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 Seok-ji, initially in a low position, was promoted after impressing Emperor Mu with his wisdom. He became known for his fairness in upholding the law, even when it went against the emperor’s wishes. Manseok-gun (Suk Bun) was a model of virtue and responsibility, with his sons following in his footsteps. His family’s legacy of respect, duty, and integrity became a standard for officials, earning admiration across the land.
법 앞에서 귀천을 두지 않았던 법관
장석지 : 말재주가 좋다고 인물이 된 것은 아니다
장석지張釋之는 형인 장중張中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재물을 바쳐 서 겨우 기랑이라는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지만, 10년 동안 중용되 지 못했다. 장석지가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벼슬다운 벼슬도 하지 못한 채 형의 재산만 축내고 뜻도 이루지 못했구나. 장석지가 실의에 빠져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려 할 때였다. 중랑장 원 앙은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 겨 자리를 옮길 수 있도록 추천하였다. 조회가 끝나고, 장석지는 문제 앞에서 진나라가 망한 이유와 한나라가 흥한 이유를 한참 동안이나 설명했다. 장석지의 말에 감명을 받은 문제는 장석지를 등용하여 알자복 야者僕射로 임명했다. 장석지가 황상을 모시고 상림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황상이 상림원 의 책임자에게 이곳에 있는 동물의 종류와 특징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책임자는 주위의 부하들 입만 쳐다볼 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데 동물원의 잡역부로 있는 사람이 황제의 질문에 대해 상세하고도 막 힘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황상이 말했다. "관리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책임자는 쓸모가 없는 사 람이다." 그리고는 즉시 장석지에게 잡역부를 상림원의 책임자로 임명하라고 했다. 그러나 장석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강후 주발을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상이 말했다. "장자長者(덕망이 있는 사람)이다."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도 장자다." "폐하께서는 강후와 동양후를 장자라고 칭찬하셨지만, 이 두 사람은 보고를 드릴 때에 어눌하여 의사를 충분히 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데 어찌 잡역부의 달변을 본받으라고 하십니까! 진나라가 망한 이유는 입만 빠르게 움직여 황제에게 아첨만 하는 도필리(문서 수정이나 하는 미 천한 벼슬아치들만을 중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잡역부의 구 변이 좋다 하여 그를 파격적으로 영전시키려 하시는데, 신은 천하의 관리들이 모두 이러한 것을 추종하여 지나치게 말재주에만 힘쓰고 실제 적인 이익을 강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폐하께서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신중을 기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문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로다." 그리고는 잡역부를 등용하려는 일을 중지했다. 황상 문제는 수레에 오르자 장석지를 불러 곁에 타도록 한 뒤 천천히 가면서 진나라의 패망 원인에 대해 물었다. 장석지는 사실대로 자세하고 성실하게 설명했다. 궁궐에 이르자 황상은 장석지를 높여 공거령公車슴으로 삼았다.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
그로부터 얼마 뒤, 태자가 양나라 왕과 함께 수레를 타고 궁궐로 들 어오면서 궁궐의 정문인 사마문司馬門에서 내리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장석지는 그 즉시 태자를 쫓아가 수레에서 내리게 한 뒤 불경죄라며 탄 핵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황제는 관을 벗고 장석지에게 사과했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이때부터 문제는 장석지를 뛰어난 인물로 여기고 중대부中大夫로 삼 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는 중랑장으로 승진되었는데, 장석지는 법의 엄 격한 집행과 위정자의 솔선수범이 있으면 백성은 자연히 법을 지킬 것 이라는 내용을 비유하며 간했다. 이에 황제는 장석지의 말하는 바를 깨 닫고 그를 정위(형법을 담당하는 벼슬)로 임명했다. 정위가 된 장석지는 엄격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했다. 어떤 사람이 한고조를 모시는 사당의 신주 앞에 놓여 있던 반지를 홈 치다 체포되었다. 황제는 몹시 노하여 반지를 훔친 자를 정위에게 넘겨 서 죄를 다스리게 했다. 장석지는 '종묘의 물건을 훔친 자는 기시형에 처한다'는 법 규정대로 집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황제는 매우 성을 내며 말했다. “백성이 무도하게도 선제先帝 사당의 기물을 도둑질했다. 내가 그놈 을 정위에게 넘긴 것은 삼족까지 멸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군은 법대로만 적용하여 기시형을 집행하려고 하니 그것은 종묘를 범한 죄 치고 너무 가볍지 않은가?" 장석지는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죄하며 말했다. “황공하오나 법으로서는 이 이상 처벌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죄는 같 더라도 죄질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종묘의 기물을 훔쳤다고 하여 그와 집안을 멸한다면, 만일 장릉長陵(한고조의 능묘)에 있 는 흙을 한 줌 파가는 어리석은 백성이 있다면 폐하께서는 그자와 일족 을 멸하시겠습니까?" 이 같은 정위의 말에 오래 고심하던 문제는 마침내 정위의 판결대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문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경제이다. 장석지 는 지난날 태자의 실수를 탄핵한 일이 있어 스스로 벼슬을 내놓았지만, 경제는 장석지가 아무 사심 없는 사람인 것을 알고 복직시켰다. 그후 장석지는 회남왕의 재상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장석지는 덕이 있는 사람은 칭송하고, 모든 일을 법질서에 맞게 집행 한 사람으로 왕에게 결코 아부하지 않았다. 참으로 깊은 맛이 있는 사 람이다. 옛말에 '그 사람을 알지 못하거든 그의 벗을 보라'고 했다. 두 임금이 함께 칭송하는 사람이라면 궁궐에 이름이 알려질 것이다. <서경>에서 말하기를,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파당도 만들지 않으 니 성왕의 도는 넓고 크도다. 파당도 없고 치우치지도 않으니 성왕의 도는 고르고도 평평하구나'라고 했다. 장석지는 이러한 뜻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만하다.
관리의 표본이 된 만석군과 그의 아들들
만석군 : 만석군의 유래
만석군萬石君의 이름은 분奮이다. 성은 석씨石氏로 그의 아버지는 조 나라 사람이었다. 한나라 고조가 동쪽으로 항우를 치러 갈 때, 당시 15 세이던 석분은 고조의 눈에 띄어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고조는 석분의 누이를 여자 관원으로 삼고, 석분을 중연(천자를 측근에 서 모시는 벼슬)에 임명하여 올라오는 글과 알현을 청하는 자의 이름을 접수하게 했다. 해문제 때에 석분의 벼슬은 태중태부에 이르렀다. 석분은 학식은 짧았 으나 그의 공손하고 신중한 태도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의 추천에 의해 석분은 태자를 가르치는 태부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는 즉위한 후, 그를 가까이하기 두려워하여 제후의 상국이 되게 하였다. 석분의 맏아들 석건石建, 둘째아들 석갑石甲, 셋째아들 석을石乙, 넷째 아들 석경石慶은 모두 행실이 선량하고 효성스럽고 신중했으며, 벼슬은 모두 2,000석의 녹봉을 받는 지위에 이르렀다. 이에 경제가 말했다. "석분과 네 아들이 모두 2,000석으로 합치면 1만 석이군. 존귀하고 총애받는 신하가 다 그 집에 모였도다!" 그래서 석분에게 호를 내려 만석군이라 불렀다.
자식이 벼슬을 시작하면 나라의 자식이다
효경제 말년, 만석군은 상대부上大夫의 녹봉을 받으면서 늙었다는 구 실로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노후를 보냈으나, 세시歲時 때에 는 신하로서 조정에 나와 문안을 올렸다. 그는 궁궐의 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으며, 노거路車(황제의 수레)를 보면 반드시 수레의 가로나무를 짚고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자식이 지위가 낮은 관리가 되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에도, 만석군은 반드시 조복朝服을 입고 아들을 대했으며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 았다. 이는 임금의 관리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다. 만석군은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꾸짖지 않고 스스로 정실에서 물 러나 곁방에 있으면서 밥상을 대해도 먹지 않았다. 이에 여러 아들들이 아버지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그 중 나이 많은 아들이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 진정으로 사죄하면 그때서야 만석군은 자식을 용서해주었다. 만석군이 이러하니 아들들뿐만 아니라 어린 종들도 태도가 공손하였 다. 만석군 집안은 효행과 신중함으로 각 나라에 이름이 퍼지게 되었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여러 선비 중에서 아무리 성실한 행동을 하는 자 일지라도 모두 스스로 만석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하였다. 건원建元 2년(한무제漢武帝의 첫번째 연호, 건원 2년은 기원전 139년이다. 기원 전 140년 한무제는 즉위하여 건원 원년元年이라고 칭했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연호이다. 한무제는 재위 54년 동안 11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낭중령 中슴 왕장王이 유가의 학설을 숭배하다 감옥에 갇혔다. 황태후竇太后 는 '선비들은 겉치레만 번듯하고 속은 비었는데, 만석군의 집안만은 말없이 행동에 충실하다'고 여겨 만석군의 맏아들 석건을 낭중령으로 삼고, 넷째아들 석경을 내사內史(나라 법전과 궁중 일을 기록하는 벼슬)로 삼았다.
아버지의 이름을 더 빛낸 아들들
석건이 늙어서 머리가 희었으나 만석군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석건 은 낭중령이었지만 조정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면, 하인을 시켜 아버 지의 속옷을 몰래 가져오게 하여 자신이 직접 빤 후에 하인에게 갖다놓 게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석건이 황상께 진언할 때는 혹 황상에게 누가 될까 싶어 사람들이 없는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진언하니 황상도 그를 친애하고 존경했다. 만석군은 원삭元朔(무제의 세 번째 연호) 5년에 죽었다. 맏아들 낭중령 석건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통곡하고 비통해하다가 기력이 쇠진하여, 결국 1년도 못 되어 죽고 말았다. 여러 자손들이 다 효성이 지극했지만 그 중에서도 맏아들 석건이 가장 지극하여 만석군을 능가할 정도였다. 석건이 낭중령으로 있을 때, 그가 황상께 올린 상소가 결재를 거쳐 다시 내려왔다. 석건이 그것을 읽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 라는 글자를 잘못 썼구나. 마 자는 네 다리를 뜻하는 네 개의 획 과 꼬리를 뜻하는 획까지 합하여 다섯 획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보니 네획만 있고 한 획이 부족하구나, 황상께서 책망하시면 죽어야겠다!" 그는 매우 황송해하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이와 같이 대 했다. 만석군의 작은아들 석경이 태복太僕이 되어 황제의 수레를 몰고 외출 했을 때, 황상이 물었다. "몇 마리의 말이 이 수레를 끌고 있는가?" 석경은 바로 앞에 훤히 말이 보이는데도 채찍을 들어 말을 다 세어본 뒤에야 손을 들고 대답했다. "여섯 마리입니다." 만석군의 아들 중에서 석경은 성품이 가장 무난한 편이었는데도 이 와 같았다.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것은 책임 회피
석경이 제나라 재상에 오르자 제나라의 정치는 올바로 서기 시작했 다. 원수元狩(무제의 네 번째 연호) 원년에 석경은 태자의 태부가 되었으 며, 7년 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원정元鼎(무제의 다섯 번째 연호) 5년에 석경은 승상이 되었는데, 이때 한나라는 동서남북 변방의 오랑캐를 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는 천하를 시찰하며 낡은 사당을 수리하고 봉선(덕성스런 천자가 하늘과 땅을 향해 지내는 제사)을 행했으며 예약제禮樂을 부흥시켰다. 내부에서는 조정 중신들이 나라를 휘어잡고 정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승상의 결재 없이도 많은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래서 석경은 9년 동안 승상으로 있으면서도 소외되어 간언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원봉元封(무제의 여섯 번째 연호) 4년에 관동關東에 유민이 200만 명이었 는데, 그 중 호적이 없는 자가 40만 명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유민들을 변경 근처로 이주시킬 것을 주청하기로 하였다. 황제와 중신들은 승상이 늙었다는 이유로 이 회의에 참석시키지 않았다. 석경은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해수하신은 과분하게도 승상의 직책을 맡았사오나, 노둔老鈍하고 미련하여 정치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곽과 창고는 비었고, 수많은 백성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 같 은 죄를 지어 마땅히 중벌을 받아야 할 것인데, 황상께서는 신을 불쌍 히 여겨 법대로 다스리지 않으셨습니다. 청컨대 승상과 후의 인을 반 납하고 물러나기를 원하오니, 부디 저 대신 현명한 자에게 승진할 길 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윤허해주십시오. 그러나 황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창고는 이미 비어 있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고향을 등지고 떠 돌이 생활을 하고 있소. 그래서 이 백성들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만들려 하는데, 이 와중에 승상인 그대가 책임도 지지 않고 물러나려고 하는 가? 그대는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것이오?" 이렇게 조서를 보내어 석경을 꾸짖자, 석경은 매우 부끄러움을 느끼 고 다시 조정에 나가 일을 맡아보았다. 그후 3년여가 지난 태초太初(무제의 일곱 번째 연호) 2년에 석경이 세상 을 떠나자 염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석경이 승상으로 있었을 때 여러 자손들이 관리에 등용되어 2,000석의 녹봉을 받은 자가 무려 13명이나 되었지만, 석경이 죽은 뒤로 만석군의 가풍은 갈수록 쇠락해졌다. 공자는 일찍이 '군자는 말을 어눌하게 하되 행동은 민첩하게 해야 한 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만석군 같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 의 가르침은 성급하거나 엄격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공을 이룰 수 있었다.
소설보다 재미 있는 사기열전
지은이 : 사마천
편역자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