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anque was of humble origins, but he helped Liu Bang with bravery and was made the Marquis of Mu Yang. He survived under the protection of Empress Lü and contributed to the founding of the Han Dynasty. Xue Yi, a wise strategist, aided Liu Bang in unifying the world, making significant contributions through his strategies and advice. However, he met a tragic end due to a misunderstanding. Both men were heroes who left their names in history, each navigating turbulent times in their own way.
난세에만 인정받아 존귀한 몸이 될 자
번쾌 :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리오?
무양후舞陽侯 번쾌는 패沛 땅 사람으로, 개 잡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유방과 뜻이 맞아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번쾌는 처음에 유방을 따라 풍읍豊邑에서 군사를 일으켜 패 땅을 함 락시켰다. 유방은 패공沛公이 되면서 번쾌를 심복으로 데리고 다녔다. 번쾌는 유방을 따라 패공의 동서남북 땅을 방어하고 진나라 땅을 공략 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패공이 장함(진秦나라 말기 때의 장군)의 군대 와 싸울 때나 이유李由(이사의 아들)의 군대와 싸울 때나 모든 전투의 선 봉에 서서 적의 머리를 베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국대부國大夫의 작위를 받았고 경우에 오르게 되었다. 패공은 갈수록 전공을 세우는 번쾌에게 현성군賢成君이라 부르며 봉작을 거듭 높여주었다. 항우가 희하에서 패공을 공격하려고 하니, 패공은 기마병 100여 명 을 거느리고 친분이 있던 항백(항우의 숙부)을 통하여 항우를 만나 함곡 관을 봉쇄한 일이 없다고 해명하였다. 항우가 패공을 위해 벌인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항우의 책 사策士 범증范增은 패공을 놓아주려는 항우의 생각과는 달랐다. 이번이 패공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알고 연회 중에 항우의 사촌 동 생 항장項莊에게 칼춤을 추게 했다. 이미 항장과 범증 사이에는 사전 모 의가 있었다. 항장이 범증의 지시대로 칼을 빼들고 좌중에서 춤을 추었다. 항장이 춤을 추는 동안 어느새 그의 칼날은 패공의 목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 순간 항백이 중간에 끼어들며 자신도 칼춤을 추는 척하면서 항장의 칼 을 어깨로 막아주었다. 이때 패공과 그의 군사軍師 장량만이 술자리에 앉아 있었고, 번쾌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번쾌가 일이 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곧 쇠방패를 갖고 군영 문 안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했지만 군영의 호위병이 가로막았다. 그러나 번쾌는 방패로 그들을 치고 들어 가 장막 아래에 섰다. 항우가 그를 보고 물었다. "이 자는 누구냐?" 장량이 대답했다. “패공의 참승(수레 오른쪽에 타는 자로, 임금이 가장 신뢰하는 신하) 번쾌입니다." 항우가 탄복하며 말했다.
"참으로 장사로구나!" 그리고는 번쾌에게 술 한 잔과 돼지의 어깨 고기를 내려주어 먹게 했 다. 번쾌는 술을 마신 뒤 칼을 빼서 고기를 잘라 먹어치웠다. 항우가 물었다. “더 마실 수 있는가?" 번쾌가 대답했다.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겠습니까? 그 건 그렇다 치고, 이전에 대왕(항우)은 먼저 함곡관에 들어가는 자가 왕이 되기로 우리 주군(유방)과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 주군은 대왕보다 먼저 함곡관에 들어와 함양을 평정하고 군대를 패상霸上에서 야영시키면서 대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 주군은 사심이 없 는데 어찌 대왕께서는 소인배들의 말만 듣고 우리 주군을 의심하십니 까? 신은 이 일로 천하 민심이 대왕을 떠날까 두려울 뿐입니다." 항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틈에 패공은 변소에 가는 체하면서 번쾌를 손짓으로 불러낸 뒤 자신의 수레는 놔둔 채 홀로 말 한 필에 의 지하여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패공을 수행하던 번쾌를 비롯한 4명의 신하들은 걸어서 그의 뒤를 따 랐다. 패공은 산 아래 샛길을 따라 패상의 진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패공은 장량을 사자로 보내 항우에게 사과하게 했다. “패공이 술에 약한 체질이어서 작별 인사조차 못 드렸습니다. 패공이 이를 사죄하는 뜻에서 신에게 아름다운 흰 옥 한 쌍을 주어 대왕께 바 치라 했습니다. 또한 옥 한 쌍은 대장군 범증께 바치니 기꺼이 받아주 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항우는 기분이 좋아져 흰 옥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범 증은 옥을 받아들자마자 땅에 놓고 칼로 쳐 박살을 내버렸다. 범증은 밖으로 나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했다. “이렇게 세상 이치를 모르는 자와 어찌 천하를 논한단 말인가! 장차 천하를 패공에게 빼앗기고 말리라.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패공의 포 로가 되고 말 것이다." 이날 번쾌가 군영으로 달려들어가 항우를 꾸짖는 일이 없었더라면, 패공은 매우 큰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지연과 혈연의 끈에 붙어 천리를 달린 용사들
이튿날 항우는 함양으로 들어가서 진나라 백성들을 잔인하게 죽인 뒤 패공을 한漢나라 왕으로 봉했다. 한나라 왕은 번쾌에게 열후列侯의 작위를 내리고 임무후臨武侯라고 불렀다. 번쾌는 낭중으로 승진하여 한 나라 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그후 번쾌는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선봉에 서서 적의 머리를 베고 포 로로 잡는 등 그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래서 그 공로로 식 읍으로 두천 땅의 번향을 받았다. 또한 형양滎陽으로 돌아왔다가 그 로부터 1년 뒤, 항우가 동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자, 한왕을 따라 항적 項籍(항우의 이름이 적籍)을 공격하여 양하현陽夏縣을 점령했다. 또 진현陳 縣에서 항적을 포위하여 크게 물리쳤으며 호릉胡陵을 몰살시켰다. 항적이 죽자 한왕이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번쾌에게 식읍 800호를 더 주었다. 번쾌는 황제를 배반한 연나라 왕 장도를 공격하여 포로로 삼고, 연나라 땅을 평정했다.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을 때도 한신 을 공격하여 진옛 땅에서 포로로 잡고, 초나라 땅마저 황제의 땅으로 만 들었다. 이에 황제는 다시 번쾌에게 열후의 작위를 내리고, 제후의 부절符節 을 주고 대대로 세습하게 했다. 또 무양舞陽을 식읍으로 주고 무양후舞 陽侯라고 불렀다. 그후 번쾌는 황제를 배반한 진희와 한나라 왕 신信· 연나라 왕 노관과 그들의 잔존 세력들을 잇따라 격파하여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呂須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항伉을 낳 았다. 그러므로 번쾌는 여러 장수들에 비하여 고조와 가장 가까웠다. 이전에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일이다. 고조는 병이 깊어 남을 대하는 것을 귀찮아해 궁중에 누워 있으면서, 호위병에게 명령을 내려 군신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강후와 관영 등의 대신들도 10여 일 동안이나 감히 궁중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때 번쾌가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대신들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고조는 홀로 환관의 몸을 베고 누워 있었다. 번쾌 등은 고조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옛날 폐하께서 신 등과 함께 풍과 패 땅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할 때에는 그 얼마나 혈기가 왕성하셨습니까! 천하가 이미 평정됐 는데 앓을 병이 무어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병이 위중하시다고 하니 대 신들이 몹시 겁을 내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 등에게 일을 의논하시지 않고, 도리어 환관만 상대하다 운명하려 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진나라를 멸망의 길에 빠뜨린 환관 조고의 일을 알지 못하십니까?" 고조는 웃으며 일어났다. 그 뒤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번쾌를 재상으로 삼은 뒤 연나 라를 치게 했다. 이때 고조의 병이 심했는데, 어떤 자가 번쾌를 이렇게 헐뜯었다. “번쾌는 여씨의 도당입니다. 만일 황상께서 하루아침에 붕어하시면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유씨 황족皇族을 모두 죽일 것입니다.” 고조는 이 말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곧바로 진평陳주에게 번쾌를 군 대 안에서 베어 죽이게 했다. 그러나 진평은 여후를 두려워하여 번쾌를 죽이지 않고 체포하여 장 안으로 끌고 왔다. 진평이 장안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고조는 붕어했으 므로, 여후가 번쾌를 석방하고 작위과 식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번쾌는 그후 효혜제孝惠帝(유방의 아들) 6년에 죽었다. 번쾌가 칼을 휘둘러 개를 도살하던 그때에 어찌, 스스로 준마의 꼬리 에 붙어서 천 리를 가는 것처럼 한고조를 만나 그 이름을 한나라의 조 정에 드리우고 자손들에게 덕이 전해질 것을 알았겠는가? 번쾌는 자신 의 이름과 공이 후세에 전해질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한고조를 도와 거사를 벌인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변사
역시기·육고 : 천하를 구하려는 분이 걸상에 걸터앉아 장자를 맞이합니까?
역이기는 진류현陳留縣 고양高陽 사람으로 즐겨 글을 읽었으나, 집안 이 가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어 마을의 성문을 관리하는 낮은 벼슬아치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그 러나 현 안의 어진 사람들과 호걸들은 그를 미치광이라 부르며 부리려 하지 않았다. 진승과 항량 등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면서 군사를 일으키자, 군사들 을 데리고 고양을 지나가는 장수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역이기 는 그 장수들이 다 작은 일에 얽매이고 자질구레한 예의나 찾는 속 좁 은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재능을 깊이 숨기고 있었다. 그후 역이기는 패공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류현의 외곽을 공격하 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패공의 휘하에는 역이기와 같은 고향 사람이 기병으로 있었는데, 패공은 그 기병을 불러 이 지역에 어진 선비와 호 걸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 기병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역이기는 그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패공은 거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큰 뜻을 지녔다 고 들었소. 이분이야말로 내가 따르고 싶었던 인물이오. 하지만 나를 그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없구려. 그대가 패공을 만나거든 '신의 마 을에 역이기라는 자가 있는데, 나이가 60여 세이며 키가 8척입니다. 사 람들은 다 그를 미치광이라고 합니다만, 역이기는 스스로 나는 미치광 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라고 전해주겠소?" 그 기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패공은 선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관을 쓴 선비가 찾아오면 패공은 그 갓을 벗게 하고 그 안에다가 오줌을 눌 정도입니다. 사람들 과 말할 때에도 항상 목청 높여 유생들을 욕합니다. 선비의 신분으로 그를 설득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알았소. 하여튼 내가 부탁하는 대로만 전해주시오.” 기병은 역이기가 부탁한 대로 기회가 있을 때 패공에게 전했다. 얼마 후 역이기가 패공의 부름을 받았다. 역이기가 패공을 만나러 들어가니 그는 걸상에 걸터앉아서 두 여인에게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다. 역이기 는 들어가 절은 하지 않고 길게 읍揖만 한 뒤 말했다. “족하께서는 진나라를 도와서 제후를 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 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치려고 하십니까?" 이 말에 발을 씻고 있던 패공이 역이기에게 소리쳤다. “이 하찮은 선비놈아,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린 지 오래다. 그 래서 당연히 제후들이 서로 연합해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다. 어째서 내가 진나라를 도와 제후를 치겠는가?” 그러자 오히려 역이기가 되물었다. “무리를 모으고 의병을 규합하여 무도한 진나라를 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걸상에 걸터앉아서 나이든 사람을 맞이합니까?" 그러자 패공이 비로소 깨달은 듯 발 씻던 것을 물리고, 일어나 옷을 바로 입었다. 그리고 역이기를 윗자리에 앉히고 사과하였다. 역이기는 천하통일의 방법을 6국이 합종하고 연횡했을 때의 일과 비교해서 말했 다. 패공은 기뻐서 역이기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정중히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계책을 써야 합니까?" “족하께서는 오합지졸의 무리를 모아 규합하였지만 만 명도 못 됩니 다. 이 병력으로 강한 진나라와 맞서는 것은 호랑이의 입을 더듬는 것 과 같습니다. 진류현은 천하의 요충지로 사방으로 길이 통하여 교통이 지극히 편리한 곳이며, 지금 그 성 안에는 비축된 양곡도 많습니다. 신 이 진류현의 현령과 친한 사이이니, 제가 지금 그곳에 가서 족하께 항 복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만일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족하께서 진 류현을 공격하십시오. 신은 성 안에서 대응하겠습니다.” 그래서 역이기가 먼저 떠나고 패공이 그 뒤를 따라 군대를 출동시키 니, 마침내 진류현은 쉽게 평정됐다. 패공은 역이기를 광야군廣野君에 봉하였다.
큰 일을 이루려는 자는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
역이기는 그의 아우 역상을 패공에게 추천하여, 수천 군사를 거느리 고 패공을 따라 서남쪽으로 가서 땅을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유세객이 되어 패공을 위해 제후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한나라 3년 가을, 패공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제나라를 치러 간 한신에게서는 시원한 소식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팽월彭越 이 양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게다가 한나라 왕 은 형양과 성고에서 항우에게 싸움에 져 군대를 공현鞏縣과 낙양현洛陽 縣에 주둔시키고 어디로 철수할 것인지를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역이 기가 한왕에게 계책을 올렸다. “신이 들으니, '하늘로 받들어야 할 것을 진정 아는 자는 왕업을 성 취할 수 있고, 하늘로 받들어야 할 것을 모르는 자는 왕업을 성취할 수 없다. 왕은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고 합 니다. 오창敖倉은 천하의 곡식이 집결하는 창고입니다. 그런데 초나라 는 오창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군사를 다른 데로 출동시켰으니 이 는 하늘이 한나라를 돕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두 영웅은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디 족하께서는 급히 군대를 정돈시킨 후 오창의 양곡을 점거한 뒤 형양을 회수하고 성고를 폐쇄하고 태행산의 통로를 차단한다면 천하는 족하에게 돌아올 것입니 다. 지금 연나라와 조나라는 평정됐지만 제나라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 습니다. 제나라는 대병력을 소유한데다 거짓말을 손바닥 뒤집듯 하기 때문에 무력으로 평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에 신이 족하의 조서를 받들고 가서 제나라 왕을 달래어 제나라를 한나라 동쪽을 지키는 속국으로 만들겠습니다." 한나라 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소.” 한왕은 곧 역이기의 계책을 좇아 오창을 점령한 뒤 역이기를 제나라 왕에게 보냈다. 역이기는 제나라 왕 전광을 만나 설득했다. 한나라 왕 은 항우와 달리 신의를 지키는 인물이며, 천하의 민심이 다 한나라 왕 에게 돌아갔고, 천하 역시 한나라 왕에게 돌아감은 하늘의 뜻이란 것을 주지시킨 뒤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왕께서 빨리 먼저 한나라 왕에게 항복한다면 제나라를 보존할 수 있지만, 한나라 왕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왕은 눈앞에서 제나라가 멸망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 전광은 고개를 끄덕인 뒤 역하를 지키던 군대를 거둬들인 뒤 역이기와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때 회음후 한신의 군대가 제나라를 습격했다. 한신은 역이기가 세치 혀로 제나라의 항복을 받아 냈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도 무력을 감행한 것이었다. 제나라 왕은 한나 라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받고 역이기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 하여 소리쳤다. "네가 한나라 군대를 저지시키면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를 삶아 죽일 것이다." 그러자 역이기가 대답했다. "큰 일을 행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로 근심하지 않으며, 덕이 높은 사 람은 다른 사람의 비난에 게의치 않는다. 내 너를 위하여 이 말을 바꾸 게 할 수는 없다." 제나라 왕은 결국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으랴!
육고소는 초나라 사람으로, 빈객으로 고조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말솜씨 좋은 유세객으로 유명하여, 고조를 모 시고 있으면서 제후들에게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고조 때에 이르러 중원이 처음으로 안정됐는데, 이때에 위타가 남월 왕해을 자칭하며 고조에게 반기를 들려고 했다. 그러자 육고는 고 조의 명을 받고 위타를 설득하여 고조에게 충성을 바치는 약속을 받아 내고 돌아왔다. 고조는 매우 기뻐하며 육고를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 했다. 육고는 때때로 고조 앞에 나아가 <시경>과 <상서> 속의 이야기를 인용 하였다. 이때마다 육고가 그 고서들을 찬양하자 고조가 그를 꾸짖었다. "짐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소. 내 어찌 《시경>과 <상서>에 얽매이겠소?“ 육고가 대답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하여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 겠습니까? 옛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지만 민심을 따라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와 같이 문무文武를 아울러 쓰는 것 이 나라를 오래 지키는 방법입니다. 옛날에 오나라 왕 부차夫差와 진품 나라의 지백智伯은 무력을 너무 쓰다가 망했고, 진나라는 형법만을 쓰 고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한 뒤에 인과 의를 행하고 옛 성인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천 하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에 고조는 부끄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잠시 뒤 고조는 육고에 게 이런 말을 했다. "시험삼아 짐을 위하여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짐이 어떻게 해서 천하를 얻었으며, 또 고대 국가들이 어떻게 흥망성패했는지 이에 관해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시오." 그래서 육고는 국가 존망의 징후에 대하여 대략 서술하여 12편을 지 었다. 그가 한 편 한 편을 지어 올릴 때마다 고조는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좌우의 신하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 책을 《신어新語)라 고 하였다.
치세의 도는 승상에게, 난세의 도는 장군에게 구하라
효혜제 때, 여태후는 정권을 거머쥐고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했다. 그녀가 나이 어린 왕을 협박하니 유씨 황족이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다. 우승상 진평이 이 일을 우려했으나 감히 반대해서 다툴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진평은 말도 못하고 항상 조용히 집에 있으 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느 날이었다. 병을 핑계로 벼슬자리를 내놓은 뒤 다섯 아들 집에서 번갈아 유숙하며 지내고 있던 육고가 찾아왔다. 그런데 이날도 진평은 고심하느라 육고가 온 것을 몰랐다. 육고가 물었다. "무엇을 그리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진평이 말했다. "그대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소?" "족하는 지위가 우승상에 이르고 부귀가 극에 달하니 더는 무슨 욕망 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근심이 있다면, 여씨와 어린 왕의 일 때문이 겠지요." 진평은 반가운 기색을 띠면서 육고에게 공손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천하가 편안하면 백성들은 승상에게 기울고, 천하가 위태로우면 장 군에게 기웁니다. 그러니 장군과 승상이 서로 힘을 합하면 기꺼이 선비 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선비들이 규합하면 천하에 변이 있 을지라도 권력은 갈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직을 위한 계책으로는 장 군과 승상이 서로 손을 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은 항상 태위太尉 강후 絳侯에게 말하고자 했으나, 강후는 나와 너무 친한 사이라 오히려 내 말 을 우습게 여깁니다. 군께서는 어찌하여 태위와 교분을 쌓아 깊이 결속 할 생각을 안 하십니까?" 이리하여 육고는 진평을 위해 여씨를 누를 몇 가지 계책을 알려주었 다. 진평은 곧 이 계책대로 일을 벌였다. 즉, 강후에게 500금을 주어 그 의 장수를 축하하고 성대한 술자리를 마련하니, 태위 또한 이와 같이 보답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결속을 다지자, 여씨의 음모는 점점 물거품이 되어 갔다. 진평은 육고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노비 100명과 수레와 말 50승, 돈 500만 전錢을 주었다. 육고는 이것을 가지고 한나라 조정의 공경들 과 교유하니, 그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다. 황제의 외척 세력인 여씨 일족들을 쓸어버리고 효문제孝文帝(유방의 아 들)를 세우게 된 데에는 육고의 힘이 매우 컸다. 효문제는 즉위하자 남 월에 사신을 보내려고 했다. 이에 진평 등이 육고를 추천하니 육고가 다시 한 번 남월로 가 천자 흉내를 내는 위타를 설득해 다른 제후들의 차림과 같게 만들었다. 육고는 타고난 수명대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역이기의 <신어> 12편을 읽어보니 과연 그는 당시의 변사인 것은 분 명하다. 역이기와 육고는 삶의 종말이 판이하게 달랐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변사였다.
길은 본래부터 구불구불하다
숙손통 :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오다
숙손통叔孫通은 설야 땅 사람으로, 진나라 때에 학문이 뛰어나 조정의 부름을 받고 박사博士(관직 이름) 임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 뒤 산동 지방에서 진승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2세 황제는 박 사와 여러 선비들을 불러다 자문을 구했다. 박사들과 선비 30명은 반역임이 명백하니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일 으킨 진승을 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2세 황제의 얼굴빛이 분노로 푸르락붉으락했다. 이를 보고 숙손통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여러 선비들의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무릇 천하가 통일되어 무기를 회수하여 다 녹여버렸으며, 천하의 백성들은 조정의 요구대로 다 자기 직분에 따라 일하고 있는 이때에 누가 감히 반역을 하겠습니까! 진승은 다만 몰래 곡식을 훔쳐내는 좀도둑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입에 담아 논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산동의 무관이 그를 잡아다 죄를 다스리고 있을 테니 근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2세 황제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다." 나머지 유생들에게도 진승의 일에 대해 의견을 물으니, 어떤 이는 숙 손통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좀도둑이라 말했고, 어떤 이는 숙손통의 의 견과 달리 반란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2세 황제는 반란이라고 말한 유 생들을 전부 파면하였다. 한편 숙손통에게는 비단 20필과 옷 한 벌을 내리고 박사로 임명했다. 숙손통이 궁중에서 나오자 유생들이 물었다. "선생은 어쩜 그렇게 아첨을 잘합니까?" 숙손통이 대답했다. “공들은 모릅니다. 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호랑이 입 에 던져졌을 것이오.”그리고는 설 땅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설은 이미 초나라에 항복한 뒤 였다. 항량이 설로 들어오자 숙손통은 그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후 항 량이 전사하자 숙손통은 초나라 의제義帝를 섬겼고, 이후에는 항왕을 섬겼다. 그러다가 한나라 왕(유방)이 팽성으로 들어오자, 이번에는 한나 라 왕을 따랐다. 숙손통은 한나라 왕이 자신의 유생 옷차림을 몹사 싫 어하는 것을 알고 초나라의 짧은 옷으로 바꿔 입어, 한나라 왕의 마음 을 샀다. 숙손통이 한나라 왕에게 항복하였을 때, 그의 제자가 백여 명이었다. 그런데 숙손통은 그들을 추천하여 등용시키지 않고, 도둑이나 건달들 만을 추천하여 벼슬살이를 하게 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뒤에서 스승에 대해 이런 불평을 터트렸다. "저희들은 선생을 수년 동안이나 섬겨왔고, 다행히 한나라까지 들어 왔습니다. 이러한데 저희들을 추천하지 않고 아주 교활한 무리들만 추 천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숙손통은 그들을 이렇게 타일렀다. "지금 한나라 왕은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하를 다 투고 있소. 이런 때에 유생들이 어찌 잘 싸울 수 있소? 지금은 먼저 적 장을 베어 죽이고 적의 기를 빼앗아 올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한 것뿐이오. 그대들은 나를 믿고 기다리시오. 내가 그대들을 잊은 것은 결코 아 니오." 얼마 후 한나라 왕은 숙손통을 등용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직사군稷嗣 참이라고 불렀다.
예라는 것은 시대와 인정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한나라 5년, 천하가 통일되자 제후들은 모두 모여 한나라 왕을 황제 로 추대하였는데, 숙손통이 즉위식의 절차를 제정하게 되었다. 이때에 고조는 진나라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의례들을 죄다 없애버리고 간편하 고 쉽게 즉위 절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황제 즉위식을 마친 뒤 고조는 곧 근심에 빠졌다. 여러 신하들이 술을 마시면 자신들의 공을 다투고, 술에 취해서는 함부로 큰소리를 지르며 칼을 뽑아 기둥을 치는 것이었 다. 이를 보고 숙손통은 고조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대체로 선비라는 자들은 함께 천하를 얻는 데 진취적인 일을 하기는 어려우나, 이루어진 일을 함께 지킬 수는 있습니다. 부디 신의 제자들 과 노나라의 유생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정하게 해주십시오." 고조가 조건을 달았다.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가?" “오제五帝(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제왕, 즉 황제·전욱·곡·요·순 다섯 성 군을 가리킨다)는 제각기 음악을 달리하였고, 삼왕三王(하나라 우왕禹王, 은 나라 탕왕湯王, 주나라 문왕을 가리킨다)은 제각기 예법을 달리했습니다. 예법이란 것은 시대와 인정에 따라 조절하기도 하고 꾸밀 수도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하·은·주 나라의 예법은 더하거나 빼고 조절한 바에 근거하여 추측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예법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시대에 따라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합니 다. 원컨대 신이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법儀法을 합하여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있나 없나를 염두에 두고 만들도록 하시오." 좋소, 시험삼아 만들되, 사람들이 알기 쉽게 하고, 짐이 시행할 수 숙손통은 직접 노나라로 가 유생을 모집하여 초청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두 사람이 숙손통의 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는 무려 열 명이나 되는 군주를 섬겼는데, 모든 군주 앞에서 아첨하여 총애를 받고 존귀하게 됐습니다. 지금 천하는 겨우 평정되어 죽은 자를 미처 장사지내지 못했으며, 부상한 자도 아직 회복되지 못했 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공께서는 또 예약禮樂을 일으키려고 하십니 다. 예와 음악을 일으키는 것은 천자가 100년 동안 덕을 쌓은 뒤라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공께서 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공께서 하려는 일은 예법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니 우리들은 가지 않겠 습니다. 공은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더는 우리들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숙손통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정말로 고루한 선비들이로다. 그토록 세상의 변화를 알지 못하니..…………."
오늘의 시대 책무가 무엇인지 아시니 성인입니다
숙손통은 노나라에서 데려온 30명의 유생과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예악을 만들어 고조의 허락을 받아냈다. 한나라 7년, 숙손통이 만든 조 정 의식안대로 장락궁에서 군주와 신하 간에 갖추어야 하는 의식이 엄숙하게 치러졌다.고조는 흡족해하며 말했다. “내 오늘에야 비로소 황제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그리고는 숙손통을 태상太常(종묘의 제사를 관장하는 벼슬)으로 임명하고 금 500근을 하사했다. 숙손통이 이 틈을 이용해 나아가 말했다. "신에게는 저를 따라다니는 여러 선비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있어 신과 함께 의식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도 벼슬을 내려주십시오." 그러자 황제가 그들에게 죄다 낭郞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숙손통은 조정에서 나오자마자 500근의 황금을 유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여러 제자들이 비로소 기뻐하며 말했다. “숙손 선생은 진실로 성인이시다.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신다.”
천하를 가지고 농담하면 근본이 흔들린다
한나라 9년에 고조는 숙손통을 태자의 태부(태자를 가르치는 수석 스승) 로 삼았다. 그후 3년이 지나 고조가 태자를 조나라 왕 여의(유방이 총애 하던 비妃 척부인戚夫人의 아들)로 바꾸려고 하자, 숙손통은 이렇게 반대하였다. “옛날 진晉나라의 헌공이나 진秦나라의 황제가 태자를 바꾸려 했다가 나라가 혼란스러워졌고 급기야 망했습니다. 지금의 태자께서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입니다. 또한 태자의 어머니 되시 는 여후께서는 폐하와 고통과 근심을 함께했는데, 어찌 여후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굳이 적자를 폐하고 어린 여의를 세우고자 한 다면, 신을 먼저 죽여 제 목의 피로 땅을 더럽히십시오.” 이 말에 고조가 얼버무리며 말했다. “더 말 안 해도 충분히 알겠소. 짐은 다만 농담을 했을 뿐이오.” 그러자 숙손통은 더욱 정색을 하며 말했다. “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 번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합니 다. 어찌 천하를 가지고 농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됐소, 내, 공의 말을 따르리다.” 결국 고조는 숙손통의 말을 듣고 태자를 바꾸는 일을 철회했다. 그리 고 숙손통을 태부에서 태상으로 올려주고 종묘의 의법을 제정하게 했 다. 한나라의 여러 가지 의법은 다 숙손통이 태상으로 있으면서 제정한 것이다. 효혜제 때였다. 효혜제가 모후(여태후)를 뵈러 갈 때에 백성들의 통행 을 막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생기자, 새로 상하 이중으로 된 복도를 만 들라고 했다. 그런데 이 복도가 고조를 모신 묘를 거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숙손통이 지적했다. “나라의 시조를 모시는 종묘를 손상시켜면 큰일납니다." 이에 효혜제가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효혜제는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숙손통은 이것도 반대하였다. "군주는 잘못하는 일이 없는 법입니다. 지금 복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 헐어버린다면 스스로 잘못 이 있었음을 백성에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위수 渭水 북쪽에 별도로 고조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고조의 의관을 매달 그 곳으로 옮기십시오. 종묘를 더욱더 넓히고 많이 짓는 것은 큰 효도의 근본입니다." 효혜제는 조서를 내려 숙손통의 주청대로 사당을 짓게 했다. 새로 별 도의 사당을 세우게 된 것은 다 복도를 정당화시키려고 벌인 일이었다. 옛말에 '천금짜리 갖옷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털만으로 만든 것 이 아니고, 관청의 서까래는 한 그루의 나뭇가지만으로 지을 수 없다. 하·은·주3대의 성대함도 선비 한 명의 지혜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하더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고조는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했으니, 계책과 용병술 이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숙손통 같은 이가 지혜를 보탰 기 때문에 한나라의 만대가 편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숙손통은 세상에 등용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결국 그 당시의 중요 하고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하여 예의 형식과 절차를 시대의 변 화에 따라 고쳐 마침내 한나라 유학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매우 곧은 것은 굽어 보이고, 길이란 본래부터 구불구불하다'고 한 것은 아마 숙손 통의 행적을 두고 말한 것이리라.
소설보다 재미 있는 사기열전
지은이 : 사마천
편역자 : 김민수