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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재미있는]사기 열전_102

During the early Han Dynasty, King Bi of Wu expanded his influence through wealth and political scheming, harboring distrust toward the central court, and eventually staged a rebellion. The rebellion was fueled by personal resentment stemming from the Crown Prince’s board game incident, which led to the loss of his son, as well as dissatisfaction among feudal lords due to the imperial policy of reducing their territories. Although the rebellion initially saw some success, it ultimately failed due to poor strategic decisions and the court’s swift response. The rebel forces were quickly suppressed, and King Bi, along with other feudal lords, met their demise either through execution or suicide. This event stands as a cautionary tale of how political scheming and excessive ambition can lead to downfall.

권모의 수파가 되어 죽음의 길로 빠져들다

오왕 비 : 50년 뒤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아마 너일 것이다

오나라 왕 유비는 고조(유방)의 형인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고조는 유 중을 대代나라 왕으로 임명했는데, 흉노의 공격을 당하자 유중이 평민 복장으로 나라를 빠져나와 낙양으로 돌아왔다. 고조는 그와 한 형제인 지라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왕의 자리를 폐하고 합양후로 삼았다. 유중의 아들 비는 반란을 일으킨 회남왕 영포英布를 진압하는 데 협조 한 공으로 오왕으로 임명되었다. 고조가 비에게 왕인王印을 내리고 난 후, 그를 불러 관상을 찬찬히 보 며 말했다. "네 얼굴을 보니 모반할 상이로다." 그러나 이미 임명한 뒤였으므로, 비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당부 했다. “50년 뒤 한나라의 동남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아마 너일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유씨 성이니 한집안이다. 이를 유념하여 결코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오나라는 광물이 풍부하고 바닷가에 인접해 있어 제철과 제염업이 발달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됐고 국고는 가득 넘쳤다. 비는 이를 바탕으로 해서 조정의 망명자들을 불러들였다.

 

장기판 위의 길을 다투다 죽음의 길을 자초한 사람

효문제 때였다. 오나라의 태자가 조정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는 황태 자와 장기를 두게 되었다. 오나라 태자의 사부들은 초나라 사람들로 경 솔하고 사나운 편이었으므로 오나라 태자 또한 교만했다. 그가 황태자와 장기를 두는데 길을 다투는 것이 매우 불경스러웠다. 화가 난 황태자는 장기판을 집어던져 그를 죽였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오나라로 보낸 뒤, 장사 지내게 했다. 아들의 관을 받아본 오왕은 분노하여 말했다. "천하는 모두 유씨의 집안이다.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사지 낼 일이지, 어찌 오나라에서 장사 지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는 그 관을 다시 장안으로 보내 장사 지내게 했다. 오나라 왕 은 이때부터 번신藩臣(변방에서 조정을 지켜주는 울타리 구실을 하는 신해의 예를 지키지 않았고, 조정에서 불러도 병을 핑계로 나서지 않았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조정에서는 오왕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왕은 위조 동전을 찍어내어 화폐제도를 문란하게 하는 등 조정에 반하는 정 책을 계속 펴나갔고, 아울러 조정의 망명자 또한 계속해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흘러 효경제가 즉위했다. 문제가 세상을 뜨고 오왕의 태자를 장기판으로 죽인 황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효경제다.어사대부 조조가 효경제에게 간했다. 왕가의 만세를 위해선 제후 억 멸책을 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옛날 고제(유방)께서 처음으로 천하를 평정했을 때에는 황제를 받쳐 줄 황족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황족의 여러 자제들인 같은 성씨를 왕 으로 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왕의 세력이 황상을 위협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오왕은 지난날 자신 의 자식이 죽은 일 때문에 조정을 원망하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조정의 정책에 위배되는 수상쩍은 일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황상께 서 지금 오왕이 다스리는 땅을 줄이면 그가 배반하는 일은 빨리 일어날 것이나 화는 작을 것이고, 오왕의 땅을 삭감하지 않으면 배반하는 일은 더디지만 화는 클 것입니다." 아울러 조조는 지난날 사소한 잘못을 범한 초나라 왕, 조나라 왕, 교 서왕膠西王의 땅도 삭감해야 한다고 아뢰니, 황상은 조조의 간대로 그 들의 영지를 삭감했다.

 

미워하는 대상이 같으면 서로 돕는다

조정의 영지 삭감 정책에 제일 먼저 반기를 든 이는 오왕 비였다. 그 는 거사를 위해서 다른 제후들과 연합하기 위해 옛 제나라 땅을 다스리 고 있는 교서왕에게 먼저 사신을 보냈다. 교서왕 앞에서 오왕의 사신은 이런 말로 유혹했다.“미워하는 대상이 같으면 서로 돕고, 좋아하는 대상이 같으면 서로 머무르며, 뜻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 한곳으로 달려가며, 이익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를 위하여 죽는다고 합니다. 지금 오왕께서는 스스로 대왕 (교서왕)과 근심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때를 이 용하고 사리에 따라서 몸을 내던져 근심과 위험을 제거해주십시오. 힘 을 합해 일을 도모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습니까?"그러자 교서왕이 조정을 배반할 수 없다며 한 발 물러서려는 뜻을 내 비쳤다. 사신이 다시 설득했다. “지금 간신 조조의 농단으로 제후들뿐만 아니라 천하 백성들의 원망 이 자자합니다. 하늘에는 혜성이 자주 나타나, 조정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천명임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만세에 한 번 있는 기회입 니다. 그래서 오왕은 안으로는 조조를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밖으로는 대왕의 수레 뒤를 수행하여 천하를 기세좋게 훨훨 날개치며 날고자 하는 것입니다.대왕이 뜻을 정하기만 하면 향하는 곳은 다 항복하고 가리키는 곳은 다 평정되어 천하에 감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오왕의 청을 허락하신다면, 오왕은 곧 초나라 왕을 이끌고 가서 함곡관을 공략하고, 형양·오창의 양곡을 확보한 뒤에 한나라의 군사를 방어 하면서 교두보를 구축하여 대왕을 기다릴 것입니다. 대왕께서 오왕과 함께 깃발을 들면 곧 천하를 평정하여 한나라를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대왕을 위해서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서왕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오왕의 신하가 돌아가자 교서왕의 한 신하가 왕에게 간했다. “한 분의 황제를 받드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오왕과 함께 서쪽으로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시는데, 만약 거사에 성공 하고 나면 두 군주가 다툴 게 뻔하니 새로운 근심거리를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제후의 땅은 죄다 합해도 한나라가 직접 통치 하는 군郡의 5분의 1도 못 됩니다. 이것이 좋은 계책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교서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제나라·치천·교동膠 東·제남濟南·제북濟北 등에 사자를 보내어 설득하게 하니 모두 이를 허락하였다. 이렇게 되어 교서·교동·치천·제남·제북·초나라·조 나라의 제후들은 자연스럽게 오왕 비가 세운 반역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제나라 왕은 반역에 가담한 것을 후회하여 자살하였으 므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효경제는 난을 진압하기 위해 태위太尉(무관)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와 곡주후曲周侯 역기, 난포欒布, 대장군 두영에게 반란군을 격퇴하도록 각 각의 임무를 주었다. 대장군 두영은 떠나기 전에, 오나라 재상이었던 원앙을 효경제에게 천거하였다. 황제가 그를 불러 묘책을 물으니, 원앙 이 아뢰었다. "원컨대 좌우 신하를 물리쳐 주십시오.” 황제가 신하들을 물리치고 어전에는 어사대부 조조만이 남았다. 원 앙이 말했다. “신이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황상께서만 아셔야 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조조를 물러나게 했다. 조조는 빠른 걸음으로 어전을 물러 나오면서 속으로 원앙을 몹시 원망했다. 비로소 원앙이 계책을 말 했다. "·초 등 7국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다 조조의 머리에서 나온 영지 삭감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조를 참형에 처하고 사신을 보내 서 오·초를 용서하고 그들의 영지를 되돌려준다면 반란군은 곧 해산 될 것입니다." 황제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천자인 짐이 한 사람의 목을 베어 천하에 사과하는 방법밖에 없단 말이오? "황공하옵게도 이것 외에 다른 계책은 없습니다. 황상께서는 깊이 해 아려 주십시오." 10여 일 뒤, 조조는 동쪽 저잣거리에서 관복 차림으로 참형을 당했다.

 

반군이 가장 겁내는 것은 반군 속의 반군

황제는 원앙을 사신으로 보내 오왕 비를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원앙 은 오히려 오왕 비의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오왕은 원앙을 장수로 쓰려 했지만, 원앙은 틈을 엿보다 도망하여 조정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조후 에게 오·초 진압을 명했다. 조후는 아버지 강후 주발의 문객이었던 등 도위의 묘책을 받아들여 오초와 싸울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오왕은 막 출병하려 할 즈음 신하 전녹백田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전녹백이 오왕에게 말했다. "군대가 한곳에 모여 있으면 한꺼번에 궤멸되기 쉽습니다. 신에게 5 만 병사를 주시면 회남과 장사를 점령한 뒤 무관으로 들어가 대왕과 합류하겠습니다. 이 또한 하나의 계책입니다." 그러나 오왕의 태자가 반대했다. "명분상 어찌됐든 왕의 군대는 반군입니다. 반군의 군대를 남에게 빌 려줄 수는 없습니다. 남에게 빌려주어 오히려 배반을 당하면 어찌 할 것입니까? 또 병권을 나누어주면 다른 이해관계가 생길 것입니다. 결과 적으로 보면 손해가 될 뿐입니다." 오왕은 전녹백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나라의 젊은 장수인 환장군桓將軍은 이런 계책을 올렸다. "오나라는 보병이 많아 험난한 지형에서 전투에 능하지만, 한나라는 전차와 기병이 많아 험난한 지형에서는 불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쪽으로 가서 낙양의 무기고를 점령하고 오창의 양곡을 먹으면서 혐 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린다면 승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성 함락에 집착해서 싸운다면 그 사이에 한나라의 전차와 기병이 달려올 것이고, 그리하면 거사는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왕은 환장군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오왕은 환장군과 반 대되는 늙은 장군들의 계책에 따라 성을 함락하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그래서 하비성만 함락했을 뿐 양나라에서 양왕의 군대와 소모전을 펼치 다 이때에 들이닥친 조후의 군대에게 패해 동쪽 월로 도망치게 되었다. 결국 오왕은 동월東越의 군사들의 창에 맞아 일생을 마쳐야 했다 에 초나라 왕 무가 자살했다. 얼마 후 교서왕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교동왕·치천왕·제남왕도 죽으니, 반란을 일으킨 왕들의 나라는 다 해체되고 한나라에 편입되고 말았다. 목숨을 건진 제북왕은 옮겨져 치천왕이 되었다. 처음 오왕이 제일 먼저 배반하여 초나라. 제나라와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이 정월이고, 3월에 한나라에 의해 함락되었으니, 2개월 만에 난이 진압된 것이다. 홀로 조나라만이 뒤에 함락되었다. 오왕 비가 반란을 일으키다 멸족을 당한 것은 자신의 자식이 황태자 와 장기를 두다 장기판에 맞아 죽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조조는 국가의 먼 장래를 염려하여 무리한 계책을 세웠다가 도리어 화를 입었다. 원앙 은 권모에 능하고 언변이 뛰어나 처음에는 총애를 받았으나 훗날에 치 욕을 당했다. 그래서 옛날에 제후의 땅은 백 리를 넘지 않았고, 산과 바 다가 있는 곳에는 제후를 봉하지 않았다. '오랑캐를 가까이하여 혈족을 소원히 하지 마라'고 한 말은 아마 오 나라 같은 경우를 두고 한 말이리라. 또한 '권모의 우두머리가 되지 마 라. 도리어 그 재앙을 받으리라'고 한 말은 아마 원앙과 조조 같은 사람 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울창한 나무는 스스로 길을 만든다

이광 : 장군은 난세와 위기에 더 이름을 날린다

장군 이광의 집안은 대대로 활을 잘 쏘았다. 이광은 문제 때 흉노 를 치는 데 공을 세워 중량이 되었고, 800석의 녹봉을 받았다. 임금 이 사냥 갈 때 이광이 호위해 모셨는데, 이때에 이광은 맹수를 맨손으 로 때려잡았다. 이를 보고 문제가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안타깝도다. 만약 그대가 고제유망 때 살았더라면 만호 로도 그대의 공을 덮기에는 부족했으리라! 경제 때 이광은 농서·복지·안문 대군 운중의 태수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흉노와 싸워 이름을 드날렸다. 흉노가 상군으로 침입하 자, 경제는 총애하는 환관을 보내 이광과 함께 흉노를 무찌르도록 했다.

 

그런데 환관이 흉노의 명사수에게 활을 맞고 부상을 당하자, 이들은 기병 백여 명만 이끌고 흉노의 적진으로 들어가 환관을 쏘았던 세 명의 흉노를 활로 쏘아 두 명을 죽이고 한 명은 생포했다. 이때 흉노의 수 분 기병이 이광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이광이 태연히 걸어가니 흉노들 은 유인병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후퇴해 산으로 달아나 진을 쳤다. 이장이 흉노족을 공격하려고 기병들에게 전진하라고 명했으나, 부하 기병들은 흉노족이 두려워 달아나려고 했다. 이광이 이렇게 소리쳤다. "우리는 본진과 수십 리 떨어져 있다. 우리가 달아나려고 한다면 휴 노는 우리의 상황을 눈치채고 당장 뒤쫓아와 다 죽이고 말 것이다. 하 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태연한 행동을 취한다면, 흉노는 우리를 대군의 유인병이라 여기고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이광의 부하 기병들이 명령대로 흉노를 향해 전진했다. 흉노의 진지 2리 앞까지 오자 이광은 다시 명령했다. "모두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그러자 기병들이 불안해하여 물었다. "오랑캐들이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그럽니까?“ "이렇게 해야만 저 오랑캐들을 속일 수 있다. 우리가 달아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들은 우리를 정말로 대군의 유인병이라고 믿을 것이다." 과연 오랑캐 군대는 이광의 기병들을 공격하지 못했다. 오랑케 장수 가 진에서 나와 자신의 부하들을 정돈하고 있을 때, 이광은 곧바로 말을 타고 달려가 오랑캐 장수를 황로 쏴 죽이고 다시 부하들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말안장을 품게 한 뒤 땅바닥에 드러누워 휴식을취하게 했다. 이때 마침 날이 저물자, 오랑개 군사는 눈앞에 펼쳐진 광 청이 괴이하게 여겨져 감히 한나라 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밤이 되자 오랑개 군사들은 한나라 본대의 기습이 있을 줄 알고 서둘러 철수해버 했다. 이광은 부하들을 수습해 군대의 본진으로 돌아왔다.

 

대비되는 두 유형의 명장

세월이 흘러 경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무제다. 이 광은 상군 태수로 있으면서 미앙궁의 위위가 되었고, 정불식 또한 위위로서 장락궁을 지켰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러모로 대비가 되었다. 오랑캐를 질 때 이장은 군 행렬을 다소 느슨하게 풀어주며 행군하게 했고, 주둔할 때는 물이 있는 곳에서 쉬게 하면서 군법을 엄격히 지키지 않았다. 또 막사 안에서는 문서와 장부 같은 격식 따위는 생략했다. 이 에 반해 정불식은 군 행렬을 엄격히 지키며 행군하게 했고, 군법 또한 엄수하도록 군대를 감독하니 병사들은 휴식할 틈이 없었다. 정품식은 군대를 다스릴 때 이광과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광의 군대는 지극히 간략하여 오랑캐가 기습하면 방어하기가 어 했다. 그러나 군사들은 이광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 죽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내가 군대를 다루는 법은 번잡하지만, 이 때문에 오랑캐가 침범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장과 정봉식은 변방을 지키는 명장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자주 포위되거나 곤욕을 당했고, 맹수에게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불운한 벼슬길, 운명인가? 자신의 과오 때문인가?

이광이 낭중령이 되어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과 함께 연합작전을 펴며 흉노를 공격할 때의 일이었다. 이광이 중과부적으로 거의 생포될 위기 에 처했을 때 장건 군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조정으로 돌 아왔다. 조정에서는 적시에 흉노를 공격하지 못한 죄를 물어 장건을 서 민으로 전락시키고, 이광의 공은 눈부시나 부하를 전멸시킨 과오가 있 기에 이광에게는 상을 주지 아니했다. 이광은 벼슬 운이 없었다. 이광의 벼슬은 고작 구경九卿에 불과하였 는데, 그보다 명성이나 공로 면에서 훨씬 뒤떨어진 그의 사촌동생은 열 후가 되고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광의 부하들 가운데 후작에 봉해진 사람도 있었다. 이광이 점술가 왕삭王朔과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이 몸은 흉노를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 참전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공이 모자란 자들이 제후가 된 자가 수십 명이나 됩니다. 내가 이렇게 벼슬 운이 없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요? 내 인상이 제후가 될 수 없는 상입니까, 아니면 본래부터 나의 운명이 그 런 것입니까?" 왕삭이 말했다. "장군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회한스러운 일은 없었습니까?" “예전에 농서군의 태수로 있을 때, 내가 오랑캐를 달래 항복을 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려준다는 투항조건을 지키지 않고 그 오랑 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일이 매우 후회스럽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큰 과오는 없습 니다. 이것이 장군이 제후가 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원수元狩 4, 이광의 몸은 점차 쇠약해져 조정에서는 그를 흉노의 싸 움에서 제외시켰다. 그러자 이광이 자청하여 대장군 위청 휘하의 선봉 부대의 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이광이 젊은 날의 용맹만 믿고 흉노와 싸우다 길을 잘못 들어 위청의 작전을 지연시켰다. 위청이 이광을 심문 하여 죄를 밝히려 하자, 이광이 이렇게 절규했다. “내 부하들은 죄가 없다. 길을 잃어버린 것은 다 내 죄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흉노와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싸움을 했다. 이제 몸은 늙었 으나 마지막 전투로 생각하고 이 전투에 참가한 것이다. 그런데 대장군 위청이 선봉부대의 장군인 나를 선봉에 세우지 않고 내 부서를 옮겨 길 을 멀리 돌아가게 하였고, 그래서 길을 잃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과연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제 내 나이가 예순을 넘었으니, 내 한갓 미 천한 벼슬아치의 심문에 답변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칼을 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광이 거느리던 문관과 무관의 관리와 온 군대가 통곡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백성들도 늙은이 건 젊은이건 할 것 없이 모두 이광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옛말에,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할지라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이 것은 이광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광은 시골사람 같고 말을 잘할 줄 몰랐다. 그가 죽는 날 천하의 사 람들은 그를 알든지 모르든지 모두 슬퍼했다. 그의 충실한 마음을 사대 부들이 진실로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 말에 '복숭아나무나 오얏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아래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고 한다. 이 말은 비록 사 소한 것이지만 큰 이치를 설명하는 데 적절한 비유이다.

 

소설보다 재미 있는 사기열전

지은이 : 사마천

편역자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