과 같은 대열에 서게 되었다. 황상은 대사마大司馬란 벼슬을 증설하여 대장군과 표기장군을 대사마로 삼았다. 그리고 표기장군의 녹봉을 대장군과 같게 했다. 이후부터 대장군 위청의 권세는 날로 퇴조되고 표기장군은 더욱더 귀하게 되니, 대장군의 휘하 사람들이 표기장군의 휘하로 들어오게 되 었다. 표기장군은 입이 무겁고 말이 적어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으며, 강단 있게 일을 추진했다. 어느 날, 천자가 그에게 오자·손자의 병법을 가르치려고 하자 표기 장군이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의 병법을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오로지 실전에 신경 쓸 뿐입 니다." 한번은 천자가 그를 위하여 저택을 수리해준 뒤 한 번 가보라고 하 니, 표기장군이 이렇게 대답했다.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집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이런 곽거병을 천자는 더욱더 소중히 여기고 총애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젊은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휘하 사람들을 잘 보살피 지 않았다. 그가 출정할 때, 천자의 하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떠났는 데, 돌아올 때도 하사품이 수레에 그대로 있었다. 그 수레에는 좋은 쌀 과 고기가 남아돌 정도였다. 군량이 모자라 전투 중에 병사들은 체력이 쇠한 나머지 창을 잡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표기장군은 땅을 정리하고 구역을 정한 뒤 공차기를 즐겼다. 그에게는 이와 비슷한 예가 많았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모두 6회에 걸쳐 출정했다. 그 중 네 번은 자신이 직접 장군으로 나간 것인데, 적의 목을 베거나 생포한 합계가 총 11만 여 명이라는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표기장군은 마침내 국경의 요새 밖 하서 주천의 땅을 점령하고 개척 하니 서방의 오랑캐는 활동 근거지를 잃게 되었다. 이 공으로 표기장군 은 네번 봉읍을 더하여 모두 1만 5,100호나 받았다. 그의 부하 중에는 무장으로서 공이 있어서 후가 된 자가 모두 6명이고, 장군이 된 자는 2명이다. 장차 성스러운 천자의 통업統業은 오직 장수와 재상을 가려서 일을 맡기는 데 달렸을 뿐이로다! 어떤 대장군은 '신하란 국법을 받들고 직 책을 준수하면 그뿐이다. 무엇하러 어진 선비들을 초빙하는가?라고 하 였다. 표기장군 곽거병도 이런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말을 바꿨던 유학자
공손홍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집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이런 곽거병을 천자는 더욱더 소중히 여기고 총애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젊은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휘하 사람들을 잘 보살피 지 않았다. 그가 출정할 때, 천자의 하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떠났는 데, 돌아올 때도 하사품이 수레에 그대로 있었다. 그 수레에는 좋은 쌀 과 고기가 남아돌 정도였다. 군량이 모자라 전투 중에 병사들은 체력이 쇠한 나머지 창을 잡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표기장군은 땅을 정리하고 구역을 정한 뒤 공차기를 즐겼다. 그에게는 이와 비슷한 예가 많았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모두 6회에 걸쳐 출정했다. 그 중 네 번은 자신이 직접 장군으로 나간 것인데, 적의 목을 베거나 생포한 합계가 총 11만 여 명이라는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표기장군은 마침내 국경의 요새 밖 하서 주천의 땅을 점령하고 개척 하니 서방의 오랑캐는 활동 근거지를 잃게 되었다. 이 공으로 표기장군 은 네번 봉읍을 더하여 모두 1만 5,100호나 받았다. 그의 부하 중에는 무장으로서 공이 있어서 후가 된 자가 모두 6명이고, 장군이 된 자는 2명이다. 장차 성스러운 천자의 통업統業은 오직 장수와 재상을 가려서 일을 맡기는 데 달렸을 뿐이로다! 어떤 대장군은 '신하란 국법을 받들고 직 책을 준수하면 그뿐이다. 무엇하러 어진 선비들을 초빙하는가?라고 하 였다. 표기장군 곽거병도 이런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말을 바꿨던 유학자
공손홍 : 임금이 총애하면 아첨도 중용으로 보인다
승상 공손홍소은 젊었을 때 옥리로 있다가 죄를 짓는 바람에 파면 되고 말았다. 그후 집이 가난하여 해변에서 돼지를 기르며 살았다. 그 가 춘추잡가의 학문을 배울 때는 그의 나이 40여 세였다. 그는 계모가 살아 있을 때는 극진히 봉양했고, 계모가 죽고 나서는 3년간 상복을 입 었다. 공손홍은 도량이 크고 식견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 주장하기 를 '임금의 병은 도량이 크지 못한 데 있고, 신하의 병은 검소하고 절약 할 줄 모르는 데 있다'고 했다. 그는 베로 이불을 만들어 덮고, 두 가지 이상의 고기 반찬을 상에 올리지 않았다. 건원 원년에 그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으로 추천되어 박사가 되었다. 이때 공손흥의 나이 60세였다. 그는 천자의 심기를 건드려 두 번이나 파면됐다가 복직되었다. 조정에서 회의를 할 때면, 공손홍은 찬반의 장단점만을 진술하고 자 기의 의견은 내놓지 않고 천자가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하기를 유도했 다. 그는 천자께 직간하거나 신하들과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자는 공손홍의 이러한 태도가 말과 행동에 여유가 있으며 법 률 업무 전반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유학의 몸가짐을 익힌 자세라 하여 매우 좋아했다. 공손홍은 좌내사左內史에 2년 동안 있었다. 그는 이때도 조정에서 천 자가 윤허하지 않은 일에 대해 불가하다고 주청한 적이 한 번도 없었 다. 항상 한가한 때를 틈타 주작도위主爵都尉(작위를 봉하는 관직) 급암과 함께 알현을 청한 뒤 아뢰었는데, 급암이 먼저 얘기하면 뒤에서 미는 식이었다. 천자는 기뻐하며 공손홍이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공손 홍은 날로 천자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공경들과 함께 주청을 하기로 약속하고 천 자를 알현했다. 그런데 공손홍은 약속을 어기고 천자의 뜻에 순종했다. 급암은 조정에서 공손흥을 힐책했다. “공손홍은 진실됨이 없습니다. 처음에 신 등과 약속하고서 이제는 그 것을 배반하니 불충하기만 합니다." 그러자 공손홍은 이렇게 변명했다. “신을 아는 사람은 신을 충신으로 생각합니다만, 신을 모르는 사람만 신을 불충하다고 여깁니다." 이 말을 듣고 천자는 공손홍을 충신이라고 칭찬했다. 좌우의 중신들 이 공손홍을 헐뜯을 때마다 천자는 더욱더 그를 총애했다.
미소 속에 비수를 품었던 이중인격자
원삭 3년에, 공손홍은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때 중국은 서남의 오랑 캐와 교류하고, 동쪽에는 창해군을 두었으며, 북쪽에는 삭방군을 설치 하고 성을 쌓았다. 이에 공손홍은 자주 직간했다. “쓸모없는 변방의 땅에다 힘을 쏟는 것은 조정을 피폐하게 만들 뿐입 니다. 원컨대 중지하십시오." 그러자 천자는 주매신을 시켜서 공손홍을 비난하고 변방에 군을 두 는 것이 유익하다는 계책 10가지를 제출하게 했다. 그랬더니 공손홍은 그 중 하나도 논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일을 사죄하며 이렇게 말 했다. "신은 산동의 촌구석에 있던 사람이라 그 이익이 그토록 큰 줄 몰랐 습니다. 그러니 삭방군을 다스리는 일에 주력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 각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급암이 한마디했다. “공손홍의 지위가 삼공에 있고 녹봉 또한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베 이불을 덮고 지내니 이것은 거짓된 행동입니다." 천자가 공손홍에게 물으니 그가 금방 사죄했다. "급암의 말이 옳습니다. 급암은 구경九卿 중에서 신과 가장 사이가 좋으니 저의 결점을 잘 압니다. 오늘 신의 행동은 급암의 말처럼 이름을 탐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듣건대, 지난날 관중은 세 곳에 각 각 부인을 두어 거처를 마련하여 사치하기가 패자 제환공과 비견되고 또한 그의 권세는 임금과 같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경공 때의 재상 안영은 검소하고 겸양하기가 이를 데 없어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습니 다. 이것은 백성의 생활처럼 안영이 검소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신은 어사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베 이불을 덮음으로써 구경에 서부터 아전에 이르기까지 차등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급암이 말한 신의 죄입니다. 이 또한 급암의 충성이 없었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천자는 공손홍의 말을 겸양의 말로 여기고 더욱더 그를 우대했다. 마 침내 공손홍은 승상이 되고 평진후로 봉해졌다. 공손홍은 속으론 남을 시기했으나 겉으론 관대한 체했다. 그는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 에 대해서는 위해주는 척하면서 남몰래 보복했다. 주보언主父偃(제나라 사람으로, 처음에는 전국시대의 합종과 연횡의 술을 배웠 으나, 만년에는 〈역>·<춘추)·제자백가의 학설을 배웠다. 주보언이 귀한 신분이었 을 때는 빈객들이 수천 명이나 되었으나, 그가 멸족당하자 선비들은 다투어 그의 악행을 이야기했다)을 죽이고 동중서董仲舒(한대의 유학자, 진나라에 의해 시작 된 중국의 통일과업은 한나라 때에 완성되었다. 이때 본격적인 통일제국시대를 뒷 받침할 사상적 작업을 이룩한 핵심인물이 바로 동중서이다. 그는 유교의 사상적 폭 을 더욱 넓히는 동시에 유교의 국교화를 추진했다)를 교서로 귀양 보낸 것도 다 공손홍이 꾸민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거친 현미로 밥을 지어 먹고 옛 친구나 친한 사람들의 부탁이면 재산을 모두 털어 도와주었다. 이렇듯 눈에 보이는 선행 때문에 공손홍은 세상의 선비들한테는 현사라고 칭송받았다.일을 이룬 뒤에는 문을, 위기에는 무武를 존중히 여긴다 회남왕과 형산왕이 반란을 일으켜 천하가 어지러울 때 공손홍은 중 병을 앓고 있었다. 자신이 재상의 직책에 있을 때의 일이므로 책임을 느끼고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사퇴의 뜻을 아뢰었다. “신이 들으니, 천하에는 변하지 않는 다섯 가지의 도가 있고, 이것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군신·부자·형제·부 부·장유의 질서 이 다섯 가지는 변하지 않는 도입니다. 그리고 지智. 인仁·용勇이 세 가지는 변하지 않는 덕으로 그것을 실행하게 하는 방 법입니다. 그런 까닭에 묻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깝고, 실행에 힘 쓰는 것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으며 또한 남을 다스릴 수 있 습니다. 스스로 다스릴 수 없으면서 남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백 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도입니다.지금 폐하께서는 몸소 하·은·주 3대의 왕을 거울로 삼아 도를 세워 문무를 겸비하고 계시면서, 어진 선비를 격려하여 녹을 주고 능력을 헤 아려 벼슬을 주십니다. 그런데 신 홍은 재능도 없으며 땀흘려 싸운 공 로도 없는데도 폐하의 총애를 입어 열후가 되고 지위가 삼공에 이르렀 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공을 맡기에는 신 홍의 능력과 공이 모자랍니다. 평소부터 지병이 있어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기 전에 먼저 쓰 러져 성덕에 보답하지 못함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황공하옵게도 그 순간이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이제 후의 인태을 반납하여 현자에게 길을 비켜주고자 하니 윤허해주십시오." 천자가 글을 내려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옛날부터 공이 있는 자를 상주고 유덕한 자를 드러내어 기렸으며, 이전 사람들이 이룬 사업을 지키고 문을 숭상하고, 난세에는 무武를 존중했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으로 짐 또한 이것을 따르고자 한다. 짐 은 그동안의 그대의 노고를 잊은 적이 없다. 그런데 그대는 불행하게도 나이가 들어 병에 걸렸으니 어찌 짐이 근심하지 않겠는가. 그대가 병에 걸렸다 해서 스스로 사퇴의 뜻을 밝히니 이것은 짐의 부덕함을 드러내 는 것이다. 이제 일이 조금 한가해졌으니 그대는 걱정을 그만두고 정신 을 맑게 하고 의약으로 몸을 보하는 데에만 신경써라.” 그리고 천자는 공손홍에게 휴가를 주면서 쇠고기와 술과 여러 종류 의 비단을 하사했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 공손홍은 치유되어 다시 나 랏일을 보았다. 원수 2년에 공손홍은 병이 들어 마침내 승상의 현직에서 일생을 마쳤다. 한나라가 일어난 지 80여 년, 천자가 바야흐로 학문을 진작시키려고 할 때에 공손홍은 때를 잘 만나 승상의 현직에 있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가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돼지나 양을 치면서 살아야 했을 것 이다. 반면 공손홍처럼 재주는 있었으나 때가 다 되어 명성이 떨어지고 처참히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다. 선비들은 그들이 높은 직위에 있 을 때는 칭찬했으나 명성을 잃고 사형을 당하자 다투어 이들을 악평했 다.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로다!
청렴하고 엄격하게 법을 다스렸던 관리들
손숙오·자산·공의휴 : 법을 만들지 않고도 정책을 따르게 할 수 있다
손숙오孫叔敖가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초나라 장왕 王은 화폐(당시에는 조개껍질로 만듦)를 무겁게 바꾸었다. 백성들은 그것 이 너무 불편해 생업에는 쓰지 않았다. 시장의 관리가 재상에게 이를 보고했다. "조정에서 정한 화폐 단위와 점포에서 계산하는 화폐 단위가 달라 민 생고가 말도 못할 정도로 큽니다." 손숙오가 말했다. "물러가라, 내 화폐 단위를 원상 복귀시키겠노라." 닷새 후에 손숙오가 시장 관리에게 약속한 대로 장왕에게 아뢰니, 장왕은 손숙오의 말대로 화폐 단위를 예전대로 돌려놓았다. 초나라 백성들은 바퀴가 작고 본체가 낮은 수레를 선호하였다. 그런 데 말들이 낮은 수레를 끄느라 쉬이 지쳐버렸다. 이를 보고 왕이 명령 을 내려 수레를 높이려고 했다. 그러자 손숙오가 말했다. “옳지 않습니다. 법령을 자주 변경하시면 백성들은 어찌 할 바를 모 릅니다. 왕께서 꼭 수레를 높이시려면 신에게 맡겨주십시오. 신이 마을 의 문지방을 높이도록 유도하겠습니다. 수레를 타는 사람은 모두 군자 입니다. 군자는 자주 수레에서 오르내릴 수 없으므로, 자연히 백성들은 수레를 높일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반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수레를 높였다. 이것은 나라가 백성을 가르치지 않아도 백성 스스로 깨닫고 정책을 따른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가까이 있는 자는 이것을 직접 보고 배 우고, 멀리 있는 자는 이것을 듣고 모방하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손숙 오는 세 번이나 재상이 되었어도 기뻐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뛰어 난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세 번 이나 재상을 그만두었어도 후회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죄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관리가 바뀌면 나라가 바뀐다
자산구產은 정나라의 대부중 한 사람이다. 그가 재상이 되기 전 에는 나라가 문란하여 위아래가 긴밀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화 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더벅머리 아이들이 농짓거리를 하며 버릇없이 구는 행동이 없어지고, 노인네들은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지 않았으며, 어린아이들이 밭갈이하는 일이 없어졌다. 2년째가 되자 시장에서는 물건값을 깎는 일이 없어졌다. 3년째에는 밤에 문을 닫는 일이 없어졌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어졌다. 4년이 지나자 농부들이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갈 때도 농기구를 가지고 가지 않았고, 5년이 지나자 선비는 군대에 동 원되지 않았으며, 상복을 입는 기간을 나라에서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 로 지켜나갔다. 자산이 정나라를 다스린 지 26년 만에 그가 죽으니, 장정들은 통곡을 하고 노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흐느끼며 말했다. “자산이 우리들을 버리고 죽다니, 백성들은 장차 어디에 의지한단 말 인가!"
부자가 써야 가난한 사람이 혜택을 입는다
공의휴公儀休는 노나라의 박사博士였다. 그는 재능과 덕망이 뛰어나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몸소 법을 받들고 도리를 따르며 변경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백관들은 스스로 바르게 되었다. 남의 녹을 먹는 자는 일반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없어지고, 고위직이 하위직의 녹을 빼앗는 일 또한 없어졌다.어떤 빈객이 재상에게 생선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다. 다른 빈객이 말했다. "재상께서 생선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듣고 생선을 보냈는데, 무슨 까 닭으로 받지 않으십니까?" 재상이 말했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이오. 내가 생선쯤은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생선을 받고 뇌물죄로 파면된다면 나에게 생선을 대줄자가 누가 있겠소.” 재상은 자기집 밭에서 나는 야채를 먹어보더니 맛이 좋자 그 밭의 채소를 모두 뽑아버렸다. 또 자기집에서 짜는 베가 품질이 좋은 것을 보 고는 얼른 베틀을 불태워 버리고 이렇게 말했다. “난 채소나 베틀쯤은 구입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 내가 이를 사주지 않는다면 채소장수와 베 짜는 여자들은 뭐 먹고 살꼬!"
효와 충 사이에서 죽음을 택한 법관
석사石奢는 초나라 소왕 때의 재상이었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하고 엄정하여 아첨하거나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석사는 현을 순시하다가 길에서 살인을 목격하게 되었다. 재상이 뒤쫓아가 보니 살인자는 바로 자기 아버지였다. 재상은 아버지를 놓아주고 조정에 돌아와 자기를 결박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왕에게 아뢰었다. "살인자는 신의 아비올시다. 아비에게 형을 적용하는 것은 불효이고, 법을 버리고 죄를 용서하면 충이 아닙니다. 신은 불충을 저질렀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왕이 말했다. "열 사람의 포졸이 한 사람의 도둑을 못 잡는 법이오. 그대가 벌을 받는다는 것은 가당치 않소. 그대는 직무에 힘쓰시오." 석사가 아뢰었다. "아비에게 정을 두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며, 주군의 법을 받들지 않 는다면 충신이 아닙니다. 왕께서 죄를 용서하심은 임금의 은혜이지만, 죄의 대가를 청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입니다." 그리고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녹을 나눠주지 않으면 책임도 전가할 수 없다
이리는 진품나라 문공文公 때의 재판관이었다. 그가 거짓말을 듣 고 판결을 잘못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자, 스스로 죄인으로 만들어 사형당하려 했다. 문공이 말했다. "벼슬에는 귀천이 있고, 벌에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있소. 하급 관리 에게 잘못이 있으니, 그대의 죄가 아니로다." 이리가 말했다. "신은 관직에 있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만 하급 관리에게 자리를 양 보하지 않았으며, 많은 녹을 받았으나 하급 관리와 이익을 나누지도 않 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잘못 판결하여 사람을 죽이고 하급 관리에 게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리는 사양하고 명령을 듣지 않았다. 문공이 말했다. "그대는 스스로 유죄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과인에게도 죄가 있 는 것이 아닌가?" 이리는 대답했다. "관리에게는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형벌을 잘못 내렸으면 자신이 형벌을 받아야 하며, 사형을 잘못 판결했으면 자신이 사형을 받아야 하 는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신이 법에 정통하여 재판을 잘할 것이라고 여 겨 신을 법관으로 임명하신 것인데, 신이 잘못 재판하여 사람을 죽였으 니 죽어 마땅합니다." 이리는 결국 문공의 명령을 듣지 않고 칼에 엎드려 자결하였다.
소설보다 재미 있는 사기열전
지은이 : 사마천
편역자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